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156
156화
메브의 미간이 좁아졌다. 필립과 샬롯도 귀를 의심하듯 서로를 돌아보았다.
이안도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짧게 코웃음 친 그가 내뱉었다.
“저번에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는군. 하늘이나 보고 말해.”
“아직은 수습할 수 있어요. 잘 생각해 봐요, 이안. 당신이 아무리 우리를 싫어한다고 해도, 그깟 요정 계집애 하나 때문에 목숨을 걸 필요는 없잖아요.”
“테사는, 살아 있나?”
“아직은요. 하지만 당신이 끝까지 멈추지 않는다면, 결국 죽게 되겠죠.”
메브의 시선이 샬롯에게로 돌아갔다. 그녀의 주황색 눈동자에 진득한 살의가 고이고 있었다.
이안도 우뚝 움직임을 멈춘 채였다. 여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아직도 당신을 싫어하지 않아요, 이안. 오히려 그 반대죠. 당신은 이런 곳에서 죽기에는 너무 아까운 인물이에요. 살아남는다면 수많은 업적을 이룩하고, 역사에도 그 이름을 여러 번 남기겠죠. 북부에서 그랬듯이.”
“너희를 전부 죽인 것도, 내 업적에 포함될 거다.”
이윽고 이안이 덤덤하게 말했다.
머리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비극적인 일이군요. 난 당신을 살리려 애쓰는데, 당신은 날 죽이지 못해 안달이라니. 지금 이 순간에도 모든 일족이 집결하고 있어요. 당신들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우리 전부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가요?”
“전부 모이고 있다고?”
“그래요. 당신이 여기 도착할 때쯤엔 준비가 끝나 있겠죠.”
이안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메브는 비로소 그가 대화를 이어나가는 건 그저 정보를 더 얻어내기 위해서일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여제도 눈치채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왜 설득을 멈추지 않는 거지?’
정말 이안을 죽이고 싶지 않아서?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이안이 내뱉었다.
“잘됐군. 찾아다니는 수고를 덜겠어. 경험치도 쓸어 담겠고.”
“또 그런 못 알아들을 소릴…. 당신이 북부에서 어떤 업적을 이룩했는지는 잘 알아요, 이안. 그야말로 신화적이죠.”
여제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하지만 난, 그게 온전히 당신의 공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요. 그때와 지금은 여러모로 다르죠. 누구보다 당신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나요?”
“…….”
이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메브는 그가 무표정한 얼굴이리라 생각했다. 이안은 분노가 깊어질수록 얼굴에서 감정이 사라졌으니까.
“어지간히 초조한 모양이군.”
하지만 뜻밖에도, 이어진 이안의 말투는 아주 부드러웠다.
“네? 그게 무슨-”
“네 뒤를 봐주는 자들이,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나 보지?”
“…….”
여제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놀랍게도, 메브는 저 역겨운 얼굴에서 흐릿한 당황이 묻어나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게 아니면 직접 이런 개소리를 늘어놓을 이유가 없잖아.”
이안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사실은 너도 알고 있는 거야. 그들의 도움 없이는, 네가 애지중지하며 일궈 온 일족이 전부 내 손에 죽게 되리라는 걸. 그러니 어떻게든 날 설득하려는 거겠지. 되지도 않는 이유 들이나 가져다 붙이면서. 안 그래?”
“…비약이 너무 심하군요. 이안.”
이윽고 여제가 내뱉었다. 낮게 코웃음 친 이안이 덧붙였다.
“테사가 죽었건 살았건 상관없어. 백성들을 칼받이로 세워도 날 막을 수는 없을 거다. 차라리 내 손에 죽는 게, 너희들에게 피를 빨리다 죽는 것보단 덜 고통스러울 테니까.”
“…….”
머리가 말문이 막힌 듯 입술만 달싹였다. 이안이 그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며 덧붙였다.
“이런 무의미한 짓거리는 이제 그만해라. 그리고 다음번엔.”
이안이 발을 들었다.
“네 진짜 머리를 터뜨려 주지.”
“이안. 정말 후회하게 될-”
콰직!
이안이 머리를 그대로 짓밟았다. 내부의 마력이 흩어지면서, 산산조각난 내장들이 솟구쳤다.
“하….”
피와 살점을 뒤집어쓴 이안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얼굴에 튄 피를 손바닥으로 눌러 닦으며 모닥불로 돌아왔다.
