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172
172화
돌덩이를 집어 던지는 샬롯과 잔해 사이에 상반신을 파묻은 테사이아의 뒷모습을 눈에 담으며, 이안은 짧은 헛웃음을 흘렸다.
저걸 정말 하고 있다니.
심지어 수확도 있어 보였다.
“와! 또 금화! 말했지? 이것들, 부자라니까?”
그것도 제법 많이.
주머니를 들고 기어 나온 테사이아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샬롯을 돌아보았다.
“별거 아니라고 큰소리치더니. 잘 좀 해 봐, 야옹아. 계속 돌만 집어 던진다고 뭐가 나오는 게 아니라니까? 앗, 이안! 일어났어?”
걸음을 옮겨 전리품이 쌓여 있는 평평한 돌 근처로 다가가던 테사이아가, 이윽고 이안을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고, 테사이아가 보란 듯 돈주머니를 전리품 사이에 떨어뜨리는 사이.
“깨어났구나, 이안.”
낮게 그르렁대며 입맛을 다시던 샬롯도 홱 이안 쪽을 돌아보았다.
“그래.”
대답한 이안이, 자신 쪽으로 다가오려는 샬롯을 향해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살만 하니까,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거 계속해.”
“…그래도 될까?”
멈칫한 샬롯이 되물었다. 눈에 은은한 승부욕이 맺혀 있는 걸 보니, 저 전리품을 누가 더 많이 발굴했는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그래. 잘 됐지. 장비도 죄다 박살 나고 주머니도 홀쭉해졌는데. 엄선은 나중에 해도 되니까, 열심히들 해 봐.”
“그렇게 말한 다면야….”
고개를 끄덕인 샬롯이 몸을 돌렸다. 테사이아는 이미 네발로 기어 다니며 잔해 사이를 관찰하는 중이었다.
아주 잘들 노는군.
피식댄 이안이 시선을 거뒀다.
말과 마차가 없으니 찾은 걸 전부 들고 갈 순 없겠지만, 어쨌든 가계에 꽤 보탬이 될 터였다.
운이 정말 좋다면 값진 보물이라도 하나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르고.
고소한 냄새가 가까워진 건 그때였다.
“샬롯이 저렇게 즐거워하는 건 처음 봅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테사이아가 하자는 건 다 하더군요. 둘이 확실히, 보통 사이가 아닌 모양이에요.”
필립이 스튜가 담긴 그릇을 내밀며 말했다. 가장자리가 깨진 걸 보니, 여기서 파낸 물건을 대충 씻어 온 모양이었다.
“둘의 목숨이 하나였으니까. 보통 사이는 아니지.”
접시를 받아들며 대답한 이안이 메브를 돌아보았다.
“아쉽게 됐소. 기대한 바가 있으셨을 텐데. 저 녀석은 더는 마족이 아니거든.”
그가 접시를 들어 스튜를 입에 가져갔다. 뜨끈한 온기가 식도를 타고 흘러들면서, 잊고 있던 허기가 밀려들었다. 육포와 알 수 없는 보존 식량들을 넣고 끓인 꿀꿀이 죽이었지만, 천상의 맛이 따로 없었다.
하긴 생각해 보니 꼬박 하루 이상을 먹은 게 없었다. 심지어 부상 중이 아니던가.
“잘된 일이니 전혀 아쉽지 않아. 오히려 새로운 기적을 본 느낌이다. 누군가 타락하는 것은 보았어도, 그 반대의 경우는 처음이니.”
선선히 대답하며, 메브가 이안의 접시에 수저를 얹어 줬다.
이것도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다들 현지 조달 전문가가 다 됐군.
이안은 내심 웃고는 수저를 쥐었다. 정신없이 먹는 그를 바라보던 메브가 이윽고 말을 이었다.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만. 실제로 보니 정말 놀라운 회복력이구나. 고작 하루 만에 이렇게까지 멀쩡해지다니. 적어도 며칠은 요양해야 하고, 회복까지 한 달 이상은 필요할 줄 알았다.”
“겨우 움직이기만 하는 수준이오. 아직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한 이안이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회복이 극도로 빠른 건 딱 지금 수준까지일 터였다.
컨디션이 온전해지려면 적어도 일주일에서 열흘은 더 필요하리라.
물론 전투가 끝난 직후의 몸 상태를 생각하면, 그것도 충분히 초인적인 회복력이라 할 수 있었다.
그가 다시 입을 연 건 접시가 다 비워져 갈 때쯤이었다.
“경은 괜찮으시오?”
“보다시피. 부끄럽구나. 다들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웠건만, 나만 멀쩡하다니.”
