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140
140화
필립의 수색은 성과가 있었다.
그는 지하실에서 오염된 정수가 담긴 작은 상자를 들고나왔다. 전부 하급 정수이긴 했지만, 어쨌건 세 개나 됐다.
흑마법사가 만든 정수일 터였다.
‘어차피 쓸데없는 스킬 한가득이긴 한데, 나도 정수 제작 하나쯤 찍을 걸 그랬나.’
질색하는 표정의 필립에게서 정수를 받아든 이안은, 앞장서 고블린 부락을 빠져나왔다.
다행히도 살아남은 세 마리의 말은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린 상태였다. 필립은 반색하며 녀석들에게 물을 먹였다. 죽은 한 마리는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다리를 한쪽 떼어 갈까 하는데.”
샬롯이 단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큼직하게 떼라. 내일 아침까지 먹게.”
“염려 마라.”
샬롯이 곧바로 죽은 말의 뒷다리를 도려내기 시작했다. 아주 능숙하고 거침없는 손길이었다. 처음에는 불쌍하다는 듯 바라보던 필립도, 메브가 허벅지의 살점을 통째로 발골하자 침을 꼴깍 삼켰다.
아직 탈 수 있을 정도의 컨디션은 아니어서, 일행은 고삐를 잡고 걸어서 산기슭을 내려왔다.
마경은 닫혔지만 아직 안개가 자욱하고 하늘은 어두웠다.
“…말을 끌고 가길 잘했군요.”
마차를 발견한 필립이 중얼댔다.
짐승들이 헤집은 듯한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부서진 건 아니었지만, 짐가방이 죄다 파헤쳐져 물건들이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육포 냄새라도 맡은 모양입니다. 싹 다 가져갔네요.”
이안은 그게 정말 평범한 들짐승들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굳이 내뱉지 않았다. 죄다 녹초가 된 이 시점에 하기 좋은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술병까지 깨지진 않았습니다!”
이내 씩 웃은 필립이, 가방 안쪽에서 술병과 주석 잔을 꺼내 들었다. 모닥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울 준비를 하던 샬롯이 눈을 번뜩였다.
“잘됐군.”
“적당히들 마셔라. 교대로 불침번을 서야 하니까.”
모닥불 옆에 주저앉은 이안이 나른하게 읊조렸다. 눈만 감으면 바로 기절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레벨이 올랐으니, 한숨 자고 나면 제법 말끔해지리라.
“각자 한두 잔씩 마시면 끝일 겁니다.”
냉큼 달려온 필립이 불가에 앉았다.
그의 시선은 불 위에서 통째로 구워지고 있는 살덩어리에 고정된 채였다.
샬롯이 몸을 돌리며 덧붙였다.
“익으면 적당히 칼로 도려내서 드려라.”
“그런 건 걱정 마시고… 그런데, 어딜 가십니까?”
“개울을 찾으러.”
그녀가 이안 쪽을 턱짓했다.
“이안은 씻는 걸 중요하게 여기니까.”
이젠 알아서도 척척이군.
낮게 웃음 지은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멀리 가진 마라. 가는 길에 개울이 나오면, 그때 씻어도 돼.”
“알았다. 오늘은 나도 찝찝하군.”
내뱉은 샬롯이 훌쩍 몸을 날렸다.
빈말은 아닐 터였다. 그녀뿐 아니라 일행 모두가, 피와 흙먼지로 범벅이 되어 있었으니까.
“한 점씩 드십시오.”
곧 필립이 단검으로 썬 고기를 잔가지에 끼워 내밀었다. 이안은 말없이 우물댔고, 그건 투구를 벗은 메브도 마찬가지였다.
핏방울이 점점이 튄 그녀의 얼굴에도 짙은 피로가 묻어났다. 필립이 술을 따른 잔을 건넸다.
전부 도적 기사의 산채에서 챙겨 온 것들. 잔을 받은 메브가 단숨에 들이켰다.