필립이 어색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아, 아주 멋지셨습니다, 나리. 마족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선전 포고를 하시다니요. 분명, 또 뭔가 생각이 있으신 거겠죠?”
“아니.”
곧바로 대답한 이안이, 필립을 마주 보며 덧붙였다.
“그런 건 없다. 그냥 이대로 글루미르로 향해서, 놈들과 정면으로 맞부딪칠 거야.”
“…….”
말을 멈춘 필립이 입술을 달싹였다. 좀 전의 그 내장으로 만들어진 머리가 말문이 막혔을 때와 똑같은 반응이었다. 이안이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여제는 자기 소굴에서 꼼짝도 하지 않을 거야. 거기 숨어 들어갈 방법 따윈 없겠지. 그러니 그냥 정면으로 돌파할 수밖에.”
“허….”
필립이 탄식했다. 샬롯이 가라앉은 눈으로 씹어 뱉었다.
“성대한 전투가 되겠군. 싸우다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고, 살아남는다면 평생 기억되겠지.”
“그건 또 무슨 정신 나간…. 여제의 말이 사실이라면, 말 그대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꼴이 될 텐데요. 물론 나리들께선 일당백의 용사들이십니다만. 상대도 엄연한… 마족이니까….”
이안의 시선을 받은 필립이 어깨를 움츠리며 말을 맺었다. 곧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일리 있는 말이군.”
“…예?”
필립이 눈썹을 치켜들며 되물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네 말대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꼴이 될 테니까. 이대로 말을 돌려서 버브룩으로 돌아가도 돼. 경도 마찬가지요.”
메브를 일별한 이안이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받은 도움만으로도 둘 다 충분히 제 역할을 다해 주었으니까. 물러난다 해도 전혀 탓하지 않겠소. 우리가 이긴다면 곧바로 버브룩으로 가겠소. 물론 알아낸 정보도 공유할 거고.”
그가 이렇게 말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 오히려 필립의 얼굴에 당황이 번졌다.
“아니… 그렇다고 말씀을 그렇게 서운하게 하십니까…. 돌아가다니요. 아무리 겁이 나도, 제가 두 분만 두고 혼자 내빼겠습니까?”
“나도 같은 생각이다. 너희들만 사지에 던져 놓고 도망칠 수는 없지. 끝까지 함께 싸우겠다.”
메브가 덧붙였다. 그녀를 돌아본 필립이 너스레를 떨었다.
“흡혈귀들을 상대하는 법까지 연습했는데, 빈손으로 돌아가면 여러모로 무안하지요.”
“아무리 이곳이 저들의 땅이라 해도, 정말 뱀파이어다운 자들은 많아야 수십에 불과할 거다. 나머지는 죄다 그때 본 하수인들과 비슷한 수준이겠지. 내가 보기에도 우리에게 승산이 없지는 않다. 각자 몇십 명씩만 상대하면 돼.”
이어진 메브의 진지한 말에, 이안이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렇게들 말 할 줄 알았지.
“알겠소. 그렇게들 죽으러 가고 싶다면야.”
물론 이안은 죽을 생각 따윈 없었다. 능력치 포인트는 몇 개 없지만, 아직 스킬 포인트에는 제법 여유가 있었으니까.
여차하면 바로 필요한 대로 포인트를 투자할 생각이었다.
그게 아니라도, 믿는 구석은 더 있었다.
여제의 제안을 거절한 순간, 눈앞에 퀘스트 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로 저택의 안주인. 미로 저택으로 들어가 흡혈 여제를 죽이는 게 목표였다.
게임에서도 존재하던 상황이라는 의미였다. 그러니 어쨌든, 클리어하는 게 불가능한 상황이 조성되지는 않을 터였다.
타후므리트와의 전투가 그랬듯이.
최악의 경우라도, 악착같이 발버둥 치다 보면 길이 보이리라.
뭐든, 일행이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할 수 있는 근거들은 아니었다.
“내일부턴 천천히 움직입시다. 다들 체력 보전에 힘쓰시오. 끼니도 거르지 말고.”
이안이 덧붙인 말은 이게 전부였다. 루 솔라여, 하고 비장하게 읊조린 필립이 메브를 돌아보았다.
“혹시 제가 싸우다 죽거들랑, 반드시 복수해 주십시오, 나리.”
