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161
161화
단정하게 빗어넘긴 흑발.
제국 양식의 검은 정복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얼굴에 기품 있는 미소를 머금은 미남자였다.
“뒷놈은 주문 쟁이 같다, 이안.”
“흡혈귀는 다 주문 쟁이야.”
“그건 안다만. 주문을 주로 쓸 것 같은데.”
마른침을 삼키는 필립의 귓가로, 샬롯과 이안의 대화가 파고들었다. 둘 다 덤덤한 말투였다.
이안이 일단 지켜 보자는 듯 어깨를 까딱이는 사이, 정복 뱀파이어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미로 저택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용살자 이안 경, 그리고 일행 여러분. 저는 저택의 집사장인 알프윈입니다. 여제의 지엄하신 명을 받들어 귀빈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너흰 귀빈을 내려다보며 맞이하나 보지?”
일행들이 저마다 자세를 다잡는 가운데, 이안이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은 알프윈이 대답했다.
“양해해 주십시오. 경께서 대화보다 행동을 우선하는 분이란 걸 이미 알고 있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처음 인사드리게 되어 영광이군요.”
“다른 방향으로 갔다면 다른 놈들이 환영해 줬겠군.”
“물론입니다. 귀빈들께서 어디로 가실지는, 저희도 알 수 없었으니까요. 애석하게도 경 덕분에, 남은 분들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만.”
“감사 인사는 사양하지.”
이안의 도발에도 알프윈의 미소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염려 마십시오. 이제 여러분들께서 들어오셨으니, 곧 다들 만나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물론… 그중엔 반가운 얼굴도 있을 테고요.”
샬롯이 낮게 으르렁댔다. 곧바로 쌍둥이를 떠올린 것이리라.
“저놈은 내게 맡겨다오, 이안. 부디.”
그녀가 내뱉는 가운데, 알프윈이 한 손을 가슴 앞에 올리며 덧붙였다.
“그 전에, 지루하지 않으시도록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푸스스, 가슴에 얹은 손에서 검은 안개가 번졌다. 이안을 내려다보는 알프윈의 미소가 짙어졌다.
“물론 저희만으로 경을 막을 수 없으리란 건 알고 있습니다만….”
안개 사이로 새카만 검의 형태가 드러났다. 날 한복판이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튀어나온 기형 검이었다. 커다란 갈고리나 원형 낫처럼 보이기도 했다. 얼굴 옆으로 검날을 드리운 알프윈이 말을 맺었다.
“다른 일행 분들은, 아닐지도 모르지요.”
“자신감 넘치는 놈이군. 말도 많고.”
분위기가 흉흉하게 가라앉는 가운데, 이안이 고저 없는 말투로 내뱉었다. 어느새 그의 전신에 붉은 신성력이 흐릿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어디, 해 봐.”
내뱉음과 동시에, 이안이 예고 없이 왼손을 털었다. 빛살처럼 날아드는 투척용 단검을 단박에 쳐낸 알트윈이 미소 지었다.
“기꺼이.”
슈확,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알프윈이 새카만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 채 쇄도했다. 가까운 거리도 아니건만, 말 그대로 순식간이었다.
샬롯이 이안의 앞을 가로막으며 튀어나온 건 거의 동시였다.
카가각-!
초승달 검과 송곳니 검이 맞부딪쳤다. 둘의 시선이 교차하는 사이.
“내려와라! 이 겁쟁아!”
필립이 아직도 넝쿨 장벽 위에 선 네이든을 검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네이든이 신경질적인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너 같으면 가겠느냐, 애송아? 난 이 위에서 절대 내려가지 않을 것이니, 어디 끌어내려 보거라.”
그가 흑단목 지팡이를 슬쩍 까딱였다. 발치에 피어 있던 커다란 장미가 툭 떨어지더니 빙글빙글 돌며 그의 옆으로 날아들었다.
회전하는 꽃잎이 순식간에 올올이 해체되더니, 그대로 새빨간 핏덩이로 화했다. 네이든의 미소가 짙어졌다.
“할 수 있다면 말이지.”
파파팟-!
동시에 핏덩이에서 붉은 가시가 쏟아져 나왔다. 필립이 화들짝 오른팔을 내뻗었다.
삽시에 피어오른 황금빛 장막이 그는 물론 옆의 메브까지 감싸며 커다랗게 번졌다. 평소보다 훨씬 크고 선명한 신성력.
장막에 닿은 피의 가시들이 타들어 가는 사이.
쩌엉-!