얼씨구, 진짜 술꾼 다 됐네.
이안이 소리 없이 피식대며 술잔을 입에 가져가는 그때, 잔을 내려놓은 메브가 입을 열었다.
“아까 전투 중에 보았다. 네가 다른 검을 사용할 때부터 짐작하긴 했다만. 내가 준 검이 부러졌더구나.”
“…그렇소.”
“탓하려 한 말은 아니다. 네 것이니, 어떻게 다루건 네 몫이지. 다만 신성력이 심상치 않아 한 말이야. 잠시 보여 줄 수 있겠느냐?”
“안 될 것 없지.”
잔을 내려놓은 이안이 아공간에서 부러진 단죄의 검을 꺼냈다. 필립이 고기를 우물대며 탄식했다.
“나리께서 검을 깨뜨리는 게 한두 번이 아니긴 합니다만. 그 검까지 부러뜨리실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놀랍긴 하구나. 여신께서 축복하신 검이라, 어지간해선 부러질 일이 없을 텐데.”
“어쩌다 보니….”
입맛을 다신 이안이 머쓱하게 술잔을 들었다. 검을 건네받은 메브가 자루를 쥐고는 눈을 감았다.
곧 그녀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식이 번졌다.
“신성의 근원은 무사하구나. 아니, 오히려 내가 네게 주었을 때보다 더 선명하고 커졌군.”
더 커졌다고? 이안은 고기를 우물대며 메브를 바라보았다. 눈을 뜬 그녀가 덧붙였다.
“여신의 눈에 들만한 업적을 여럿 쌓은 모양이구나, 이안.”
“그런 식으로 신성의 근원이 커질 수도 있소?”
“그렇게 성물이 만들어지는 것이지.”
그래서 단죄의 일격이 더 강해진 건가. 하긴. 저건 타락용의 심장을 찌른 검이었다. 게다가 그때의 티르엔은, 검이 견디지 못할 정도의 신성을 내렸었다. 그중 일부가 근원에 흡수되어 자리 잡았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쉽구나. 부러지지 않았다면 머지않아 온전한 성물이 되었을 텐데.”
“검날을 다시 살릴 방법은 없겠소?”
“글쎄. 잘 모르겠구나. 검신을 그냥 이어 붙일 수는 없을 테고. 검을 녹여 다시 만든다 해도, 신성의 근원은 흩어져 버릴 것이다.”
이안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실 찰나, 그녀가 덧붙였다.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진 않을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손상된 성물을 온전히 복원한 전례가 있으니. 엄정한 여신을 섬기는 사제를 만나게 된다면, 반드시 물어보도록 하마.”
“…그럼, 부탁드리겠소.”
방법이 있을 수도 있단 말이지. 가능성이 생긴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무적이었다.
어쨌거나 단죄의 검은 신성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는 명검이었다. 지금까지 저것보다 좋은 검을 손에 넣은 적도 없었다.
복원해 온전한 성물로 만들 수 있다면, 앞으로도 그럴지도 몰랐다.
‘남은 내구도를 보면, 단죄의 일격은 앞으로 많이 써야 대여섯 번 정도였지….’
아예 깨 먹지 않으려면 아껴 써야겠군. 고개를 끄덕인 이안은, 아까 얻은 퀘스트 보상들까지 차근하게 점검했다.
샬롯이 돌아온 건 그 직후였다. 숲으로 들어갔던 그녀는, 일행이 가야 할 계곡 길 쪽에서 돌아왔다.
“이 능선을 넘어가면 개울이 있다.”
“그래? 그럼 내일 가는 길에 씻으면 되겠군.”
미소 지은 이안이, 그대로 땅에 몸을 뉘었다. 좀 쌀쌀했지만 이 몰골로 모포를 덮고 싶진 않았다.
곧 메브도 몸을 뉘었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기절하듯 잠들었다.
다음 날 떠날 채비를 마쳤을 때쯤엔, 어느새 자욱하던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말 한 마리가 줄어든 일행이 산을 넘었다.
