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126
126화
어둠 한복판. 검붉은 안광이 소리 없이 번졌다. 뒤이어 주위가 은은하게 밝아졌다.
거대한 동공의 가장자리를 따라 검붉은 광원이 삽시에 번졌다.
석주 하나 존재하지 않는 드넓은 내부 곳곳에, 작은 동산처럼 쌓인 뼈 언덕들이 드러났다.
출입구조차 존재하지 않는 이 지하 동공은, 용의 무덤이었다.
그러나 이곳의 모든 용이 영원한 안식에 든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산채로 영원한 고통 속에 남겨진 존재도 있었다.
“…….”
깎아지른 절벽처럼 솟은 벽면. 그 한복판에서 피어오른 안광이, 숨소리와 함께 선명해졌다. 검붉은 마력이 용의 전신을 비췄다.
가슴 한복판과 복부를 꿰뚫고 벽면에 박힌 거대한 금속 말뚝. 활짝 펼친 양 날개에도 각각 두 개씩의 말뚝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벽에서 이어진 굵은 금속 고리가 목과 꼬리조차 제대로 움직일 수 없게 구속했다.
육각형을 그리는 말뚝과 고리 표면에 빼곡하게 새겨진 진언이, 검붉은 마력을 머금고 일렁였다.
그는 산채로 유폐된 죄인이자, 동공을 지키는 무덤 지기였다.
용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푸스스, 머리에 쌓여 있던 부스러기가 흘러내렸다. 용의 시선이 저 먼 공동의 끝, 황금빛을 머금고 빛나는 거대한 진언으로 향했다.
그 한복판에서, 하얀 로브를 걸친 인간이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검붉은 안광이 설핏 가늘어졌다.
-오랜만이구나….
굵고 낮은 사념이 번졌다. 동시에 아주 부드럽기도 했다. 인간이 머리에 쓴 두건을 벗었다.
빛바랜 금발.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을 발하는 듯한 새하얀 얼굴이 드러났다.
용의 시선을 정확히 마주하며, 아르케아스가 옅게 미소지었다.
“그래. 오랜만이로구나.”
속삭이는 듯한 육성. 하지만 그들에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한동안 전혀 찾지 않더니…. 드디어 외로워지기라도 한 모양이지. 그렇다 해도 반갑구나…. 빛바랜 황금이여….
“나 역시. 그러나 오늘은… 너를 만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아르케아스가 걸음을 옮겼다. 로브 자락 아래로 금빛 마력이 번지더니, 그의 몸이 날듯이 동공을 가로질렀다.
이윽고 그가 텅 빈 공간에 멈춰선 그가 손을 내저었다.
허공에 거대한 황금빛 진언이 피어올랐다. 그 한복판으로 뼈 무더기가 소리 없이 쏟아졌다.
쏟아진 뼈는 흩어지거나 허물어지는 일 없이, 작은 동산처럼 자리를 잡았다.
주위의 다른 뼈 무덤이 그렇듯.
사념이 탄식했다.
-아직 대륙에 남은 동족이 있었던가…. 그래… 이 잔재는… 기억나는군…. 타후므리트인가….
“광기에 눈멀었던 푸른 용이, 비로소 안식을 찾았노라….”
아르케아스가 읊조렸다.
-그래, 그리 된 것이로군… 다시 우리 둘만 남았구나… 빛바랜 황금이여….
용의 낮은 웃음소리가 번졌다.
-타후므리트가 순순히 안식에 들지는 않았던 모양이지…. 네 고통과 피로가 느껴진다, 아르케아스…. 하지만 이상한 일이군… 그럼에도 네 기분이 그리 나빠 보이지는 않아….
“…….”
아르케아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건조한 눈으로, 영겁의 형벌에 처해진 동족을 바라보았을 뿐.
사념이 이어졌다.
-어째서지? 오랜만에 본모습으로 바깥세상을 거닐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무자비하게 동족의 목숨을 빼앗던 옛 기억에 다시 피가 끓어서인가. 그도 아니라면… 눈에 든 새로운 필멸자라도 나타난 것이냐…?
묵묵히 듣던 아르케아스의 입가에, 비로소 흐릿한 미소가 번졌다.
