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15
015화
“알아보는군. 의뢰비다.”
이안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아니, 뭐, 이런….”
미구엘이 숨을 헐떡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일반 금화만 해도 거금인데.
제국 금화는 그 두 배에 달하는 가치가 있었으니까.
금 함량도 높고 위조도 불가능한, 사실상 기축 통화였기 때문이다.
미구엘이 금화를 뚫어질 듯 응시하자, 이안이 덧붙였다.
“왜. 금화가 마음에 안 드나?”
“아, 아니오!”
미구엘이 황급히 주먹을 쥐었다.
이안이 피식 웃자, 머쓱하게 시선을 돌린 그가 덧붙였다.
“그, 길잡이 고용비치곤 너무 큰 돈이어서 말이오.”
“목숨값이니까. 그 정돈 되어야지.”
태연한 대답이었지만, 미구엘은 도리어 섬찟한 표정이 되었다.
“그만큼 위험하다는 뜻이오, 아니면 목숨 걸고 시간 내에 도착해야 한단 뜻이오?”
“글쎄….”
이안이 말꼬리를 흐렸다.
미구엘이 침을 꼴깍 삼키는 사이.
“자신 없으면 도로 가져오든가. 지금 돌려준다면 받아 주지.”
이안이 혀를 차며 내뱉었다.
갈등하는 표정으로, 미구엘이 슬쩍 손아귀를 펼쳤다.
시선을 사로잡는 금빛. 그의 뇌리로 긍정적인 속삭임이 이어졌다.
그래. 고작해야 닷새잖아? 용병도 기사도 엄청난 실력자고. 숲까지만 데려가면 되는 쉬운 일인데, 무려 제국 금화라니. 이런 기회는 놓치는 게 등신이지. 안 그래?
“…하겠소. 닷새 안에 반드시 모셔다드리리다.”
미구엘은 결국 금화를 품속 깊숙이 찔러넣었다.
이안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바람직한 선택이군.”
애초부터 미구엘이 의뢰를 받아들이리라 확신하던 그였다.
그의 말대로, 길잡이 고용비치고는 지나치게 큰돈이었으니까.
심지어 동료도 다 잃고, 의뢰도 알선비만 받아야 하는 신세라면야.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리라.
물론, 이안이 이런 좋은 제안을 던진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짬 처리할 놈이 필요했는데, 잘 됐군.’
그는 애초부터 무덤 숲까지만 메브와 함께할 생각이었다.
그때를 대비한 보험 역할로, 미구엘이 딱 적당해 보였다.
돈 냄새만 살짝 흘려도 지금처럼 유혹을 뿌리치지 못할 테니, 떠넘기는 게 어렵지도 않으리라.
게다가 미신 때문일지언정, 목격자 없는 의뢰를 수행하고 죽은 동료를 묻어 줄 정도의 책임감까지 갖춘 녀석이니 금상첨화였다.
‘괜히 입씨름하다 피 보느니, 그게 모두가 윈윈 하는 길이지.’
생각하며 미소 짓던 이안은, 문득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필립이 묘하게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은 뭐지?”
“…아닙니다. 돈을 시원하게 쓰시는 모습에 감탄이 나와서요.”
“호오….”
이 새끼가 이젠 비꼴 줄도 아네.
감탄하며 미간을 좁힌 것도 잠시.
“그래. 좋은 지적이다. 필립.”
다시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이안이 메브를 돌아보았다.
“경. 내게 금화 하나 빚지신 거요.”
이어진 말에 필립의 눈이 커졌다.
“우리 나리께서 빚을 지시다니요?”
“내가 경을 대신해서 낸 거니까. 그게 아니면 내가 왜 저놈을 고용해야 하지?”
“맙소사, 루 솔라여….”
이마를 감싸 쥔 필립이 탄식하듯 말을 이었다.
“정말이지 나리는, 제가 본 중에서 가장 대단한-.”
“그만. 옳은 말이다, 필립.”
메브가 말을 잘랐다. 이안을 돌아본 그녀가 담담하게 덧붙였다.
“이안. 빚은 의뢰가 끝난 후에 갚도록 하지.”
이안은 눈을 질끈 감는 필립을 보며 피식대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메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미구엘에게로 돌아갔다.
“정식으로 고용된 만큼, 네 역할을 충실히 해 주리라 믿겠다. 미구엘.”
“…예. 물론입죠, 나리.”
그녀의 엄격한 목소리에 미구엘이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와중에도 낯이 살짝 굳어진 것은, 이제 정말 빼도 박도 못하게 됐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눈동자를 굴리던 그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 런데 말입니다. 무덤 숲에는 왜 가시려는 겁니까? 거긴 저주받은 숲이라, 들어가면 다시 나올 수 없다는 소문이 있는데요.”