잿빛 숲과 완만하고 칙칙한 굽이진 언덕길이 그들을 맞이했다.
어느덧 벨 론데였다.
***
“그러니까, 지하에 궁전이 있었다고요? 그 안에는 거인 왕국의 마지막 여왕이 잠들어 있었고요?”
“그래. 이안이 그 여왕을 죽였다. 이 도끼가 거기서 가져온 물건이지.”
“루 솔라 맙소사…. 얼핏 보기에도 보통 도끼가 아니다 싶긴 했습니다만…. 유물이었군요.”
마부석에 샬롯과 나란히 앉은 필립이 탄성을 흘렸다. 옆에는 말에 탄 메브가 나란히 걸으며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거인 왕국을 진정한 의미로 멸망시킨 건 이안인 셈이겠군.”
메브가 덧붙인 말에, 필립에게 전투 도끼를 보여주던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줄 알았었지. 그때는.”
도끼날을 뚫어져라 훑던 필립이 홱 고개를 들었다.
“그때는…? 그리고 또 뭔가 있단 말씀이십니까?”
“글쎄. 지금 할 얘긴 아닌 것 같군.”
“아니… 이걸 여기서 끊으신다고요? 아직 지하 궁전을 빠져나가지도 못했잖습니까.”
“거래는 거래다. 징징대지 마.”
“또 무슨 징징 씩이나…. 잠시만 기다리십쇼.”
혀를 차던 필립이 뒤를 돌아보았다.
“거의 다 와 갑니다, 나리.”
“그래.”
의자에 기대앉아 고블린 둥지에서 가져온 일지를 읽고 있던 이안이 대답했다. 그를 잠시 묘한 눈으로 바라 본 필립이 덧붙였다.
“그건 재미 있으십니까?”
“전혀.”
빈말이 아니었다. 다른 타락자들이 그렇듯 정신 나간 이야기만 잔뜩 적혀 있었으니까.
이걸 쓴 놈은 사역마, 즉 마물을 길들여 부리는 데에 관심이 많던 놈이었다.
그중에서도 고블린을 연구했는데, 가장 손쉽게 복종시키고 부려 먹을 수 있는 놈들이어서였다.
흑마법사는 그 이유가 고블린들의 영혼이 약하기 때문이라 여겼다. 그러니 육체만 쓸만하게 개량하면 최고의 사역마가 만들어지리라 결론 내렸다.
그래서 온갖 마물, 짐승과 고블린을 교배시켰다. 말 그대로 광기 가득한 연구. 그 광기의 종착지는 당연하게도, 인간이었다.
피난민 처녀를 하나 납치해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더 크고 말귀도 잘 알아듣는 혼종 고블린이 탄생한 것이다.
인간 여인의 몸은 고블린을 출산하는 걸 감당할 수 없으며, 혼종들은 번식의 욕구가 유독 강하니 이걸 억제할 방법만 찾으면 된다는 게, 그가 방금 읽은 부분이었다.
‘이 뒤는 의미 없겠네.’
혀를 찬 이안은 몇 장 남지 않은 일지를 덮었다. 어쩌다 마경이 열린 건지, 그 자주색 공허를 뭐라고 부르는지 따위의 정보는 단 한 줄도 적혀 있지 않았다.
아마 관심도 없었으리라.
필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거의 다 읽으셨군요.”
“너희들이 하는 얘길 듣는 것보단 낫거든.”
“그럴 리가요. 전 요즘 샬롯이 입을 열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너야 그렇겠지.”
콧방귀 뀌는 이안을 바라보며, 필립이 넌지시 덧붙였다.
“얘기가 나와서 말입니다만. 거인 여왕은 어떤 존재였습니까? 그걸 직접 본 건 나리뿐이라면서요.”
“다 지나간 걸….”
