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129
129화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놈들이다. 아직 벌레도 꼬이지 않았어.”
“보아하니 칼도 좀 쓰는 놈이고.”
혀를 찬 이안이 몸을 돌리며 덧붙였다.
“그놈을 빼앗길 순 없지. 계획 변경이다. 마차 잘 묶어 놓고 따라와.”
“……?! 알았다!”
달려 올라가는 이안의 뒷모습을 눈을 치켜뜨며 바라본 샬롯이, 곧바로 마차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사이에도 이안은 쉬지 않고 내달렸다.
‘…어쨌든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까, 아예 늦진 않았을 것 같은데.’
곧 거대한 산채의 전경이 드러났다.
끝을 뾰족하게 다듬은 목책이 성벽처럼 펼쳐지고, 망루도 규칙적으로 솟아 있었다. 그 너머, 완만한 산기슭을 따라 이어진 목조 건물들의 지붕이 보였다.
거주 시설까지 완비된, 훌륭한 목조 요새였다.
망루가 텅 비어 있다는 것만 빼면.
그래도 아예 늦진 않았으리란 예상은, 다행히 현실이 되었다.
저 멀리, 아직도 소음이 번지고 있었으니까.
‘누군진 몰라도….’
이안은 반쯤 열린 정문 너머로 발을 들였다. 피 냄새와 구린내가 코를 찔렀다. 사방에 널브러진 시체들.
‘자신감이 대단한 놈들이군. 정면 돌파라니.’
죽음의 행렬은 통나무 집 사이의 굽이진 길을 따라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이안은 선객들의 배포에 내심 감탄하며 걸음을 옮겼다.
앞선 시체들을 보면서도 느꼈지만, 보통 실력자들이 아니었다.
여러 번 찔린 흔적이 있는 비교적 멀쩡한 시체도 없진 않았지만.
대부분은 목이 잘리거나 내장을 철철 흘리는 끔찍한 몰골이었다.
가로나 세로, 대각선을 가리지 않고 쪼개지거나 아예 토막 난 시신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그리고 대부분 단칼에 그렇게 된 게 분명했다. 제대로 막아내지도 못한 것 같았다. 수수깡처럼 부러진 검과 빗나가 박힌 볼트가 곳곳에 보였다.
“살육이 펼쳐졌었군….”
뒤이어 마을로 들어선 샬롯이 감탄한 얼굴로 읊조렸다.
“그렇다고 다 죽인 건 아니야.”
이안은 건물 사이의 길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내뱉었다.
그 뒤를 따르며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건물 내부의 숨죽인 기척들을 느낄 수 있었다. 지나치는 거의 모든 건물 안에 생존자들이 있었다. 그것도 꽤 많이.
“달려드는 놈들만 죽이면서 올라간 거군.”
“그래. …인간 타락자 할 것 없이 전부.”
은은하게 번지는 소음의 근원지로 올라가면서, 이안은 널브러진 시체들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도적 기사를 빼앗길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안 되면 힘으로라도 빼앗을 생각이니, 먼저 온 놈들의 실력을 확실히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다.
푸확-!
“……!”
이안의 눈이 커진 건, 오르막길을 반 이상 올랐을 때쯤이었다.
저 멀리, 욕설과 고함이 번지는 2층짜리 목조 건물의 창에서 붉은 섬광이 번쩍였기 때문이었다.
놀람은 아주 잠깐이었다.
“하… 그래. 누군가 했더니.”
그의 입가에 이내 미소가 스쳤다.
선객의 정체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오히려 왜 보자마자 깨닫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변방에 이만한 칼 솜씨와 무모함을 가진 사람이 그리 많을 리 없건만.
“아는 자들인가?”
뒤따르던 샬롯이 물었다. 멈추지 않고 걸으면서,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잘 아는 정도가 아니-”
말을 멈춘 그가 앞을 바라보았다.
