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163
163화
달려 나간 메브가 쓰러지는 그의 몸을 받아들었다.
그제야 필립의 왼쪽 어깻죽지에 튀어나온 단검 자루를 눈에 담은 이안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
흐릿해지는 검은 궤적 너머. 손을 내뻗은 알프윈이 비로소 선명해졌다. 시녀들이 쓰던 단검을 던진 것이리라.
이안의 눈동자가 새카맣게 가라앉는 그때.
“으오오오-”
뒤에서 정원사의 겁에 질린 비명과 꾸득대는 소리가 이어졌다.
멈칫한 이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연기에 휩싸인 채 허우적대며 몸을 돌리는 정원사. 그리고 다시 스멀스멀 모여드는 넝쿨들.
다시 본래의 장벽으로 돌아가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리 멀지 않아서, 지금이라면 충분히 통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안은 달려가는 대신, 짧게 입맛만 다시며 검을 고쳐 쥐었다. 그가 다시 알프윈 쪽을 돌아보려는 찰나.
솨아아-
피어오른 황금빛 장막이 넝쿨 사이를 가로막았다. 신성력에 닿은 장미 넝쿨들이 타들어 가고, 필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가십시오, 나리. 놓치면 안 될 놈입니다….”
미간을 좁힌 이안이 필립을 돌아보았다. 메브의 품에 안겨 옆으로 옮겨지는 그는, 안색이 창백한 와중에도 오른손을 내뻗고 있었다.
어깻죽지의 단검은 뽑지도 않은 채였다.
다 죽어가는 얼굴로, 무슨.
“헛소리 말고-”
“괜찮다, 이안. 가거라.”
말을 자른 건 필립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메브였다.
몸을 일으킨 그녀가 달려오기 시작한 시녀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느새 그녀의 전신에는 검붉은 신성력이 끈적하게 번지고 있었다.
세검을 고쳐 쥐며, 그녀가 덧붙였다.
“저것들은 내게 맡겨다오. 단 하나도 살려 두지 않을 테니.”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
샬롯이 이안을 바라보는 가운데, 필립의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서요, 나리. 성물의 힘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비로소 혀를 찬 이안이 몸을 돌렸다.
“버티시오. 둘 다.”
내뱉은 그가, 신성력에 타들어 가면서도 꾸역꾸역 밀려드는 넝쿨 사이로 몸을 날렸다.
필립에게 고개를 끄덕인 샬롯도 재빨리 그의 뒤를 따랐다.
퍼석-!
둘이 지나치기가 무섭게 장막이 흩어졌다. 재가 된 넝쿨들을 밀어내며, 순식간에 벽이 메꿔졌다.
장벽 너머에서 시녀들의 비명이 메아리치고, 뒤이어 붉은 섬광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벽 하나 사이라기엔 멀게 느껴지는 소리였지만, 이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렸다. 감각의 왜곡은 어차피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허우적대며 도망치는 정원사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단 한순간도 저놈을 시야에서 벗어나게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언제든 미로의 형태를 바꿀 수 있는 놈이었으니까.
만약 그렇게 놓친다면, 두고 온 동료들에게 면목이 없으리라.
“으어어어어-”
우스꽝스럽고 둔해 보이는 자세로 달리고 있음에도, 정원사는 상당히 빨랐다.
하지만 투쟁의 축복을 활성화한 이안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워어어억-!”
점점 가까워지는 이안을 돌아보며 겁에 질린 듯 울부짖던 정원사가, 곧 널찍한 공터로 들어섰다.
놈이 손의 가위를 다급하게 철컹댔다. 통로 좌우의 넝쿨들이 스멀스멀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안은 망설이지 않고 땅을 박찼다. 좁아지는 입구를 여유롭게 통과한 그가, 곧 공터를 가로지르고 있는 정원사를 향해 힘껏 검을 휘둘렀다.
혼돈력으로 증폭되고 신성력까지 실린 바람 칼날이, 놈의 두꺼운 다리를 훑고 지나갔다.
