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133
133화
내리막길이 조금씩 완만해졌다.
산 반대편이었다.
이안과 샬롯은 아직 피로가 덜 풀린 메브와 필립에게 마차를 양보하고, 대신 말에 탄 채 뒤를 따랐다.
산채의 마구에 있던 말들 중에서 가장 상태가 좋은 두 마리였다.
메브와 필립은 산채로 쳐들어가기 전에 본래 타던 말들을 그냥 풀어 줬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말을 갈아탄 게 처음이 아닌 모양이었다.
어쨌든, 달라진 건 일행의 구성만이 아니었다.
“제가 고민을 좀 해 봤는데 말입니다, 나리.”
이안이 마차 옆으로 다가서자, 마부석에 앉은 필립이 입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말투.
그가 일행의 새 길잡이였다.
샬롯은 일말의 아쉬움도 없이, 오히려 홀가분한 얼굴로 그에게 그 역할을 양보했다.
“이동 경로를 조금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필립이 들고 있던 널찍한 종이를 이안에게도 보이게 펼쳐 들며 덧붙였다.
꼬깃꼬깃하게 접힌 자국이 역력한 종이는, 변방 지역의 지도였다.
정확도에는 상당한 오차가 있어 보였지만, 어쨌건 국경은 물론 성과 마을, 산과 강 같은 지형이 상당히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이안은 그 위에 이어진 검은 선과 크고 작은 글자들을 눈에 담았다.
그들의 이동 경로. 그 과정에서 겪은 사건과 얻은 정보의 요약들.
‘열심히도 살았군.’
이안의 뇌리로 어젯밤의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이안은 필립의 음모론을 그저 망상이라 치부하지 않았다.
타락자들의 각기 다른 비밀스러운 인맥들. 그 사이에서 모호하게나마 연관성을 찾아낸 직관을, 오히려 훌륭하다 여겼다.
이안이 보기에도 많은 음모의 배후에 원탁 의회가 개입되어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르케아스를 통해 들은, 그들의 방식 그대로였으니까.
‘식상한 새끼들 같으니라고….’
어쨌거나 만약 정말 그렇다면, 메브와 필립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거대한 어둠의 가장자리에 발을 들인 셈이었다.
메브는 그저 자신이 겪은 비극의 근본적 원흉을 알아내고 싶을 뿐이겠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더욱, 물러나지 않고 중심부를 향해 나아가게 되리라.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정확히 모르는 건, 사실 나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나리? 듣고 계십니까?”
필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안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떻게 바꾼다고?”
필립이 손가락을 지도의 한쪽에 얹어 현재 위치를 표시했다.
“일단 저희는 적당히 나아가다가, 관도가 없는 길로 빠질 겁니다. 이런 식으로요.”
필립이 손가락을 아래로 움직였다.
“그래서?”
“어, 왜 빠지는 안 물으십니까?”
“별로 안 궁금하니까.”
“아하… 그래도 굳이 말씀을 드리자면, 라 드린 남부는 분위기가 특히나 흉흉하다고 합니다. 볼튼이 벨 론데에게 넘어가서, 사실상 국경지대나 다름이 없거든요. 특히 이 근처는 얼마 전에 큰 전투가 있었다고 하는데-”
“안 궁금하다니까. 넘어가라.”
필립이 당황한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짧게 헛기침한 그가 말을 이었다.
“루 사드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이렇게 남서쪽으로 계속 내려가는 거겠죠. 나리께서 가시던 경로도 이 방향이고요. 하지만 분명 중간중간 검문이나 강도를 여럿 마주치게 될 겁니다. 개중에는 우리 나리에게 원한을 가진 이들도 있을지도 모르고요. 아시다시피, 저희가 사고를 좀 치고 다녔거든요.”
씩 미소 지은 필립이, 이안의 건조한 눈빛을 보고는 재빨리 덧붙였다.
“거기다 루 사드 왕국은, 국경의 통행을 특히 철저하게 단속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북부 국경지대에 거의 전 병력을 배치했다더군요.”
