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157
157화
“……!”
멍하니 그를 응시하던 메브와 필립이 화들짝 눈을 깜빡였다. 그들이 마차에서 말을 분리하려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샬롯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다가오던 기수들이 언덕 중턱에서 도열 하고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알겠나?”
마력이 실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다란 미늘창을 움켜쥔 뱀파이어 기사의 목소리였다. 하수인 기병들이 죽 늘어서는 가운데, 그는 언덕 꼭대기 바로 아래에 홀로 서 있었다.
손가락 사이에 궐련을 끼운 이안이, 연기를 뿜으며 대답했다.
“셔피로 백작?”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백작의 귀에는 충분히 들어간 모양이었다. 낮은 웃음이 번졌다.
“기다리고 있었다. 용살자.”
“이렇게 빨리 만날 줄은 몰랐는데.”
백작이 투구를 벗었다. 아들인 워렌과 그리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아 보이는 얼굴이 드러났다.
그가 붉은 눈으로 이안을 노려보며 내뱉었다.
“내가 직접 여제께 간청하였다. 군단의 첨단에서, 가장 먼저 용살자를 맞이하게 해 달라고. 명예롭게 복수할 기회를 달라고.”
“그 새끼가 기사 흉내를 누구한테 배웠나 했더니….”
코웃음 친 이안이 다시 궐련을 입에 물었다. 마차 쪽의 소란이 잦아드는 것을 느낀 그가, 고삐를 집어 들며 미소 지었다.
“그런 얘긴, 네 아들에게 가서 해라. 곧 다시 만나게 해줄 테니까.”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고삐를 후려쳤다. 말이 발작하듯 내달렸다. 백작이 이를 갈며 투구를 눌러쓰는 가운데, 그게 신호라도 된 것처럼 하수인 기병들이 일제히 달려 나오기 시작했다.
말의 숨소리에 공포가 서렸지만, 이안은 오히려 고삐를 더 후려쳐 속도를 높였다. 이런 것들에게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솨아아-
투구 아래, 이안의 눈동자가 잿빛으로 물들었다. 전신에 바람이 맺히고 말의 속도가 한층 더 빨라졌다. 전열의 기병들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놈들은 손에 든 장창을 내뻗은 채 망설임 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평소라면 저들의 창날이 먼저 그에게 닿았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쒸하악-!
이안은 허리를 꺾어 말머리를 옆으로 돌리면서, 양손으로 움켜쥔 대검을 힘차게 휘둘렀다. 말이 휘청대는 게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바람 칼날이 검신을 타고 뿜어져 나가고, 붉은 신성력이 섞인 궤적이 창날보다 먼저 기병들을 휩쓸었다.
콰지지직-!
궤적은 말과 기수를 가리지 않고 걸리는 모든 걸 찢어발겼다.
잘려나간 말의 머리와 사슬 갑옷째로 찢긴 기수들의 상반신이 검은 피를 흩뿌리며 치솟았다.
몸이 토막 나고도 죽지 않은 기수들의 얼굴에 경악과 고통이 뒤엉켰다.
이안은 이미 놈들을 보고 있지도 않았다. 가랑이로 안장을 꽉 붙잡은 채, 내뻗었던 팔을 치켜들어 이번에는 사선으로 내리쳤다.
콰드드득-!
남아 있던 바람 칼날이 붉은 신성을 머금고 남김없이 뿜어져 나갔다. 허물어지는 기병들을 뛰어넘던 하수인들이 허공에서 그대로 찢겨 나갔다.
“저, 저런 미친…?”
“아아악-!”
썩은 피와 토막 난 살점. 욕설과 비명이 사방에 가득해졌다. 달려드는 기병들의 얼굴에 공포가 서렸다. 단 두 번의 참격이 만들어냈다기엔 너무 끔찍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물러나는 선택권은 존재하지 않았다.
카가가각!
또 한 번의 붉은 궤적이 그 옆의 기수들을 휩쓸었다.
아무리 투쟁의 축복을 받았다곤 해도, 군단장의 대검을 보통 장검처럼 섬세하게 다루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런 기교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찢어발길 생각으로 휘두르기만 하면 충분했다.
물론 그건 이안에게만 해당하는 얘기였다.
푸화악-
아슬아슬하게 휘청대던 말이 끝내 고꾸라졌다.
미안하다. 속으로 읊조리며, 이안은 안장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고꾸라지던 말이 땅에 처박히고, 그의 몸이 둔중한 포물선을 그리며 솟구쳤다.
달려들던 하수인 기병들이 놀란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머리 위로 대검을 치켜들면서, 이안은 저 언덕 위를 바라보았다.