“끄어어억!”
두 다리가 허벅지 아래로 잘려 나간 정원사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뒤따라 몸을 날린 샬롯이 아슬아슬하게 공터로 들어서는 가운데, 이안이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가 정원사의 머리를 노려보며 검을 치켜들 찰나.
쒸에엑-
“……!”
불현듯 새카만 궤적이 날아들었다. 몸을 비튼 이안이 검을 떨쳤다.
검은 궤적이 잘려나가고, 거의 동시에 증발해 사라졌다.
정원사를 지나친 이안이 바닥을 구르며 착지하는 사이.
“이걸 자르다니? 역시 대단하군, 으히힛…!”
장벽 위에서 거슬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골격이 얇고 길쭉한, 거무튀튀한 가죽으로 만든 딱 달라붙는 옷을 걸친 남자였다. 가죽 두 장을 기워 만든, 코 위까지 가리는 가면까지 뒤집어쓴 채였다.
이안을 방해한 건, 그의 손에 들린 채찍이었다. 손잡이 아래로는 그림자로 만들어진 것처럼 새카맣게 아른거렸다.
“…….”
이안은 본 척도 하지 않고 벌떡 일어섰다. 고문 기술자라는 이름으로 떠오른 퀘스트 창조차 바로 닫아 버린 채, 그가 다시 정원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으, 으어어-”
잘린 다리를 주워든 채 주춤주춤 기어가던 정원사가 몸을 움츠리는 가운데.
슈확-
새카만 보호막이 원을 그리며 놈을 감쌌다. 이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표면을 힘껏 내리쳤다. 하지만 보호막은 깨지지 않았다. 부러진 건 오히려 그의 검이었다.
방해가 왜 이렇게 많아, 시발.
비로소 이안이 짜증스럽게 부러진 검을 내던지는 사이.
“저 머저리를 우리 손으로 구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역시 용살자는 무섭네. 그렇지, 언니?”
뒤에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번졌다.
“……!”
샬롯의 눈이 커졌다. 전신의 털과 갈기가 삽시에 곤두서는 듯 했다.
아공간에서 새 검을 꺼내 들면서, 이안은 장벽 위에 나란히 선 백금발의 두 뱀파이어를 눈에 담았다.
너희가 그 쌍둥이냐는 질문은 할 필요도 없었다. 판에 박은 것처럼 똑같이 생겼으니까. 또 다른 퀘스트 창이 이어졌다. 그림자 자매.
이안은 창을 닫음과 동시에 몸을 날렸다.
촤아악-!
그림자 채찍이 그가 서 있던 주위를 휩쓸고 지나갔다. 어느새 장벽 위를 내달린 고문 기술자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듣던 대로 가면을 쓴 것 같은 얼굴이군…! 네 그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지는 걸 꼭 보고 싶어, 용살자!”
진짜 전형적으로 미친 것들이네.
이안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보호막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당연하게도 빈틈은 보이지 않았다. 정원사가 회복할 때까지 시간을 끌려는 모양.
그냥 부서질 때까지 부숴 봐?
“……!”
이안의 눈매가 가늘어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쌍둥이 중 하나가 장막 위로 불쑥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이다. 첫째였다.
그녀의 붉은 눈을 마주 본 순간, 이안은 시야가 그 눈을 중심으로 왜곡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붉은 눈동자 안쪽이 기묘한 파형을 그리며 일렁였다.
눈을 마주 본 순간 홀린다더니.
하지만 이안의 의식을 완전히 빼앗을 수는 없었다. 이안은 혼돈력을 끌어올리는 것만으로, 어긋났던 감각을 단숨에 되돌렸다.
시야가 명료해짐과 동시에, 이안이 왼팔을 털었다.
퍼억-!
미간에 단검이 박힌 자매의 고개가 뒤로 튕겨 나갔다. 다음 순간 그녀가 휙, 장막 아래로 사라졌다.
