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137
137화
퍼엉-!
날아들던 불덩이가 흐릿한 황금빛 막에 부딪혀 폭발했다. 필립이 검을 쥔 손을 앞으로 내뻗은 순간 만들어진 장막이었다.
“씁….”
뻗은 팔을 회수하는 필립의 입에서 혀 차는 소리가 번졌다. 검에 맺힌 빛이 옅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물에 깃든 신성을 거의 다 사용했단 의미였고, 그건 곧 머잖아 날아드는 불덩이를 방패로 막아야 하리란 뜻이었다.
검의 예리함이 떨어지리란 의미이기도 했다. 이 덩치 크고 역겹게 생겨 먹은 고블린들은 가죽도 두껍고 질겼다. 거기다 손톱과 이빨은 쇠만큼 단단하고 힘까지 셌다. 곧 비장의 한 수인 유물을 사용할 수 없게 될 테니, 이제부턴 한층 신중해야 했다.
방패를 눈 아래까지 치켜드는 필립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키악-”
그때 뒤쪽에서 짧은 숨소리가 번졌다. 필립은 확인하기도 전에 바닥부터 굴렀다. 머리 위로 팔이 스쳐 지나갔다. 팔은 인간의 그것처럼 긴데 다리는 짧은 놈이었다.
허공을 가른 놈의 시선이, 건너편의 말들에게로 향했다.
묶인 말들은 금방이라도 앞발질을 할 것처럼 들썩이고 있었다. 그게 놈의 시선을 잡아끈 것이리라.
그리고 덕분에 생긴 잠깐의 틈을, 필립은 놓치지 않았다.
푸욱-
일어섬과 동시에 달려든 필립이 놈의 등 어름에 검을 찔러 넣었다. 흐릿한 신성이 맺힌 검날이 두꺼운 가죽을 종이처럼 가르며 깊숙이 박혔다. 끼아악-! 비명을 지르는 놈의 뒤통수로 원형 방패의 모서리가 날아들었다. 콰직, 고블린이 앞으로 쓰러졌다.
검을 놓지 않은 채 놈의 위로 올라탄 필립이, 방패를 쥔 왼 주먹에 더 힘을 주며 마구 내리쳤다. 혼혈 고블린의 단단한 뒤통수가 흐물흐물해지는 건 몇 초면 충분했다.
“키에엑-!”
하지만 숨을 고를 틈도 없었다. 필립이 눈을 치켜뜬 채 고개를 들었다. 검 자루를 놓은 그가 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하지만 손바닥에서 흐릿한 빛의 파장이 한차례 번졌을 뿐, 장막은 피어오르지 않았다.
“이런-”
필립이 다급하게 검을 쥐었다. 방패를 치켜들며 다가올 충격에도 대비한 참이었다. 하지만 고블린이 그에게 닿는 것보다, 커다란 도끼날이 놈의 팔을 훑고 지나가는 게 더 빨랐다.
콰직!
고블린의 두 팔이 단숨에 잘려 나갔다. 샬롯은 내리쳤던 도끼를 힘으로 중간에서 멈추고는, 그대로 팔을 비틀며 앞으로 후려쳤다. 고블린의 얼굴 한복판에 기다란 도끼날이 박혔다. 촤악, 다리를 끌며 멈춰 선 그녀가 고블린이 매달린 도끼를 들어 땅에 내리찍었다. 고블린의 머리가 가로로 양단됐다.
샬롯은 체액을 머금어 반짝이는 얼굴로 필립을 돌아보았다.
“드디어 내 본래 역할을 한 번 하는군.”
일어서던 필립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아니… 혼자서도 충분히 해치울 수 있었습니다만.”
“그러시겠-”
샬롯이 피식한 그때, 일순간 주위가 대낮처럼 밝아졌다. 콰앙! 온몸을 울리는 폭음이 번졌다. 내달리던 고블린들 조차 일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필립은 샬롯 너머, 샛노랗게 치솟아 오른 불기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콰르르- 곧 잦아든 불기둥이 주황색 혀를 날름대는 불길로 변했다.
“허….”
탄식하는 필립의 시야 한구석에 붉은 궤적이 아른거렸다. 이름 그대로 붉은 기사가 된 메브였다. 그녀는 폭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멈춰 선 고블린들을 착실히 하나씩 베어 넘기고 있었다.
‘나리는 또 언제 맹세를-’
의문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저 멀리서 이안이 일어서고 있었다. 불길 덕분에 그의 표정까지 분간할 수 있었다. 엄청난 마법을 펼쳤음에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얼굴. 오히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몸을 돌리고 있었다.
그게 혼돈력을 생각 보다 많이 섞는 바람에 화력 조절에 실패해서라는 것까진, 필립이 알 도리가 없었다. 걸음을 옮긴 이안이 땅에 떨어져 있던 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아직도 타고 있는 불길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
필립의 눈이 다시 한 번 커졌다.
