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132
132화
눈을 치켜떴던 필립이, 이내 짧은 탄성을 흘렸다.
“남은 의뢰가 있으신 거군요.”
“그래.”
“오래 걸리시는 일입니까?”
“글쎄. 그것까진 잘 모르겠군.”
“무슨 의뢰를 받으셨기에…. 그, 추궁하려는 건 아닙니다. 그저 궁금해서요.”
필립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메브도 술잔을 내려놓고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가 제안을 거절한 건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이었다.
샬롯이 눈을 가늘게 뜨며 술을 홀짝이는 가운데, 한쪽 어깨를 까딱인 이안이 내뱉었다.
“우린 뱀파이어들을 죽이러 가고 있다.”
“배, 뱀파이어요…? 마족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루 사드에 놈들의 본거지가 있어.”
이안의 말투는 덤덤했지만, 듣는 이들의 반응은 그렇지 못했다. 필립의 눈이 찢어질 듯 커지고, 메브도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 입을 뻐끔댄 필립이 외쳤다.
“제국 옆에 붙은, 그 루 사드요?”
“목소리가 아주 크고 좋군. 제국에서도 들리겠어.”
“…죄송합니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만…. 하, 하지만 그럴 만하지 않습니까. 루 사드는 그런 괴물들이 숨어 살 만한 곳이 아니니까요.”
“숨어 사는 정도가 아니야. 놈들은 세력을 형성하고 있지. 어쩌면 왕국 자체가 그것들의 손아귀에 놓여 있을지도 몰라.”
“허어….”
필립이 탄식하는 가운데, 술을 한 모금 마신 메브가 덧붙였다.
“그런 것들을 상대하러 가면서, 둘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냐?”
“경도 둘이서 이 산채에 쳐들어가셨잖소.”
“…….”
눈을 깜빡인 메브가, 그 둘이 어떻게 같냐는 듯 옅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사이 침을 꼴깍 삼킨 필립이 메브를 돌아보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안 나리를 도우면 되지 않겠습니까, 나리?”
“흐음….”
메브가 침음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필립이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마족이라면 분명 타락자들과도 연관이 있을 겁니다. 어쩌면 제국의 타락자들과 이어진 또 다른 연결 고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죠. 변방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데에 협조해 왔으리란 건 생각할 필요도 없겠고요. 지금의 전쟁을 가장 기뻐하고 있을 자들이 그들 아니겠습니까.”
“…그래.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이다만, 이안의 허락을 구하는 게 순서이겠지.”
메브가 선선히 대답했다. 필립이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이안 나리께서 거절하실 이유가 있으시겠습니까? 우리가 합류한다면 그 마족들을 상대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될 텐데요. 안 그러십니까, 나리? …나리?”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필립이 비로소 이안을 돌아보았다.
“글쎄….”
턱을 긁적이던 이안이 중얼댔다.
이런 반응이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한 듯, 필립이 눈을 치켜떴다.
“아니, 이걸 고민하신다고요? 저는 그렇다 쳐도, 우리 나리께서 도움이 되지 않으실 리가 없잖습니까!”
“그래. 그건 당연하지.”
“달리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는 거구나.”
대답하는 이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메브가 말했다. 이안은 부정하지 않았다. 포도주를 한 모금 들이켠 메브가 차분하게 덧붙였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더는 묻지 않으마.”
“아니, 나리…?”
필립이 멍하니 메브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아끼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냥 이렇게 수긍하시면-”
“추궁이라도 하란 말이냐, 필립? 전우이자 은인인, 이안을?”
“그건… 옳은 말씀이십니다만… 아니…. 예… 옳으신 말씀이지요…”
필립이 더듬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술잔을 쥔 손이 초조하게 까딱였다.
‘자기들끼리 북치고 장구치고, 잘하네. 여전히.’
술을 마시며 피식댄 이안이, 이윽고 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 경의 동의를 먼저 받아야 할 사안이 있소. 미리 아셔야 할 부분도 있고.”
필립이 홱 고개를 돌렸다. 안심한 듯 다시 창가에 느슨하게 기대던 샬롯도 미간을 좁혔다. 메브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네가 자주 하던 말을 인용해야겠구나. 우선 들어 본 뒤에 답하마.”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이 말했다.
“얼마 전까지, 내 일행은 둘이 아니라 셋이었소. 의뢰인이 동행하고 있었지.”
그는 잠시 메브를 마주 보고는 덧붙였다.
“다만 그 의뢰인은, 인간이 아니었소.”
“이안…?!”
샬롯이 탄식하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정말 다 말할 거냐는 듯한 눈빛. 필립의 시선이 어리둥절하게 그녀 쪽으로 돌아갔다.
“인간이 아니라면… 저분 같은 이종족 이었단 말씀이십니까?”