그리고는 곧바로 다시 자신의 자매의 곁에 솟아올랐다.
미간에 박힌 단검을 뽑으면서, 그녀가 읊조렸다.
“역시 안 통하네. 그래도 이렇게 쉽게 떨쳐낼 줄은 몰랐는데. 너랑은 딴판이야, 안 그래 야옹아?”
동시에 고개를 돌린 자매의 얼굴에 이내 비웃음이 번졌다.
어느새 안대로 단단히 눈을 가린 샬롯이, 송곳니 검과 은검을 동시에 뽑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갈기가 고요한 살기를 머금고 일렁이는 가운데, 둘째가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걸 대책이라고 가지고 온 거야? 그 몰골로 싸울 수나 있겠어?”
샬롯이 대답 대신 몸을 날렸다.
“아, 그래. 싸울 수 있구나?”
“이번엔 또 얼마나 재롱을 부릴지 기대되네.”
낭랑한 말투와 달리 가라앉은 눈빛이 된 자매가 물러나는 가운데.
“아하하! 드디어 내게도 관심을 보이는구나!”
다시 한번 채찍을 휘둘렀던 고문 기술자가, 자신에게 달려오는 이안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놈은 그러면서도 채찍을 쥔 팔을 다시 한번 크게 털었다. 살아있는 것처럼 궤적을 바꾼 채찍이 기다랗게 늘어나며 이안의 측면을 노렸다.
이안의 주위로 마력 역장이 피어올랐다.
콰지직-
채찍은 역장에 막히고도 멈추지 않고, 오히려 그 표면을 기어올라 반대편까지 넘어갔다. 가늘어진 채찍이 기어코 이안에게 도달했다.
이안이 그 궤적 앞으로 왼팔을 내뻗은 건 거의 동시였다.
촤르륵-
채찍이 기다렸다는 듯 이안의 팔을 휘감았다. 동시에 그 안에 담긴 마력이 이안의 전신으로 퍼졌다.
파슥, 마력 역장이 깨지는 가운데 고문 기술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잡았다…! 이제 너는 내가 만든 고통 속에서 벗어날 수-?”
채찍을 끌어당기던 고문 기술자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분명 그의 마력은 이안에게 극한의 고통을 전해 주고 있건만.
이안은 비명은커녕 여전히 표정조차 바뀌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휘두르는 대로 끌려오지도 않았다.
카가각-
뒤꿈치를 땅에 찍으며 멈춰선 이안이, 채찍이 감긴 왼손으로 한 번 더 채찍 한복판을 콱 움켜쥐고는 힘껏 끌어당겼다.
으스러질 듯 자루를 쥐고 있던 고문 기술자의 몸이 휙, 그에게로 딸려 들어갔다.
마력을 밀어 넣는 동안의 채찍은 본래처럼 마구 늘어날 수 없었다.
“너, 고통을-?”
놀란 목소리로 내뱉던 고문 기술자의 눈동자에, 붉은 신성력이 가득 맺혔다.
서걱-!
눈동자 한복판에 닿은 검날이, 놈의 머리를 가로로 가르고 지나갔다. 그대로 왼팔을 뻗은 이안이 놈의 멱살을 움켜쥐고는 땅에 내리찍었다. 눈동자가 붉게 물들고, 손아귀에 화염구가 피어올랐다.
콰앙!
손아귀에서 폭발한 화염구는 고문 기술자의 가슴을 말 그대로 뻥 뚫어 버렸다. 신성력을 머금은 이안의 손은 손가락 하나조차 날아가지 않았다.
이안이 비로소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느껴. 참았을 뿐이지.”
지독한 고통이었다. 그 때문에 불필요한 신성력을 낭비했다. 하지만 무작정 손해라고만 볼 수는 없었다. 이번엔 진혈을 완전히 태워 버렸으니까.