순식간에 몇 합을 교환하고, 힘으로 초승달 검을 떨쳐낸 샬롯이 알프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목을 틀어쥐려는 듯, 손톱이 튀어나온 손아귀를 앞으로 내뻗은 채였다.
샬롯의 힘에 놀란 듯 눈썹을 치켜 올린 것도 잠시. 알프윈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쒸엑-
“……!”
놈의 그림자 아래에서 구불구불한 단검 날이 솟구쳐 올랐다. 새하얀 피부의 여인이 단검을 내뻗으며 놈의 그림자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샬롯의 눈이 커질 찰나.
퍼억-!
미간에 투척용 단검이 박힌 여인의 고개가 뒤로 튕겨 나갔다. 뒤따라 달려든 이안이 그대로 검을 휘둘러 여인의 목을 날려 버렸다. 반사적으로 뻗었던 팔을 거둬들인 샬롯이, 오른팔을 힘껏 휘둘렀다.
콰지직-!
송곳니 검이, 이번에는 진짜 놀란 게 분명한 알프윈의 가슴팍을 길게 찢어발기며 지나갔다.
알프윈이 검붉은 피를 흩뿌리며 다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그의 등이 넝쿨 장벽에 부딪혔다. 장벽에 솟은 가시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
털썩-
반으로 잘린 여인의 머리가 뒤이어 땅에 떨어졌다. 아래턱이 없어서인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저 미간에 단검이 박힌 채, 피눈물 맺힌 눈만 깜빡댈 뿐.
퍼석, 이안이 그 머리를 밟아 으깨버리는 사이, 뒤에서 필립의 외침이 이어졌다.
“이안 나리! 어쩌죠? 저놈은 정말 내려올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이안은 대답 대신 메브를 돌아보았다. 안면 가리개 너머의 시선을 느낀 그가 옆쪽으로 고개를 까딱이는 그때.
“감이 대단하시군요, 이안 경. 제가 혼자가 아니라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알프윈이 내뱉었다. 말하는 사이에 쩍 갈라져 있던 가슴팍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었다. 심지어 걸치고 있던 옷까지 되돌아왔다.
그게 더 신기한데. 생각하며, 이안이 대답했다.
“잘.”
물론 감으로 알아챈 건 아니었다.
이안은 처음부터 놈이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저것들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연달아 떠오른 퀘스트 창 덕분이었다.
피의 마술사. 그리고 집사와 시녀들.
보이는 건 집사뿐이니, 시녀들은 어딘가 숨어 있으리라 짐작했을 뿐이었다. 이상하게 짙은 그림자를 본 순간, 그녀들이 저 안에 있으리라 확신하게 되었고.
“기습은 의미가 없겠군요.”
다시 땅에 내려선 알프윈이 팔을 펼쳤다. 그의 그림자가 넓어지더니, 그 아래에서 시녀복을 걸친 여인들이 우수수 솟아올랐다. 하나같이 구불구불한 단검을 움켜쥔 채였다.
그녀들은 자세를 다잡음과 동시에 이안과 샬롯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 빈자리를 또 다른 시녀들이 채웠다.
뭐 이렇게 많이 나와?
생각할 찰나, 샬롯이 이안의 앞으로 나섰다. 철컹대는 소리와 함께 메브도 달려왔다.
“여긴 우리가 처리하겠다, 이안.”
그녀가 이안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덧붙였다. 샬롯이 기다렸다는 듯 시녀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련없이 몸을 돌렸다.
방패를 치켜든 채 언제든 신성력을 펼칠 태세인 필립의 뒷모습이 가까워졌다.
“너도 가라. 둘을 보조해.”
“예. 감사합니다, 나리.”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인 필립이 물러났다. 마지막 순간까지, 장벽 위의 네이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였다.
“끼아아아-”
“꺄아아아악-!”
시녀들이 듣기 싫은 비명을 내지르며 싸우기 시작한 건 거의 동시였다. 이안을 내려다보는 네이든의 미간이 짜증스럽게 좁아졌다.
“제기랄…. 네 일행이 저것들을 다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거냐? 왜 이쪽으로 오는 거야?”
“주문쟁이는 주문쟁이끼리 놀아야지.”
이안이 불그스름한 마력이 맺힌 눈으로 내뱉었다. 주위의 소란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 실제로는 뒤의 기척을 면밀하게 살피고 있었지만, 네이든이 거기까지 알 도리는 없었다.
