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16
016화
이안의 시선을 오해했는지, 사제가 빙긋 입술을 말아 올렸다.
“오래전에도 제국의 사도께서 방문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루 솔라께서 친히 이토록 찬란한 신성을 내리신 건 그때뿐이었지요.”
친히, 라고?
이안의 시선이 성상으로 돌아갔다.
“……?!”
그의 눈썹이 이내 치켜 올라갔다.
빛 너머, 정말 신성을 넘어선 초월적 무언가가 어렴풋이 느껴졌다.
“그러니 용무를 말씀해 주십시오. 기꺼이 돕겠습니다.”
사제가 공손하게 덧붙였다.
보란 듯 성상의 빛이 밝아졌다.
“애석한 말이지만.”
화들짝 성상에서 시선을 뗀 이안이 내뱉었다.
“나는 용병이오. 사도가 아니라.”
“사도가… 아니시라고요?”
“그렇소. 심지어 신도도 아니지.”
평소라면 이용해 먹었을 오해건만.
이안이 굳이 정정한 건, 빛의 여신이 정말 성상을 통해 그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왜 보고 있는 거지? 관음증 환자도 아니고.’
아무리 그라도 신이 지켜보는 앞에서 사도를 사칭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어떤 천벌이 내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말씀이 사실이시라면….”
멍하니 고개를 기울이던 사제가, 이윽고 성상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이제라도 찬란한 여신을 섬기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갑자기 전도를 하고 난리야.
헛웃음을 삼킨 이안이 되물었다.
“진심이시오?”
“여신께서 특별히 아끼시는 게 아니라면, 이리 큰 신성을 내리시면서까지 지켜보실 리 없으니까요.”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며, 사제가 이안을 마주 보았다.
“귀하가 루 솔라를 섬긴다면, 분명 사도로 선택받게 되실 겁니다. 필멸자에게 그보다 큰 명예와 영광은 없지요.”
“…….”
사제의 말에 감응하듯 성상의 빛이 더 찬란해졌다.
이안의 대답을 종용하듯이.
하지만 이안의 미소가 굳어진 건 그 때문이 아니었다.
‘정말 사도 퀘스트였다니.’
눈앞에 선택 퀘스트 수락 창이 떠올라서였다.
루 솔라의 사도.
물론 게임에서도 특정 레벨 이상이 되면 신의 사도 퀘스트를 받을 수 있는 직업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안이 알기로 마법사는 거기 포함되지 않았다.
마법사는 대신 깨달음을 얻거나 근원적 진리를 엿보는 식의 각성 퀘스트가 있었고, 심지어 이안은 아직 거기까지 레벨을 올리지도 못한 상태였다.
‘…어쩌면 이제 그런 제약 따윈 없는 걸지도 모르겠군.’
정신을 추스른 이안은, 퀘스트를 거절하며 입을 열었다.
“곧바로 결정 내릴 문제는 아닌 것 같군. 차차 고민해 보겠소.”
사실상 사제가 아니라, 지켜보고 있을 루 솔라에게 한 말이었다.
물론 나중에라도 그녀를 섬길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당장은 그녀의 힘을 써먹어야 하니 여지만 남겨둔 것이다.
딱 잘라 거절했다가 그녀가 신성을 거둬들이기라도 하면, 낭패도 그런 낭패가 또 없을 테니까.
덩달아 낚인 사제의 눈빛이 일렁였다.
“부디 옳은 결정을 하시길 바랍니다. 찬란한 여신께선 신도에게 아낌없는 자비를 베푸는 분이시니까요. 그리고….”
빙긋 미소 짓는 사제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그 영광스러운 순간이 온다면, 이 신실한 에드워드를 기억해 주십시오. 충실히 보필하겠습니다.”
얼씨구, 이젠 자기 어필까지.
입가에 실소를 머금은 것도 잠시.
“알겠소, 에드워드. 내 반드시 기억하지.”
이안도 같은 은근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주머니를 털릴 줄 알았더니, 오히려 털어먹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건 거짓말도 아니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마침 그대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소만.”
“말씀하십시오.”
에드워드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찬란한 여신의 신성으로, 타락한 마력을 정화해 주셨으면 하오.”
