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144
144화
“고대수…? 생명수를 말하는 거냐?”
“늪지 요정들의 유산. 내가 듣기론, 그것들이 너희 조상이라던데.”
“생명수를 말하는 게 맞군…. 늪지 요정이라니, 대체 언제 적 얘기를….”
“아는 게 있긴 하단 거네.”
“글쎄.”
내뱉은 핀드렐이, 이안의 눈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날 풀어 주겠다고 여신께 맹세하면, 대답해 주지.”
“흠….”
작게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읊조렸다.
“아무래도, 귀 한쪽으론 부족했나 보군.”
“뭐라고…? 내, 내 입을 열려면 최소한-”
말하던 핀드렐이 본능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샬롯이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균형을 잃고 옆으로 쓰러진 그가, 흙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헐떡댔다. 잘린 귀에서 흘러나온 피가 요정의 얼굴을 적셨다.
궐련을 끼운 검지와 중지를 슬쩍 내밀어 샬롯을 저지한 이안이,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착각하나 본데. 그런 건 네가 유일한 선택지일 때나 효과가 있는 거다. 너 말고도 요정은 많아. 난 그렇게 급하지도 않고. 하지만 너는… 글쎄.”
“…….”
핀드렐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이안이 궐련을 다시 입에 물었다. 샬롯이 기다렸다는 듯 핀드렐의 목을 쥐고는 일으켜 세웠다.
그녀가 단검을 뻗을 찰나, 핀드렐이 켁켁대며 내뱉었다.
“안다! 잘 알고 있다. 난 생명수를 직접 본 적도 있어!”
“그래…?”
이안이 미소 지었다. 샬롯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고는 놈의 목을 놓았다. 무릎 꿇은 핀드렐이 숨을 고르는 가운데, 이안의 싸늘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잘 안다는 건 별로 믿기 힘든데.”
“……! 아니, 정말로-”
“그 판단은 내가 해. 아는 대로 읊어라.”
“네, 네 말대로 고대 늪지 요정은 우리 조상이 맞다. 인간에게 밀려난 일부는 밀림에 저주를 풀고 끝끝내 그 안에 남았지만, 대부분은 내해를 건너 남부로 이주했지. 거기 새로운 생명수를 심었고, 그걸 중심으로 다시 일어섰지. 그리고 알다시피, 그 위대한 생명수는 전쟁의 시대에 불탔다. 지금은 그 자손만이 몇 그루 남아 있지. 하지만 마력의 황혼기가-”
“역사는 그 정도면 충분해.”
정말 아는 대로 막 읊는군.
말을 자른 이안이 연기를 한 모금 빨고는 덧붙였다.
“네 말대로 좀 아는 것 같으니, 다른 걸 묻지. 생명수가 몇 그루 남아 있다면, 너희 종족의 귀족들은 왜 은밀하게 그 씨앗을 찾고 있지? 자체적으로 수급하면 될 텐데.”
샬롯이 슬쩍 이안을 돌아보았다. 왜 이런 걸 묻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 핀드렐도 마찬가지였다.
슬쩍 미간을 좁힌 그가 내뱉었다.
“이해할 수 없군. 인간인 네가 왜 생명수에 대해 묻고, 씨앗을 찾는 원로들이 있단 건 또 어떻게 알지? 말하는 걸 보니, 의뢰를 받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알긴. 게임에서 겪어 봤으니까 그렇지.
아공간 가장 구석에 처박혀 있는 고대수의 씨앗을 떠올리며, 이안이 턱을 까딱였다.
“그건 네가 알 바 아니고. 대답이나 해라.”
“자체적으로 씨앗을 구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안이 다시 손짓할 기세이자, 핀드렐이 재빨리 내뱉었다. 이안이 계속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핀드렐이 안도하듯 말을 이었다.
“생명수들은 아직 어려. 꽃을 피울 수도, 열매를 맺을 수도 없는 상태지. 게다가 더는 자라지도 않고 있다. 그러니 방법이 없지.”
“자라지 않는다고?”