홀로 선 백작의 모습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투구 사이로 일렁이는 안광에서 당황이 전해졌다. 놀랄 만한 일이었다. 아무리 강하다 한들 결국 인간이며, 용살자의 명성에는 여러모로 과장이 섞여 있으리라 여겼을 테니까.
놈에게 보란 듯 웃어 보인 이안이, 다시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기병들이 창을 치켜들어 그를 겨누고 있었다.
이 순간에도 냉정을 잃지 않은 그의 이성은, 저 한복판으로 떨어지는 건 무모할 수도 있다고 속삭였다. 하지만 심장에 가득한 열기는, 당장 달려들라는 듯 더 거세게 타올랐다.
대검을 움켜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오오오오오-!”
열기를 토해내듯 포효한 이안이, 대검을 내리치며 떨어져 내렸다.
***
“아니… 저런 말도 안 되는….”
허공을 가른 붉은 궤적을 바라보며, 필립이 멍하니 중얼댔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사람 키만 한 대검을 자유자재로 휘둘러 대는 것도. 저렇게 높이 솟구친 것도. 적들 한복판에 대검을 내리찍으며 떨어져 내린 것까지. 모든 게 비현실적이었다.
“정신 차려라. 구경이나 할 때가 아니야.”
뒤에서 이어진 샬롯의 핀잔에, 필립이 화들짝 눈을 깜빡였다.
그제야 그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적들이 가까웠다.
“준비하십시오!”
소리치며 필립이 고삐를 고쳐 쥐었다. 승객을 둘이나 태운 탓에 말이 숨을 헐떡였지만, 이안의 뒤를 따라가려면 어쩔 수 없었다.
하수인 기병들은 그들에게는 관심도 없었다. 죄다 이안에게 완전히 관심을 빼앗긴 상태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붉은 신성력을 전신에 두른 채 대검을 휘둘러대는 그의 존재감은 독보적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아마 본인도 그걸 의도하고 있으리라.
덕분에 일행은 별다른 방해 없이 적들의 후미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나리!”
검을 고쳐 쥔 필립이 소리쳤다. 샬롯이 말의 등 위로 비스듬하게 일어섰다. 언덕길인 데다 전력으로 질주하는 중임에도, 그녀는 하반신의 움직임만으로 안정적으로 균형을 잡았다. 그녀가 양손에 쥔 검을 어깨 옆으로 드리울 찰나.
솨아아-
필립이 내뻗은 검이 빛났다. 뒤이어 내달리는 말의 앞으로 눈부신 황금빛 장막이 피어올랐다.
장막이 그대로 하수인 기병 하나와 맞부딪쳤다.
“아아악-”
말과 함께 불이 붙듯 타들어 간 기수가 비명을 터뜨렸다. 그마저도 필립의 말이 부딪치면서 재가 되어 바스러졌다.
샬롯이 말 등을 박차고 가볍게 뛰어오른 건 그 직후였다. 가속이 더해진 검은 궤적이 허공을 갈랐다.
콰직!
샬롯이 기수의 양쪽 어깨에 검을 내리찍으며 착지했다. 꿰뚫린 기수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축 늘어졌다.
그대로 검을 뽑은 그녀가 묘기를 부리듯 뛰어오르는 사이. 필립도 신성력이 맺힌 검을 찔러 넣으며 따라붙었다.
뒤를 조심할 필요는 없었다.
서걱-!
기다란 양손 검을 쥔 메브가 기수들의 목을 날려 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기수들은 머리가 잘려도 죽지 않았지만, 적어도 전투력을 상실하게 만들 수는 있었다.
퍼석! 콰직-!
그들이 순식간에 기병들의 후미를 휩쓸기 시작했다. 이안에게 정신이 팔려있던 놈들이 비로소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여기까지 온 거야, 시발…!”
“흩어져서 포위해! 흩어져!”
몇몇은 달려들고 몇몇은 좌우로 흩어져 간격을 벌렸다. 메브와 필립은 굳이 멀어지는 것들을 따라가지 않고, 길을 여는 데에만 주력했다.
그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이안을 따라잡는 데에 있었다.
물론, 그게 마음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리! 보입니다!”
날아드는 창을 방패로 쳐 내거나 피하며 기병들을 찔러 죽이던 필립이 이윽고 소리쳤다.
기병들에 가려져 있던 붉은 궤적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가리킨 방향을 돌아본 메브의 입에서 탄식이 번졌다.
“어느새 저기까지…?”
이안은 벌써 언덕 중턱을 지나치고 있었다. 일직선으로 멈추지 않고 달렸다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속도였다.