사뭇 경건하게 말하며, 이안이 아공간에서 오염된 정수를 꺼냈다.
큰 구슬 하나와 작은 구슬 셋.
오염된 마력이 타르처럼 끈적하게 꿈틀댔다.
“이렇게나 오염된 마력이라니. 이런 정수를 품었다면 여간 타락한 마물들이 아니었겠군요.”
손아귀를 꺼림칙하게 내려다보며, 에드워드가 탄식했다.
“여신께서 귀하를 어여삐 여기시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습니다.”
“타락한 마력을 정화하면 그대도 어여삐 여기시겠지. 그래서….”
이안이 정수를 쥔 손을 까딱였다.
“이 중에서 몇 개나 가능하시겠소? 내일 정오쯤엔 떠나야 하오만.”
고심하듯 정수를 응시하던 에드워드가 답했다.
“여신께서 평소보다 많은 신성을 내리셨으나, 기도를 올리는 제 체력에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 이상은 힘들 듯합니다.”
“하나라….”
이안은 짧게 입맛을 다셨다.
하루 만에 상급 정수까지 정화할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하나는 너무 적었다.
“다만 사원의 유지를 위한 기부금을 충분히 내주신다면….”
에드워드의 은근한 목소리가 이어진 건 그때였다.
“몸이 상하더라도 밤새 여신께 정화의 기도를 올릴 수도 있겠지요. 그런다면 아마 하나 정도는, 더 정화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새끼 봐라…?
한쪽 눈썹을 치켜든 이안이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에드워드가 빙긋 미소 지었다.
사람 좋아 보이지만,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미소였다.
이안의 시선이 뒤쪽의 성상과 그를 차례로 오갔다.
이런데도 돈을 받을 생각이냐는 눈빛.
에드워드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먼저 입을 열지는 않았다.
이걸 끝까지 갈등하네.
이윽고 코웃음을 친 이안이 품에 손을 넣었다.
“얼마나 원하시오? 루 솔라를 섬기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겠군….”
비웃듯 덧붙인 말에, 비로소 에드워드의 미소가 무너졌다.
“받지… 않겠습니다….”
그가 웅얼대듯 입술을 달싹였다.
움직임을 멈춘 이안이 그를 노려보았다.
“뭐라고?”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실언을 했군요. 여신께서 어여삐 여기시는 분을 도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영광이겠지요….”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말투였다.
거기에 일말의 미안함조차 사라지게 만드는 눈빛까지.
“그럼 기꺼이 부탁드리지. 여신께서도 분명 그대의 신실함을 알아주실 거요.”
산뜻한 손길로 정수 두 개를 골라내 내밀면서, 이안이 미소 지었다.
“…그러시겠지요.”
에드워드도 입술을 말아 올렸다.
말 그대로 억지 미소였다.
***
이안이 여관 앞에 도착한 건 한 시간쯤 더 지나서였다.
‘아공간이 꽉 찬 건 오랜만이군.’
무덤 숲에 도착하기 전에 물자를 보충할 마지막 기회였으니, 대장간을 탈탈 털고 온 참이었다.
흑마법사가 위협적이진 않았지만.
사고는 언제나 방심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뜻밖의 사건으로 주머니 사정에 여유가 생긴 덕이기도 했다.
‘신이 지켜보고 있는데도 그렇게까지 대놓고 돈을 밝힐 줄이야.’
에드워드를 떠올리며 다시 한번 피식댄 이안이, 여관 문을 열었다.
“오…! 용 사냥꾼께서 마침내 돌아오셨군!”
얼큰하게 취한 미구엘의 목소리가 그를 마중 나왔다.
“나리! 말씀해 주십시오! 정말 늪지대의 용을 사냥하셨습니까?”
필립의 외침이 뒤를 이었다.
그 역시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어진 상태였다.
신나게도 들이부었군.
혀를 찬 이안이 장내로 들어섰다.
그를 힐끔대던 주정뱅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무슨 대화가 오갔을지 짐작이 가는 순간이었다.
“좀 늦었소. 볼 게 많더군.”
모르는 척 메브에게 말한 이안이 테이블에 앉았다.