콰장창 하는 굉음과 함께, 목조 건물 2층의 벽면을 뚫고 누군가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바닥을 구르며 착지한 건 전신 판금 갑옷을 걸친 기사였다. 투구만은 걸치지 않은 채였다. 벌떡 일어난 그가 자신이 부순 벽면을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다들 당장 저 미친 새끼를 막아! 그렇게 겁먹은 표정으로 보지 말고, 이 병신들아! 그래…! 내가 네놈들의 두려움을 없애 주지!”
소리치는 그의 전신에 보랏빛 마력이 휘몰아쳤다. 기다란 대검을 뽑아 든 그가, 검을 벽면의 구멍을 향해 내뻗었다. 날을 타고 오염된 마력이 번져 나갔다. 건물 내부에서 크고 작은 비명이 잠깐 울리더니, 뒤이어 가래가 끓는 듯한 숨소리로 바뀌었다.
“넌 절대로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할 거다, 이 개자식아-!”
“호오….”
걸음을 멈춘 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안이, 비로소 나지막이 탄식을 흘렸다.
“만나자마자 2페이즈인 거군….”
중얼대는 그를, 옆에 선 샬롯이 돌아보았다.
“그건 또 무슨 뜻이지?”
“저놈이 우리 목표물이란 얘기지.”
북부 전사의 검을 검집에 되돌리며, 이안이 옆을 턱짓했다.
“저놈은 내 거다. 넌 정문으로 도망쳐 나오는 놈들을 맡아. 대신 이 강도들이랑 싸우는 자들은 절대 건드리지 마라. 판금 갑옷을 걸친 기사는 특히.”
“염려 마라. 죽이지 않을 테니까.”
내뱉은 샬롯이 훌쩍 몸을 날렸다.
담장을 박차고 가볍게 지붕에 착지한 그녀가 멀어졌다.
네가 죽을까 봐 한 말인데.
생각하며, 이안은 부러진 단죄의 검을 아공간에서 꺼내 들었다.
그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느긋한 발걸음이었다.
저 도적 기사는 부하들을 희생시켜 도망치려는 게 분명했다. 저긴 건물 끝 쪽이니, 달려서 도망치거나 정문으로 돌아갈 게 아니라면 자신 쪽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에 마구간을 지나쳤으니까.
‘본진이 털리고 있는 것 치고 제한 시간이 넉넉하다 싶더라니. 저놈이 도망쳐 나가는 시간까지 포함이었던 거네.’
하긴. 도적 기사는 게임에서도 불리하면 도망 다니던 놈이었다. 재생력이 아주 뛰어나서, 궁지에 몰리면 부하들을 불러 모으고 도망쳐 체력을 회복하곤 했었다.
‘그런데, 상태 창이 어떻게 이걸 미리 알고 제한 시간을 둔 거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의문이 뒤를 이었다.
예지력이라도 있는 걸까? 그보단 차라리 이 상황이 게임에서도 똑같이 존재했었다고 생각하는 쪽이 설득력이 있었다. 그때도 제한 시간이 지나서, 존재조차 모르고 지나친 서브 퀘스트가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까.
그럼 이번에는 운 좋게 타이밍을 딱 맞춘 것이리라.
‘이미 서브 퀘스트를 몇 개쯤 놓쳤으리란 뜻도 되겠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던 도적 기사가 그를 발견한 건 그때였다.
보라색 광망이 아른거리는 눈으로 이안을 응시한 그가, 이윽고 물었다.
“넌 또 뭐냐?”
“널 죽일 사람.”
“그 부러진 칼로?”
“널 죽이는 건 이거면 충분할 것 같은데.”
이안의 태연한 대답에, 도적 기사의 얼굴이 구겨지듯 일그러졌다.
“이 미친 새끼들이… 날 아주 우습게 보는군. 오냐. 죽여 주마, 이 고블린 똥 같은 새끼야!”
고오오- 그의 전신에서 오염된 마력이 휘몰아쳤다. 뿌득대는 섬뜩한 소리가 갑옷 아래에서 이어졌다.
