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149
149화
“경이… 말씀이시오?”
파엘의 눈이 순간 커졌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귀하의 손님이 될 수도 있는 거잖소.”
“그야 물론 그렇소만….”
혀로 입술을 적신 파엘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경께는 정말 큰 도움을 받았소. 하지만 그렇다 해도 가격이 만만치 않은 것들이라서 말이오…. 물론 귀하께는 최소한의 이문만 남길 것이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가격이 만만치는 않을 것인데….”
“손님이 되겠다고 했지, 헐값에 달라고 한 적은 없소만.”
내뱉은 이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하긴. 그와 다른 일행의 면면만 봐선, 돈 깨나 있으리란 생각은 하기 어려울 터였다.
이내 어깨를 으쓱인 그가 덧붙였다.
“팔 생각이 없다면 마시오. 보아하니 그쪽 일행들도 물건은 비슷할 것 같은데. 그쪽은 생각이 다르-”
“보여 드리겠소.”
비로소 아차 싶은 얼굴이 된 파엘이 황급히 말을 잘랐다. 이안의 시선을 받은 그가 미소 지었다.
“아무렴. 내가 또 생각이 짧았소. 경이 빈말을 하실 분이 아닌데 말이오.”
“내 주머니 사정을 꿰뚫어 본 거 아니셨소? 에둘러 거절하시기에 그런 줄 알았더니.”
“이놈의 입이 방정이오. 사과드리겠소. 그, 그래도 이왕이면 안면이 있는 나와 거래하시는 편이 좋지 않으시겠소…?”
파엘이 손바닥이라도 마주 비빌 듯 미소 지었다. 보르가 쯧쯧 혀를 차는 가운데, 그가 덧붙였다.
“무례를 사과하는 의미로, 정말 최소한의 최소한만 이문을 남기겠소. 아예 원가로 드리고 싶지만 딸린 입이 많아서 말이오. 하지만 찬란한 여신께 맹세컨대, 다른 상인들에게선 절대 같은 가격에 구하지 못하실 거요. 품목이 그리 다르지도 않을 테고 말이오.”
진작 이럴 것이지.
피식댄 이안이 잔을 들었다.
“그럼 그렇게 합시다.”
“잘 생각하셨소. 혹, 지금 바로 보기를 원하시오?”
“내일 정오에 봅시다. 오늘은 쉬고 싶어서 말이오.”
“사실 나도 그러시길 바랐소. 물품이 꽤 많아서 말이오. 원하시는 걸 말씀해 주신다면, 추려 놓겠소.”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들로만 엄선해 주시오. 마도구 같은 건, 전부 보여 주시고.”
“허어… 알겠소. 준비하리다.”
얼떨떨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인 파엘이, 잔에 남은 술을 전부 털어 넣고는 일어섰다.
“여러분의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았소. 본래는 간단히 안부만 묻고 가려던 것이, 대화가 길어졌군. 좋은 정보에 대한 보답 겸 거래를 약속한 기념으로 한 잔씩 더 돌리겠소.”
이런 게 암흑시대식 영업인가.
생각하며,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잘 마시겠소.”
“그럼 내일 정오에 봅시다. 돌아가서 일행에게도 이안 경께 들은 이야기를 공유해야겠소.”
일행과 차례로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까딱인 파엘이 몸을 돌렸다. 이안에게 눈인사를 한 보르도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재미있는 자들이군요. 제국의 상인들은 죄다 거만하기 짝이 없는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필립이 주점을 가로지르며 멀어지는 둘을 돌아보며 말했다.
샬롯이 낮게 코웃음 쳤다.
“아직은 아니리라 확신할 수 없지. 권력을 휘두를 만큼의 돈이 생기고부터 본성이 나오는 게, 상인이란 족속들이니까.”
“그렇긴 하겠습니다만….”
그때 여급이 술잔이 담긴 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벌써 석 잔째였다. 샬롯과 필립의 얼굴에도 조금씩 취기가 돌고 있었다.
테이블에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일행 모두 말없이 술만 홀짝였다.
저마다 다른 생각에 잠긴 눈빛이었다. 누군가는 한때 전부였던 나라를. 누군가는 아직도 끝내 듣지 못한 이야기를. 누군가는 오래전 떠나온 고향을.
그리고 누군가는, 이런 미지근한 에일이 아니라 머리가 깨질 듯 차가운 라거와, 이제는 쉽사리 느끼지 못하게 된 취기를.