눈치를 살피던 여급이 재빨리 음식을 차렸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튜와 정체 모를 고기. 그리고 맥주 한 잔.
이안이 포크를 드는 사이.
“그러니까, 정말 나리께서 용을 죽이셨단 말이죠? 늪지대에 산다고 소문난, 그 용을요.”
필립이 참지 못하고 재차 물었다.
이안은 대답 대신 미구엘을 돌아보았다.
서늘한 눈빛을 마주한 미구엘의 미소가 뒤늦게 굳어졌다.
“아니, 그, 별말 안 했소. 이 친구가 댁의 과거를 궁금해하기에 조금만….”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
“아, 아니오! 기껏해야 뭐, 댁을 어떻게 만났는지, 댁한테 까불다가 손모가지 날아간 놈들이 몇인지. 어떤 의뢰를 해결했고 댁을 뭐라고 불렀는지 라던가….”
“…….”
전부 다 얘기했단 소리잖아.
입가에 절로 쓴웃음이 스쳤다.
미구엘은 무용담이랍시고 얘기한 거겠지만.
그에겐 그다지 좋은 기억들도 아니었다. 사실 이 세계에선 좋았던 기억을 찾는 게 더 어려웠다.
“맙소사. 정말이었군요. 하긴, 나리께서 보여 주신 능력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긴 합니다만-.”
“그래서, 의뢰비는?”
술을 한 모금 마신 이안이 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잘랐다. 필립이 냉큼 품에서 은화를 꺼내 들었다.
“말을 사고 남은 돈도 포함했습니다, 나리.”
이안은 눈대중으로 돈을 확인하고는 주머니에 넣었다.
이로써 이 마을에서 해야 할 일은 전부 끝난 셈이었다.
“어떻게 용을 사냥하신 겁니까?”
이제 속 편하게 먹고 쉴 일만 남았건만.
“…그건 용이 아니었다.”
지치지 않고 이어진 질문에, 이안은 결국 입을 열었다.
“성체가 된 지 얼마 안 된 늪지 드레이크였지. 그놈은 그냥 날개 달린 도마뱀일 뿐이야.”
게임에선 튜토리얼 지역의 보스이기도 했던 놈은, 늪지대 외곽에 터를 잡은 포식자였다.
잘 무장한 병사들이 오갈 때는 숨어 있다가, 홀로 다니는 행인만을 노리던 영악한 포식자.
덜 자란 놈이었기에 택한 방식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늪지대 거주민들이 탈출로로 택하는 길목 근처의 계곡에 터를 잡은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동시에 그를 반년 넘게 늪지대에 묶어 둔 가장 큰 원흉이기도 했다.
높은 레벨과 능력치 따윈, 날개 달린 거대 도마뱀이 울부짖는 현실 앞에선 별로 와닿지 않았었으니까.
심지어 놈은 이안이 특별해 보였던지, 유독 집착하기까지 했었다.
“그게 용 아닙니까? 나리 말씀대로 덜 자랐을 뿐인 거고요.”
“도마뱀은 커도 도마뱀이지. 진짜 용은 그딴 거랑은 비교도 안 돼.”
그러니 슬슬 닥쳐라.
그런 눈치를 읽었는지, 테이블이 순간 조용해졌다.
필립의 멍한 목소리가 이어진 건 직후였다.
“진짜 용을 보신 적이… 있으신 겁니까?”
말실수 때문이었던 거군.
이안은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뭐, 꿈에서.”
사실은 당연히 게임에서였다.
이 세계에서 계속 살아가다 보면 언젠간, 직접 만나게도 될 테고.
‘그것도 목숨 원 코인으로 말이지.’
상상만 해도 개 같네.
이안은 다시 맥주를 들이켰다.
그리고는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는 필립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궁금한 게 남았냐? 정말 혀가 짧아지고 싶은 모양이군.”
“근본적인 의문이 들어서 말입니다. 왜 나리께서 늪지대에 계셨던 건지에 대한 의문이요. 거긴 버려지거나 유배당한 자들이 사는, 저주받은 땅이잖습니까.”
“그, 나도 전부터 궁금하긴 했소. 댁 같은 양반이 갑자기 늪지대에서 걸어 나왔을 리는 없잖소.”