이안은 마력을 끌어올렸다. 마력이 엄청난 속도로 혈관을 내달리고, 바람 칼날이 순식간에 완성됐다.
여유를 부리긴 했지만, 전투를 길게 끌 생각은 없었다.
변이 중인 도적 기사를 향해 달리기 시작한 이안이 훌쩍 솟구쳤다. 머리 위로 부러진 단죄의 검을 치켜드는 가운데, 지붕에 가려져 있던 광경이 얼핏 드러났다.
“괴, 괴물-! 살려 줘…!”
문을 박차고 나오는 두 놈.
끔찍한 몰골로 변이된 하수인들을 보고 혼비백산해 도망친 것이리라. 여기까지 나온 것만으로도 운이 좋은 셈이겠지만. 안타깝게도 괴물은 안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콰직-!
옆 건물의 지붕 위에서 뛰어내린 샬롯이 한 놈의 머리를 쪼갰다. 옆의 놈은 눈을 치켜뜬 그대로 목이 날아갔다.
‘…암살자가 딱이라니까.’
“이 버러지야! 어딜 보는 거냐?”
도적 기사의 외침이 뒤를 이었다. 놈의 변이는 말단 하수인들처럼 끔찍하고 요란하지 않았다. 갑옷이 버틸 수 있을 정도만큼만 덩치가 커졌고, 얼굴 전체에 보라색 핏줄이 돋아났을 뿐이었다.
온통 검보랏빛으로 변한 눈동자가, 가까워지는 이안을 똑바로 노려 보았다.
“겁대가리 없는 놈! 그대로 똥구멍까지 꿰어 주마!”
소리치며, 놈이 손에 든 검을 치켜들었다. 날이 기다란 대검을 한 손 검처럼 내뻗고 있었다.
“이래야 네가 안 튈 것 같아서.”
내뱉으며, 이안은 단죄의 일격을 사용했다.
솨아아아-
십자막이를 타고 푸른 빛이 번졌다. 날이 멀쩡하던 과거와 달리, 신성력은 타오르는 불길처럼 부러진 날의 단면 위로 치솟았다.
“뭣…?!”
도적 기사가 눈을 부릅떴다. 놈이 내뻗었던 팔을 황급히 당기는 가운데, 이안이 검을 내리쳤다.
푸른 궤적이 거칠게 대기를 갈랐다.
카드드득-!
앞을 막아선 대검 날을 불길처럼 넘실대며 지나친 신성력이, 도적 기사의 몸을 세로로 가르며 떨어져 내렸다.
놈의 발치에 착지한 이안이, 가랑이 사이를 굴러 지나치고는 멈춰 섰다.
푸-확-!
한 박자 늦게 피가 치솟았다. 쩍, 좌우로 갈라진 놈의 머리와 상반신이 지저분하게 벌어졌다.
‘위력 자체는 부러지기 전보다 더 세진 것 같은데.’
생각하며, 이안은 빛이 잦아드는 검을 고쳐 쥐었다.
꿈틀꿈틀, 놈의 잘린 단면이 부풀면서 이어 붙고 있었다. 신성력에 타들어 가면서도 재생을 멈추지 않았다.
“그… 그극….”
바퀴벌레 같은 놈.
이안은 놈의 등을 향해 남은 신성력을 모조리 뿜어내고는 단죄의 검을 아공간으로 되돌렸다. 그리고는 북부 전사의 검을 뽑아 들며 다시 한번 솟구쳤다.
쉬학-!
바람 칼날을 머금은 검이 횡으로 그어졌다. 카가각, 쇠를 긁는 듯한 느낌과 함께 목덜미가 깊이 패였다.
“그… 아, 윽….”
안 잘릴 줄이야. 혀를 찬 이안이, 그대로 놈의 등을 힘차게 박찼다. 도적 기사가 그대로 앞으로 엎어졌다. 바닥을 구르며 착지한 이안이 다시 놈에게로 달려갔다.
