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166
166화
3층 높이의 대저택은 담장도 없이 우뚝 솟아 있었다.
본래는 정원에 둘러싸인 모습이었겠지만. 지금은 제법 거리가 떨어진 녹지에 홀로 지어진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모든 창문과 대문이 활짝 열려 있기까지 했다. 어서 들어오라는 듯이. 그 주위를 붉은 꽃잎들이 자욱하게 흩날리며 떠다녔다.
나풀대는 꽃잎들이 저택의 열린 창문으로 자연스럽게 들락거렸다.
수천 마리의 나비 떼에 둘러싸인 괴물의 얼굴처럼 보이기도 했다.
지긋지긋하네 정말.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게임에서의 기억이 절로 겹쳐졌다.
그때의 저택 지하에는 부지만큼의 지하 공간이 있었다.
여러 타락자나 마족이 그렇듯. 뱀파이어 들도 신의 시선이 닿지 않은 지하에 본거지를 지어 둔 것이다.
연구실과 고문실. 또 다른 지하 동굴로 통하는 비밀 통로. 그리고 여제의 알현실 같은 것들이 위치한, 일종의 간이 지하 궁전.
지금은 그때와 달리 본래의 여제가 그곳에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를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로.
“…….”
활짝 열린 대문 앞으로 누군가 모습을 드러낸 건 바로 그때였다.
제국식 정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노인이었다.
눈앞으로 퀘스트 창이 이어졌다.
여제의 반려.
…반려?
이안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갈 찰나.
“피곤해 보이시는군요. 이안 경.”
노인, 니그리안테 백작이 입을 열었다. 그가 정중하면서도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안심하십시오. 나는 어디까지나 귀하의 길잡이로 이곳에 있습니다. 함께 가시지요. 여제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가 말을 이어 가는 동안, 이안의 걸음은 점점 더 빨라졌다. 그러다 끝내는 달리는 형상이 되었다.
그가 허리춤에서 검까지 뽑아 들자, 비로소 백작이 미소 지었다.
“싸울 생각이 없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이미 많은 힘을 소진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힘을 아끼시고-”
“그럼 목만 내밀고 있어라. 깔끔하게 처리해 줄 테니.”
이안이 달리며 내뱉었다. 백작의 미소가 짙어졌다.
“제 안내 없이는, 여제께서 계신 곳을 찾기 어려우실 겁니다.”
“글쎄. 지하에 있는 거 아닌가?”
“……!”
바로 정답이 나올 줄은 몰랐다는 듯, 백작의 눈이 설핏 커졌다. 이안은 더 덧붙이는 말 없이 달려왔다. 이윽고 백작이 헛웃음을 흘리며 손을 내뻗었다.
“어쩔 수 없군요.”
주위에 나풀대던 꽃잎들이 쏜살같이 그의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사이에 저마다 하나씩의 핏방울로 변한 채였다. 백작이 손을 털었다. 삐죽대던 핏방울들이 산탄총처럼 뿜어져 나갔다. 다른 점이라면 총구가 아니라 넓은 면적을 점령하고 밀려든다는 사실 뿐이었다.
이건 거의 크레모아 아닌가?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멈추지 않았다.
푸확-!
동시에 치솟은 돌풍이 날아드는 핏방울을 흩어버렸다. 전부 튕겨 나간 건 아니었지만, 나머지는 검과 팔뚝으로 얼굴을 가린 채 맨몸으로 견뎌냈다.
“역시, 어림도 없군요.”
하지만 백작은 놀란 표정도 짓지 않았다. 이안의 속도를 조금 늦춘 것만으로도 충분한 모양이었다. 어느새 그의 전신이 거뭇한 연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새카만 연기 덩어리가 된 그가 쏜살같이 저택 안으로 멀어졌다.
그가 지나친 경로에 나울대던 꽃잎들이 작은 소용돌이를 그리며 휘몰아쳤다.
‘모기 새끼들은 튀는 걸 너무 좋아한다니까.’
유전자에 새겨져 있나.
혀를 차면서도, 이안 역시 저택으로 들어섰다.
백작의 뒤를 쫓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가 지나친 궤적을 따라 꽃잎들이 빠르게 회전하며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텅 빈 복조를 지나친 이안은 곧바로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다음 복도로 들어섰을 때, 검은 안개로 변한 백작은 이미 저 멀리의 코너를 돌고 있었다. 그 뒤를 따라 휘몰아치는 꽃잎 사이로 이안도 질주했다.