읊조리면서도, 이안은 짧게 입맛을 다셨다. 메브도 조용히 눈을 반짝이며 그를 돌아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상태로 헛된 야망에 눈먼 존재였다. 악마와의 힘겨루기에서 이기기만 하면, 거인 왕국을 재건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어.”
“호오. 하지만, 듣자 하니 거인 왕국의 망령들이 실존했다면서요. 그러니 아예 허황된 야망은 아니었지 않겠습니까?”
“언데드 왕국도 왕국이라고 할 수 있다면야…. 그만 물어라. 네 옆에 앉은 녀석이나 닦달해.”
나까지 귀찮게 하지 말고.
쯧, 혀를 찬 이안이 턱짓했다.
“정수는?”
“아, 예.”
필립이 옆에 내려놓았던 정수를 들어 내밀었다.
장갑을 벗은 맨손. 중지에 루 솔라의 문양이 새겨진 낡고 굵은 금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필립의 설명에 의하면, 교단의 어떤 성자가 쓰던 성물이라고 했다. 어떻게 손에 넣게 됐는지 따위의 별로 궁금하지 않은 사연은, 물론 제대로 귀담아듣지 않았다.
중요한 건, 어쨌든 필립이 루 솔라의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 뿐이었다.
“오염이 조금 정화되긴 했습니다만. 완전히 정화하려면 몇 번은 더 같은 작업을 반복해야 할 겁니다.”
물론 루 솔라의 사도만큼 신성력을 많이 사용할 수는 없었다.
반지는 일종의 충전식 성물이었다. 해가 떠 있는 동안 내부의 근원에 신성이 쌓이는 구조였고, 먹구름이 자욱한 이곳에선 더 더디게 쌓였다. 그렇게 모은 신성력을 쬔 결과가, 지금 그가 내민 불그스름한 정수였다.
처음의 자줏빛에 비하면 색이 많이 옅어졌지만, 아직도 그냥 쓸 수준은 아니었다.
“수고했다. 며칠 뒤에 다시 부탁하도록 하지.”
물론 불만 따위는 없었다. 자체적으로 오염된 마력을 정화할 방법이 생긴 걸로도 감지덕지였다.
성상이나 성물이 비치된 사원은 드물었고, 있다 해도 돈독이 오른 사제와 입씨름을 해야 할 테니까.
다각- 다각-
어느새 도시가 가까워졌다.
메브와 필립이 볼일이 있다던, 스톤빌이었다.
조금 큰 마을 정도였지만, 변방에선 이 정도면 충분히 도시라 부를 수 있었다. 성벽 대신 높다란 돌담이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 언덕 위엔 그보다 더 높은 담벼락에 둘러싸인 커다란 장원이 있었다.
“그래도 여긴 사람 사는 동네 같군.”
출입문을 지키던 병사들은, 일행을 한차례 훑어볼 뿐 앞을 가로막지는 않았다.
전신 판금 갑옷을 걸친 기사가 마차를 지키듯 말에 타고 있으니, 귀족이 방문했으리라 여긴 모양이었다. 어쩌면 애초에 출입 검문이 까다롭지 않은 건지도 몰랐다.
이안이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중얼대자, 필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전선과는 제법 거리가 있으니까요. 어수선한 시기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제일 안정된 지역 중 하나일 겁니다.”
“우리는 사원에 들를 것이다. 같이 가겠느냐?”
마구간에 들어서면서 메브가 물었다. 마차에서 내린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동행이 필요한 일이오?”
“그렇진 않다. 싸울 일도 없을 거고.”
“그럼 나랑 샬롯은 물자를 보충하고 숙소를 잡아 놓고 있겠소.”
“그래. 그럼 식사도 먼저 하거라. 시간이 조금 걸릴지도 몰라.”
“그런 당연한 말씀을.”
피식한 이안이 몸을 돌렸다.
***
이안과 샬롯은 거리를 돌며 보존 식량과 여벌의 옷, 그리고 몇 자루의 검을 구입했다.
물자가 아주 풍족하진 않은지, 모든 물건이 상태에 비해 비쌌다.