“잘 됐지, 부상자들의 안전을 책임질 사람이 하나는 있어야 하잖소.”
“그래, 그건 내 당연한 의무다.”
이안을 마주 본 메브가 다짐받듯 말을 이었다.
“당분간은 내가 선두에 설 거야. 너는 절대 무리하지 말고 회복에만 전념하도록 해.”
안 그래도 그럴 거다.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접시에 남은 걸 한입에 털어 넣었다.
필립이 스튜를 한 국자 더 퍼서 다가온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어쨌건, 결과적으로 루 사드는 구원 받은 셈입니다. 마족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났으니까요. 글루미르 시나 다른 영지의 상황이 좋을 것 같진 않습니다만…. 어쨌든, 생존자들은 전보다 훨씬 안전하게 삶을 이어갈 수 있겠죠.”
“글쎄….”
잠시 침음한 이안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수저를 들었다.
슬쩍 미간을 좁혔던 필립이, 이내 그의 의중을 알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영주들이 다 죽었으니 혼란이 시작될 거란 말씀이시군요. 전쟁 중이기도 하고요. 염려 마십시오. 정말 모든 귀족이 죽은 건 아닐 테니, 적법한 대체자가 있을 겁니다. 마침 국경도 봉쇄 중이라, 다른 왕국까지 소식이 바로 들어가지도 않을 테고요. 혹 내부의 갈등이 심화되더라도….”
오른손의 반지를 내려다본 그가 덧붙였다.
“교단의 조사단이 그리 늦지는 않을 겁니다. 아무리 변방에 무심해도, 이만한 괴현상까지 방치하지는 않겠지요. 어쩌면 정화대를 파견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곳의 사정을 알게 되면, 당연히 적극적으로 개입할 테고요. 물론 기부금을 왕창 뜯어내긴 하겠습니다만….”
“…그래, 뭐. 그럴지도 모르지. 다른 더 큰 문제들이 일어나지만 않는다면야.”
심드렁하게 대꾸한 이안이 식사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메브와 필립의 표정은 대번에 심각해졌다. 이안을 가만히 바라보던 메브가, 이윽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른 더 큰 문제가… 생길 거란 말이냐?”
“당장 할 얘긴 아닌 것 같소.”
이안이 수저를 놓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묘하게 조용해진 샬롯과 테사이아 쪽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이미 진작부터 뭔가를 느낀 듯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이안 쪽도 힐끔대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둘에게 고개를 슬쩍 끄덕인 이안이 덧붙였다.
“지금은 손님들을 맞을 준비부터 해야 할 것 같으니까. 우리가 주인은 아니지만.”
“……!”
그제야 메브와 필립도 폐허의 비탈길 위로 시선을 돌렸다.
메브가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고, 샬롯과 테사이아도 서로 간격을 좁히며 일행의 앞을 가로막듯 서는 가운데.
저벅- 저벅-
비로소 발걸음 소리가 조금씩 선명해졌다. 아주 조심스럽고 주춤대는 기척들이었다.
곧 같은 종류의 창과 방패, 방어구로 무장한 일련의 병사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제기랄, 정말 있다니….”
“고기 끓이는 냄새가 착각이 아니었군…. 루 솔라시여….”
다만, 그들은 하나같이 겁에 질린 얼굴들이었다.
폐허 한복판의 일행에게 제대로 무기를 겨눌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서로를 돌아보며 수근댔다.
“보아하니 글루미르 시의 주민들은 무사한 모양이군.”
마법 같은 걸로 재워 두기라도 했었나 보지.
이안이 심드렁하게 읊조리는 가운데, 필립의 속삭임이 이어졌다.
“그런데 왜들 저렇게 겁을 집어먹었답니까? 역시, 이 폐허 때문일까요?”
“진심으로 묻는 거냐? 저택 밖의 시체들을 봤겠지. 정원에도 여럿 널브러져 있을 테고.”
“…아. 그랬겠군요. 너무 당연한 것들이라 의식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필립이 머쓱하게 볼을 긁적였다.
지금 저 밖은 지금 말 그대로 지옥도나 다름없을 터였다.
그 광경을 보고서도 여기까지 들어온 저 병사들의 배포가 오히려 대단하다 할 수 있었다.
‘하긴. 저택이 사라졌으니 안 와 볼 수는 없었겠지만.’
어쨌건, 이안이 염려한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적어도 저들은 대화는 통할 것 같아 보였으니까.
물론, 귀찮아 지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러기 전에 뜨고 싶었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상황을 잘 이용해 볼 수밖에.
이안이 내심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전부 모여든 병사들이 움푹 함몰된 폐허의 가장자리에 늘어섰다.