밀려나기 전에 그의 몸에 부딪힌 꽃잎들이 핏방울이 되어 끈적하게 터져 나갔다.
피비린내가 가시질 않네, 진짜.
생각하던 이안의 눈빛이 이내 묘해졌다.
백작이 그저 단순히 도망만 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채서였다.
‘길잡이라더니.’
게임에서 저택의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는 3층, 여제의 집무실 뒤에 위치해 있었다.
그때보다 저택이 훨씬 커진 지금도, 그런 기본적인 요소까지 달라지지는 않았을 터였다.
역시나. 길고 구불구불한 통로를 지나, 백작의 흔적은 3층까지 이어졌다.
계단을 올라 또 다른 복도로 들어선 이안은, 흔적을 뒤따르며 커다란 창밖을 바라보았다.
온통 붉은 녹지와 붉게 변색되고 있는 미로 정원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사이 어딘가에 있을 일행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어느새 완전히 붉어진 초승달의 모습만큼은 선명하게 눈에 각인 됐다. 밤하늘의 테두리를 따라 번지는 먹구름의 소용돌이도 태풍처럼 빠르고 거셌다.
두족류의 눈알 같아 보일 정도였다. 저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철컥. 쿠구구구구-
그때, 저 멀리서 기관 장치가 작동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휘몰아치는 꽃잎을 따라 복도 끝의 열린 방 안으로 들어선 이안은, 이내 입가에 흐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고급스러운 장식과 가구로 가득한 집무실 너머.
벽면이 통째로 돌아가면서 숨겨진 원형 계단의 입구가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백작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아마 지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더럽게 친절하네.’
나풀대는 꽃잎을 손으로 튕겨 터뜨리며, 이안은 계단을 내려갔다.
사방이 벽으로 가득해졌지만, 계단은 전혀 어둡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꽃잎들이 은은한 붉은빛을 뿜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안은 원을 그리며 이어진 계단을 멈추지 않고 내려갔다.
“…….”
한참 이어지던 계단은 갑작스럽게 끝났다. 동시에 계단 주위를 막고 있던 벽도 사라지고, 널찍한 지하 공간이 드러났다.
널찍하고 길게 이어진 통로 좌우로, 벽에 박힌 마석이 뿜어내는 빛이 은은하게 번졌다. 높다란 천장 인근에는 붉게 일렁이는 꽃잎들이 수없이 떠다녔다.
뭐, 밝아서 좋네.
이안은 넓고 길게 이어진 통로를 나아갔다. 좌우로 이어진 밀실들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저 앞의 커다란 대문 앞에 백작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달릴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이제 저놈이 도망쳐 봐야, 갈 곳은 여제의 알현실뿐이었다.
이안과 눈이 마주친 백작이 주름진 미소와 함께 허리를 숙였다.
“이곳이 귀하의 종착지가 되길,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번진 다음 순간, 그가 그대로 손을 들어 자신의 목 앞을 그었다.
푸확, 잘린 목 단면에서 피가 튀었다. 그 사이로 번진 진혈이 대문의 틈 사이로 빨려들어 사라지고, 백작의 몸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자결이라니.
이어진 퀘스트 완료 창을 닫아 버리며, 이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혹여라도 그에게 진혈을 잃기 전에 그냥 죽음을 택해버린 모양이었다. 여제에게 반드시 자신의 진혈을 전해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마족 충신이라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정말 여제를 사랑하기라도 했던 건가.’
생각하며, 이안은 재가 되어 바스러지는 백작의 시신을 밟고 지나쳤다. 그리고는 양손을 뻗어 천장까지 이어진 대문을 힘차게 밀었다.
쿠구구구-
그의 기억보다 더 큰 여제의 알현실이 드러났다.
‘하여간 두더지 같은 것들.’
이안은 심드렁하게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알현실의 천장에도 꽃잎들이 가득했다.
바람이 불지 않음에도 붉은빛을 흘리며 나풀나풀 날아다녔다.
그 아래로, 의자 대신 황금으로 만든 커다란 원통이 솟아 있었다.
황금 잔이나 화로처럼 보이기도 했다. 표면에 루비를 중심으로 한 보석이 호화롭게 박혀 있었고, 빽빽하게 새겨진 고대어 주문 회로가 은은한 붉은 빛을 흘렸다.
게임에서도 본 적 있는 물건이었다. 황금 욕조. 저게 흡혈 일족의 권좌이자 성물이었고, 그때는 지금과 달리 테사이아가 가장자리에 비스듬하게 누워 있었다.