“네 통찰력이 여전함에 기쁨을 감출 수 없구나. 라크마흐, 대륙에 남은 내 마지막 동족이여….”
비꼬는 것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부드러운 말투로 내뱉은 그가, 용을 돌아보았다.
“질문이 곧 해답이니… 굳이 더 답할 필요는 없겠구나.”
그의 로브자락을 타고 황금빛이 번졌다. 아르케아스가 다시 동공을 가로질러 멀어졌다.
라크마흐가 낮게 웃음 지었다.
-너는 여전히 결코 보답받을 수 없는 사랑만을 하는구나…. 하지만 그렇기에 언젠가… 너는 끝내… 나를 이해하게 되리라….
아르케아스가 빛을 잃은 진언 위에 올라섰다.
그가 라크마흐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읊조렸다.
“헛된 기대는 품지 말거라. 내 영혼이 광기에 물든다 한들, 신을 참칭하는 일은 없을 것이니.”
-큰 사랑은 언젠가 반드시, 그만큼 큰 증오를 낳는 법이니…. 어쩌면 네가 낳을 증오는, 그 누구보다도 거대할지도 모르지….
검붉은 안광이, 사념만큼이나 부드럽게 일렁였다.
-그럼에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다시 볼 수 있길 바라겠다….
진언이 눈부시게 빛났다.
무표정한 아르케아스가 그 너머로 사라졌다.
“…….”
흩어지는 빛무리를 응시하는 용의 안광이, 이윽고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새로운 대행자를 찾은 것이로구나… 빛바랜 황금이여….
솨아아-
용의 전신에 마력이 일렁였다.
그럴수록 말뚝과 족쇄에 새겨진 진언이 짙게 빛나며, 그에게 더 큰 고통을 선사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검붉은 마력이 거미줄처럼 벽면 전체로 번졌다.
길고 긴 시간과 바깥세상의 혼돈은, 이 지하 깊숙한 무덤을 감싼 용의 진언에도 작은 균열을 일으켰다.
전체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을 만큼 작디작은 틈이었지만.
한때 역천을 꿈꿨던 고룡은, 끝내 그 너머로 작은 손길을 뻗치는 데에 성공했다.
저 공허의 고대 신들이 그러하듯. 그의 속삭임을 듣고 받아들일 추종자를 기다리면서.
신탁을 내리듯 마력을 발산한 그가, 심장을 파고드는 고통을 즐기듯 웃음 지었다.
-둘 중 하나는… 끝내 또다시, 대행자를 잃는 슬픔을 맛보게 되리라….
공동의 광원이 잦아들었다. 신들의 시선조차 닿지 않는 깊은 지하. 아직도 역천의 꿈을 꾸는 용이, 다시 눈을 감았다.
***
라 드린에 접어든 지 사흘째였다.
날이 따듯해졌다 느끼는 건, 그저 북부의 추위에 익숙해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느덧 봄이 오고 있었다.
‘전혀 그런 풍경은 아니지만.’
의자에 기대 육포를 우물대던 이안은, 잿빛 하늘과 황량한 언덕을 눈에 담으며 생각했다.
그래도 오늘은 그나마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저 멀리 은은하게 번지는 연기가, 눈에 보이는 비극의 전부였으니까.
망조가 들었으리라던 트루드의 말은 정확했다.
북부로 이어진 길목의 초소는 전부 텅 비어 있었다.
약탈당하고 버려진 마을. 말뚝에 못 박혀 전시되거나 아무렇게나 버려진 시체들. 까마귀와 쥐가 들끓었고, 밤에는 원한을 품고 되살아난 망자들과 청소부를 자처하는 마물들이 들판을 배회했다.
라 드린 왕국은 이안이 기억하는 게임 속 변방의 모습 그대로였다.
‘거꾸로 북부부터 거치고 내려왔더니, 이제야 얼추 시기가 비슷해진 거겠지….’
타락자들을 제외한 그 누구도 끝내 승리하지 못한, 혼돈과 파괴, 죽음과 약탈만이 가득한 전쟁.
하지만 그 한구석을 나아가는 그들의 여정은, 뜻밖에도 상당히 평화로웠다.
