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125
125화
설산 두꺼비 여관.
주점으로 내려온 이안은 비로소 한 잔 들이켜며 숨을 돌렸다.
문이 열리고 트루드와 용병들이 들어온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거참 부지런들 하군.
입맛을 다신 그가 두 번째 잔을 따르는 사이, 트루드가 그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수인 양반은, 잠들었소?”
술잔을 입에 가져가며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욕을 끝낸 샬롯은 기절하듯 잠들었다. 아무리 강한 생명력과 회복력을 가진 수인이라도, 그 돼지우리 같은 집에서 홀로 피 말리는 시간을 보낸 여파가 없을 수는 없었다.
이안이 보기엔 상처가 덧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마차는?”
이안이 물었다. 앞에 앉은 트루드가 미소 지었다.
“마구 옆에 가져다 놨소. 마구간지기한테도 몇 푼 찔러 줬으니, 언제 가셔도 바로 준비해 줄 거요.”
***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스의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그가 샬롯과 함께 있는 사이, 여관 앞으로 마차를 보낸 것이다.
대행자를 자청하고 나선 건 트루드를 비롯한 용병들이었다.
“그리고 외곽을 한 바퀴 돌면서 조사도 해 봤소. 대부분 소란이 있었다는 걸 전혀 모르더군. 집에 마법적인 뭔가가 있었던 모양이오. 대신 커다란 은빛 새와 커다란 박쥐 두 마리가 성벽 너머로 날아가는 걸 본 자는 하나 있었소. 이틀 전 새벽이라던데. 술김에 헛걸 본 줄 알았다더군.”
부탁하지도 않은 일까지 해 왔군.
생각하며,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테사이아가 도시 밖으로 나갔으리란 건 진작 예상한 부분이었다.
도망은 어떤 의미로는 그녀의 전문 분야였다.
도시에서 소란을 피우는 건 자충수일 뿐이란 걸 모를 리 없었다.
어쩌면 아직도 붙잡히지 않고 도망 다니는 중일지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그렇다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오히려 그가 도시를 떠나는 게, 그녀가 냄새를 맡고 따라오기에는 더 편하리라.
“…그 은빛 새가, 테사이아가 맞소?”
“…….”
이어진 물음에, 이안이 트루드를 빤히 바라보았다.
트루드가 황급히 미소 지었다.
“그저 걱정되어서 여쭙는 것이오.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그런 것 같아서.”
“그 녀석을 쫓는 자들이 있다. 루 사드에 도사린 마족들이지.”
“마, 마족…?”
트루드의 눈이 커졌다. 주위 용병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숨을 멈춘 채 서로를 돌아보았다.
더 묻지 않을 줄 알았건만.
침을 삼킨 트루드가 목소리를 낮추며 덧붙였다.
“그럼, 마족들에게 납치된 거요?”
“아마도.”
“도대체 왜…. 혹시, 루 사드로 가시려던 것도 그래서였소? 마족들을 쳐 죽이시려고?”
“그런 셈이지.”
“허… 역시….”
용병들 사이에 탄식과 감탄이 번졌다. 이안을 바라보는 눈빛들이 부담스럽게 일렁였다.
이들은 전부 벨리움 요새에서 살아 돌아온 자들이었다.
몇몇은 이안의 전투를 목격하기까지 했다. 그를 대륙의 어둠과 싸우는 구원자쯤으로 여기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이안이 짧게 혀를 찼다.
“그딴 눈 하지 마라. 징그러우니까.”
재빨리 시선을 돌리며 트루드가 말했다.
“그럼 어서 따라가셔야겠소. 이대로 도시에 남아 계시다간 최소한 한 달은 꼼짝없이 발이 묶이실 거요. 듣자 하니 대공께서도 대장을 만나고 싶어 하시고, 화로의 사원과 제국의 대교회에서도 사람을 보냈다던데.”
대공은 그렇다 치고.
“화로의 사원에, 대교회라고?”
“소문이 돌고 있소. 대장의 위업을 칭송하고, 뭐, 교단의 성자나 사도로 모시려는 거 아니겠소?”
진짜 더럽게 유명해졌나 보군.
이안은 짧게 헛웃음을 지었다.