불길 한복판에 우두커니 선 실루엣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대검을 움켜쥔 숯덩어리. 족장이 분명했다. 말까지 할 정도면 보통 놈이 아니었을 텐데, 저렇게 만들어 버리다니.
‘그럼 나리께선 왜 다가가시지?’
불길 속으로 접어들던 이안이 우뚝 멈춘 건 그때였다. 인상을 구긴 것도 잠시, 그가 뒤로 몸을 날렸다. 새카맣게 탄 족장의 전신에 거미줄 같은 자주색 균열이 번진 건 거의 동시였다.
콰아아-
곧 족장의 전신에서 마력의 폭발이 터져 나왔다. 불길이 단숨에 꺼지고, 물러나던 이안도 거기 휩쓸려 더 멀리 튕겨나갔다.
“……!”
필립도 방패를 얼굴 앞까지 치켜 들며 몸을 낮췄다. 마력의 폭발이 비탈길을 넘어 그가 선 외곽까지 밀려들고 있었다.
“큭…!”
그는 곧 거대한 파도에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휩쓸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끔찍한 환영이 뇌리를 스치고, 공포심이 치솟았다. 다리가 풀려 주저앉던 필립은 곧 으직, 본능적으로 볼 안쪽을 씹었다. 아찔한 고통과 함께 이성이 되돌아왔다. 마물이나 타락자들이 부리는 사술에서 벗어나기 위해 찾아낸 나름의 방법이었다.
키히잉-!
귓가를 스치는 말들의 울부짖음. 퍼뜩 뒤를 돌아본 필립의 인상이 이내 구겨졌다.
말들이 거품을 물며 쓰러지고 있었다. 특히 도적 기사의 산채에서 가져온 두 놈은 눈까지 까뒤집고 널브러졌다. 북부 혈통으로 보이는 커다란 두 마리는 자리에 주저앉아 간신히 숨만 헐떡였다.
“젠장…!”
허둥지둥 달려간 필립이 주저 앉았다. 쓰러진 두 놈은 거품을 문 채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한 녀석의 몸에 오른손을 얹은 그가 정신을 집중했다. 손바닥에서 빛이 잠시 일렁였다. 그게 전부였다. 더는 작은 반짝임조차 번지지 않았다. 어쨌건 효과가 있었다. 한 마리의 경련이 멎고 있었다. 다른 한 마리는, 더는 손쓸 도리가 없었지만.
“그-오오오오-!”
두 갈래로 갈라진 포효가 대기를 울린 건 그 직후였다. 발작적으로 뒤를 돌아본 필립이 숨을 멈췄다.
일렁이는 자주색 마력 장막 한복판.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탈피한 족장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듯 울부짖고 있었다. 놈이라는 걸 알아본 건 마력 장막과 손에 든 대검 덕분이었다.
그 외의 모습은,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고블린일 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조차 없었다.
더 커진 덩치. 점액질을 머금고 반짝이는 붉은 피부. 등 양쪽을 뚫고 기다랗게 돋아난 날카로운 뼈 칼날. 목 주위를 볏처럼 뒤덮은 촉수들이 꿈틀댔다. 끝에는 하나같이 붉은 눈알이 박혀 있었다. 거기다 포효하는 놈의 이마 한복판에도, 눈꺼풀이 세로로 길게 찢어진 커다란 눈이 하나 더 벌어져 있었다.
그야말로 끔찍한 모습이었지만, 그간 봐온 변이된 타락자들 특유의 불안정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저 자체로 온전한 존재였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공포와 이질감을 동시에 자아내는.
“악마…?”
탄식하는 필립의 입가에 헛웃음이 번졌다. 아무리 검은 벽의 광기에 물들었다 한들, 고작 고블린이 굴레를 벗어난 존재로 거듭나다니.
“정신 차려라. 어딜 보는 거냐?”
샬롯의 그르렁대는 목소리가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눈을 깜빡인 필립이, 어느새 옆으로 다가선 샬롯을 돌아보았다.
“저긴 이안에게 맡겨라. 우리가 신경 쓸 건 저쪽이 아냐.”
자세를 낮춘 채 그녀가 덧붙였다. 그녀의 주황색 눈동자에는, 지금까지 보여주던 여유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이유를 깨달은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뿌득- 뿌드득-
족장의 포효가 잦아들면서, 지금까지 거기 묻혀 들리지 않던 섬뜩한 소리가 귀를 파고들기 시작한 것이다. 눈동자가 온통 자주색으로 물든 혼혈 고블린들. 그 사이에서 변이를 일으키는 몇몇 놈들의 몸에서 번지는 소리였다.