“그래. 생명수는 물과 햇빛뿐 아니라 마력을 먹고 자란다. 하지만 알다시피, 지금은 마력의 황혼기지. 생명수가 말라 죽지 않는 것에 감사해야 할 상황이란 얘기야. 그러니 원로 늙은이들은 더 애가 닳으시겠지.”
핀드렐의 시선이 기억을 헤집듯 허공을 훑었다.
“예전에 얼핏 들은 적이 있다. 아겔 란 외곽의 그 저주받은 밀림으로 수색대를 보냈다고 말이야. 거기라면 다 자란 생명수가 있으리라 여겼겠지. 그 이후의 소식은 듣지 못했지만.”
“살아 돌아오지도 못했겠군….”
늪지대 외곽의 밀림을 떠올리며, 이안이 읊조렸다. 아겔 란 한복판의 숲속에 한 그루가 남아 있다는 건 끝내 알아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긴. 그러니 그 씨앗이 이안의 손에 들어왔겠지.
그걸 타락시켰던 버차드 후작도, 그게 요정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닌 나무인지는 몰랐겠고. 알았다 해도 달라질 건 없었으리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핀드렐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가 봤으니까 알지.
코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한 이안이 말을 이었다.
“생명수를 자라게 할 방법은 없나 보군. 나라면 마석이라도 잔뜩 파묻어 봤을 텐데.”
“뿌리로 흡수하는 게 아닐 거다. 그게 가능하다 해도, 마석이 끝도 없이 필요할 테고.”
“그렇단 말이지…. 그럼 결국, 씨앗을 심으려고 찾는 건 아니란 얘기군.”
이어진 말에 핀드렐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아주 잠깐에 불과했지만, 이안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반 정도 남은 궐련을 다시 한번 깊이 빤 이안이 미소 지었다.
“새로 심어 봤자, 제대로 자라지 못할 테니까. 안 그래?”
“글쎄…. 그것까진 나도 잘 모르겠군. 늙은이들은 의뭉스러워서, 좀처럼 나 같은 젊은이들에게 지식을 공유하지 않-”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둘의 대화가 슬슬 지겹다는 눈빛이던 샬롯이, 기다렸다는 듯 핀드렐의 입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이안의 마음이 바뀌기라도 할까, 곧바로 단검을 휘둘렀다.
“읍… 으으읍…!”
멀쩡하던 반대쪽 귀 끝도 사선으로 잘려 나갔다.
핀드렐의 눈에 핏발이 섰다. 어찌나 온몸에 힘을 줬는지, 어느새 출혈이 멈췄던 반대쪽 귀에서도 다시 피가 흘렀다.
흘러내린 피가 요정의 목 양쪽을 적시는 가운데, 이안이 무감정하게 그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정말이지, 요정이란 것들은 틈만 나면 사람을 속이려 드는군. 말을 하는 데는 혀만 있으면 충분하단 걸 알아 둬라, 핀드렐.”
“읍… 으읍……!”
날이 어두워지면서 늪처럼 칙칙한 녹색이 된 핀드렐의 눈에 두려움이 서렸다. 샬롯이 양 볼을 쥔 손아귀에 힘을 풀었다. 기다렸다는 듯 핀드렐이 내뱉었다.
“나도 정확히는 몰라…! 심장이 멎을 각오가 되었다면, 씨앗이 우리를 고위 요정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 준댔어. 그게 내가 아는 전부야. 씨앗을 어떤 식으로 쓰는 건진, 늙은이들이 절대 말해 주지 않는다고…!”
“부족해. 더 떠올려라. 그 말은 뭐지? 너흰 이미 스스로를 고위 요정이라 부르지 않나?”
“그건 그 빌어먹을 마족들과 우리를 구별하기 위해 붙인 말이다. 본래 고위 요정은 극소수의 원로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어. 지금은 그냥 원로란 말로 대신하지만, 어쨌든. 그들은 생명수의 축복을 받아 더 오래 살고, 많은 양의 마력을 부리지. 생명수에 축적된 마력을 사용할 수도 있다던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건진 몰라. 그건 원로회의 후계자들에게만 전승되는 비밀이라고…. 내가 이걸 아는 것만 해도 대단한 거란 말이다….”