루시와 미구엘이 절로 떠올랐다.
다시 만난다면 분명 반갑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저 산뜻한 재회만으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어차피 무사히 살아만 있다면, 언젠가 한 번쯤은 다시 만날 날이 있을 터였다.
“…귀찮아지기 전에 떠나야겠군.”
“입단속은 염려 마시오. 우린 용살자의 전사들이잖소. 그런 주제에 용살자의 발목을 잡을 순 없지.”
“그놈의 용살자는….”
이안의 헛웃음이 짙어졌다.
트루드를 비롯해 이안을 따라왔던 용병들은 용살자의 전사들이라는 이름의 용병단을 결성했다.
현재로선 트라벨가의 유일한 용병단인 셈이었다.
벨리움에서 함께 싸운 야인 전사들과 방위군과도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데다, 부상으로 남아 있던 용병들까지 단숨에 흡수하면서 입지도 탄탄하게 다졌다.
새로운 북부의 거대 용병단이 탄생한 것이다.
트루드가 황급히 말했다.
“대장을 따라다녔다간 목숨이 열 개라도 부족할 것 같아서 포기했지만. 어쨌든 대장의 앞길에 걸림돌이 될 일은 없을 거요. 우리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기꺼이 따를 거고. 이건 언제 어디서도 변치 않을 사실이오. 우리가 용살자의 전사들인 이상.”
말은 잘하는군.
이안은 그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술잔을 들었다. 용병들의 의리를 믿는 건 사제에게 헌신을 기대하거나 주문쟁이에게서 신뢰를 찾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했다.
“그거야 너희 자유다만. 그 이름을 걸고 도적질이나 하고 다니다 걸리면, 용살자가 직접 멱을 따러 올 거란 사실만 알아 둬라.”
“우릴 뭐로 보시고… 하하. 그보다, 라 드린과 벨 론데를 거쳐서 내려가실 거요?”
애써 웃음 지은 트루드가 재빨리 말을 돌렸다.
이안은 어깨만 까딱였다.
본 계획은 안전하게 제국령을 통해 루 사드로 향하는 거였다.
상당히 돌아가게 되겠지만, 루 사드에 발을 들이기 전까진 변방의 전쟁과 엮이는 일 없이 이동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테사이아가 사라진 지금은, 북부에 발을 들일 때 그랬듯 최단 거리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트라벨가에서는 라 드린의 외곽과 벨 론데를 질러 남하하는 게 가장 빠른 길이었다.
“여기도 혼란스러워서 전처럼 정보가 빠르진 않지만, 라 드린은 지금 난장판이라고 들었소. 벨 론데와 가장 먼저 치고받은 나라잖소. 북부나 제국령으로 피난 온 자들의 말에 따르면 망조가 단단히 들었다고 하니까, 알아 두시오. 사방으로 싸우고 있는 벨 론데는, 더 말씀드릴 것도 없고.”
“정보 고맙군. 참고하지.”
“그럼… 쉬시오. 생각하실 것도 많아 보이는데, 그만 방해하겠소.”
꾸벅 인사한 트루드와 용병들이 일어섰다.
“조용히들 마시다 올라가라. 대장 신경 거슬리시지 않게. 소리 크게 내다 걸리면, 목젖 뽑힐 줄 알아.”
장내의 다른 용병들을 돌아보며 내뱉은 트루드가 성큼성큼 계단으로 향했다. 가뜩이나 조용하던 주점이 더 고요해졌다.
너희가 제일 시끄러웠는데.
피식댄 이안이 술잔을 들었다.
트루드의 말대로, 생각할 게 많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어느덧 늦은 새벽이었다.
텅 빈 주점. 새 술병을 꺼내다 준 여급까지 자러 간 시간에도, 이안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비 효과라는 건 정말 예상할 수가 없단 말이지….’
술잔을 입에 가져가며, 그는 이미 몇 번이나 했던 생각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흡혈 여제는 기다리겠다 했지만, 이안은 그 말을 그다지 믿지 않았었다.
물론 그의 방문을 대비하겠지만, 테사를 탈취하려는 시도까지 포기하진 않을 수도 있다 여긴 것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그녀를 인파 근처에 두었고, 자신과도 멀리 떨어뜨리지 않았었다.