“바로 그래서 가는 거다.”
이안이 육포를 베어 물며 말했다.
미구엘이 떨떠름하게 읊조렸다.
“그 안에 뭐가 있을 줄 알고….”
“흑마법사가 있길 바라고 있지.”
미구엘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흑마법사? 하지만 여긴 마법사도 거의 볼 일 없는 동네잖소. 그런 대단한 악당이 숨어 있다는 얘긴 한 번도 들은 적 없소만….”
“소문이 나지 않은 거지, 있어.”
“그걸 어떻게 확신하시오?”
새끼, 더럽게 의심 많네.
혀를 찬 이안이 그를 돌아보았다.
“내가 놈과 만났었으니까.”
“직접… 만나셨다고?”
“내가 놈의 권속을 하나 죽였거든. 놈이 현신한 분신체도 죽여 버렸고. 덕분에 원한을 제대로 샀지.”
비로소 미구엘의 안색이 창백해지는 가운데, 이안이 덧붙였다.
“목 없는 기수도 놈의 하수인이었다. 넌 재수 없게 휘말린 거고.”
“…그럼 앞으로도 이런 습격이 있을 거란 말이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우리를 얼마나 빨리 무덤 숲까지 안내하느냐에 달렸지.”
“허….”
마침내 미구엘의 입이 벌어졌다.
“왕국을 혼란에 빠뜨리려는 자다.”
굳어진 그를 바라보며, 메브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놈을 찾아내 단죄하는 것이, 우리 여정의 목적이지.”
“정확히는 왕성에 도착해야 할 시일 전까지 말이죠. 그래서 당신의 역할이 중요한 겁니다, 미구엘.”
필립이 말을 맺었다.
일행을 차례로 돌아보는 미구엘의 동공이 지진 난 듯 떨렸다.
실감한 것까진 아니었지만.
적어도 엄청나게 위험하고 중요한 일에 발을 들였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깨달았으리라.
“이런 시부럴…. 된통 걸렸군.”
이윽고 그가 탄식했다.
입맛이 떨어졌는지, 어느새 꼬챙이까지 땅에 내려놓은 채였다.
이안이 피식 웃음 지었다.
“넌 길잡이로 고용된 거다. 싸움은 이쪽에 맡기고, 넌 그냥 네 역할에 충실할 생각만 하면 돼.”
빈 꼬챙이를 불길에 던져넣은 그가 땅에 누우며 덧붙였다.
“그럼 아무 문제도 없을 테니까.”
“…….”
태연한 말투였지만, 미구엘은 순간 얼어붙었다.
제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문제가 생기리란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해도, 여기까지 온 이상 달라질 건 없었다.
저들에게서 도망칠 수도, 계약을 취소할 수 있을 리도 없었으니까.
“…알았소.”
읊조리듯 대답한 미구엘은, 다시 꼬챙이를 집어 들었다.
입맛은 여전히 없었지만, 체력을 충분히 보충해 둬야 했다.
그래야 저들을 무덤 숲까지 한시라도 빨리 인도할 수 있을 테니까.
그의 생각엔, 그게 자신이 이 의뢰를 무사히 끝내고 살아남을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하여 다음 날부터, 사냥꾼 미구엘은 길잡이로 다시 태어났다.
“가시죠. 앞장서 모시겠습니다!”
그것도 아주 충실한.
***
구름 낀 해 질 녘 하늘 아래.
일련의 무리가 마을 어귀로 접어들었다.
평소였다면 힐끔 보고 말았을 경작지의 주민들은, 드물게도 그들의 모습을 한참 눈에 담았다.
몇몇은 아예 하던 일을 멈추고 그들을 관찰할 정도였다.
무리 중앙의 기사 때문이었다.
번쩍이는 전신 갑옷은, 좀처럼 보기 힘든 진귀한 구경거리였다.
“어, 저자는…?”
덕분에 몇몇은 선두에 선 수염 난 사내를 알아보았다.
얼굴의 흉터를 씰룩대며 부하들을 끌고 다니던 용병, 미구엘.
술과 고기를 축내며 촌장에게 호언장담하던 바로 그였다.
하지만 지금의 미구엘은, 주민들이 기억하던 그 험상궂은 용병의 모습과는 아주 거리가 멀었다.
“해도 지기 전에 도착했군요. 예상보다 한 시간 이상 빠른 겁니다.”
싱글거리며 떠들어 대는 길잡이일 뿐.
이안은 그의 자랑을 한 귀로 흘리며 시선을 돌렸다.
듬성듬성한 목책을 두른 마을의 전경이 그의 시야를 채웠다.
“이곳도 예상보다 크군.”
성벽에 둘러싸인 도시까진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아겔 란에서는 충분히 큰 마을이었다.
