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124
124화
“……!”
엉거주춤 자세를 낮추던 용병들이 그대로 굳어졌다.
이안은 하나둘씩 다시 의자에 앉기 시작한 그들 사이를 지나쳐, 트루드의 건너편에 걸터앉았다.
“샬롯과 테사는, 위에 있나?”
“어… 그게… 우리가 돌아왔을 땐, 이미 여기가 아니라 야인들과 지내고 있었소. 둘이 외곽의 집 한 채를 통째로 쓴다던데.”
트루드가 더듬대며 말했다. 이안이 자신의 앞에 있다는 게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외곽 지역?”
“이주민이나 빈민들이 많이 머무는 골목이 있소. 뭐, 그래도 샬롯 그 양반은 하루 한 번은 들러서 식사를 하고 가긴 했는데…. 그러고 보니, 벌써 못 본지 며칠은 됐군.”
“……?”
술을 마시던 이안의 미간이 꿈틀댔다.
잔을 내려 놓은 그가 트루드를 마주 보았다.
“자세히.”
“대장… 아니, 대전사… 아니, 어… 그냥 대장이라 하겠소. 도저히 형씨라고는 못 부르겠군.”
이안의 잔에 떨리는 손으로 술을 따르며, 트루드가 말을 이었다.
“대장이 실려 온 뒤로, 둘 다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소. 야인들과 우르르 몰려다녔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았지. 대장이 기적적으로 회복 중이란 걸 알고 나서야 안심한 얼굴들이 되더군. 야인들이 떠난 날, 샬롯이 여길 들렀었소. 술을 마시며 그랬지. 대장이 죽을 리 없다고. 알고 있었다고.”
“그리고?”
“생각해보니 그게 마지막이오. 그날 이후론 본 기억이 없군. 요 며칠간 샬롯 본 놈 있냐?”
트루드가 소리쳤다. 이안의 시선을 받은 용병들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보니 코빼기도 안 보인다거나, 눈에 안 띌 리가 없는데 이상하다는 식의 대화가 간간히 오갔다.
“…….”
이윽고 이안이 다시 트루드를 돌아보았다.
그의 가라앉은 눈을 마주 본 트루드가, 황급히 술을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그 집이 어딘지 알고 있는데, 모셔다 드리면 되겠소?”
술을 단숨에 털어넣은 이안이 일어섰다.
“당장.”
***
트루드가 골목을 성큼성큼 나아갔다.
점점 외곽 성벽이 가까워졌다.
뒤따르는 이안의 눈치를 살피던 그가 문득 내뱉었다.
“여긴 볕도 잘 안 들고 가장 살기 불편한 곳이오. 그래서 그냥 여관으로 돌아오라고도 전했었소. 물론 거절당했지만. 지금도 이유를 모르겠소. 굳이 편하고 따듯한 곳을 놔두고 왜 여길 고집했는지.”
그 녀석들에겐 여기가 오히려 더 안락했을 테니까.
속으로만 읊조리며, 이안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예감은, 거의 틀리는 법이 없었다.
‘테사가 배신했나? 아니면 또 다른 심판자…? 서로 싸웠을 수도 있겠지.’
어느 쪽이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가 피떡이 된 채로 교회에 실려간 지, 일주일이 넘게 지났으니까.
‘아무리 회복 중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멀쩡하리란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게 오히려 당연하지.’
그는 테사이아와 샬롯을 힘으로 억눌러 왔다.
물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둘이 가까워지도록 유도하긴 했지만.
그가 약해졌다 여긴다면 언제든 균열이 일어날 수 있는 균형이었다. 그리고 그건 루 사드의 뱀파이어들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가 약해지거나 사라진다면, 심판자를 보내지 않을 이유 역시 사라지는 셈이었으니까.
“여기요. 다 왔소.”
트루드가 멈춰 섰다.
낡아빠진 돌집 앞이었다.
천으로 가린, 깨진 창문.
끼이-
문은 잠겨 있지도 않았다.
어둑어둑한 장내로 들어선 순간, 이안은 자신의 예감이 현실이 되었음을 확신했다.