“드디어 영양가 있는 얘기로군. 이유도 알고 있나?”
“원정에 한차례 실패한 뒤론, 빗장을 걸어 잠갔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도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하게요.”
“흐음….”
그게 대외적인 이유란 말이지.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생각했다. 적당한 명분이 생겼으니, 내부를 외부와 완전히 차단한 채 그의 방문을 대비하고 있으리라.
‘게임과 비슷한 상태라면 아마….’
이안의 눈매가 설핏 가늘어지는 사이, 필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니 벨 론데에서 잠깐 제국을 경유해 이동하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만.”
이안의 눈이 더 가늘어졌다.
“제국을?”
“예. 이런 식으로요. 제국 국경 쪽에는 병력이 전혀 없을 테니까요.”
필립이 손가락을 벨 론데 남동쪽 국경을 넘어, 제국 땅을 지나쳐 루 사드의 동부로 움직였다.
“대신 거기엔 반대로, 제국의 국경 수비대가 순찰을 돌고 있을 텐데.”
마차 반대편, 말 안장에 앉은 샬롯이 물었다. 이안의 시선에 그녀가 태연하게 덧붙였다.
“변방 왕국들이야 제국 국경 근처에는 병력을 배치하지 않겠지. 하지만 제국은 아니다. 도적 떼나 도망자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더 철저하게 감시하지. 신원 확인부터 한다면 별문제 없겠지만-”
“아주 훌륭한 질문입니다, 샬롯.”
필립이 말을 자르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드디어 대답할 맛이 나는 질문이 들어왔다는 눈빛이었다.
미간을 찌푸린 샬롯이 혀를 날름대며 입맛을 다셨다.
필립이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무리 제국이라도 모든 국경 지역을 지킬 수는 없죠. 소위 개구멍이라 불리는, 몰래 국경을 넘을 수 있는 샛길들이 존재합니다.”
“개구멍…?”
성기사의 종자가 할 말은 아니지 않냐?
생각하며, 이안은 슬쩍 메브를 돌아보았다. 놀랍게도 그녀는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안의 시선을 느낀 듯 머쓱하게 시선을 돌린 메브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전에 벨 론데를 지나다 피난민 몇을 구한 적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제국 국경을 넘나들던 암거래상이었어. 보답이라며 알려 줬지. 본래는 그 길을 통해… 제국 국경을 넘어갈 계획이었다….”
아, 그래. 애초에 공범이셨군.
이안의 입가에 헛웃음이 번졌다.
하긴. 복수의 기사로 거듭나면서, 단죄의 기사이던 시절의 제약이 대부분 사라진 그녀였다.
대신 다른 극단적인 제약이 생기긴 했지만, 어쨌거나 언행의 자유로움만큼은 과거와 비할 바 아닐 터였다.
“친절한 설명 감사합니다, 나리.”
미소 지으며 말한 필립이 다시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 길을 통해 우회하면, 며칠이 더 걸리겠지만 안전하게 루 사드에 발을 들일 수 있을 겁니다. 중간에 겪을 귀찮고 위험한 상황들을 생각하면, 이쪽이 더 빠를지도 모르죠. 게다가 그 뱀파이어들도, 나리가 동부를 통해 들어오리란 생각까진 하지 못할 테고요.”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상을 벗어나는 건, 사실 아무래도 좋은 부분이었다. 뱀파이어들이 뭘 준비했건, 정면으로 하나하나 깨부수며 전진할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도 나쁘지 않은 계획이었다.
“벨 론데에서 들를 곳이 있다고 하지 않았었냐?”
“예. 그 일정은 제가 알아서 조율할 수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변수가 생기지 않는 한, 최대한 예상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대답하는 필립의 말투는 아주 여상했다. 그리고 그 모습이, 놀랍게도 믿음직스러웠다.
…역시 인간은 구를수록 성장하는 건가. 생각하며 낮게 웃음 지은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행 시켜. 이제 길은 네가 알아서 해라. 굳이 보고가 하고 싶다면 경에게만 하고.”