“다른 마법사들이 보면 기절하겠군. 마검사라니. 대체 너 같은 괴물이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너 같은 괴물은, 말이 되고?”
화르륵, 동시에 이안의 주위로 연달아 피어오른 불덩이들이 네이든을 향해 뿜어져 나갔다.
네이든이 망토를 휘저었다. 동시에 그의 옆에 둥둥 떠 있던 핏덩이가 방울 같은 막이 되어 그의 주위를 뒤덮었다.
퍼버버벙-
거대한 핏방울에 부딪힌 화염구가 연달아 폭발했다. 붉은 수증기가 자욱해졌다. 화염구는 단 하나도 핏방울을 뚫어 내지 못했다.
“헉-”
하지만 망토를 내리는 네이든의 얼굴에는 여유를 찾아볼 수 없었다.
쒸엑-
대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어느새 뛰어오른 이안이 쇄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약력이 어찌나 좋은지, 거의 장벽 위에 닿을 정도였다.
“제기랄-!”
네이든이 다급하게 망토를 펄럭였다. 이안이 몸쪽으로 당겼던 팔을 힘차게 휘두른 건 거의 동시였다.
쉬학-!
네이든의 몸이 누가 끈으로 당긴 것처럼 옆으로 미끄러졌다.
콰지직, 이안이 휘두른 검이 빈 허공을 가르고 장벽 윗부분에 틀어박혔다. 검날에 찢겨나간 넝쿨 단면에서 새빨간 핏물이 솟구쳤다.
“제기랄! 벽이 낮아! 너무 낮다고! 듣고 있냐, 이 멍청한 놈아?!”
네이든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마력까지 섞인 외침. 장벽에서 꾸득, 꾸드득 하는 소리가 커다랗게 번지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넝쿨 장벽이 더 높아지고 있었다.
뾰족한 가시들을 발로 차 부러뜨리고는 그 사이로 발을 내디딘 이안이,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정원을 통제하는 놈도 있나?’
우드득, 동시에 장벽에 박혀 있던 칼날이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말려 들어갔다.
미련 없이 놔 버린 이안이, 저만치의 네이든을 향해 도약했다.
휘아아악-
휘몰아친 바람이 그의 몸을 허공에서 한 번 더 떠밀었다. 장벽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도약하며 치켜든 손이 아공간을 훑고, 이내 새로운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이든의 눈에 핏발이 섰다.
“이 미친 괴물 놈…! 정말 카르하가 따로 없구나…!”
그가 다급하게 몸을 날렸다. 파라락, 망토가 펄럭이면서, 그의 몸이 순식간에 허공을 가로질렀다.
이안은 허공에서 고개만 돌려 놈의 움직임을 좇으며 혀를 찼다.
진짜 모기 같은 새끼네.
콰직!
그 와중에 장벽에 검을 내리쳐 박은 이안이, 한결 더 능숙하게 가시들을 후려치고 발로 차 공간을 확보하고는 자세를 다잡았다.
검 자루에 의지한 채 매달린 형태였다. 평소라면 꽤 힘이 들었을 자세였지만, 투쟁의 축복을 활성화한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심지어 신성력을 최소한으로만 사용하고 있음에도 그랬다.
능력치 상승 폭이 아까의 절반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어지간한 야만 전사보다 힘이 강할 터였다.
“씁….”
건너편으로 날아가는 네이든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이안의 시선이, 이윽고 난전이 펼쳐진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끼아아아아-!”
비명을 지르며 사방에서 밀려드는 시녀들은, 더이상 인간 같은 형상이 아니었다. 온통 새빨갛게 충혈된 눈과 깨진 유리 조각처럼 돋아난 이빨.
단검을 쥔 손에도 칼날 같은 손톱이 번뜩이고 머리카락은 살아있는 것처럼 펄럭댔다.
하지만 그 한복판에서 날뛰는 샬롯은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어느새 은검까지 뽑아 든 그녀는 한시도 쉬지 않고 짐승처럼 날뛰어댔다. 칼날뿐 아니라 어깨나 팔꿈치, 무릎으로 후려치는 것조차 서슴지 않았다.
그럼에도 생겨난 빈틈은 삽시에 피어오르는 황금빛 장막이 막아줬다. 방패를 바짝 치켜든 필립은 가장자리에서 방어에 주력하며 샬롯과 메브를 보조하고 있었다.
채채챙-!