그들 사이로 말 탄 기수의 모습이 드러났다.
마흔쯤 되어 보이는, 루 사드의 문장이 새겨진 서코트를 걸친 기사였다.
병사들의 지휘관일 터였다.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긴장이 가득한 얼굴임에도, 그는 자신의 의무를 잊지 않았다.
“나는 니그리안테 백작을 섬기는 글루미르의 기사, 오스릭이오! 그대들의 정체를 밝히고,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를 낱낱이 고하시오! 그러지 않는다면… 적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소…!”
그가 용기를 쥐어 짠듯한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눈에 힘을 주고 있긴 했지만, 초조함과 떨림이 묻어나오는 것까진 감추지 못한 채였다. 아마 내심, 부디 그들이 협조해 주길 바라고 있을 터였다. 그들이 본 광경을 만들어 낸 장본인들이 이안 일행이라는 걸 모를 리 없었으니까.
물론 이안은 그들과 굳이 싸울 생각이 없었다. 경험치조차 없는, 무의미한 살육이 될 테니까.
게다가 해결책도 간단했다.
‘썩 내키는 방식은 아니지만….’
오스릭을 바라보던 이안의 시선이, 이내 아래로 내려갔다.
역시나, 샬롯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나서도 되겠냐는 듯한 눈빛.
거기다 메브와 필립도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이안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긴장감이 없구만.
어깨를 까딱인 이안이 말했다.
“짧고 간결하게.”
샬롯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턱을 살짝 치켜든 그녀가, 이윽고 그르렁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춰라. 여기 계신 이분은 엄정한 여신의 성전사이자 타오르는 여신의 불씨의 운반자, 거인 왕국 최후의 징벌자이며 북부의 진정한 대전사-”
“……?!”
오스릭을 비롯한 병사들의 눈이 점점 커졌다. 샬롯은 그들 하나하나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심장을 찌른 용살자이자, 백금룡의 공식적이며 유일한 대행자. 이제는 왕국을 암중에서 지배하던 흡혈 일족을 처단하고 루 사드를 구원하기까지 하신, 북부의 초인, 이안 호프 경이시다!”
짧게 하라니까….
적막이 내려앉는 가운데, 이안이 소리 없이 입맛을 다셨다.
오스릭과 병사들은 말 그대로 멍한 얼굴들이었다.
놀랍지도 않았다. 저 장황한 칭호들을 한 번에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그게 더 놀랄 일이었다.
이윽고 오스릭이 입을 달싹였다.
“흡혈… 일족이라니… 그게 무슨… 루 사드가, 마족의 지배를 받고 있기라도 했다는… 말이오?”
아, 역시 그게 제일 충격인 건가.
생각할 찰나, 필립이 슬쩍 그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저도 거들어도 되겠습니까?”
“…….”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내친걸음이니, 다른 주접이 더해진다 해서 달라질 것도 없으리라.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나선 필립이 소리쳤다.
“방금 이안 경의 종자가 한 말은 전부 사실입니다! 이는 루 솔라의 신도이자 티르 엔의 사도. 약자들의 구원자이며 정당한 복수의 대행자인 붉은 기사, 메브 리우렐 경의 이름으로 보증합니다!”
“복수의…? 귀공이… 그, 붉은 기사란 말씀이시오?”
“저는 경의 종자인 필립입니다.”
깍듯하게 대답한 필립이, 옆의 메브를 향해 손을 받쳐 들었다.
가뜩이나 벌어져 있던 오스릭의 입이, 메브의 녹색 눈을 마주한 순간 더 크게 벌어졌다.
그 명성이 자자한 붉은 기사가 여인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모양. 메브가 입을 연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붉은 기사, 메브 리우렐이오. 그리고 지금은, 북부의 초인인 이안 호프 경을 섬기고 있지.”
“……?”
이안이 돌아보았음에도, 메브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이안 경께서는 뱀파이어들이 루 사드를 지배하고 있음을 알고, 그들과 목숨을 걸고 싸우셨소. 그리고 끝내 그 저주받은 족속들을 전부 격퇴하고 루 사드를 구원하셨지. 이는 찬란한 여신과 엄정한 여신께서 지켜보셨으며, 투쟁의 신께서도 가호한 성전이었음이니.”
병사들을 한차례 돌아본 메브가 덧붙였다.
“모두 무기를 거두고 합당한 예를 갖추시오. 무지로 저지른 무례에는 죄를 묻지 않을 것이나, 알고도 행하지 않음은 신성 모독이요, 또한 마족을 섬겼음을 자백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
이안의 한쪽 눈썹이 말려 올라갔다.
입을 연 것도 드문 일인데, 거기다 한술 더 뜨기까지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