피부를 찢고 부풀어 오르는 근육과, 몸 곳곳에서 제멋대로 돋아나는 뼈 촉수들.
“…루 솔라 맙소사.”
“버티거라, 필립! 내가 곧 그리 가겠다!”
탄식하는 필립의 귀로 메브의 외침이 파고들었다. 도끼를 고쳐 쥔 샬롯의 속삭임이 뒤를 이었다.
“걱정 마라. 내가 지켜줄 테니.”
묘하게 비장한 말투였다. 속사정까진 알지 못했지만, 필립이 퍼뜩 정신을 차리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그가 검과 방패를 치켜들며 읊조렸다.
“서로를 지켜주는 거라니까요.”
고블린들이 괴성과 함께 달려들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
사방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이안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잦아드는 역장 너머의 족장을 노려보았다. 방금 새로 받은 퀘스트의 이름이 뇌리를 스쳤다. 혼종 초월자. 다시 태어난 놈의 모습을 보면 틀린 이름도 아니었다.
‘출세했네. 고블린 주제에.’
족장은 대검을 늘어뜨린 채 이안을 가만히 마주 응시하고 있었다. 눈빛에 자신감과 고양감, 여유가 느껴졌다.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된 힘에 취한 것처럼 보였다.
놈이 손에 쥔 대검을 이안 쪽으로 뻗었다. 송곳니가 빽빽하게 돋은 입이 달싹였다.
“새로운… 씨앗이… 되어라….”
그거, 아직도 포기 안 했냐?
한쪽 입꼬리만 말아 올린 이안이 중얼댔다.
“방금 태어난 주제에 무슨 자신감인지….”
검을 고쳐 쥐며, 그가 덧붙였다.
“필요하면 가져가 봐, 아가야.”
“……!”
그의 말을 이해한 듯, 족장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스쳤다. 미소는 곧 분노로 바뀌었다. 놈이 자주색 마력을 흩뿌리며 몸을 날렸다. 사그라들던 역장이 완전히 박살나고 콰과과, 놈의 대검이 자주색 궤적을 그리며 떨어졌다.
콰앙-!
땅이 움푹 파이면서 흙먼지가 치솟았다. 이미 옆으로 몸을 날린 이안은, 자세를 다잡고는 놈의 품으로 쇄도했다. 족장이 고개를 돌리는 것보다 목덜미의 촉수들이 그를 돌아보는 게 더 빨랐다. 끝에 박힌 눈알들이 자주색으로 번쩍였다. 동시에 감각이 어긋났다. 시야가 어지럽게 뒤엉키고, 머릿속으로 온갖 끔찍한 환영이 스쳤다.
‘호오.’
하지만 이안의 정신을 오염시킬 수는 없었다. 용의 포효마저 눈앞에서 견뎌낸 그였다. 공포 상태는커녕 평정심을 깨뜨리지도 못했다.
어긋났던 감각은 찰나의 감탄과 동시에 되돌아왔다. 북부 전사의 검이 놈의 목덜미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족장이 어깨를 치켜 들어 막았다.
콰직-!
검날은 붉은 비늘이 덮인 두꺼운 가죽을 찢으며 틀어박혔다.
홱, 비로소 놈이 눈을 치켜뜨며 고개를 돌렸다. 이안이 입꼬리만 슬쩍 말아 올렸다. 박힐 줄 몰랐겠지.
지금 북부 전사의 검에는 마력과 혼돈력이 뒤섞여 흐르고 있었다.
혼돈력은 공허의 존재들에게 신성력만큼이나 효과적이었다.
물론, 검신이 견디지 못하고 웅웅 대고 있었다. 정보창을 확인하진 않았지만 내구도가 엄청난 속도로 떨어지고 있을 터였다. 그것까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어… 떻게?”
물으면서도, 족장은 땅에 박혀 있던 대검을 그대로 비스듬하게 올려쳤다. 이안은 놈의 몸에 힘이 들어간 걸 느낀 순간, 이미 반대 방향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콰과과-
자주색 궤적이 허공을 갈랐다. 엄청난 위력이었다. 이안이라도 저 궤적에 휩쓸린다면 갈기갈기 찢어질 터였다.
‘휩쓸린다면 말이지….’
땅을 짚으며 멈춰 선 이안이 놈을 돌아보았다. 꽤 오래 싸웠건만, 그의 호흡에는 아직도 여유가 남아 있었다. 한계에 가까워지고서야 비로소, 체력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실감이 났다.
게다가 체력 수치는 오로지 생명력이나 활력에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었다. 전투에 돌입한 지 제법 시간이 지났건만, 아직도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고 유지되고 있었다. 관자놀이를 후벼 파는 듯한 통증도 훨씬 덜했다. 예민하게 돋아난 감각도 여전히 명징했다.