“계곡을 넘지 않으면 근처에 다른 마을이 없어서 그렇소. 요새의 병사들도 종종 들르는 곳이고.”
미구엘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늑대 무리에 습격당할 것 같지는 않은데. 설마, 이런 마을에도 상주 병력이 없는 것이냐?”
메브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쏟아지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꼿꼿한 자세를 유지한 채였다.
그녀가 탄 말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안장 뒤에 달린 안돌프의 머리통이 달랑거렸다.
“요새 주둔군이 들르긴 합니다만. 사실상 쉬러 오는 겁니다.”
미구엘이 공손하면서도 상세하게 대답을 이어갔다.
“그리고 촌장 아들놈은 아까 우리가 지나온 길목에서 죽었습죠. 칼 차고 몰려다니면서 건달 흉내나 내던 놈이었다더군요.”
그는 일행 모두의, 심지어 본인의 예상보다도 훌륭한 길잡이였다.
앞장서서 가장 빠른 길로 일행을 인도했고, 지역의 소문이나 상황을 거의 꿰뚫고 있기까지 했다.
간밤을 평화롭게 보낸 건, 반 정도는 그 덕분이었던 셈이다.
물론 이안도 어느 정도는 그렇듯, 오래 살아남은 용병이 응당 갖춰야 할 소양이긴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미구엘은 이 분야에 특출난 면모가 있었다.
“어쨌든, 덕분에 오늘 밤은 편히 자겠군요. 식사다운 식사도 하고, 목욕도 할 수 있겠고요.”
필립의 목소리에도 화색이 돌았다.
미구엘이 맞장구쳤다.
“이곳 여관은 음식이 괜찮소. 맥주도 맛있고. 밀 농사를 지어서 그런가, 목젖을 치는 맛이 일품이지.”
“호오…. 기대되는군요. 맥주라.”
필립의 눈썹이 씰룩댔다.
하여간, 잿밥에만 관심 있는 것들.
“의뢰부터 제대로 마무리 지어라.”
“알겠소. 걱정하지 마시오.”
이안의 핀잔에 미구엘이 언제 실실댔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이틀 만에 이안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익숙해진 그였다.
마을로 들어선 후, 이안이 필립을 돌아보았다.
“저놈이 돈을 제대로 나누는지 꼼꼼히 확인해라. 문제가 생기면 네게 책임을 물을 거다.”
“저만 믿으십시오, 나리.”
필립이 냉큼 대답했다.
더럽게 못 미더운데.
이안이 내심 혀를 차는 사이.
“저, 나리, 그런데 말입니다.”
필립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웅얼댔다.
“똑바로 말해. 뜸 들이지 말고.”
“아까 들어보니, 여긴 제대로 된 마구간도 있다더군요. 말을 두 마리나 잃었으니, 급한 대로 노마라도 구할까 합니다만.”
“그런 의견을 왜 나한테 묻지?”
“그게… 송구스럽습니다만.”
머뭇거리던 필립이 이내 고개를 푹 떨구며 내뱉었다.
“…말값을 좀 빌려주십시오.”
“……!”
눈썹을 말아 올린 것도 잠시.
이안의 입가에 실소가 맺혔다.
“내가 돈을 시원하게 쓰는 용병이라 다행이군.”
빈정대듯 덧붙인 말에 필립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 그 일은 다시 한번…!”
“농담이니 사과는 넣어 둬.”
이안이 주머니에서 꺼낸 금화 몇 개를 내밀었다.
“잔돈은 고스란히 가져와라. 내 말에는 푹신한 안장까지 얹고.”
“물론이죠, 나리! 가장 좋은 안장으로 고르겠습니다!”
냉큼 받아든 필립이 외쳤다.
돈의 힘은 여기서도 위대하군.
이안이 피식대는 사이 메브가 덧붙였다.
“또 신세를 지는군. 이안.”
“별말씀을.”
이안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따지고 보면 말을 두 마리나 잃은 건 전부 그 때문이었지만, 아무도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너는 따로 할 일이 있는 건가?”
메브가 이어 물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 솔라의 사원이 있다더군. 거기부터 들를 생각이오.”
“사원? 그럼 여관에 들렀다가 함께 가겠느냐?”
이안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같이…? 경도 사원에 가셔야 할 이유가 있으시오?”
“그건 아니다. 그저, 원정에 앞서 루 솔라께 기도드리려 했을 뿐.”
“그런 거면 따로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소.”
재빨리 덧붙인 이안이, 허리춤의 검집을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사원에서 일을 본 후에 대장간도 들러야 해서 말이오. 시간이 꽤 걸릴 텐데, 그동안 경까지 안 계시면 이 두 놈이 무슨 헛짓을 벌일지 누가 알겠소.”
“흠…. 하긴. 그래. 알았다.”
메브가 아쉬운 표정으로 수긍했다.