물론 저렇게 마력을 머금고 있지도, 피가 가득 차 있지도 않았다.
번지는 피 냄새에 코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옆으로 손을 뻗은 이안이 아공간에서 군단장의 대검을 꺼내는 사이.
솨아아-
황금 욕조에 넘칠 듯 고여 있던 핏물 표면에 파장이 일었다.
넘친 핏물이 욕조 표면을 붉게 물들이며 흘러내리고, 그 안에서 황금색 머리칼을 가진 여인이 솟아올랐다.
장인이 공들여 빚은 듯한 이목구비. 피처럼 붉은 눈동자. 어깨 아래까지 이어진 금발과 흰 피부.
방금까지 피로 가득한 욕조에 들어가 있었음에도, 그녀의 머리칼과 피부는 기름을 바른 것처럼 산뜻한 윤기가 흘렀다.
이안의 눈앞으로 퀘스트 창이 이어졌다.
진혈의 주인.
“…….”
이안은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곧바로 달려들지 않은 건, 욕조에 응집된 엄청난 양의 마력 때문이었다. 이미 완성된 주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주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게임의 황금 욕조는 그저 배경에 불과했으니까.
확실한 건, 무시하고 달려들었다간 그 대가를 치르게 되리란 사실 뿐이었다.
주문을 확인하거나, 응집된 마력이 흩어지길 기다리는 게 순서였다.
‘스킵도 못하게 만들어 두다니.’
짧게 혀를 차는 사이, 여제가 욕조 가장자리에 올라섰다.
이안은 그제야 그녀의 키가 아주 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인족만큼은 아니었지만, 2미터가 훌쩍 넘어 보였다.
아마 항상 이런 모습은 아니었으리라. 뱀파이어들의 진혈을 전부 흡수하면서, 가장 이상적인 육체로 재구성된 거겠지.
촤아아아-
그녀가 밖으로 나왔음에도, 욕조의 수위는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꽃잎들이 그 안으로 떨어지면서 더 늘어나서, 핏물이 계속 흘러넘쳤다.
욕조를 중심으로 뭉근한 붉은빛이 번졌다.
여제가 발을 뻗었다. 순식간에 모여든 꽃잎이 하나의 핏덩이로 변해 그녀의 발을 받쳤다.
그 위에 올라선 여제가 미소 지었다.
“이렇게 직접 마주 보는 건 처음이군요. 반가워요, 이안 경. 기다리고 있었어요.”
내장으로 만들어진 머리로 들었을 때와는 달리, 아주 듣기 좋은 우아한 목소리였다.
이안은 쌍둥이의 눈을 마주 보았을 때처럼, 그녀를 중심으로 시야가 일그러지는 느낌을 받았다.
여제가 의도한 것은 아닐 터였다. 단지 지금 그녀가 품은 마력이 너무 강대한 나머지, 작은 행동 하나하나까지 주문적인 힘을 지니게 되었을 뿐.
혼돈력을 끌어올리며, 이안이 내뱉었다.
“그래. 아주 철저하게도 준비하고 기다리셨더군.”
“그게 당신이 바란 것 아니었나요? 덕분에…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명분이 생겼으니까.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여제의 눈매가 우아한 호선을 그렸다.
“당신이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꿔 주는 것뿐이에요. 원하는 건 모두 얻지 않았나요? 기어코 그 가여운 아이도 살려냈고. 여기서 멈춘다면, 나는 조용히 루 사드를 떠날 거예요. 당신은, 당신의 여정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겠죠. 나는 아직도 당신이 싫지 않거든요.”
일말의 긴장감이나 분노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오히려 후련하고, 조금은 설레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안은 지금 그녀의 말이 전부 진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제는 정말 이 땅을 떠나고 싶은 것이다.
“걱정 마라. 충분히 싫어지게 만들어 줄 테니까.”
“안타깝군요. 우리가 끝까지 싸운다면, 이득을 보는 건 전혀 다른 자들일 텐데요. 나와 일족의 자리를 노리는 것들. 우리를 이용하려는 자들. 당신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이들…. 하지만 당신이 마음을 바꾼다면, 아니, 그걸 넘어 내 손을 잡아준다면 상황은 전혀 달라질 거예요. 어때요?”
여제가 길고 흰 손을 슬며시 앞으로 내밀며 미소 지었다. 이안의 시선을 순간 요동치게 하기엔 충분했다.