“그 이상이었지.”
이안이 필립을 돌아보았다.
“너도 본 적 있다. 아겔 란에서, 나랑 같이.”
“그게 무슨…. …설마?”
고개를 갸웃하던 필립의 눈이 이내 커졌다.
“그 흡혈 귀쟁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우리가 상자에서 꺼내줬던, 그 괴물이요?”
“그래. 이름은 테사이아고, 마족이었지.”
“…….”
샬롯이 낮게 그르렁대며 눈을 감는 가운데, 필립은 물론 메브의 입도 멍하니 벌어졌다.
전혀 상상치 못한 이야기인 게 당연했다. 그들이 아는 이안은, 어둠의 족속이라면 일단 날붙이부터 들이미는 성격이었으니까.
“사, 사악한 주문에 홀리기라도 하셨던 겁니까…?”
이윽고 필립이 더듬대며 물었다. 체념의 한숨을 내쉬던 샬롯이 그를 돌아보았다.
“이안에게 그런 게 통할 거라고 생각하나?”
“그야 그렇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나리께서 그런 부정한 족속과-”
“흡혈 일족은 다른 종족을 납치해 뱀파이어로 만들고, 모종의 실험을 벌이는 것 같더군. 그 녀석은 거기서 도망친 실험체였다.”
말을 자른 이안이, 빈 잔에 샬롯이 가져온 술을 따랐다. 정체 모를 과실주였다.
“붙잡혀서 다시 잡혀가던 걸, 너랑 내가 구했던 거야. 어쨌든, 그 녀석은 그 후로도 계속 쫓기고 있었다. 그리고 궁지에 몰리자, 내게 도움을 요청했지.”
“그래서 나리는 그걸… 받아들이셨고요.”
“그래.”
“아니…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마족의 의뢰를….”
“미끼로 쓴 거구나.”
메브가 툭 끼어들었다. 잔에 술을 따르며, 그녀가 이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곁에 두면 다른 마족들이 제 발로 찾아오리라 여긴 거야. 그렇지?”
“정확하시군.”
무슨 그런 소리를 하냐는 듯 인상을 찌푸리던 샬롯이, 이안의 대답에 홱 그를 돌아보았다.
술을 한 모금 마신 메브가 이안의 눈을 빤히 마주 보았다. 타락자와 마물을 일말의 자비 없이 베어 넘기는, 완고한 기사의 눈.
“그래서, 그 마족은 지금 어디에 있지?”
“빼앗겼소. 뱀파이어들에게. 아마 지금쯤 루 사드 어딘가에 있겠지.”
“…이제야 말씀을 아끼신 이유를 알겠군요.”
가라앉은 목소리로 뇌까린 필립이 이안을 바라보았다.
“저와 나리가 동행하면, 그 흡혈 귀쟁이까지 죽일 걸 염려하신 거예요. 이안 나리께선, 그 마족을 죽이고 싶지 않으신 거군요.”
“…그 녀석은 다른 뱀파이어와는 다르다.”
샬롯이 내뱉은 건 그때였다.
필립을 가만히 응시한 그녀가, 메브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덧붙였다.
“사람의 피를 마시지 않아. 그래서 약해 빠졌지. 누군가에게 해악을 끼친 적도 없다. 그저 갈증에 시달릴 뿐, 자신이 마족이라는 자각조차 없지. 오히려 그들을 증오해.”
“그렇다 해도 마족이란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죠.”
필립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내 목숨을 여러 번 구한 동료라는 사실도 변하지 않지.”
씹어 뱉는 샬롯의 눈매가 서늘해졌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듯한 기세. 필립도 언제 실실댔냐는 듯, 건조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받은 의뢰는 흡혈 일족을 전부 죽여달란 거였소.”
이안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둘의 긴장을 깨뜨렸다.
“그러니 난 의뢰를 우선할 거요. 테사이아의 생사는, 그다음 문제지.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고. 그러면 귀하가 동행하셔도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겠지.”
“뭐라고…? 이안, 진심이냐…?”
샬롯이 충격받은 듯 돌아보는 가운데, 이안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 녀석이 끝내 살아남아 무사히 내 앞에 설지도 모를 일이오. 그땐 상황이 좀 달라지겠지. 경과 달리 나는, 샬롯의 말도 아예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으니까. 게다가….”
잠시 말을 멈춘 이안이 술로 입술을 축였다. 메브의 가라앉은 녹색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였다.
“테사이아는 내 의뢰인이자, 동시에 하인이기도 하지. 그 녀석의 생사여탈권은 내게 있다는 뜻이오.”
잔을 내려놓은 그가, 건조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때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건, 개입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으시겠소? 만약 내 결정이, 그 녀석을 살리는 것이라 하더라도?”
“…….”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서로를 향한 시선만이 교차했다.