마력을 상당히 소진했음에도, 육체가 그 여파를 감당하고 있었다.
‘역시. 능력치에도 나름의 현실성이 부여된 거야.’
이안은 예전에 힘과 민첩성을 올렸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도 체력이 조금 더 좋아지고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었다.
모든 능력치가 다 조금씩 서로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분명해졌다. 물론 해당 능력치를 찍는 것만큼 효과적이진 않겠지만.
타탓-
이안은 아직 대검을 회수하지도 못한 족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놈의 세 번째 눈이 번뜩였다. 마력이 파장이 물결쳤다. 자주색 역장이 치솟았다.
‘변신 컷씬 용인줄 알았더니. 액티브 스킬이었어?’
이안은 그대로 역장을 후려쳤다. 생성되던 역장이 그대로 깨져나갔다. 족장이 대검을 다시 내려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안은 물러나는 대신 몸을 옆으로 기울였다. 쒸에엑-! 궤적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뒤이은 풍압과 거기 담긴 마력이 그의 귀와 볼을 할퀴었다. 피가 터져 나오는 것도 개의치 않고, 이안은 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콰지직-!
내뻗은 검이, 거의 끊어지기 직전이던 놈의 사슬 갑옷을 뚫고 옆구리 깊숙이 박혔다. 족장의 촉수들이 먼저 고통을 느낀 듯 꿈틀댔다.
이안의 눈동자가 잿빛으로 번뜩였다. 퍼엉, 몸속에서 일어난 소리 없는 폭발과 함께, 족장의 거대한 몸이 튕겨 날아갔다. 터져 나간 놈의 옆구리에서 조각난 내장과 체액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콰장창-!
바닥을 구른 족장이 이내 일어섰다. 거미줄 같은 붉은 섬유질과 꿈틀대는 촉수가 놈의 옆구리를 이미 뒤덮고 있었다.
“넌… 뭐지…?”
읊조리는 놈의 표정은 고통스럽다기보다는 어리둥절해 보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놈은 지금 종을 초월한 새로운 존재가 되었으니까. 본래도 얕봤을 인간에게 이런 식으로 당하리란 상상은 한 적도 없을 터였다.
이안이 보기에도 이놈이 품은 힘은 엄청났다. 게임처럼 3챕터에 만났다면 적잖이 고생했을 상대였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놈은 아직 새롭게 손에 넣은 힘과 육체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놈의 움직임과 힘을 사용하는 방식은, 수많은 타락자와 마물, 마족을 상대해온 이안의 입장에선 여러모로 어설펐다. 지금도 그랬다.
‘얼이나 탈 때냐? 어차피 그 정도론 안 죽으면서.’
주문을 완성한 이안이 손을 내뻗었다. 쩌저적, 벌집처럼 피어오른 얼음 감옥이 족장의 주위를 순식간에 뒤덮었다. 족장이 이를 갈며 어깨에 돋은 칼날 같은 촉수를 휘둘렀다. 얼음 감옥은 맥없이 부서져 나갔지만, 그러면서 동시에 다시 얼어붙어 그 자리를 채웠다.
그리고 그 몇 초는, 내뻗은 이안의 손아귀에 번개 돌풍이 모여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파치치칫-!
새파란 뇌전을 머금은 돌개바람이 얼음 감옥 위로 뻗어 나갔다.
“오- 오오오-!”
포효하며 족장이 몸을 일으켰다. 놈의 전신에서 타오른 마력이 이윽고 돌풍을 흩어 버렸다.
쉬학-!
하지만 그때 이안은 이미 놈의 코앞까지 달려들고 있었다.
이안이 검을 내뻗은 것과 족장의 세 번째 눈이 번쩍이며 역장을 피워 올린 건 거의 동시였다. 콰지직, 이안의 돌진이 역장을 깨뜨리며 멈췄다. 북부 전사의 검이 더는 견디지 못하고 함께 부서졌다. 하지만 자루를 놔 버리는 이안의 입가에는 오히려 옅은 조소가 스쳤다.
‘이런 게 특히 어설프다니까.’
너무 뻔하게 대응하잖아.
그가 준비하고 있던 왼손을 힘껏 떨쳤다. 그의 손을 떠난 운철 단검이, 족장의 세 번째 눈 한복판에 정확히 틀어박혔다. 꽈직, 하는 도자기 깨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눈이 붉게 물들었다.
“오오오오오-!”
족장이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바닥을 구르며 착지한 이안이, 다시 놈에게로 온 힘을 다해 솟구쳤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부러진 단죄의 검이 들려 있었다.
콰아아-
십자 막이를 타고 푸른 신성력이 불길처럼 솟구쳤다. 채찍처럼 휘어진 눈부신 푸른 궤적이, 족장의 목으로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