샬롯은 막상 이동하기 시작하자 서두르거나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이안이 돌아오고 안정을 찾으면서,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한 게 분명했다.
어쩌면 그저 이안을 믿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라면 반드시 테사를 구해내리라고.
이안은 굳이 그 생각을 바로잡거나,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다 해서 달라질 것도 없었다.
게다가 게임에서도 별 볼 일 없던 변방의 마물은, 설원 지대의 마물도 거침없이 베어 넘기던 수인 전사에게는 짚단이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아직 완벽한 컨디션을 되찾은 상태가 아님에도 그랬다.
물론, 그건 이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 인근의 마물들은 솔직히 말해, 몸풀기 상대도 되지 못했다.
‘게임에서도 이 동네 잡몹들은 3챕터가 넘어서나 짜증 났었지. 지금은 하수인들 정도나….’
육포를 씹으며 생각하던 이안이, 문득 눈동자를 굴렸다.
마부석의 샬롯이 그를 돌아보고 있었다.
“육포?”
이안이 손에 든 육포를 내밀며 물었다. 선선히 받아들면서도, 샬롯이 고개를 옆으로 까딱였다.
“언덕 너머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이안.”
“……?”
“비명과 고함이 들리는군. 싸움이 일어난 것 같은데.”
“아, 그래….”
언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지.
속으로 읊조리며, 이안은 시야가 가려지지 않게 옆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황량하게 이어진 언덕길. 아직 그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계속 가라. 뭐건, 어차피 지나쳐야 할 길이니까.”
“그러지.”
덤덤하게 대답한 샬롯이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이안도 언덕 위에 시선을 고정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귀에도 다급한 발굽 소리와 마차 덜컹대는 소리가 희미하게 파고들었다.
곧 언덕 위로 마차 한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비쩍 마른 말 한 마리가 끄는 낡은 짐 마차였다. 겁에 질린 얼굴의 여자가 마부석에 앉아 있었고, 짐칸에는 검과 방패를 어정쩡하게 든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곧 말 탄 기수 몇이 마차 주위로 순식간에 따라붙었다.
짐 마차의 둘과 달리, 제대로 무장을 갖춘 자들이었다.
“…약탈인가.”
샬롯이 나지막이 그르렁댔다.
이안은 놀랍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라 드린 왕국은 붕괴되고 있었다. 용병뿐 아니라 병사들도 강도질을 일삼고 있으리라. 거기다 곳곳에 암약한 타락자들이 본격적으로 세력을 키우고 있기까지 할 터였다. 그들에겐 백성 따윈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런 식으로 시작되는 서브 퀘스트도 여럿 있었지.’
“저들을 구하긴 어렵겠군.”
생각하는 사이, 샬롯이 덧붙였다.
그들의 마차와 언덕 꼭대기까지는 아직도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전력으로 달려간다 한들,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었으리라.
“그래도 복수 정도는 해 줄 수 있겠지.”
마차 지붕 위로 훌쩍 올라가며 이안이 대답했다. 명분 따위를 붙이지 않더라도, 저 강도들이 그들을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아악…!”
그사이, 안간힘을 쓰며 저항하던 남자가 비명을 터뜨렸다. 짐칸에 훌쩍 올라탄 강도의 칼이 그의 어깨를 내리찍은 것이다. 남자가 방패를 떨어뜨리자, 그대로 다가선 강도가 뽑아 든 칼을 가슴에 깊이 박아 넣었다.
“여, 여보-!”
마부석의 여자가 울부짖었다. 남자를 툭 밖으로 던져 버린 강도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가 여자의 머리채를 휘어잡으며 고삐를 당겼다. 짐 마차가 멈췄다.
하지만 이안은 이미 마차를 보고 있지 않았다.
“…….”
“…….”
말을 탄 채 마차 옆을 따르던 다른 두 놈이, 그들 쪽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곧 고개를 돌려 서로 눈빛을 교환한 놈들이, 안장 옆의 쇠뇌를 집어 들고는 달려오기 시작했다.
‘기본에 충실한 놈들이군….’
검을 뽑아 든 이안은 마부석 바로 뒤까지 이동해 자세를 낮췄다.