“그 상인에게 거래를 제안한 건 뜻밖이구나.”
적막을 깨뜨린 건 메브였다.
빈 잔을 옆에 밀어놓고 새 술잔을 집어 들면서, 그녀가 덧붙였다.
“듣자 하니 하나 같이 값이 꽤 나가는 물건들일 것 같던데.”
이안이 짧게 웃음 지었다.
오늘 여럿이 내 주머니를 걱정해 주는군.
“전에 말하지 않았소? 주머니에 제법 여유가 있다고.”
“듣긴 했다만… 그게 제국 상인에게 가장 좋은 물건을 보여달라 할 정도인 줄은 몰랐지.”
“내 것만 사려는 게 아니란 걸 아시면, 더 놀라시겠군.”
“…설마, 저희도요?”
“그래. 내일 저자가 물건을 내 오면 필요한 걸 전부 골라라, 필립. 메브, 당신도 마찬가지요.”
“…….”
필립은 물론 메브의 입도 순간 설핏 벌어졌다. 그녀보다 먼저 정신을 수습한 필립이 내뱉었다.
“무, 물론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저와 나리 모두, 이미 귀한 선물을 받았는데요. 여기서 더 받기엔 염치가 너무 없습니다.”
“옳은 말이다. 신경 써 주어 고맙다, 이안. 하지만 네가 준 검만으로도 충분해.”
메브도 재빨리 덧붙였다. 짧게 웃음 지은 이안이 잔을 들며 말했다.
“둘 다 착각하시는군. 선심 쓰겠단 얘기가 아니오. 필요하니까 하라는 거지.”
필립이 고개를 갸웃했다. 술을 한 모금 마신 이안이 덧붙였다.
“아까 들은 이야기대로면, 루 사드에 들어서고 나면 더는 제대로 된 보급을 할 수 없을 거요.”
“…아.”
“어쩌면 제대로 쉴 수도 없을지도 모르지. 그보다 최악일 수도 있고. 다들 제 몫을 다하려면, 그리고 무사히 일을 끝내려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준비를 해도 과하지 않소.”
이안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놀람을 가라앉히던 메브의 눈매가, 이윽고 가늘어졌다.
“루 사드의 도시들이 문을 걸어 잠근 게, 전쟁 때문이 아니리란 말이구나.”
“그렇소. 전에는 말하지 않고 넘어갔소만…. 국경의 방비를 철저히 한 것 역시, 전쟁이 아니라 나 때문일지도 모르오.”
“나리… 때문이라고요?”
필립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그래. 흡혈 여제는 내가 찾아올 걸 알고 있으니까. 아마, 내가 한 일들도 전부 알고 있을 테고.”
“그 모든 위업을 말입니까?”
이안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대신 말한 건 샬롯이었다.
“이안은 용을 죽이는 과정에서 큰 부상을 입었었다. 생사를 알 수 없을 정도였지. 그리고 그 빌어먹을 년들은, 이안이 회복 중이란 게 알려지고 나서야 우릴 습격했지. 이안이 멀쩡했다면 테사를 그런 식으로 빼앗길 일은 없었을 거다. …어쨌든, 이안에 대한 걸 전부 보고했겠지.”
“허… 그런 일이…. 하지만 지금 나리로 봐선, 그렇게 위중하셨다는 걸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만.”
메브가 새삼 눈을 치켜뜨며 이안을 살피는 가운데, 필립이 읊조렸다.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말로 기적이지. 그러니 어쩌면 그것들도, 이안이 이렇게나 멀쩡하리란 생각은 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여제는 아주 신중한 성격 같았어.”
술잔을 놓은 이안이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아마 최악의 상황도 대비하고 있을 거다.”
“정말 너 때문에 국경과 성문을 닫은 거라면….”
비로소 나지막이 입을 연 메브가, 가라앉은 눈으로 이안을 마주 보았다.
“루 사드 전체가 이미 그것들의 손아귀에 있으리란 뜻이기도 하겠구나.”
“그렇소. 아마도.”
이안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 사드의 영주는 죄다 뱀파이어거나 놈들의 하수인이었다.
게임에선 테사이아가 새로운 흡혈 여제가 되면서, 전 여왕의 통제에서 벗어난 그들이 말 그대로 미쳐 날뛰고 있었다. 억눌려 있던 광기가 완전히 해방된 것이다.