메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염려 말거라, 필립.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렇게 하겠다.”
“이 중에 누군가 죽는다면, 내가 처음이 될 거다. 그러니 내 복수를 맹세하는 편이 더 빠를 거야.”
샬롯이 덧붙였다.
이젠 서로 죽겠다고 난리군.
헛웃음을 지은 이안이, 천을 들어 얼굴과 몸에 묻은 피를 대충 닦아내기 시작했다.
물론, 그는 아무도 죽게 할 생각이 없었다.
가능하다면.
***
다음 날부터 먹구름은 폭풍이 치듯 출렁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낮게 깔리고 있기까지 했다. 하늘이 좁아진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밤낮의 구별 역시 여전히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일행의 분위기는, 오히려 평소보다 더 차분했다. 매 끼니를 식량을 아끼지 않고 배불리 먹었고, 수면도 충분히 취했다.
그리고 그사이, 뱀파이어의 습격은 단 한 차례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을 감시하는 시선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없는 건지는 이안도 확신하지 못했다. 하늘이 가까워질수록 오염된 마력도 짙어져서, 그의 감각을 교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마도 사흘째.
“호오….”
마침내 마차가 글루미르 외곽의 숲을 벗어났다.
안장에 앉은 이안은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인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도 그랬다. 들판은 완만한 내리막을 그리고 있었다.
덕분에 저 너머, 글루미르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첫 번째 성벽은 도시 밖의 농경지와 작은 삼림까지 감싸며 넓고 길게 이어져 있었다. 동시에 낮고 얇기까지 했다. 제국의 양식이었다.
높은 성벽에 둘러싸인 도시는 그 내부의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었다. 외부 성벽이 둘러싼 지역의 반도 되지 않았지만, 그렇다 해도 제법 넓고 번성한 도시 같았다.
적어도 얼마 전까지는 그랬으리라.
지금은 도시 전체가 흐릿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작은 불빛조차 번져 나오지 않아서, 버려진 도시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 이질감을 파악한 건 이안 뿐이었다.
다른 일행의 시선은,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의 소용돌이에 사로잡혀 있었다.
정확히는 태풍의 눈처럼 구멍이 뻥 뚫린, 소용돌이의 중심부에.
“루 솔라 맙소사….”
그 사이로 드러난 짙은 자주색의 하늘과 커다란 초승달을 응시하던 필립이, 이윽고 탄식을 흘렸다.
“…마법이군. 어쩌면, 다른 세상이거나.”
뒤이어 샬롯이 읊조렸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뭐건, 길 잃을 걱정은 없겠네.”
“……?”
고개를 갸웃하던 필립의 시선이, 이윽고 그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이안은 구멍 뚫린 하늘이 아니라, 창백한 달빛이 내리쬐는 그 아래의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넓은 정원과 그 한복판의 대저택이 달빛을 받아 선명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달빛이 내리쬐는 건 정원을 둘러싼 담벼락 인근까지가 전부였다.
덕분에 다른 지역이 더 어둡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 비현실적인 광경을 눈에 담던 필립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럼… 저기가 바로….”
“우리의 목적지겠지.”
말을 맺은 건, 마차 옆으로 몸을 내민 메브였다. 그녀가 가라앉은 녹색 눈으로 이안을 돌아보았다.
“저기가 바로 여제의 궁전인 거야. 그렇지?”
“아마도.”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글루미르의 전경이 외부 성벽에 가려졌다. 낮다고 해도 성벽은 성벽이었다.
평지로 접어든 마차가 관도를 따라 나아갔다. 성문이 가까워졌다.
좌우로 열린 성문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고요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문을 지키는 경비병조차 보이지 않았다.
비로소 부자연스러운 적막을 깨달은 필립이 중얼댔다.
“설마,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건 아니겠지요.”
“글쎄. 어쩌면.”
“다들 어디로… 아니, 아닙니다. 생각하지 않는게 좋겠군요.”
고개를 저은 필립이 입을 다물었다. 곧 마차가 성문을 지나쳤다.
이안의 미간이 꿈틀댔다.
감각이 일순간 미세하게 어긋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마경에 발을 들일 때와 같은 감각.
“…….”