엉망진창이 된 내부. 옅은 피냄새와 누린내.
그건 상처 입고 궁지에 몰린 짐승에게서가 날 법한 냄새였다.
어둠 너머에서 주황색 눈동자가 살의를 머금고 번뜩였다.
이안이 두건을 벗었다.
“이젠 냄새도 못 맡나?”
뾰족하게 솟아 있던 수인의 동공이 확장됐다.
“이안…?!”
“그래. 나다.”
“무사히… 돌아왔구나…!”
얼어붙은 샬롯을 가만히 응시하던 이안이, 이윽고 내뱉었다.
“부상 당했군.”
“이건… 나는… 아니, 이건 전부 나 때문이다….”
샬롯의 안광이 목소리만큼이나 휘청댔다. 이안은 성큼성큼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아니, 시벌, 이게 뭔…?!”
엉망이 된 장내를 그제야 눈에 담은 트루드가 입을 벌렸다. 침상에 걸터 앉으며, 이안이 말했다.
“가서 가장 독한 술과 붕대, 먹을 걸 챙겨 와라. 식탁이랑 의자도.”
“아, 알겠소…!”
트루드가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 사이 이안은, 몰라보게 수척해진 수인을 마주 보았다.
샬롯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안, 이건….”
“네 상처부터 보면서 얘기하지.”
말을 자른 이안이 장갑을 벗었다.
샬롯이 뒤로 몸을 기댔다. 이안은 침대 주위로 대충 벗어 놓은 장비들을 슬쩍 훑어 보았다.
싸움이 있었던 건 분명했다.
옆구리에 엉망으로 감긴 붕대를 풀면서, 이안이 물었다.
“테사가 이런 건가?”
“…그래.”
이안은 드러난 환부를 바라보았다. 할퀸 흔적들 사이, 옆구리를 깊이 찌른 흉터가 선명했다.
다행히 아물고 있었다. 썩거나 감염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술은 필요 없겠군.
생각하는 사이, 샬롯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먼저 그 녀석을 죽이려 들었으니까.”
“처음부터.”
이안이 샬롯을 올려다 보았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처음부터 말해. 야인들이 돌아간 직후인가?”
“…그래. 술을 마시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샬롯이 마른 혀로 입술을 훑고는 말을 이었다.
“테사보다 일찍 도착해야 했지. 그 녀석은 이틀을 굶어서, 근처로 먹을 걸 잡으러 갔었다. 나도 식사를 거의 하지 않아서, 각자 배를 채우고 모이기로 했다. 그때 골목 너머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붉은 눈이 보이더군. 처음에는 테사인 줄 알았다.”
“…심판자였군.”
“그 뒤로는 기억이 없다. 정신을 차리니 여기더군. 벽에 박힌 내 칼과, 우는 테사가 눈앞에 있었다. 그 녀석이 내 옆구리를 찔렀고. 그 덕분에 정신이 든 거야. 그러니까 나는….”
스스로에게 분노한 듯 낮게 그르렁댄 샬롯이, 이안의 시선을 피하며 내뱉었다.
“그 심판자 년들에게 홀렸던 거다. 그래서 내 손으로 그것들을 집에 들이고, 테사를 붙잡기 위한 함정을 팠던 거야.”
아공간에서 봉인함을 꺼낸 이안이 붕대를 들었다. 샬롯의 허리에 붕대를 감으면서, 그의 시선이 장내를 훑었다. 부서진 식탁과 의자. 박살 난 가재도구들. 바닥에 떨어진 송곳니 검과 한쪽 벽면에 박힌 전투 도끼.
“심판자가 하나가 아니었군.”
“둘이었다. 쌍둥이였지….”
샬롯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주황색 눈동자에 살의가 아른댔다.
“그것들은 나와 테사가 싸우는 걸 구경하고 있었다. 집안을 검게 물들인 채로. 외부와 공간을 차단한 거였겠지. 그것들의 속삭임이 들렸다. 계속 우릴 지켜보며 기다린 것 같더군. 우리가 둘만 남는, 그래서 서로를 죽이게 할 절호의 기회를.”