“마침, 나는 방금 다시 혼자가 된 참인데.”
끌어올린 혼돈력을 신성력에 섞어 넣으면서, 이안이 내뱉었다.
“널 위해 자결한 남편이 들으면 서운해 하겠군.”
“물론 마음 아픈 일이지만…. 그도 알고 있었어요. 언젠간 이렇게 되리란 걸.”
“거절하지. 위대한 사랑 따위엔 관심 없거든. 그보단….”
“……?”
“네가 줄 경험치에 관심이 있지.”
내뱉은 이안이 달리기 시작했다. 욕조에 응집되어 있던 마력이 사그라든 것과 거의 동시였다.
대검을 늘어뜨린 채 질주하는 그를 바라보며, 여제가 옅게 미소 지었다.
“아쉽군요. 아니, 차라리 잘 된 걸지도 모르겠어요. 강제적인 걸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죠.”
그녀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동시에 욕조에서 흘러나와 흥건하게 번지던 핏물이 일제히 솟아올랐다. 피는 순식간에 하나하나가 화살만 한 크기의 가시로 변해 뿜어져 나갔다.
이안의 전신에 맺힌 붉은 신성력이 타올랐다. 대검을 몸 앞에 비스듬하게 치켜든 그가 넓적한 검면 뒤에 몸을 숙였다.
카가가가가-
피의 가시가 폭풍처럼 그 위를 두드렸다. 하지만 이안의 돌진을 멈추지는 못했다.
여제가 다시 한번 손을 까딱였다.
검면에 부딪쳐 흩어졌던 핏방울들이 다시 가시가 되어 뭉쳤다.
동시에 그녀의 발아래에서 솟구친 거대한 그림자 칼날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칼날과 가시에 포위당한 형상.
슈확-!
이안이 뛰어오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전신에 맺혀 있던 바람이 그를 힘껏 떠밀었다. 삽시에 천장 가까이 솟구친 이안이 단숨에 여제를 향해 밀려들었다. 오른손으로 으스러질 듯 움켜쥔 대검이 붉은 궤적을 그리며 뻗어 나갔다.
쏜살같이 여제의 앞으로 날아든 꽃잎들이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로 뭉치더니 이내 딱딱해졌다.
얼음 결정 같은 형태였다.
콰지지직!
이안의 대검이 그 한복판을 후려쳤다. 방패 전체에 균열이 번졌지만, 어쨌거나 깨지지는 않았다. 응축된 마력이 만들어 낸 반발력이 이안을 허공에 멈춰서게 했다.
하지만 붉은 마력이 휘몰아치는 이안의 눈동자에는 전혀 실망한 기색이 없었다.
솨아아-
솟구쳐 쇄도하는 그 잠깐의 사이에, 이미 주문이 완성되었으니까.
방패 너머, 여제의 여유로운 얼굴을 응시한 이안이 왼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허공을 움켜쥔 것처럼 오므린 손 한복판, 맹렬하게 회전하는 정수가 빛났다.
여제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 다음 순간.
콰아아아아아-
용의 숨결처럼 터져 나온 불길이 그대로 피의 방패를 불태우고, 여제의 전신을 집어삼켰다.
눈부신 섬광과 열기가 장내를 가득 채웠다. 이안은 허공에서 뒤로 튕겨 나가면서도 끝까지 불길을 여제에게서 떨어뜨리지 않았다.
열기에 타들어 간 꽃잎과 핏물이 붉은 수증기로 변해 자욱해졌다.
푸스스-
이윽고 불길이 잦아들었다. 허공을 돌아 떨어져 내리면서도, 이안은 새카만 덩어리만 남은 여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철퍽-
그가 피로 흥건한 바닥에 착지한 순간, 그녀가 재가 되어 흩어졌다.
붉은 수증기가 허공에 맹렬한 소용돌이를 만들어 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슈화아아아-
거대한 붉은 보호막 속에서, 여제의 전신이 순식간에 재생성되기 시작했다. 붉은 속살을 훤히 드러낸 채로, 여제가 미소 지었다.
“역시 대단하군요, 이안. 꼭 한번 직접 경험해 보고 싶었는데. 기대 이상이에요.”
그래, 이렇게 쉽게 죽을 리가 없지.
이안의 입가에 쓴웃음이 스쳤다.
여제가 덧붙였다.
“원하는 만큼 계속해 보세요. 당신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몇 번이고 죽어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