가슴이 터지고 머리 절반이 날아간 고문 기술자가 재로 변하기 시작했다. 퍼석, 그때까지 왼팔에 감겨있던 그림자 채찍이 자루만 남긴채 사라졌다.
왼팔을 툭툭 털며 일어선 이안은, 저 반대편의 장벽 위에서 날뛰고 있는 샬롯을 눈에 담았다.
콰직-! 서걱-!
좌우로 흩어진 자매가 서로의 그림자를 번갈아 오가며 도망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샬롯은 개의치 않고 집요하게 따라붙으면서 검을 휘둘렀다. 그 과정에서 온몸에 넝쿨의 가시가 박히고, 자매들이 날리는 그림자 칼날에 살가죽이 찢어지는 것조차 아랑곳하지 않았다.
“캬오오-!”
오히려 그럴수록 더 크게 울부짖으며 날뛰었다.
이안은 그녀를 도우러 달려가는 대신, 그저 시선을 돌렸다.
그날의 일을 수없이 곱씹으며 복수를 꿈꾸던 그녀였다. 그러니 자신의 손으로 매듭지을 기회는 줄 생각이었다. 그게 성공으로 끝나건 실패로 끝나건 간에.
‘뭐, 죽게 놔두진 않겠지만.’
적어도 그게 당장은 아니겠지.
생각하며, 이안은 균열이 번지는 보호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에서 정원사가 날뛰고 있었다.
쩍, 쩌적- 쩌엉-!
곧 보호막을 깨뜨리며, 가위를 치켜든 정원사가 솟아올랐다.
놈이 멀쩡해진 몸으로 울부짖었다.
“으오오오-”
주위의 장벽이 파도치듯 꿈틀대는 가운데.
쒸에엑-!
붉은 궤적이 놈의 한복판으로 날아들었다.
가면 아래, 정원사의 눈이 커졌다.
“으워어억!”
놈이 발작적으로 가위를 내뻗었다.
***
콰지지직-
살덩이가 찢겨나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생이 샬롯의 공격을 피하는 것을 확인하던 첫째가, 눈을 치켜뜨며 옆을 돌아보았다.
“……!”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한쪽 어깨가 통째로 잘려나간 정원사의 모습이었다. 이안은 놈을 지나쳐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으워어어어억-!”
정원사가 고통에 찬 비명을 토해냈다. 마구잡이로 뿜어낸 마력이 주위의 넝쿨들을 놈의 주위로 끌어당겼다. 이안은 촉수처럼 뻗어오는 가시넝쿨을 이리저리 몸을 날려 피했다.
“조용히 있을 것이지. 모자란 녀석….”
혀를 찬 첫째가 장미 꽃잎을 입에 넣으며 마력을 끌어올린 찰나였다.
쉬학-
머리 위로 문득 바람이 불었다. 고개를 든 첫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나부끼는 새카만 갈기. 그리고 말려 올라간 채 번뜩이는 뾰족한 송곳니였다.
어느새?
내심 경악한 첫째는 그림자 가시를 내뻗으며, 동시에 그림자 속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건 샬롯이 예상한 그대로의 움직임이었다.
푸욱-!
바닥에 깔리듯 밀려들던 송곳니 검이, 그림자 속으로 떨어지던 첫째의 가슴팍을 낚아채듯 꿰뚫고 치솟았다.
“아윽…?!”
첫째의 눈이 커졌다. 눈앞이 아찔해지는 고통.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 은검이 아니었다. 그녀가 다급하게 양손을 움켜쥐었다. 멈칫했던 두 가닥 그림자 가시가 곧바로 다시 뻗어 나가 샬롯의 양쪽 옆구리를 찔렀다. 그리고는 밀어내듯 점점 더 깊이 박혔다.
하지만 샬롯은 물러나지 않았다.
콰직-!
그녀가 그대로 첫째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목덜미가 통째로 으깨질 정도의 엄청난 치악력이었다,
“언니-!”
뒤에서 자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첫째는 오지 말라고 소리치려 했다. 하지만 그건 이미 불가능한 일이었다.