안 잘리면 잘릴 때까지 잘라 주면 그만이었다.
콰직! 콰직!
이안은 재생 중인 놈의 목을 도끼질하듯 내리쳤다. 꾸물대며 끝까지 버티던 머리가 끝내 떨어져 나갔다. 이안은 데구르르 굴러가는 놈의 머리에 비로소 화염구를 한 발 쏘아 보냈다.
그 와중에도 다시 이어 붙으려 꾸물꾸물 번지던 살점이 불길에 휩싸여 타들어 갔다.
부들부들 떨리던 놈의 몸이 이윽고 축 늘어졌다.
퀘스트 완료 창이 뒤를 이었다.
창을 닫아 버리며, 이안은 익은 고깃덩어리가 된 머리와 축 늘어진 몸통을 번갈아 내려다보았다.
도적 기사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벌레 같은 최후였다.
‘어쨌든, 결과적으론 노른자만 쏙 빼먹었네.’
생각하며, 이안은 검을 회수했다.
옆의 벽면에 기댄 그가, 소란이 이어지고 있는 목조 건물을 바라보았다.
저 안에선 괴성과 비명, 쇠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피처럼 붉은빛이 순간순간 번쩍였다.
굳이 도우러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여기서 기다리기만 해도 충분하리라.
뻐억-!
얼마 지나지 않아 가죽 북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도적 기사가 부쉈던 벽면에서 시커먼 덩어리 하나가 튕겨 나왔다.
“그… 으윽…!”
근육이 비대하게 부풀어 오른, 변이된 하수인이었다. 바닥을 한 바퀴 굴러 멈춰선 놈의 움푹 파인 가슴팍이, 뼈 소리와 함께 다시 부풀어 올랐다.
부서진 벽면 너머로 낮게 깔린 붉은 신성력이 번진 건 그 직후였다.
곧 전신 판금 갑옷을 걸친 기사가 그 너머로 튀어나왔다.
피처럼 붉은 궤적이, 쓰러진 타락자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콰직!
검이 놈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비대한 몸을 짓밟으며 착지한 붉은 기사가, 그대로 자루를 놓고는 주먹을 들었다.
콰직! 콰직!
신성이 맺힌 강철 주먹이 하수인의 머리를 무자비하게 내리찍었다.
주먹질은 놈의 머리가 곤죽이 되고서야 비로소 멈췄다. 거친 숨을 내쉬며 일어선 붉은 기사가 가슴팍에 박힌 검을 뽑아 들었다.
검에 묻은 피를 휙 털어내며 몸을 돌린 다음 순간.
“……!”
그의 움직임이 그대로 멈췄다.
전에 봤던 카르하의 성상처럼, 신성을 머금은 기사의 조각상처럼 보일 정도였다.
얼어붙은 시선을 마주한 이안이 비로소 입꼬리를 말아 올린 그때였다.
“으, 으악-?!”
뻥 뚫린 벽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벽면 끝에 간신히 멈춰선 갈색 머리의 청년이, 검과 방패를 볼썽사납게 펄럭이고 있었다.
뛰어내리려고 달려왔다가 마지막 순간에 겨우 멈춰선 모양이었다.
이윽고 간신히 균형을 다잡은 그가, 검을 회수하며 쪼그려 앉았다.
하반신부터 건물 밖으로 내밀면서, 그가 주절댔다.
“아니, 여기서 어떻게 그렇게 뛰어내리신 겁니까? 읏… 어라…? 나리,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밑에서 저 좀 받아 주세요…!”
낑낑대며 벽면에 매달린 종자가 이윽고 소리쳤다. 그가 여전히 굳어 있는 기사를 돌아보았다.
“나리? 안 들리십니까? 그렇게 서 계시지만 마시고…. …그런데 뭘 그렇게 멍하니 보십니까?”
종자가 비로소 기사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을 의심하듯 미간을 찌푸린 것도 잠시. 이윽고 종자, 필립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이, 이안 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