“흐음….”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핀드렐의 말에는 거짓이 없었다. 눈빛, 말투, 작은 몸짓과 표정까지 전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난 요정들의 영약을 그냥 먹어버렸던 거군.’
게임일 때는 알지 못했던 정보들이 머릿속에 빠르게 정리됐다.
물론 완벽한 건 아니었다. 정확한 용법만큼은 여전히 빈 자리로 남아 있었다.
그저 모호한 문구뿐.
‘퍼즐이나 문답이 어려운 게임은 아니었어. 오히려 아주 직관적이었지. 그럼, 심장이 멎게 해야 된단 건가? 그리고 나선?’
“왜 자꾸 이런 걸 묻는 거지?”
핀드렐이 덧붙인 건 그때였다. 초조함이 묻어나는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던 그가, 이내 덧붙였다.
“혹시, 생명수의 씨앗을 가지고 있는 건가? 그런 거야? 거래를 하려면 모든 걸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하니 정보를 수집 중인 거고? 아니면 혹시, 우연히 다른 요정에게서 빼앗기라도 한 건가?”
“…….”
이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우묵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핀드렐을 마주 볼 따름이었다.
말실수를 했다고 느꼈는지, 핀드렐이 황급히 입술을 말아 올렸다.
“사, 사연 따윈 상관없지. 정말 네게 씨앗이 있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다. 나는 원로회의 일원이자 제국의 귀족인 아이나스가의 삼남이다. 비록 스스로 업적을 이루고자 자유 기사를 자청하고 있으나, 본래는 제국 어디에서도 합당한 대우를 받을 신분이지.”
“가문의 골칫덩이가 아니라?”
이안이 툭 내뱉었다. 핀드렐이 짧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내가 가문으로 돌아간다면 모두가 환영할 것이다. 생명수의 씨앗을 가진 이가 동행한다면, 더 큰 환대를 받겠지. 그리고 할아버님께선 어떤 대가라도 기꺼이 치르실 거다. 물론 내 이름과 명예를 걸고 거래를 중개할 거고.”
말을 이어 가는 동안 핀드렐의 목소리에 점점 더 생기가 돌았다. 이안은 가만히 그의 잘린 귀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핀드렐의 미소가 짙어졌다.
“이건 신경 쓰지 마라. 나의 과오로 인연의 시작이 좋지 않았으니,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른 것뿐이야. 과거는 과거로 남겨 두고-”
“들으면 들을수록 더 확실히 알겠군.”
비로소 이안이 입을 열었다. 그가 얼마 남지 않은 궐련을 한 모금 빨고는 연기를 내뿜었다.
“너희 요정들은 내게 씨앗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죽여서 빼앗으려 할 거야. 그게 아니라도 정당한 값을 치르려 하진 않겠지. 어떻게든 속이려 들 거야. 이런 순간에도 거짓말을 늘어놓는 너처럼.”
“거, 거짓말이 아니다, 정말….”
“네가 기사들을 끌고 온 걸 알고 있다, 핀드렐.”
“……!”
순간 핀드렐의 숨이 멈췄다. 이안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우리가 패배해서 사로잡혔다면, 넌 우릴 살려 줬을 거냐?”
“…….”
핀드렐이 순간 입을 뻐끔댔다. 가뜩이나 창백하던 그의 낯빛은, 이제 거의 납처럼 하얗게 되어 있었다.
궐련의 연기를 깊이 들이마신 이안이, 짧아진 궐련을 툭 땅에 떨구며 덧붙였다.
“네가 준 정보는 고맙다. 그 보답으로, 고통스럽지 않게 보내 주지.”
“자, 잘못 생각한 거다. 내가 죽으면 가문이 알게 될 거야. 그럼 넌 요정들에게 쫓기게 될 거다. 요정은 최고의 추적자들이야. 집요하고, 절대 포기하지 않지.”
“쫓기는 건 익숙해. 그리고 날 따라온 놈들은 다 죽었지.”
“귀쟁이들이 알아서 굴러들어 올 거라니. 기대되는군.”