둘의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언제 굳었었냐는 듯 초조한 얼굴이 된 필립이 눈알을 굴렸다.
이윽고, 메브가 입을 열었다.
“너는 항상, 네 뜻을 관철하기 위해 나와 대립하는 걸 망설이지 않는구나, 이안. 최악의 가정이라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어.”
“…이번엔 망설였소만.”
이안의 말에, 메브의 입꼬리가 설핏 말려 올라갔다.
“그래서 고민했던 것이냐?”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대답했다.
“하지만 경이라면 결국, 내 뜻을 존중해 주실 것 같더군.”
“하… 그래. 여전히 말로는 못 당하겠구나.”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읊조린 메브가, 술잔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다른 이였다면 재고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족의 하수인이라 여기고 목을 베었겠지. 하지만 네게 검을 겨눌 수는 없구나. 오히려 이럴 이유가 있으리란 생각부터 들어. 거기다 방금 그런 말까지 듣고 나니, 달리 방도가 없구나.”
그녀가 다시 이안을 마주 보았다.
“한쪽 눈을 감을 수밖에. 이만하면 답이 되었느냐?”
이안이 슬쩍 미소 지었다.
“되었소.”
메브가 술잔을 들며 덧붙였다.
“네 종자의 말처럼 정말 어두운 본성과 싸워 이긴 마족이 존재할 수 있는지, 나 역시 궁금하구나. 직접 확인하고 싶어. 그러니, 함께 가자꾸나.”
“…그 부분은 사실 나도 아직 확신하진 못하는 부분이긴 하지만.”
이안은 마주 술잔을 들어, 그녀의 잔 앞으로 내밀었다.
“그럽시다.”
미소 지은 메브가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이안도 잔에 담긴 술을 남김 없이 들이켰다. 그런 둘의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필립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두 분 나리께서 다시 동행하신다는 말씀이신 거지요?”
“그래. 루 사드까지만, 일단은.”
잔을 내려놓으며 이안이 말했다. 메브도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 쉰 필립이, 이내 웃음 지었다.
“다행입니다. 방금 알았는데, 마족을 죽이니 살리니 하는 건 저에게 별로 큰 문제가 아니더군요. 그보단 두 분의 사이가 틀어지는 게 더 겁이 났어요.”
“네 걱정이나 해라. 이제 뱀파이어 소굴로 함께 들어가는 거니까.”
“그 정도 각오도 없이 말씀 드렸겠습니까? 어차피 이미 충분히 목숨이 간당간당하게 살고 있습니다, 나리.”
넉살 좋게 덧붙인 필립이, 이내 턱을 긁적였다.
“그보다… 계획을 전부 새로 짜야겠군요. 사실, 벨 론데에서도 거쳐가야 할 곳이 한 군데 있거든요.”
“그런 건 네가 알아서 해.”
“물론이죠. 어차피 당장 생각할 부분은 아닙니다. 다시 함께하게 됐는데, 지금은 자축부터 해야죠.”
필립이 빈 술잔에 술을 따르기 시작한 가운데, 이안의 시선이 창가의 샬롯에게로 돌아갔다.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이 조금 어리둥절해 보였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의자 들고 와라. 앉아.”
“그래요, 어서 오십시오. 함께 다니게 됐으니, 이제 그냥 이름으로 부르겠습니다, 샬롯.”
필립이 언제 날을 세웠냐는 듯 덧붙였다. 눈을 깜빡인 샬롯이, 선선히 의자를 들고 다가왔다. 그녀가 빈 자리를 채우자, 필립이 재빨리 그녀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건배사 한 번 하시죠. 두 분 나리.”
필립이 싱글댔다. 잔을 든 메브가 미소 지었다.
“함께하게 되어 좋구나. 이안. 그리고, 샬롯. 잘 해 보자.”
그녀의 시선을 받은 샬롯이 슬쩍 혀로 입술을 축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이안에게로 모였다.
이안이 덤덤하게 내뱉었다.
“이것까지 마시고 잡시다. 내일 일찍 떠나는 게 좋을 것 같으니.”
“참 너 다운 건배사로군.”
웃음 지은 메브가 잔을 내밀었다. 네 개의 술잔이 테이블 중앙에서 맞부딪쳤다.
“그런데 나리, 북부의 상황은 언제쯤… 하하. 하긴, 오늘만 날이 아니지요. 예.”
곧 테이블 위에는 빈 냄비와 빈 술잔만이 남았다. 등잔의 불빛이 잦아들고, 코 고는 소리와 숨소리만이 장내를 채웠다.
다음 날. 넷으로 늘어난 일행은, 모두가 아직 잠든 이른 아침에 조용히 산채를 떠났다.
도적 기사의 방에서 찾은 돈주머니들은 고스란히 테이블 위에 남겨둔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