그런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필립은 주위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들을 기준으로 오른편 저 멀리로 도시를 감싼 성벽이 보였고, 정면으로는 농경지로 이어지는 언덕이, 좌측으로는 듬성듬성 나무가 솟은 삼림이 펼쳐졌다. 소용돌이의 눈은 정면에서 좌측으로 조금 치우친 저 멀리에 뚫려 있었다.
필립이 그 아래, 내리쬐는 달빛이 만들어내는 흐릿한 빛의 기둥을 눈에 담던 그때.
“마차를 세워라, 필립.”
이안이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서며 내뱉었다.
필립이 반사적으로 고삐를 당겼다.
어느새 손에 든 투구를 깊이 눌러쓰며, 이안이 덧붙였다.
“다들 싸울 준비를 하시오.”
“……!”
그제야 일행 모두의 시선이, 그가 응시하는 언덕 위로 향했다.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메브가 재빨리 투구를 집어 들고, 마차 지붕의 샬롯도 튕겨 오르듯 일어섰다.
언덕 위로 검은 형체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필립이 마부석에서 벌떡 일어서며 그것들을 차근히 눈에 담았다.
죽은 말을 탄 기수들이었다. 뒤이어 그 사이로, 검은 연기에 휩싸인 존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신 판금 갑옷을 걸치고, 마갑을 두른 죽은 말을 탄 기사였다.
하늘의 휘몰아치는 먹구름과 어우러져, 지옥의 군세를 떠올리게 했다.
마른 침을 삼키던 필립의 시야 한구석에 붉은빛이 번지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였다.
“……?!”
시선을 내린 필립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저 앞으로 나선 이안의 전신에 붉은 빛이 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요하지만, 언제라도 활화산처럼 타오를 것 같은 신성력이었다.
“북부의 대전사….”
메브가 마차에서 내리며 탄식했다.
자신의 손아귀를 내려다보는 이안의 눈매도 슬쩍 말려 올라갔다.
험난한 하루가 되리란 예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몸속으로 스며드는 신성력이 전보다 더 선명하게 느껴지고 있어서였다.
상태창을 확인해 보니, 실제로도 전보다 능력치가 몇 포인트씩 더 올라 있었다.
특별히 더 많은 신성력을 받고 있는 것도 아니건만.
‘단죄의 검이 더 강해진 거랑 비슷한 현상인가…?’
어쩌면 용의 진원 덕분일지도.
확실히 알 수는 없는 부분이었다. 사실, 이유 따윈 그리 중요하지도 않았다.
이내 시선을 거둔 이안은, 목함을 꺼내 안에 담겨 있던 궐련 하나를 입에 물었다. 화륵, 손아귀에서 피어오른 불꽃이 궐련 끝에 불을 붙였다.
손을 털어 불꽃을 날려 버린 그가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하….”
이안은 연기를 토해내며, 천천히 언덕을 내려오기 시작한 기수들을 눈에 담았다. 적지 않은 숫자. 하지만 저것들은 일부에 불과할 터였다. 미로 저택에 발을 들이기까지의 과정이 순탄치는 않으리라.
그렇다고 저런 놈들에게 마력을 마구 소모할 수는 없었다. 무기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이라면 어지간한 검은 몇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부러질 터였다.
하지만 대안은 있었다.
반대로, 지금이기에 가능한.
“후….”
궐련의 연기를 토해내며 이안이 오른손을 뻗었다. 아공간에 들어간 그의 손이 이내 천천히 밖으로 빠져나왔다.
한 손으로는 온전히 다 감을 수도 없는 두꺼운 자루를 움켜쥔 채였다. 뒤이어 그의 키만큼이나 길고 넓적한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끝이 살짝 휘어지고 날 등을 따라 고대어가 새겨진 외날 대검.
군단장의 대검이었다.
갑작스럽게 더해진 무게에 놀란 듯 비틀댄 말이, 투레질을 하며 자세를 다잡았다.
이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루를 양손으로 움켜 주었다. 그의 손등에 힘줄이 돋았다.
뿌득, 뿌드득-
굵고 긴 자루에 그의 손자국이 조금씩 깊어졌다. 전신에 맺힌 신성력이 소리 없이 이글댔다.
이윽고 이안이 대검을 한 손으로 고쳐 쥐었다. 거대한 검날을 비스듬하게 늘어뜨리며,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궐련을 문 입술이 달싹였다.
“길을 뚫겠다. 천천히 따라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