샬롯까지 덧붙이자, 핀드렐이 말문이 막힌 듯 멍해졌다. 그사이, 샬롯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내게 기회를 주면 안 되겠나? 내 손으로 끝내고 싶은데.”
“너는 귀 두 개로 만족해라. 이 녀석, 퀘스트가 있거든.”
“그 말은 아직도 못 알아듣겠다만…. 그래, 네가 그렇다면야.”
덤덤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둘을 멍하니 바라보던 핀드렐의 얼굴이, 이윽고 일그러졌다.
“이 짐승만도 못한 것들…! 어차피 죽일 거면서, 이런 식으로 수모를 줬단 말이냐? 너, 이름 모를 인간아. 내 죽어서도 너를 저주할 것이다. 그리고 네년, 그래… 네년은 오래도록 살아남길 기원하마.”
핀드렐이 공포와 증오가 뒤섞인 눈으로 샬롯을 노려보았다.
“너희 역겨운 수인들이 모조리 뒈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꼭 살아서 그 모든 걸 눈에 담아라!”
“…….”
샬롯의 미소가 순간 굳어졌다. 핀드렐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너희 짐승들이 남몰래 그 버림받은 역겨운 신을 섬기는 걸, 우리가 모를 것 같으냐? 아니. 이미 다 안다! 그저 놔둘 뿐이지! 너희 짐승들이 충분히 많이 그 괴물을 섬기게 될 때까지!”
“뭐… 라고…?”
샬롯이 싸늘하게 되물었다. 핀드렐이 소리 내서 웃었다.
“네년 따윈 알아도 막지 못할 것이다. 이미 늦었으니까…! 해가 바뀔 때쯤엔, 심판관을 대동한 일족이 너희의 그 냄새 나는 땅을 정화하러 가게 될 거다. 아쉽군. 본래는 나도 변방에서 공적을 쌓은 후에, 그 사냥에 합류할 생각이었거늘.”
“…거짓말하지 마라. 역겨운 귀쟁아. 우리는 황제 폐하께서 인정하신-”
“폐하께도 이미 너희에 대한 보고가 들어가고 있다.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입은 주제에, 버려진 신이나 섬기며 반란을 꿈꾸고 있다고 말이야. 하하… 표정을 보아하니 전혀 몰랐나 보군. 설마, 고향의 동족들이 무슨 짓거릴 하는지도 몰랐던 건-”
샬롯이 핀드렐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손톱이 튀어나와 핀드렐의 볼을 깊이 파고들었다. 붉은 피가 줄지어 흘러내렸다.
“입 닥쳐라. 산채로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고 싶지 않으면.”
핀드렐은 번들대는 눈으로 샬롯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곧 그의 얼굴 위로 어둑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단검을 뽑아 든 이안이었다.
“고통스럽게 죽고 싶단 말을, 길고 어렵게 하는군.”
핀드렐의 눈동자는, 그의 검은 눈을 마주한 순간 빛을 잃었다.
그건 찰나였다. 곧 그의 눈에 푸른 광택이 아른거렸다. 발악하듯 마력을 끌어올린 것이다.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마력 역류를 사용하거나 단검을 내지르는 대신, 입을 열었다.
“물러나라 샬롯. 다섯 걸음 이상.”
핀드렐의 얼굴을 던지듯 놓은 샬롯이 으르렁대며 물러났다. 옆으로 쓰러지는 와중에도, 핀드렐의 눈동자가 푸르게 번뜩였다.
푸확-
그를 중심으로 터져 나온 냉기 파장이 주위를 얼렸다. 왼팔로 얼굴 앞을 가린 이안의 전신에도 새하얀 서리가 내려앉았다.
콰직.
“……!”
이안이 아무렇지도 않게 팔을 움직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그는 손으로 대충 몸에 내려앉은 서리를 털어 냈다. 주문을 정면에서 맞고도 멀쩡하게 견뎌낼 줄은 몰랐던 듯, 핀드렐이 눈을 치켜떴다.
이안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마력 탈진도 느끼지 못할 만큼의 마력으론, 나한테 아무런 타격도 입힐 수 없다. 핀드렐. 네 비장의 한 수란 건, 이렇게나 보잘것없는 거야.”