어쩌면 테사이아가 그렇게 명령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때의 그녀는, 지금과는 여러모로 다른 모습이었으니까.
어쨌건, 지금 그들이 어떤 상태일지는 전혀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흡혈 여제가 무슨 생각일지도, 마찬가지로 추측의 영역이었다.
게임과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상 전혀 다른 상황인 것이다.
“물론 흡혈 여제도, 내가 제국 국경을 통해 루 사드로 들어가리란 것까진 모를 가능성이 높소. 그러니 북쪽에만 병력을 집결시켜 둔 거겠지. 그러니 일단은….”
필립을 일별한 이안이 덧붙였다.
“국경을 넘은 뒤로는 어떤 도시도 들르지 않고 글루미르를 향해 이동할 것이오. 운이 좋다면 아무런 방해 없이 도착하겠지. 물론 내 생각엔 중간에 들킬 확률이 더 높소. 그게 언제일지, 그 후에 어떻게 될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그러니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할 것이오.”
“…그래. 네 계획이 그렇다면, 그렇게 해야겠지. 사양하지 않으마. 필요해 보이는 물건이 있다면, 염치 불구하고 전부 챙기겠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 메브가, 이안을 마주 보았다.
“그게 네게도 더 도움이 될 것 같으니까.”
이안은 대답 대신 술잔을 들었다. 새삼 복수심에 불타는 눈이 된 샬롯이 조용히 술을 들이켜는 가운데, 필립의 장탄식이 이어졌다.
“기가 막힐 노릇이군요. 변방에서 가장 살기 좋고 부유한 나라로 알려진 루 사드가, 뱀파이어들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니.”
“그것들에겐 왕국이 일종의 농장일 테니까. 농장을 잘 관리하는 건 농부의 사명이지.”
“그리고 지금은 수확의 시기가 된 거고요…. 루 솔라여… 대체 이 무슨 끔찍한 진실이란 말입니까….”
자신의 오른손을 어루만지며 읊조린 필립이 술잔을 쥐었다.
“언제나 겉으로 드러난 게 전부는 아닌 법이지. 아겔 란만 하더라도, 타락자의 손에 들어갈 뻔하지 않았더냐.”
메브가 놀랍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술을 벌컥 들이켠 필립이 토로했다.
“제 얘기가 바로 그겁니다. 그동안 우리가 베어 넘긴 타락자가 몇입니까? 그나마 평화로운 줄 알았던 루 사드는 아예 마족의 땅이었다니. 이래서야, 변방 전체가 타락자들에게 놀아나고 있었던 거나 다를 바 없지 않습니까. 이젠 변방뿐 아니라 제국도 이런 꼴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뭐,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아예 틀린 말 같진 않은데.”
덤덤하게 내뱉은 이안이, 조금은 풀어진 필립의 눈을 바라보았다.
“네가 망상이라 여기는 다른 생각들도, 어쩌면 틀리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전혀 기쁘지 않군요. 그저 모든 게 제 망상일 뿐이면 좋겠습니다. 제기랄, 루 솔라여….”
중얼댄 필립이, 이윽고 애써 입술을 말아 올렸다.
“제가 분위기를 망쳤군요. 건설적인 얘기를 하겠습니다. 루 사드의 마족 놈들은, 어떻게 나올까요?”
“글쎄….”
“정말 놈들의 소굴이 글루미르에 있다면….”
이안이 대충 어깨를 으쓱이는 가운데, 샬롯이 날카롭게 가라앉은 눈으로 말을 이었다.
“둘 중 하나겠지. 우리가 거기에 발을 들이기 전에 죽이려 하거나. 거기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거나.”
“혹은 둘 다거나.”
태연하게 첨언한 이안이, 술잔의 가장자리를 어루만지며 덧붙였다.
“어쩌면 그놈들이 전부가 아닐지도 모르고.”
“그건 또 무슨….”
“뱀파이어들을 돕는 자들이 있댔지. 그들을 말하는 것이겠구나.”
필립이 미간을 좁히는 사이, 메브가 내뱉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일 뿐이오. 모든 건 닥쳐야 확실해지겠지.”
“앞서 이야기해야 할 것들이 많다더니… 그래, 정말 많겠구나. 혹시, 네가 대행 중이라는 사명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냐?”