“…….”
이안은 딱히 놀라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가 본 뱀파이어들은, 괴벽이라 불릴만한 이상한 부분을 적어도 하나씩은 가지고 있었으니까.
아스콜드는 강함에 대한 자신만의 괴상한 미학이 있었고, 프레야는 사랑에 대해 그랬다. 어쩌면 테사이아의 생존에 대한 집착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내 눈을 본 테사가 미소 짓더군. 그리고는 한쪽 눈을 깜빡였다. 다음 순간 그 녀석이 송곳니를 드러냈다. 나는… 기꺼이 목을 내주었지.”
이안은 그제야 살롯의 목덜미를 바라보았다.
털 사이로 피라냐에게 물린 듯한 흔적이 깊이 남아 있었다.
“그 녀석은 내 피를 힘껏 빨았다. 하지만 거기 취하지는 않은 게 분명했다. 내가 정신을 잃기 직전에 멈췄으니까. 내 귓가에 누워 있으라 속삭이더군. 그리고는 날 집어 던졌다. 나는… 그 녀석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으니까.”
으득, 샬롯의 입에서 이 가는 소리가 번졌다.
“그 미친년들이 깔깔대는 소리가 내 의식을 붙잡더군. 그것들은 역시 동료끼리 서로 죽이는 걸 보는 게 가장 즐겁다며 속삭였지. 그러면서 내 피는 맛있었냐고 물었다. 테사는 코웃음을 치더군. 수인의 피는 정말 맛대가리 없다고 말이야. 그러면서 그 녀석들에게 고맙다고 했다. 언젠가는 죽이고 싶었는데, 그럴 수 있게 만들어 줘서 고맙다고.”
꾸욱, 샬롯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톱이 튀어나오면서 손아귀를 피로 적셨다.
이안이 혀를 차며 손아귀를 벌리는 사이, 샬롯이 작은 탄식을 흘리고는 내뱉었다.
“그리고는 어둠을 찢어 버리더군. 아마 매를 만들어 낸 것 같았다. 그리고 그사이를 뚫고 달아났지. 쌍둥이들은 당황했는지 그 뒤를 황급히 따라가더군.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나는 정신을 잃었고, 눈을 뜨니 한낮이었지.”
“그 뒤로,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고?”
“…그랬다. 테사도, 그 미친년들도.”
“…….”
샬롯의 손아귀에 붕대를 감으며, 이안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들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건 딱히 놀랍지 않았다. 그를 놀라게 한 건, 테사이아의 선택이었다.
‘살기 위해선 뭐든 하려던 녀석이….’
샬롯을 살리기 위해 몸을 던진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물론 이유까지 고결한 건 아닐지도 몰랐다.
샬롯이 살아남아 그에게 말을 전하기를, 그래서 자신을 구하러 오기를 바랐을 지도.
어쩌면 그저, 샬롯이 죽으면 자신도 죽는다는 생각이 무의식에 박혀 있었을 뿐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결과가 바뀌는 건 아니었다.
“내 잘못이다, 이안. 나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쓰레기 같은….”
“자책이나 할 때는 아닌 것 같은데.”
이안이 샬롯을 가만히 마주 보며 덧붙였다.
“테사를 되찾으러 가야지.”
휘청대던 샬롯의 눈빛이, 이윽고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물론이다.”
문이 다시 열린 건 그때였다.
“어머, 이게 다 뭐예요? 개판이네.”
음식이 가득 담긴 쟁반을 든 여급이 미간을 찌푸린 채 장내로 들어섰다. 그 뒤로 술병과 붕대를 든 트루드와, 식탁과 의자를 든 용병 몇이 따라 들어왔다.
“술집보다 더 고약한 냄새가 나는군.”
“지금 그게 중요하냐? 대충 치우고 자리나 만들어.”
이안의 눈치를 슬쩍 살핀 트루드가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경 쓰지 않고 샬롯을 바라보던 이안이, 이윽고 내뱉었다.