벨리움으로 떠나면서 둘을 야인들에게 보낸 것도, 그저 야인들을 지키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때 게임이었던 이 세계에는, 그가 어떻게 해도 끝내 막을 수 없는 종류의 흐름이 존재했다.
작게는 메브의 영락이나, 크게는 변방의 전쟁이나 북부 망자 군단의 침공처럼. 운명이나 필연이라 표현해도 무방한 사건들.
‘애초에 호위 퀘스트 한 번 뜬 적 없던 녀석이니까. 내가 흐름을 억지로 막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지. 빈틈이 생기자마자 쓸려 내려간 거고.’
이안은 가볍게 고개를 털었다.
이제 와선 아무래도 상관없는 추측들이었다.
이번에도 중요한 건 결국 대응이었다.
메브와 루시가 끝내 살았듯. 그가 용이라는 거대한 변수를 마주하고도 살아남았듯이.
큰 흐름이라 할지라도 결과까지 정해져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어쩌면 이번에도 테사이아를 죽이지 않고 퀘스트를 끝낼 수 있는 루트가 존재할지도 몰랐다.
적어도 지금의 그녀가 진혈의 여제로 거듭나진 않을 테니, 가능성은 충분했다.
테사이아가 주던 퀘스트를 현재의 진혈의 여제가 주게 된다면….
또 한 번 같은 가정에 다다른 이안의 입가에, 문득 실소가 스쳤다.
‘자연스럽게 그 녀석을 살릴 생각만 하고 있군….’
이안이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이런 결론은 그저 희망 사항, 얄팍한 자기기만에 불과했다.
녀석을 죽여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될 확률이, 사실 훨씬 높았다.
녀석은 게임에 존재하던 보스이자 마족이니까.
테사이아가 먼저 죽게 되리란 가정은 굳이 하지 않았다.
그때는 복수만이 남을 테니까. 그건 전혀 거리낄 게 없었다.
‘…어떤 상황이 일어나더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항상 그랬듯이.
이번에는 조금 다른 결론을 내리며, 이안은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독한 열기.
곧바로 술병을 든 이안은, 빈 병을 들었음을 깨닫고 옆의 다른 술병을 들었다.
이것도 어느새 반이나 비어 있었다.
“……?”
잠깐만.
잔을 채우던 그의 미간이 순간 꿈틀댔다.
내내 느끼지 못하던 이질감을 문득 깨달은 것이다.
그의 시선이 술잔에 고정됐다.
“설마.”
읊조린 그가, 방금 채운 잔을 다시 한번 단숨에 들이켰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한 잔을 더 따라 단숨에 들이켠 그가, 비로소 허탈하게 잔을 내려놓았다.
“설마가 아니네….”
그는 본래도 쉽게 취하지 않았고, 취하더라도 판단력이 흐려지지 않았다. 숙취도 없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독한 술을 마시다 보면 적당히 기분 좋은 취기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술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이 독한 술을 한 병 반이나 마시고, 거기다 추가로 석 잔을 연거푸 들이켰건만.
잠깐 목이 얼얼하고 살짝 현기증이 일어난 게 여파의 전부였다. 그나마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본래도 높던 정신력과 내성에, 이번에 새로 올린 체력 수치와 태초의 생명력 스킬까지 어떤 식으로든 추가적인 영향을 끼치는 게 틀림 없었다.
‘알코올을 흡수하자마자 엄청난 속도로 분해하거나… 아예 흡수하지 않거나… 시발, 알 게 뭐야.’
어쨌건, 더는 취할 수 없게 됐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이 개 같은 세계를 버티게 해 주는 몇 없는 즐거움이었건만.
“하….”
탄식하면서도, 그는 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씁쓸함을 잊기 위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앞으로 능력치를 떨어뜨리는 저주받은 물건이라도 찾아봐야….’
계단에서 발소리가 울려 퍼진 건, 그가 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그때였다.
“…깨어 있었구나. 이안.”
샬롯이었다. 그녀는 장비까지 전부 갖춘 채로 계단을 내려왔다.
한결 안정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안이, 이내 그녀의 목덜미를 바라보았다.