게다가 어떻게 한 건지, 기병들이 탄 것과 같은 죽은 말을 타고 있었다. 신성력이 말을 조금씩 태우고 있었지만,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하수인 기병들은 공포에 질린 표정이 되어서도 악착같이 그의 앞을 막으려 했다.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그들은 이안이 휘두르는 대검을 단 한 번도 견뎌내지 못했다.
곧 신성력을 버티지 못한 말이 허물어지고, 대검을 치켜든 이안이 미련 없이 몸을 날렸다.
콰지직-!
앞을 가로막던 기병 하나가 말과 함께 반으로 찢겨 나갔다.
대검 날을 땅에 찍으며 착지한 이안이, 전신에 검은 피를 뒤집어썼다.
“루 솔라 맙소사….”
필립이 중얼댔다.
이야기로나 들었던 북부의 초인이 저기에 있었다. 지금 대검을 뽑아 들며 일어서는 저 이안은, 그가 알던 이안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이안이 검을 옆으로 늘어뜨리며 언덕 위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와 셔피로 백작 사이를 가로막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쒸엑-
파공음이 귀를 파고든 건 그때였다. 눈을 치켜뜬 필립이 방패를 들려는 찰나.
콰직!
불현듯 솟구친 검은 궤적이 기수의 머리통에 검을 내리찍었다. 샬롯이었다. 곧바로 왼손의 은검으로 놈의 목을 날려 버린 그녀가 내뱉었다.
“한눈팔지 말라고 했을 텐데.”
기수의 몸을 집어 던진 그녀가 안장에 앉았다. 죽은 말은 반항하지 않고 내달렸다. 안장에 앉은 이의 명령이라면 무조건 따르고 보는 모양이었다.
“가자! 필립!”
메브의 외침이 이어졌다. 전신에 검은 피를 뒤집어쓴 그녀가 양손검을 고쳐 쥐며 앞서 나갔다.
앞을 가로막는 기병들이 속속들이 쓰러졌다. 하수인에 불과한 것들은, 수많은 사선을 넘어온 그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용살자-!”
마력이 실린 쩌렁쩌렁한 일갈이 울려 퍼진 건 그때였다. 전신에 두른 새카만 연기를 흩날리며 셔피로 백작이 돌진하고 있었다.
그를 향해 마주 달려가는 붉은 궤적은, 물론 이안이었다. 맨몸으로 돌진하고 있으면서도 그의 질주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백작이 미늘창을 내뻗었다. 이안은 피하지 않고 대검을 올려쳤다. 거대한 붉은 궤적이 대기를 찢었다.
궤적은 날아드는 창과 그 너머의 말까지 동시에 휩쓸고 지나갔다.
목 어름부터 마갑 채로 잘려나간 말이 허물어지고, 백작이 함께 나뒹굴었다.
바닥을 구르며 속도를 줄인 건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백작의 분노에 찬 포효가 뒤를 이었다.
“이 노오오오옴!”
동시에 새카만 연기가 동심원을 그리며 번져 나갔다.
하수인 기병들의 눈과 입에서도 검은 연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탄 말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교전을 이어가는 와중에도 틈틈이 이안을 눈에 담던 필립이, 뒤늦게 탄식을 흘렸다.
“크… 르륵…!”
거리를 유지하며 빈틈을 노리던 기병들이 숨소리를 흘리며 일제히 그들을 돌아보았으니까.
“대열을 지켜라, 필립!”
차분하게 외친 메브가 검을 치켜들었다. 하수인 기병들이 짐승 같은 울부짖음을 토해내며 달려들기 시작한 가운데.
“빨리 끝내주십시오, 나리…!”
필립의 검이 신성력을 머금고 빛나기 시작했다.
***
“용서하지… 않겠다…!”
검을 뽑아 든 백작이 내뱉었다.
그는 새카만 안개에 완전히 뒤덮여, 그림자로 만들어진 괴물처럼 보일 정도였다.
부자가 하는 짓이 똑같네.
생각하며, 이안은 놈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늘어뜨린 대검이 밭을 갈듯 땅을 뒤엎으며 흙먼지를 흩뿌렸다.
“내 모든 힘을…!”
내뱉은 백작이 연달아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초승달 같은 검은 궤적이 연달아 이안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안은 역장이나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저 왼손을 뻗어 검 자루를 반대 방향으로 움켜쥐고는, 그대로 팔을 비스듬하게 치켜들어 넓적한 검 면으로 몸을 가렸다.
하반신까지 전부 가릴 수는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솔직히 지금은, 저걸 맨몸으로 맞아도 죽지 않을 것 같았다. 방어구들은 넝마가 되겠지만.