물론 이안에겐 의미 없는 부분이었다. 지금 그의 주머니는 마르지 않는 샘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쇠의 질이 좋아 보이지 않더군. 몇 번 쓰면 부러질 것 같던데.”
여관 겸 주점으로 들어서며 샬롯이 말했다. 아직 대낮이라, 주점에는 손님이 그리 많지 않았다. 칼잡이로 보이는 몇몇 무뢰배들만이, 예고 없이 등장한 수인을 호기심과 경계심 섞인 눈으로 곁눈질할 따름이었다.
“별수 없지. 그래서 여러 자루 산 거다.”
구석에 자리를 잡으며 이안이 말했다. 졸린 얼굴의 여급이 다가왔다.
“뭘 드릴까요?”
“스튜. 고기. 빵. 술. 알아서 그나마 괜찮은 걸로. 그리고 방도 두 개 줘. 하루 묵고 갈 거니까. 아, 목욕도 할 거야.”
테이블 위에 동전을 차곡차곡 쌓으며 말한 이안이, 여급의 손에도 동전을 하나 쥐여 주며 덧붙였다.
“잠시 후에 일행이 둘 더 올 텐데. 그때도 같은 걸로 부탁해.”
“네. 알아서 잘 챙겨 드릴게요.”
자연스러운 손길로 돈을 챙긴 여급이 몸을 돌렸다.
이안은 느슨하게 기대앉았다.
오늘은 간만에 목욕다운 목욕을 하고, 그나마 따듯한 잠자리를 가지게 될 터였다. 위생 관념이 전혀 없어 보이는 촌구석 여관이란 사실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곧 앞에 음식이 깔렸다. 흔히들 영원한 수프라고 부르는, 매일 다른 재료를 넣고 끓이는 꿀꿀이 죽. 딱딱한 빵과 소시지. 그리고 맥주.
“너무 익숙한 맛이라,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군.”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소시지를 입에 문 이안이 중얼댔다. 마찬가지로 우물대던 샬롯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넌 어디 출신이지, 이안?”
“그런 걸 묻기엔 함께한 시간이 너무 길지 않냐.”
“그야 그렇다만….”
“뭐, 일단은 아겔 란 외곽의 늪지대라고 하지.”
“…거긴 죄인이나 병자들이 유배 가는 곳 아닌가? 최악의 유배지 중 하나로 알고 있는데.”
샬롯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이안은 다시 열리는 주점의 문을 돌아보며 어깨를 까딱였다.
“그럼 죄인 출신인 모양이지.”
“……?”
샬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와중에, 이안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자를 눈에 담았다. 귀 끝이 뾰족한, 남자 요정이었다. 잿빛에 가까운 은발을 한데 묶고, 늪처럼 칙칙한 녹색 눈에 창백한 피부를 가진 자였다. 사슬 갑옷 위에 가죽 띠를 교차해 두르고, 허리에는 얇고 긴 검을 찬 채였다. 꽤 신경질적인 인상이었는데, 얇게 만 궐련을 입에 물고 있었다.
뒤따라 들어오는 일당들과 낄낄댈 때마다 입에서 연기가 번졌다.
풀 타는 냄새. 게임에서도 본 적 있는 광경이었다. 요정들은 자신들의 고향에서 재배한 약초를 말려서 저런 식으로 피워 대곤 했다.
‘냄새는 딱 금연초인데. 맛도 비슷하려나…?’
이안이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어쨌든 중요한 건, 좀처럼 보기 힘든 요정을 마주쳤단 사실이었다.
‘무작정 말을 걸면 시비 거는 줄 알 것 같은데.’
언젠가 요정을 만나게 되면 묻고 싶은 게 있었으니까.
자리에 앉으며 웃음 짓던 요정의 시선이, 이안이 앉은 테이블 쪽으로 향한 건 그 직후였다. 샬롯의 뒤통수를 응시하는 그의 눈매가 이윽고 설핏 가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