그리고 지금 알프윈을 상대하는 건 메브였다. 그녀는 오목한 부분과 볼록한 부분을 어지럽게 오가는 초승달 검의 변칙적인 궤도를, 단 한 번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받아 내거나 흘리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요정의 세검을 가볍게 휘둘러 시녀의 머리를 찌르거나 목을 날려 버렸다.
손잡이로 후려치기도 했는데, 은장식이 되어 있어 뱀파이어들에겐 충분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푸욱-!
한순간, 그녀의 세검이 알프윈의 한쪽 어깨를 찔렀다. 알프윈은 두로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검날에 더 깊숙이 몸을 파고들었다. 동시에 놈의 그림자에서 구불구불한 단검과 그걸 쥔 가느다란 팔이 솟아올랐다.
푸스슷-
알프윈의 초승달 검에 그림자 같은 안개가 맺히고, 어느새 어깨 위까지 모습을 드러낸 시녀가 기척 없이 메브의 갑옷 틈을 노릴 찰나였다.
콰직-!
어느새 달려든 이안의 검이 시녀의 머리를 후려쳤다. 이안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눈을 치켜뜨는 알프윈에게로 달려들었다.
“주문 쟁이 같은 짓만 하는군.”
내뱉음과 동시에 뻗어 나간 쇠주먹이 알프윈의 한쪽 얼굴을 그대로 후려쳤다.
빠각-
아름답던 그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지며 튕겨 나갔다. 주먹에 실린 힘이 어찌나 강한지, 어깨에 박힌 칼날이 살을 찢고 나와버릴 정도였다. 바닥을 나뒹구는 놈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이안이 내뱉었다.
“방심하지 마시오.”
메브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그가 다시 내달렸다. 지나치는 과정에서 마주친 시녀들에게 검을 휘두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콰직! 서걱-
시녀들 몇이 발악하듯 달려들었지만 이안의 돌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그의 검이 버티지 못하고 부러졌다. 미련 없이 던져버린 이안은 주먹으로 시녀들을 후려치며 지나쳤다.
“캬오오오-!”
샬롯이 포효하며 이안의 뒤를 막았다. 시녀들이 비명인지 기합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어지럽게 몰려들었다.
‘더럽게 정신없네.’
생각하면서도, 이안의 시선은 저만치의 장벽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제는 고개를 끝까지 꺾어야 꼭대기가 보였다.
어느새 또 하나의 혈옥을 만들어낸 네이든.
“……!”
이안과 눈이 마주친 그가 눈을 부릅뜨더니 삽시에 주문을 완성했다. 혈옥에서 피의 가시가 소나기처럼 뿜어져 나왔다.
이안의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쿠웅- 쒸아악-!
땅이 움푹 파이면서 그의 몸이 솟구쳤다. 동시에 그의 전신에 푸른 역장이 피어올랐다.
콰지지직-!
쏟아진 피의 가시들이 그 위를 두들겼다. 그를 지나친 게 더 많았지만, 그마저도 때마침 피어오른 신성력의 장막에 막혀 증발했다.
그런데도 네이든의 입가에는 오히려 옅은 미소가 맺혔다.
이안이 그리는 포물선이 그에게 닿을 정도까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곧바로 다음 주문을 준비하면서 그가 씹어 뱉었다.
“헛 힘 쓸 시간에, 가서 저것들이나-”
잠시 빛이 번쩍이더니 그의 몸이 앞으로 새우처럼 굽어졌다.
자루가 은으로 장식된 비수가, 어느새 그의 복부에 깊이 틀어박혀 있었다. 요정의 비수.
“어, 어억…?”
네이든이 신음을 토하며 눈을 치켜떴다. 정점을 지나쳐 장벽으로 떨어지기 시작한 이안의 모습이 그의 눈에 가득 맺혔다. 옆으로 내뻗은 손에 홀연히 나타나는, 무식하게 큰 대검도.
그제야 네이든은 이안의 의도를 깨달았다.
그는 처음부터 이 위에 닿을 생각이 아니었다. 그저 투척한 단검이 절대 빗나가지 않을 만큼만 가까워지면 충분했던 것이다.
솨아아-
검신을 타고 불그스름한 빛이 번지기 시작한 순간, 네이든의 눈에 여유가 사라졌다. 그가 다급하게 복부에 박힌 비수를 움켜쥐었다.
치이익, 자루에 장식된 은이 그의 손아귀를 붉게 태웠다. 네이든이 이를 악물며 손아귀에 힘을 준 순간.
“내려와, 새꺄.”
내뱉은 이안이, 가까워지는 장벽을 향해 온 몸을 비틀며 대검을 내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