“글쎄….”
술잔을 든 이안이 말했다.
“그 얘긴 나중에 합시다. 오늘은 이미 충분히 많은 이야기가 오갔잖소. 생각할 거리가 많은 건, 나뿐만이 아닐 것 같은데.”
“…그래. 많지. 지나칠 정도로.”
메브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이번에는 필립도 채근하지 않았다.
지루할 틈은 없어서 좋겠군.
생각한 이안이, 술잔에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켜고는 말했다.
“도시에 제대로 들른 게 오랜만이긴 하지만. 다들 적당히 드시오. 내일 오후에는 떠나는 게 좋을 것 같으니까. 혹시 교단이나 군단에서 날 보겠답시고 찾아오면, 여러모로 귀찮아질 수도 있소.”
메브와 샬롯이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필립이 술잔을 내려놓는 그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벌써 올라가시게요? 밤은 이제 시작입니다만.”
“난 목욕을 시작하는 게 더 급하거든.”
스톤빌에서부터 참았으니까.
생각하며 일어선 이안이, 여급에게 눈짓을 보내고는 덧붙였다.
“다들 알아서들 쉬고, 내일 정오 전에 여기서 다시 봅시다.”
***
이안이 눈을 뜬 건 날이 밝고 한참이 지나서였다. 간밤의 목욕 덕분인지 몸이 아주 개운했다.
방은 아주 좁고 침대도 낡았지만, 어쨌건 길바닥에서 노숙하는 것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회색 마법을 살짝 응용하면 침대에 숨어 사는 이나 벼룩도 단박에 태워 버릴 수 있었기 때문에, 잠을 설칠 요소도 없었다.
물론 마력 조절을 잘못하면 뒤처리가 곤란해지는 사고가 발생할 위험이 있긴 했지만.
여러 일을 겪으며 마력 통제력이 좋아진 요즘은, 그런 불상사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후….”
채비를 끝낸 이안은, 아공간에서 봉인함을 꺼내 들고는 방을 나섰다.
“여기다, 이안.”
이미 식당에 내려와 있던 샬롯이 팔을 들었다. 그녀는 다소 퀭한 눈으로 스튜를 퍼먹고 있었다. 목욕을 하긴 했는지 털과 갈기에는 평소보다 윤기가 흘렀지만.
이안이 그녀의 건너편에 앉으며 물었다.
“둘은?”
“곧 내려올 거다. 나랑 비슷하게 일어났으니.”
메브와 필립이 연달아 모습을 드러낸 건, 여급이 이안의 앞에 스튜와 빵을 놓은 직후였다.
메브는 갑옷 대신 적당히 도톰한 누비옷과 바지만 걸친 상태였다. 허리에 요정의 세검을 차고 있긴 했지만, 지금 모습만으로는 아무도 전신 판금 갑옷을 걸친 그 육중한 기사를 떠올리지 못할 터였다.
이안이 빵을 우물대며 말했다.
“머리를 자르셨군.”
“어젯밤에. 필립은 내가 긴 머리가 더 어울린다고 한다만. 알다시피, 너무 길면 불편해서.”
그의 곁에 앉은 메브가 말했다.
목덜미 아래까지 단검으로 대충 잘라낸 듯한 붉은 머리칼을 잠시 바라본 이안이, 이내 어깨를 까딱였다.
“내가 볼 땐 지금도 어울리는데.”
“그래…?”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다만. 그저 제가 잘라 드리는 것만이라도 허락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샬롯의 옆에 앉은 필립이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중얼댔다. 메브가 바라보자 그가 덧붙였다.
“모시는 나리의 머리가 그렇게 삐뚤빼뚤하면, 종자인 제가 욕을 먹지 않겠습니까.”
“아무도 내 머리칼엔 관심이 없을 거다, 필립. 투구를 쓴 후에는 더더욱.”
“평생 투구만 쓰고 사실 건 아니니까요….”
말해 무엇하겠냐는 듯, 필립이 짧게 입맛을 다셨다.
곧 그들 앞에도 스튜가 놓였다.
필립은 앓는 소리를 내며 접시째로 스튜를 마셨다.
“여독을 풀랬더니. 오히려 죽게 생겼군.”
이안이 핀잔했다. 필립이 머쓱하게 볼을 긁적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오랜만에 마시기도 했고, 생각할 게 많다 보니 자제를 못 했습니다.”