치이익-
샬롯의 은검이 아주 천천히, 그녀의 복부를 가르며 파고들고 있었으니까. 살을 태우며 비스듬하게 밀려든 검날이, 이윽고 터질 것처럼 뛰는 그녀의 심장에 닿았다.
“……!”
고개를 쳐든 첫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푸스스, 샬롯의 옆구리를 꿰뚫었던 그림자 가시가 사그라들었다.
첫째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 샬롯이, 비로소 목덜미를 물고 있던 입을 뗐다. 뱀파이어의 피와 살이 입안에 가득했다. 평생 잊지 못할 복수의 맛.
“안 돼애애애-!”
찢어지는 비명이 이어졌다.
첫째를 검에 매단 채, 샬롯이 몸을 돌렸다.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다른 감각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예민했다.
울부짖으며 달려드는 기척과 그녀를 향해 밀려드는 수많은 그림자 가시들이 눈으로 보고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느껴졌다.
“…….”
샬롯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팔을 휘둘러, 재가 되기 시작한 첫째를 밀려드는 그림자 가시 쪽으로 내던졌다.
다음 순간 그녀가 몸을 날렸다.
검을 고쳐 쥐는 수인의 입에서, 짐승의 그것과도 같은 포효가 다시 한번 터져 나왔다.
***
콰지지직-!
나무 가면 한복판으로 떨어진 검이, 정원사의 목 아래까지를 세로로 가르며 멈춰 섰다.
“으… 어어억….”
나지막한 신음을 토하는 정원사의 머리가 좌우로 쩍 갈라졌다.
마찬가지로 토막 난 나무 가면이 벗겨졌다. 그 아래로 묘하게 어린 아이 같은 느낌이 드는 기괴한 얼굴이 드러났다. 피가래 끓는 소리를 토해내는 놈의 얼굴에는 순수한 고통과 두려움만이 가득했다.
잿빛으로 일렁이던 이안의 눈빛이 가라앉은 건 바로 그 직후였다.
퍼억-!
진공 폭발이 정원사의 머리와 가슴팍을 그대로 날려 버렸다. 작은 살점으로 변한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안은 그 사이로 드러난 속살에 더 깊이 검을 내리누르며 화염구를 만들어 냈다.
퍼엉-!
비대한 가슴팍이 폭발과 함께 터져 나갔다. 견디지 못한 검날이 또다시 산산이 조각났다.
이안은 여전히 무릎 꿇고 있는 정원사의 몸을 발로 차 넘어뜨렸다.
파스슥-
정원사의 몸이 힘없이 쓰러졌다. 동시에 사방에 출렁이며 뻗어 나오던 넝쿨들이 본래의 형태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반도 남지 않은 검을 휙 던져버리면서, 이안은 다음 검을 꺼냈다.
어느새 아공간에 남은 장검은 세 자루밖에는 되지 않았다.
가죽 띠에 남은 단검도 요정의 비수 뿐이었다. 눈앞에 떠오른 퀘스트 완료 창을 확인하면서, 이안은 아공간에 다시 손을 넣었다.
그가 마지막 남은 두 자루 투척용 단검을 꺼내 가죽 띠에 끼워 넣는 사이.
“……!”
눈앞으로 또 다른 퀘스트 완료 창이 떠올랐다. 집사와 시녀들.
메브가 알프윈을 죽였다는 건 전혀 놀랍지 않았다. 그보단 퀘스트 완료창이 떴다는 사실 자체가 이안을 놀라게 했다.
‘퀘스트를 받기만 하면, 꼭 내가 죽이지 않아도 상관없는 건가…?’
어쩌면 그가 메브를 동료로 인정하고 있기에 가능한 상황인지도 몰랐다.
상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끼아아아악-!”
저만치의 장벽 위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린 이안의 눈에 보인 것은 몇 개의 그림자 가시에 찔린 샬롯. 그리고 그녀의 은검에 꿰뚫려 비명을 지르는 마지막 쌍둥이였다.