“예, 알겠습니다.”
대답하며 지도를 접은 필립이, 은근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긴 여정이 될 겁니다, 나리.”
“그렇겠지.”
“여정의 지루함을 달래는 데에는 대화만 한 게 없지 않겠습니까?”
이안의 눈매가 슬쩍 가늘어졌다.
또 시작이군.
“그래서?”
“북부의 이야기를 해 주시죠. 고대 거인 왕국의 망령 군단이 북부를 뒤덮었다는 게, 정말입니까?”
“말했을 텐데. 사실이라고.”
“그리고요?”
“끝인데.”
“…….”
“뭐, 불만 있냐?”
“그럴리가요.”
그제야 이안이 더 말하고 싶지 않다는 걸 깨달은 듯, 짧게 입맛을 다신 필립이 시선을 돌렸다.
놀랍지도 않다는 듯한 태도였다.
포기도 빨라졌군.
이안은 내심 피식댔다. 사실 북부에서 겪은 일을 딱히 비밀로 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이야기를 꺼낸 순간 이어질 온갖 종류의 질문과 낯간지러운 감탄, 칭송이 귀찮을 뿐이었다.
필립의 고개가 반대쪽으로 돌아간 건 그 직후였다.
“…왜 그렇게 보지?”
샬롯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머금은 필립이 입을 열었다.
“신기해서 말입니다. 이안 나리는 여간해선 누군가에게 곁을 내어주는 분이 아니시니까요. 꽤 오래 함께하신 것 같은데. 능력이 출중하신 모양이죠.”
“뭘 원하는지는 알겠다만. 아첨하지 마라.”
“그저 궁금할 뿐입니다. 어쩌다 이안 나리와 동행하게 되신 건지요.”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다만.”
“놀라운 공통점이 있군요. 저도 이안 나리와의 첫 만남이 그리 좋지는 않았었거든요.”
그래, 전략을 바꾼 거군.
이안은 낮게 콧방귀를 뀌었다.
어쨌건 필립의 이번 전략은 제법 잘 먹히고 있는 게 분명했다.
샬롯이 슬쩍 혀를 날름대며 이안의 눈치를 살폈으니까.
필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서로 한 번씩 이야기를 주고받는 게 어떠십니까? 처음부터요. 어차피, 가는 동안 달리 할 일도 없잖아요?”
“흐음….”
샬롯이 낮은 숨소리를 흘렸다.
심드렁하게 육포를 찢어 입에 문 이안이 말의 속도를 늦췄다. 허락의 의미로 받아들인 그녀가, 마부석 옆으로 나란히 다가갔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
“역시 그렇죠? 그런 의미에서, 제가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이안 나리의 이야기를 듣게 된 건 우연이었습니다. 하루 머물기 위해 들른 작은 마을에서-”
기어코 시작하는군.
이안은 필립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입맛을 다셨다.
어쨌건 그를 계속 귀찮게 하는 것보단 저게 나았다.
“마차에 타겠느냐, 이안?”
옆에서 메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안이 돌아보자, 그녀가 부드럽게 덧붙였다.
“나는 충분히 쉬었다만.”
“하루씩 탑시다. 오늘은 경이 쭉 타고 가시오.”
“그래… 네 뜻이 그렇다면야.”
고개를 끄덕인 메브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곧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이안은 그게 필립의 이야기 때문임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이쪽은 또 이쪽대로 추억 여행 중이시군….
고삐를 고쳐 쥔 이안이, 마차와 슬며시 거리를 벌렸다.
어느덧 라 드린 남부의 황량한 들판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
여정은 관도를 벗어난 뒤로도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썩은 낙엽을 밟으며 앙상한 잔가지와 맥없는 풀숲을 헤치고, 이끼가 낀 개울과 굽이진 계곡을 일상적으로 가로질렀다.
문명화된 지역을 조금만 벗어나도 볼 수 있는, 변방의 흔한 풍경들.
이정표로 삼은 산봉우리들이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가까워졌다.