하마터면 귀찮아질 뻔했네.
이안은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자신이 사원에서 뭘 하려는 건지도 굳이 알려 주고 싶지 않았지만.
사제가 가장 호구 잡기 쉬운 상대가 기사였기 때문이다.
신앙과 명예를 중시해야 하는 기사는 태생적으로 사제에게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함께 움직인다면, 이안까지 바가지를 쓰게 되리라.
“네 식사도 따로 준비해 두라 이르지. 너무 늦지 않게 돌아와라.”
“알겠소.”
“미구엘, 여관이 어느 쪽이지?”
“저쪽 길입니다, 나리.”
메브가 미구엘이 가리킨 방향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필립이 재빨리 뒤따르는 가운데, 미구엘이 이안의 곁으로 다가왔다.
“사원은 마을 뒤편에 있소. 대장간은 그 전 골목 끝에 있으니 알아두시고.”
“알았다. 나 없다고 허튼짓할 생각은 하지 말고.”
“허, 허튼짓은 무슨….”
뜨끔한 표정을 짓는 미구엘의 어깨를 두드린 이안이 몸을 돌렸다.
그는 더럽고 냄새나는 거리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꽤 큰 마을임에도 위생은 여전히 개판이었다.
오가는 주민들의 모습 역시, 현대인인 이안의 눈에는 거지꼴이 따로 없었다.
‘이왕 게임 속으로 떨어질 거면, 소년 만화 같은 모험 판타지로 떨어지던가.’
이안은 혀를 차며 생각을 떨쳤다.
차라리 곧 만날 사제에 대해 생각하는 게 건설적일 터였다.
사기꾼일 가능성도 충분했으니까.
물론, 사기꾼이 아닐지라도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사기꾼보다 더하면 모를까.’
암흑시대의 다른 것들처럼, 신을 섬기는 교단과 사제들도 부패하고 타락하긴 마찬가지였다.
물론 신과 사후세계, 기적이 실존하는 세계에선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중요한 건, 사제들은 죄다 짜증 나는 작자들이란 사실이었다.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말을 섞고 싶지도 않을 만큼.
‘그래도 힘을 빌려주는 신들이 사실상 제일 문제인 것 같지만….’
생각하던 이안은 이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작고 낡은 집 앞이었다.
초라하기 그지없는 외관이건만.
“호오….”
이안의 눈에는 이채가 번져나갔다.
“제대로 찾아왔군.”
안에서 신성력이 느껴졌다.
메브의 것만큼이나 선명하게.
문 위에 흐릿하게 음각된 태양 문양이, 이곳이 루 솔라의 사원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이안은 문손잡이를 쥐었다.
스무 명도 앉기 힘들어 보이는 작은 기도실이 곧바로 드러났다.
내부를 훑던 이안의 시선이 기도실 끝의 석상에서 멈췄다.
무릎을 꿇고 양손을 머리 위로 치켜든, 로브로 얼굴을 가린 여인의 조각상이었다.
신성력은 그 석상의 손아귀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은은한 빛과 함께.
“이런 곳에 성상이 있었다니….”
그 앞에 멈춰선 이안이 빛이 흘러나오는 손아귀를 내려다보았다.
마력도 발광체도 보이지 않는, 진짜 기적이었다.
이안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드디어 오염된 정수를 정화할 수 있으리란 의미였기 때문이다.
솨아아-.
“……?”
성상 손아귀의 빛이 진해지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손아귀 가득 찰랑대던 이내 빛이 흘러넘쳤다.
성상 전체가 아침 햇살을 머금은 것처럼 일렁였다.
…이거 갑자기 왜 이래?
이안이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기도 시간은 지났소만.”
등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안은 뒤를 돌아보았다.
흰 사제복을 걸친 중년인이 미간을 찌푸린 채 문 앞에 서 있었다.
거만한 표정과 목에 걸린 태양 형상의 황금 펜던트.
역시,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군.
속으로 혀를 찬 이안이 물었다.
“댁이 이 사원의 사제시오?”
“보다시피. 그보다 지금은 출입이 허락된 시간이 아니오. 특별한 용무가 있는 게 아니라면-.”
싸늘하게 말하며 다가오던 사제의 목소리가 문득 잦아들었다.
그의 시선이 이안의 어깨너머, 빛을 발하는 성상에 고정됐다.
멍하니 입을 벌린 것도 잠시.
“맙소사, 루 솔라시여….”
장탄식을 흘리며, 사제가 다시 이안을 마주 보았다.
부담스럽게 일렁이는 눈빛.
그의 입술이 이내 달싹였다.
“찬란한 여신의 사도께서, 이런 변방까진 어인 일이십니까?”
이안의 미간이 절로 좁아졌다.
“사도…?”
이건 또 뭔 개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