거참 핑계도 좋군.
이안이 콧방귀를 뀌는 사이, 스튜 건더기를 우물대던 메브가 말했다.
“마차에 탈 때 내가 마부석에 앉으마. 이동하는 동안 좀 더 쉬어 두거라.”
“아닙니다, 나리. 그럴 순 없지요.”
필립이 고개를 젓는 그때, 식당 겸 주점의 문이 열렸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말쑥한 모습인 파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행을 발견한 그가 넉살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시간을 맞춰 주셨군. 편히들 쉬셨소?”
“보다시피. 그쪽은, 이야기가 잘 되셨소?”
이안이 스튜에 적신 빵을 우물대며 말했다. 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잘 됐소. 마경이라면 치를 떠는 자들이 몇 있어서 말이오. 정확하진 않지만, 일정이 일주일에서 많게는 열흘까지도 단축될 거요. 대로를 벗어나는 일도 없겠고. 물론 중간에 마음이 바뀌는 자가 나올 수도 있지만….”
이안을 바라본 그가 어깨를 까딱였다.
“일정이 크게 틀어질 경우엔 알아서 무리를 나누기로 했소. 보르, 그 친구는 하루만 늦어져도 갈라서자고 하더군.”
“전에도 말했지만, 감이 좋은 자요.”
파엘이 웃음 지었다.
“둘이 비슷한 말을 하는군. 그 친구는, 경의 말은 무조건 들어야 할 것 같다고 하던데.”
혹시 그자도 특성이 육감인가.
생각하며, 이안은 식사를 이어 갔다.
파엘은 군말 않고 기다리면서도, 때때로 한 번씩 이안을 바라보았다. 표정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눈빛에 언뜻언뜻 불안이 스쳤다.
‘아, 그래. 내가 정말 돈이 있는지 걱정되는 거군.’
이안은 내심 피식댔다. 어제는 분위기에 넘어가 약속을 잡았지만, 막상 지나고 보니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럴 만한 부분이긴 했다. 티를 내지 않고 있는 것만 해도, 나름대로 예의를 차리는 셈이었다.
“어디로 가면 되겠소?”
메브가 포크를 놓자, 비로소 이안이 물었다. 빙긋 미소 지은 파엘이 일어섰다.
“모시겠소. 따라오시오.”
그가 곧바로 몸을 돌렸다.
이안은 샬롯에게 눈짓하며 일어섰다. 봉인함을 양손에 든 샬롯이 그의 곁에 붙었다.
“이걸 아직도 쓰시는군요.”
배를 어루만지며 따라온 필립이 중얼댔다. 어깨를 으쓱이며 주점을 나선 이안은, 파엘을 따라 골목 끝으로 걸음을 옮겼다.
상단의 경호병들이 막다른 골목 앞을 지키고 있었다.
맨 앞에 선 보르가 파엘과 일행을 훑어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곧 골목의 경호병들이 좌우로 물러났다. 천에 덮인 두 대의 짐 마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와….”
필립이 탄성을 흘렸다. 온갖 종류의 병장기들이 종류별로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멈춰 선 파엘이 말을 이었다.
“말씀드렸다시피, 가장 품질이 좋은 것들만 추려서 준비했소. 이것들보다 다소 떨어지는 것들도 마차 두 대 분이 더 있소만, 그건 안 보셔도 될 거요.”
말을 마친 그의 시선이 넌지시 샬롯 쪽으로 향했다.
약속을 지켰으니, 이쪽도 최소한의 보증은 해달란 것이리라.
싱긋 미소 지은 이안이 샬롯을 돌아보았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봉인함을 열었다.
안에 감춰져 있던 황금빛이 번졌다. 수북한 금화와 그 사이의 보석들을 눈에 담은 필립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허…….”
그가 뒤늦게 탄식하며 이안을 돌아보았다. 메브도 마찬가지였다.
이안은 헛웃음을 삼켰다.
재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이 세계에서 느끼게 될 줄이야.
물론 이 금화와 보석들은 전 재산이 아니었다. 강철 금고의 열쇠는 아공간 구석에 따로 들어가 있었다.
어쨌건, 파엘의 얼굴에도 미소가 가득 번졌다. 비로소 안심한 듯 미소가 한결 자연스러워졌다.
이안과 눈이 마주친 그가,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이안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얼마나 최선일지, 한번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