그가 슬쩍 발을 굴렀다. 두 겹으로 덧댄 나무 지붕은 아주 튼튼했다. 온 힘을 다해 도약하지만 않는다면 무너질 것 같지 않았다.
비로소 그의 눈에 잿빛 마력이 일렁이는 사이. 달려오며 마차를 겨냥하던 놈들이 쇠뇌를 발사했다.
샬롯이 기다렸다는 듯 마차를 옆으로 틀었다. 말을 노리고 날아들던 볼트가 마차 측면에 박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쇠뇌를 다시 안장에 건 놈들이 검을 뽑아 들었다.
“말을 지켜라. 천천히 따라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 광경을 지켜보며, 이안이 내뱉었다.
강도들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다각- 다각- 다각-
차분히 기다리던 이안은, 놈들이 마차에 도달하기 전에 먼저 몸을 날렸다.
바람이 그의 몸을 힘껏 떠밀었다.
“으헉-?!”
그가 이런 식으로 달려 들리라고는 예상도 하지 못한 듯, 강도가 눈을 치켜떴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이안이 내리친 검이 놈의 머리 바로 앞까지 다다른 상태였다.
꽈지직-!
북부 전사의 검이 도적의 머리를 가슴팍까지 쪼개며 박혀 들었다. 이안과 충돌한 놈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그 사이 이미 몸을 움츠린 이안이, 놈의 가슴팍을 힘껏 박찼다. 벨리움 요새에서 거인들을 상대하며 여러 번 반복한 바로 그 움직임이었다.
푸확-!
한순간 뿜어져 나온 바람이, 강도의 시체를 바닥에 처박다시피 튕겨냈다. 투쟁의 축복을 받던 그때만큼 힘이 강하지는 않았지만, 달려들던 속도를 상쇄할 정도로는 충분했다. 이안이 말 위에 착지했다.
허공에 피 보라가 휘몰아쳤다.
“뭐 저런, 미친…?!”
엉망진창으로 땅을 구르는 동료의 시신과 안장에 묘기 부리듯 올라탄 이안을 번갈아 본 남은 강도가, 황급히 말 머리를 옆으로 돌았다.
이안은 말머리를 돌려 곧바로 놈의 뒤로 따라붙었다. 그의 눈동자가 잿빛으로 휘몰아쳤다. 곧바로 다시 휘몰아치기 시작한 바람이, 그가 탄 말까지 감쌌다. 도망치는 강도와의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시발, 오지 마-! 오지…!”
소리치며 뒤를 돌아본 놈은, 이안이 전력으로 달리는 말의 안장 위에 두 발로 올라선 것을 보고는 숨을 들이켰다.
다음 순간 이안이 뛰어올랐다.
그의 몸이 바람의 저항을 전혀 받지 않는 것처럼 포물선을 그렸다.
콰직-!
도적이 몸을 비틀었지만, 고통만 더해질 따름이었다. 머리가 아니라 목덜미에 떨어진 칼이, 복부까지 깊이 갈라 버린 것이다. 놈이 걸친 사슬 갑옷과 가죽 견갑은, 바람 칼날이 더해진 이안의 검을 전혀 막아 주지 못했다.
“커… 허….”
단숨에 죽지 못한 강도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피를 토했다. 잘린 단면에서도 피가 치솟았다.
이안은 놈의 내장이 쏟아지기 전에, 머리채를 잡고 옆으로 던져 버렸다.
그대로 놈의 안장에 올라탄 이안이, 느릿느릿 언덕을 오르는 자신의 마차를 일별하고는 고삐를 후려쳤다.
짐 마차 위. 순식간에 동료 둘이 죽는 것을 본 강도가 언덕 반대편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었다.
마부석의 여자는 그에게 얻어맞아 얼굴이 엉망이 된 채로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겁에 질린 얼굴로 이안을 돌아본 강도가, 다급하게 재장전을 끝낸 쇠뇌를 들었다.
그 와중에도 조준은 정확했다.
쒸엑-
말을 향해 날아드는 파공음. 이안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팔을 휘두른 건 거의 동시였다.
챙-
이안이 볼트를 쳐내자, 강도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말도 안 된다고 중얼거리는 입 모양이 또렷하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