콰드드득- 콰득-!
검은 궤적이 대검 위를 후려치며 지나갔다. 검면을 받친 오른팔을 타고 묵직한 압박이 전해졌다. 견딜만한 충격이었다.
궤적은 그를 지나치며 흩어졌고, 이안의 돌진은 멈추지 않았다.
이래서 대검에 방어력이 붙은 건가.
생각하며, 이안이 얼굴을 가렸던 팔을 비스듬하게 내렸다. 백작의 새카만 전신이 드러났다.
검격을 고스란히 막아내며 돌진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 검을 양손으로 고쳐 쥐는 손길이 다급했다.
그보다 이안이 대검을 내뻗는 게 더 빨랐다.
콰지지직-!
사선으로 올려친 붉은 궤적이 백작의 새카만 몸을 비스듬하게 가르며 지나갔다.
투쟁의 축복이 더해진 괴력, 거대한 검날과 신성력을 머금은 바람 칼날은, 백작의 마력은 물론 그 너머의 판금 갑옷까지 찢어발겼다.
퍼석-
백작을 감싼 연기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백작의 상반신이 땅에 처박혔다.
카가각, 이안은 대검 날을 땅에 내리찍으며 속도를 줄였다. 여력이 엄청난 탓에, 그는 땅에 기다란 흔적을 남기고서야 멈춰 섰다.
전부터 느꼈지만, 이만한 힘을 세밀하게 통제하는 건 쉽지 않았다.
“제… 기랄…!”
널브러진 백작이 신음했다. 그는 옆구리부터 오른쪽 가슴까지가 잘려나간 채로도 살아있었다. 오른팔도 어깨 아래까지 밖에 남지 않았다.
백작이 발악하듯 연기를 뿜었지만, 육체를 재생할 수는 없었다.
바람 칼날에 실린 신성력의 잔재가 잘린 단면을 태우고 있었다.
저걸 떨쳐낸 뒤에야 본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물론 이안은 기다려줄 생각이 없었다. 대검을 어깨에 걸친 그가 백작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언덕 중턱의 소란이 비로소 귓가를 스쳤다. 일행이 미친 듯 날뛰는 하수인 기병들을 베어 넘기며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충분히 빠른 속도였다. 다만 그가 더 빨랐을 뿐.
“용서할 수 없다… 네 이놈, 용서할….”
실성한 듯 중얼대던 백작이 굳어진 건 그때였다.
“컥, 커헉…!?”
백작이 발작하듯 몸을 떨었다. 그의 입에서 피 화살이 치솟았다.
뒤로 치켜든 백작의 얼굴에 공포가 서렸다.
“아, 안 돼-”
푸화악, 놈의 눈코입과 잘린 단면에서 피 보라가 솟구쳤다. 그리고는 곧 찐득한 덩어리로 뭉치더니, 언덕 너머로 화살 같이 날아갔다.
“……?”
고개를 돌린 이안이 옅은 헛웃음을 흘렸다. 핏덩이가 날아간 건 정확하게 소용돌이의 눈이 위치한 방향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진혈이었으리라.
“잃기 전에 회수한 건가….”
거참 알뜰하네.
아마도 이 안에서만 가능한 짓거리일 터였다. 아니라면 심판자들이 죽을 때 그가 진혈을 불태우게 놔두지 않았을 테니까.
“아, 아아….”
축 늘어진 백작이 신음했다. 그의 얼굴에 생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이안은 그걸 지켜보지 않았다.
콰직!
대검이 백작의 머리통을 으깼다. 놈의 떨림이 멎었다.
퍼석, 퍼서석-
언덕 아래에서 즉각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하수인 기병들이 재가 되어 허물어지고, 죽은 말들도 썩은 고깃덩어리로 되돌아갔다.
경험치가 오른 것까지 확인한 이안이, 언덕 꼭대기를 향해 몸을 돌렸다.
다각- 다각-
뒤에서 일행이 다가왔다. 말을 지킨 건 메브 뿐이었다.
“우리가 도착하기도 전에 끝을 냈구나, 이안.”
이안이 언덕 꼭대기에 올라설 때쯤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언덕 너머의 광경을 눈에 담은 이안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대꾸했다.
“끝이라니. 이제 시작인데.”
온갖 것들이 뒤섞인 새카만 물결이 언덕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루 솔라 맙소사….”
뒤늦게 그 광경을 눈에 담은 필립이 탄식하는 가운데.
“다들 잘 따라오시오.”
대검을 늘어뜨린 이안이 성큼 앞장섰다.
“지금부턴, 멈출 수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