비명은 곧 잦아들었다.
샬롯을 꿰뚫었던 그림자 가시들이 부스스,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이안의 눈앞으로 다시 한번 퀘스트 완료창이 떠올랐다.
샬롯이 털썩 주저앉은 건 그 직후였다.
“—-!”
그녀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울부짖었다. 전신이 그야말로 만신창이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야성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정말 성공할 줄은 몰랐는데.
내심 생각하던 이안은, 다음 순간 득달같이 몸을 날렸다.
포효를 끝낸 샬롯의 몸이 기울어지더니, 그대로 장벽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그 와중에도 양손의 검은 놓치지 않은 채였다.
촤아악-!
그녀를 받아든 이안이 장벽에 등을 부딪치며 멈춰 섰다.
여전히 안대를 뒤집어쓴 샬롯이 붉게 물든 송곳니를 드러냈다.
후련해 보이는 미소였다.
“성공했다… 이안.”
“그래. 봤다.”
대충 대답하면서, 이안은 그녀의 상태부터 살폈다.
몸 곳곳에 가시가 잔뜩 박혀 있었다. 넝마가 된 부츠 아래로 드러난 맨발과 다리, 팔뚝에는 특히 더 많았다. 거기다 몸 곳곳에 긁히고 찔린 상처도 여럿이었다.
아무리 생명력이 뛰어난 수인이라도 단시간에 회복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마경 한복판에서는 특히.
이안은 곧바로 문신의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그녀의 몸속으로 밀어 넣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마력과 혼돈력을 능수능란하게 다뤄 온 입장에선 별반 다를 것도 없는 일이었다.
“…이건?”
움찔 어깨를 떤 것도 잠시, 샬롯이 이내 내뱉었다.
“힘을 아껴라, 이안. 나는 잠깐 쉬기만 하면 돼.”
“입 다물어. 널 여기 두고 갈 건데, 그냥 버려둘 수는 없거든?”
“그런 거라면….”
샬롯에게 흘러든 카르하의 신성력은 곧바로 흩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몸에 뭉근하게 고였다가 이윽고 전신으로 번졌다.
어쩌면 자신만의 투쟁을 완수한 전사를 알아본 걸지도 몰랐다.
샬롯의 표정이 조금씩 편해질 찰나.
“이런… 한 발 늦어 버렸군….”
반대편 통로 쪽에서 나지막한 탄식이 번졌다. 번쩍 고개를 치켜드는 샬롯의 머리를 다시 꾹 내리누르면서, 이안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눈에 담았다.
지금까지의 뱀파이어들과 달리, 비쩍 마르고 볼품없게 생긴 중년 남자였다. 머리털은 물론, 눈썹이나 수염도 없어서 한층 더 기괴한 인상이었다.
게다가 발 아래 드리운 그림자가 이상할 정도로 거대했다.
“뭐… 상관 없겠지….”
의욕 없이 중얼댄 그가 팔을 들었다. 그림자에서 거대한 형체가 솟아오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여러 개의 인간 몸통을 커다란 덩어리로 이어붙인 몸체에, 수많은 팔다리가 제멋대로 돋은 거대한 실험체였다.
“……!”
이안의 눈앞으로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그 글자들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거대한 실험체의 몸체 위, 홀로 불쑥 솟아 있는 상반신에 고정되어 있었다.
창백한 은발. 비쩍 마른 어깨. 그리고 낯익은 이목구비.
이안이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춘 그때, 붉은 안광이 번졌다.
“드디어 왔구나… 계속 기다렸어.”
이어진 목소리에, 누워있던 샬롯의 고개가 다시 번쩍 위로 올라왔다. 이번에는 이안도 막지 않았다.
“그럼 이제….”
굳어진 이안과 더듬대는 손길로 안대를 쥐는 샬롯을 번갈아 바라 본 테사이아가, 우는 듯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나 좀 살려줘, 얘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