미구엘도 은근슬쩍 거들었다.
졸라게들 끈질기네, 진짜.
혀를 찬 이안이 툭 내뱉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해라. 늪지대 출신이라고.”
물론 사실이었지만.
“…제국에서 유배 오신 걸까요.”
“나야 모르지. 어쩌면 늪지대 너머의 밀림에서 왔을지도.”
술 취한 둘은 전혀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거긴 고대의 저주가 서려 있다지 않습니까. 고대인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 아니면, 발을 들이기만 해도 목숨을 잃는다던데요.”
“사실일 거요. 직접 본 놈이 말하길, 숲이 살아 움직이면서 사람을 산 채로 잡아먹는다더군.”
그냥 둘 다 혀를 잘라 버릴까.
생각하던 이안은 문득 굳어졌다.
캐릭터 설명에서 고대의 후예 어쩌고 하는 문구를 봤던 기억이 불현듯 되살아나서였다.
그래서 검은 벽의 광기에도 휩쓸리지 않는다고 했던가.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 밀림이 날 살려두려 하진 않았었는데.
그가 새삼스럽게 자신의 육체에 대한 고찰에 빠진 중에도, 필립과 미구엘은 쉬지 않고 떠들어 댔다.
“…그쯤 하는 게 좋겠군.”
메브가 입을 연 건, 이안이 망국의 왕실 혈통일지도 모른다는 데까지 이야기가 전개됐을 무렵이었다.
“실언이 과했다, 필립. 미구엘.”
평소보다 싸늘한 목소리에 필립과 미구엘이 화들짝 머리를 조아렸다.
“예. 죄송합니다, 나리.”
“그, 죄송하게 됐습니다….”
메브가 위층을 턱짓했다.
“이만 마시고 올라가거라. 둘 다.”
“…예, 알겠습니다.”
두 사내가 순순히, 그러나 끝끝내 아쉬운 표정으로 일어섰다.
걸음을 옮기던 미구엘이 이내 필립을 돌아보았다.
“댁 때문에 이게 뭐요?”
“저 때문이라니요…? 신나서 떠들어 댄 건 당신이잖습니까.”
“말은 바로 해야지. 댁이 술까지 사면서 물어봤잖소?”
“그, 그건 사실이지만, 애초에 당신이 술을 얻어 마시려고 미끼를 던진 거였잖습니까.”
“허. 이젠 생사람도 잡으시는군.”
“뭐라고요…?”
투덕대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계단 너머로 사라졌다.
내분이 나고 지랄이야.
이안이 피식대는 사이, 메브가 입을 열었다.
“대신 사과하지. 저렇게 과음하지 못하게 막았어야 했다.”
이안은 맥주잔을 들며 대꾸했다.
“됐소. 취해서 한 말들이니.”
물론 저것들이 술에서 깨고 나면, 한동안은 숨소리도 못 내게 만들어 줄 생각이지만.
맥주를 꼴깍대던 이안은, 문득 느껴진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메브가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러고 보니, 그녀는 투구를 벗어 두고 있었다.
붉은 머리칼과 녹색 눈동자, 한쪽 턱의 흉터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나머지 갑옷은 입고 있었지만, 얼굴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전혀 다른 사람 같은 분위기였다.
“입맛이 없는 모양이지?”
이안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던 메브가 문득 말했다.
이안은 한쪽 어깨만 까딱였다.
“그럴 만한 얘기를 들었잖소.”
“그럼, 잠시 함께 걷겠느냐?”
이안의 미간이 순간 좁아졌다.
이건 또 무슨 안 어울리는 소리야.
“…혹시, 경도 취하셨소?”
메브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말려 올라갔다.
“조금은.”
저게 물이 아니었군.
이안은 그제야 메브의 앞에 놓인 잔을 바라보았다. 필립과 미구엘의 상태로 미뤄 보았을 때, 그녀 역시 첫 잔은 아닐 터였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다만, 여기서 하고 싶진 않군.”
그녀가 넌지시 덧붙였다.
듣는 귀가 너무 많다는 뜻이리라.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시시껄렁한 이유는 아니겠지.
생각하며 이안은 잔을 내려놓았다.
“알겠소. 나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