“그거, 테사의 안대 같은데.”
“맞다.”
머쓱하게 대답하며, 샬롯이 그의 건너편에 앉았다.
그렇게 못 잡아먹어 안달이더니.
이안이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거참 애틋하군. 그 녀석이 알면 좋아하겠어.”
“…그래서가 아니다. 그 미친년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지.”
“……?”
물잔에 술을 따르며, 샬롯이 읊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같은 결론이 나오더군. 내가 마법에 걸린 건 그것들과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던 거야. 그러니 아예 눈이 마주치지 않게 가린다면… 그것들의 꼭두각시가 되는 건 피할 수 있겠지.”
“뭐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고 일축하려던 이안은, 이내 미간을 좁혔다.
게임 속 진혈의 여제, 테사이아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마지막 페이즈에는, 마주 본 캐릭터를 정신 지배 상태에 빠뜨리던 랜덤 패턴이 분명히 존재했다.
최면술은 모든 뱀파이어가 가진 기술이라 특이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그 쌍둥이들의 진혈을 흡수해서 더 강화했던 거라면….’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안이 내뱉었다.
“하지만 눈을 가린 채로 상대할 만큼 만만한 것들이 아닐 텐데.”
“쉽진 않겠지. 하지만 나도 그 녀석 못지않게 예민한 감각을 타고났다. 숙련된다면 눈을 뜬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그렇게… 만들 것이다.”
샬롯의 목소리는 아주 차분했다.
결코 허언이 아니라는 듯이.
…말린다고 될 게 아니군.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물었다.
“몸은?”
“아주 가볍다.”
“다행이군.”
“…당장 움직일 수 있을 정도야.”
“…….”
“너만 괜찮다면.”
이안은 슬쩍 미간을 좁히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샬롯은 흔들림 없는 눈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당장 움직이고 싶단 거지, 이거.
“잊었나 본데.”
이윽고 피식 웃은 이안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난 일주일을 내리 잤다.”
***
하늘이 어슴푸레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다각, 다각. 발굽 소리가 대로의 고요를 깨뜨렸다.
굳게 닫힌 관문의 망루에 느슨하게 기대 있던 관문 대장이, 다가오는 마차를 눈에 담으며 피식댔다.
“거참, 성격 한번 급하시군.”
읊조린 그가 병사들에게 문을 열라는 턱짓을 보냈다.
벽을 따라 이어진 계단을 내려간 그가 마차를 눈에 담았다.
마부석에 앉은 샬롯이 그를 알아본 듯 턱을 까딱였다.
병사들이 관문을 여는 사이, 관문 대장이 마차 옆으로 다가갔다.
“이렇게 바로 떠나시오? 적어도 하루는 더 쉬실 줄 알았는데.”
이안이 피식대며 그를 돌아보았다.
“하루 더 쉬려다가 한 달을 시달릴 것 같아서 말이오.”
“누가 묻거든 용살자의 부탁으로 문을 열었다고 하겠소. 그 외엔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그거면 되겠소?”
이어진 물음에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칼을 들고 협박했다고 해도 상관없소. 어차피 떠나는데, 다 떠넘기시오.”
관문 대장의 미소가 짙어졌다.
“알아서 하겠소. 부디 어디서든 보중하시오. 북부의 용살자여.”
“그쪽도. 그간 고마웠소.”
문이 활짝 열렸다.
깍듯하게 인사한 관문 대장이 옆으로 비켜섰다.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이안을 마지막으로, 마차가 멀어졌다.
문이 다시 닫히는 것까지 확인한 관문 대장이 다시 망루에 올랐다.
관도를 나아가는 마차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던 그가, 이윽고 읊조렸다.
“매번, 정말 미련 없이 가시는군.”
그가 이안의 예감이 정확했음을 알게 된 건, 바로 그날 오후였다.
그를 찾는 한 무리의 야인 전사들이 도시에 도착했으니까.
용살자가 사라졌다는 사실은, 이튿날 타오르는 여신의 사제들이 도착하고서야 비로소 알려졌다.
울라프 대공은 며칠 뒤 국경 초소에서 날아든 급보를 받고서야 그의 행방을 알게 됐다.
이안 호프는 북부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