말을 마친 이안이 단검을 내뻗고 죽 그었다. 핀드렐의 목에 생겨난 긴 붉은 선이 곧 붉게 흘러내렸다.
요정의 피도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붉은 색이었다.
“너는… 후회하게….”
피거품을 물며 읊조린 말을 마지막으로, 핀드렐의 눈이 풀어졌다.
이안의 눈앞으로 퀘스트 완료 창이 떠올랐다. 가문의 골칫덩이.
아까 전, 핀드렐과 맞부딪친 순간 생겼던 퀘스트였다. 그를 살려 가문까지 데리고 가거나 죽이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완수 조건이 존재하는 분기형 퀘스트였다.
이안은 죽이는 쪽을 선택한 셈이었다. 이게 어떤 결과로 이어질진 알 수 없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현실이 된 지금도, 요정은 도저히 못 믿을 족속들이었으니까. 이 녀석이 아닌 다른 요정과 얽혔더라도,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을 터였다.
“오히려… 확실해졌지.”
이안은 놈의 팔뚝에 단검 날을 닦으며 중얼댔다. 고대수의 씨앗을 요정 귀족들과 거래하는 건 쉽지 않으리란 확신이 생긴 것이다.
아마 게임에서도, 퀘스트가 아름답게 끝나지는 않았을 터였다.
“심장이 멎을 각오라….”
중얼댄 이안이 일어섰다. 핀드렐의 시체를 가만히 노려보는 샬롯을 돌아본 그가, 이내 덧붙였다.
“챙길 게 없나 한 번 더 뒤져 봐라. 시체는 그냥 버려 두고.”
“…알았다. 그러지.”
샬롯이 다가왔다. 일어선 이안이 몸을 돌렸다. 핀드렐의 시신을 발로 툭 차 눕히는 그녀를 뒤로한 채, 그는 언덕길을 내려갔다.
“다 끝나셨습니까, 나리?”
마부석에 앉은 필립이 속삭이듯 물었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서, 그의 모습은 완전히 어둠에 싸여 있었다.
이안은 어깨만 으쓱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다가오는 그를 눈에 담던 필립이 덧붙였다.
“그 요정은… 결국 죽이셨군요.”
“그래.”
심드렁하게 대답한 이안이, 마차 옆에 선 말에 올라탔다. 그의 시선이 마차 안쪽으로 돌아갔다. 필립이 속삭였다.
“조금 전에 잠드셨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은 의자에 깊이 몸을 파묻은 메브를 바라보았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깊이 잠든 채였다.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진작 지쳐 쓰러졌을 전투를 치렀으니까.
곧 소리 없이 달려 내려온 샬롯도 남은 말에 탔다. 이안과 눈이 마주친 그녀가 손에 든 것을 가볍게 던졌다.
“……?”
받아 든 이안이 손을 내려다보았다. 은으로 만든 꽃 모양의 브로치였다. 손바닥 반만 한 크기. 무슨 꽃인지는 몰라도, 형태가 꽤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었다.
“그놈 가문의 문장인 것 같다.”
샬롯이 나지막이 덧붙였다.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장식품일 뿐이지만, 어쨌건 팔아먹으면 돈은 좀 될 터였다. 아이나스인가 하는 가문을 식별할 방법도 생겼고.
브로치를 아공간에 넣은 그가 샬롯을 다시 바라보았다.
“체력에는 여유가 좀 있나?”
“충분히. 어차피 오늘은 잠이 오지 않을 것 같고.”
“잘 됐군.”
내뱉은 이안이 필립을 돌아보았다.
“출발해. 시간을 많이 까먹었으니, 새벽까지 이동한다.”
입 모양으로만 네, 하고 대답한 필립이 말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마차가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안과 샬롯은 그 뒤를 따랐다. 가라앉은 눈으로 마차를 응시하던 샬롯이, 문득 입을 열었다.
“너는 거짓말을 가려낼 줄 알지, 이안.”
“다는 아니고, 어느 정도는.”
이안이 선선히 내뱉었다.
샬롯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럼 하나만 묻겠다.”
“말해.”
“그 녀석이 마지막에 한 말들. 거짓말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