그리고, 멈추지 않는 건 여정만이 아니었다.
“뱀파이어를 태울 정도의 화염 물결이라니…. 궁금하군요. 이안 나리께서 그렇게까지 대단한 마법을 부리시는 건 본 적이 없거든요.”
“그때는 나도 직접 보진 못했다. 말했듯이, 그 모기 놈의 술수에 넘어가 정신을 잃었었으니까. 내가 직접 본 건, 한참 후의 일이야.”
필립과 샬롯이 주고받는 일대기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둘은 뜻밖에도 꽤 대화가 잘 통했다.
필립이 잘 받아 주고 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어쨌든 샬롯도 자신이 모르던 이안의 이야기를 듣는 걸 즐기고 있었다.
그녀는 한 번씩 필립의 대련 상대가 되어 주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눈을 가리고 싸웠다.
처음에는 자존심 상해하던 필립은, 그럼에도 샬롯을 제압할 수 없다는 걸 알고부터는 군말 없이 대련에 임했다.
강하면서도 유연한 그녀의 움직임은, 필립은 물론이고 메브에게도 신선한 교범이 되어 주었다.
“한참 후라면, 언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당장 할 얘긴 아니지. 이제 네 차례다.”
“…이런 단호한 부분은 참 이안 나리와 닮으셨군요. 두 분이 왜 함께 다니시는지 알 것 같습니다.”
입맛을 다시던 필립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나리, 제가 어디까지 했었죠?”
“목 없는 기사와 싸운 이야기까지 했다, 필립.”
메브가 대답했다. 차분한 말투와 달리, 필립과 마찬가지로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였다.
그녀는 대화에 좀처럼 끼는 일이 없다는 부분에선 이안과 같았지만.
그와 달리 둘의 대화를 귀 기울여 들었다. 특히 샬롯의 이야기는 숨을 죽인 채 경청했다.
먼저 묻지 않았을 뿐, 이안이 어떤 여정을 이어갔는지 내심 궁금해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렇군요. 그렇게, 미구엘이 우리와 함께-”
…정말 끝까지 계속할 심산이군.
안장에 앉아 육포를 우물대던 이안이 결국 한숨을 삼켰다.
안개가 깔린 음산한 숲을 심드렁하게 응시하던 그가, 이윽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핏줄처럼 뻗은 나뭇가지들 너머, 한 무리의 새떼가 물결치듯 상공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 위로 자욱하게 뒤덮인 먹구름은, 오늘도 미동 없이 고요했다.
방향은 물론 시간도 짐작하기 어려웠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낮과 밤의 구별이 점점 더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 인근만 그런 건가. 아니면….’
변방의 중심부에 다다를수록 더 심해지는 걸까.
아래에서 찰박대는 물소리가 이어졌다. 제법 넓은 하천이었다. 중심부의 수심도 말의 무릎 정도까진 올 것 같았다.
어쩐지 안개가 짙더라니.
“여길 지나면 곧 산길로 접어들 겁니다. 우린 골짜기 사이로 지나칠 거고요. 여기선 안개 때문에 잘 안 보이지만요.”
잠시 마차를 모는데 집중하던 필립이 이윽고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던 이안의 미간이, 문득 좁아졌다.
“…….”
그의 시선이 하천 건너편, 안개가 한층 더 자욱해진 숲으로 향했다.
그를 돌아본 필립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조금 음산하긴 하지요. 그래도 여길 지나치면서 마물이나 도적 떼를 마주치는 게, 관도를 따라가는 것보단 나을 겁니다. 말이 국경지대지, 여긴 사실상 무법지대라고 들었으니까요. 여기 뭐가 있건, 한 번쯤 쓴맛을 보고 나면 더 덤벼들지 않겠죠.”
“글쎄….”
이안이 읊조리는 사이, 하천을 건넌 마차가 숲으로 접어들었다.
고개를 갸웃하던 필립이 주위를 돌아보았다.
비로소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강도나 마물을 신경 쓰고 계신 게 아니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