“일이 일어난 지 며칠이나 됐지?”
“…이틀. 어쩌면 사흘.”
탄식하듯 내뱉은 샬롯이 이안을 마주보았다.
“어쩌면 그 녀석은 지금쯤….”
“벌써 죽진 않았을 거다.”
이안이 덤덤하게 말을 잘랐다.
“그것들은 살아 있는 테사를 필요로 하니까. 아마 꽤 오래 살려둘 거야. 녀석도 알고 있었겠지. 그래서 너부터 살린 걸 거다. 아마도.”
“…….”
샬롯이 인상을 찌푸렸다. 여러 감정이 휘몰아치는 눈빛.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며, 이안이 덧붙였다.
“죽었다 해도 달라질 건 없어. 그때는 복수해 줘야지.”
“…….”
샬롯이 굳어졌다.
이윽고 이안을 다시 마주 본 그녀가, 씹어 뱉었다.
“그래. 반드시.”
“그 전에, 그 심판자 년들에게도 당한 걸 되갚아 주고.”
“부디. 내게 먼저 기회를 주면 좋겠군.”
“또 꼭두각시가 되려고?”
“두 번은 당하지 않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수십 번을 곱씹고, 또 곱씹었어. 그 미친년들만큼은… 내 손으로 찢어 놓기 위해서.”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건진 모르겠다만.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일어섰다.
“지금은 먼저 일어나라. 복수도 나아야 할 수 있는 거니까.”
“…….”
샬롯이 군말 없이 일어섰다. 용병들이 눈치를 살피는 가운데, 식탁에 앉은 그녀가 말없이 음식을 집어 먹기 시작했다.
“…며칠은 굶으셨나 보네요.”
샬롯의 잔에 물을 따른 여급이 중얼댔다.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며 돈 주머니를 꺼냈다.
“가장 큰 방을 부탁하지. 그리고 돌아가서 바로 목욕물을 준비해 줘. 이 녀석 꼴이, 너무 엉망진창이니까.”
“돈은 안 주셔도 돼요.”
산뜻하게 대답한 여급이 몸을 돌렸다.
“대신, 대장님이 머무셨던 방에 용살자의 방이라는 이름을 붙일 거니까. 알아 두세요.”
“…….”
이안이 미간을 좁히는 사이, 그녀가 대답도 듣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숨소리도 내지 않고 서 있던 트루드와 용병들이, 그의 시선에 눈을 깜빡였다.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샬롯의 물건을 전부 챙겨라. 잘 닦아서 여관 방에 넣어 놔. 부서진 게 있으면, 바로 수리를 맡기고.”
“알겠소…!”
용병들이 불에 덴 것처럼 움직였다.
“아니, 뭐가 이렇게 무거워…?”
“똑바로 들기나 해, 인마. 하나라도 잃어 버리면, 알지?”
곳곳에 널브러진 샬롯의 물건들을 집어 든 용병들이 밖으로 나갔다.
비로소 장내가 조용해졌다.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채 꾸역꾸역 음식을 씹어 삼키는 샬롯을, 이안은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웠군.’
방심할 틈이 없는, 개 같은 암흑시대 같으니.
불평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샬롯의 잘못이나 그녀를 탓할 일도 아니었다. 그저, 일어날 일이 어떤 식으로든 일어났을 뿐.
턱.
이윽고 샬롯의 건너편에 앉은 이안이, 술병을 들어 자신의 앞에 내려놨다. 잔 두 개에 술을 나눠 따른 그가, 잔 하나를 샬롯의 앞으로 밀었다.
그대로 독주를 들이킨 이안이,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는 샬롯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듣고 싶지 않나?”
“……?”
“내가 무슨 일들을 겪었는지.”
“……!”
샬롯의 눈이 커졌다. 이윽고 그녀가 슬며시 시선을 피하며 웅얼댔다.
“듣고… 싶다.”
“좋아. 먹으면서 들어라.”
빈 잔을 채우며, 이안이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나도 처음부터 이야기 해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