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177
177화
이안은 희미하게 번지기 시작하는 소음을 귀에 담으며, 바닥에 놓인 사슬 갑옷을 집어 들었다.
‘흡혈 일족과 관련된 마족인가? 아니면 원탁?’
어느 쪽이건 자신의 실력은 물론이고 흔적을 남기지 않을 자신도 있는 놈, 혹은 놈들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성을, 심지어 정문을 부수며 침입할 생각 따윈 하지 못할 테니까.
사슬 갑옷 위에 판금 흉갑을 걸치는 이안의 뇌리로, 자연스러운 가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만약 정말 그를 노리는 거라면, 본래는 도시 밖에서 그를 기다릴 계획이었으리라.
하지만 성문이 활짝 열려 있고, 병력이 앞다퉈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는 생각을 고쳐먹었겠지. 도시로 들어와 남은 병력이 거의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엔, 정문으로 쳐들어가도 되리란 자신감까지 얻었을 테고.
미로 저택 앞에 펼쳐진 광경도 다 봤을 테니, 시간을 오래 끌고 싶지도 않았을 터였다. 이안이 요양 중이라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을 테니까. 완전히 회복하기 전에 끝장을 내려는 심산이겠지.
‘날 죽이고 도시를 빠져나갈 자신이 있는 건가. 아니면, 목격자를 전부 죽일 자신이?’
물론 그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또 다른 세력일 수도 있었다. 선수를 쳐서 글루미르로 쳐들어온 옆 영지의 특공대라든가.
물론 그렇다 해도 딱히 달라질 건 없을 터였다.
물론 그는 내전 따위에 개입할 생각 같은 건 없었지만. 이런 짓을 벌인 놈들이 그런 뜻을 순순히 받아들일 리 없었다.
“이게 무슨 소리… 엥…?”
뒤늦게 밖의 소란을 듣고 일어난 필립이, 바쁘게 준비 중인 일행을 멍하니 눈에 담았다.
곧 잠이 달아난 얼굴이 된 그가 튕겨 오르듯 일어섰다.
“야습?! 야습입니까?”
“넌 계속 잠이나 자라. 어차피 그 상태로는 싸울 수도 없으니까.”
이안이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대답했다. 판금 갑옷을 능숙하게 걸쳐 입던 메브가 그를 돌아보았다.
“나는 너도 빠졌으면 좋겠다만. 무엇이 침입했건, 우리 셋이서 싸워도 충분할 거야.”
“그럴 순 없소.”
퀘스트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안이 팔목 보호대를 마저 고정하는 사이, 필립이 왼팔을 고정한 붕대를 풀며 내뱉었다.
“저도 그럴 순 없습니다. 다들 싸우러 가시는데 저만 어떻게-”
“그럼 너는 테사와 함께 성의 사람들을 통솔해. 괜히 얼쩡거리다가 피 보는 일 없게.”
이안이 덧붙인 말에, 벌써 방어구를 거의 다 착용한 테사이아가 홱 고개를 돌렸다.
“나? 나까지? 나는 왜?”
이안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한쪽 눈이 파랗게 멍들고 입술 끝이 터진 테사이아의 얼굴 대신, 닫힌 문으로 향했다.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리! 나리…! 도와주십시오…!”
문 두드리는 소리와 숨넘어가는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곧 문이 열리고, 무기도 들지 않은 병사 하나가 거의 구르듯 들어서며 소리쳤다.
“정문을 부수고 웬-!”
그의 목소리가 이내 잦아들었다. 이미 준비에 한창인 일행을 눈에 담은 덕분이었다.
“이미 알고 계셨군요. 다행입니다, 루 솔라여….”
식은땀을 흘리며 중얼댄 병사가 주저앉았다. 장갑을 낀 이안이 각반을 확인하며 내뱉었다.
“상황이나 설명해 봐. 침입자에 대해서도.”
“단 한 명입니다. 새카만 흑마를 이끌고 온, 정체를 알 수 없는 흑기사!”
“흑기사…?”
메브가 되물었다. 병사가 목이 떨어질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저는 비명을 듣고서야 깨어났습니다. 저를 비롯한 병사들이 달려나갔을 때는, 이미 정문이 박살 난 상태였습니다. 그 두꺼운 문을 어떻게 부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부서진 대문 한복판에 그 흑기사가 서 있었습니다. 문을 지키던 초병들은, 이미 다 죽은 상태였고요.”
“그래서?”
“그자는 몰려나오는 병사들을 마주 보면서도 태연하더군요. 그리고는 쇳가루를 삼킨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테사이아를 바라보며 말한 병사의 시선이 이안에게로 돌아갔다.
“용살자는 어디에 있냐고요. 다들 굳어 버린 와중에, 저만 겨우 정신을 차리고-”
역시, 날 찾아온 놈이군.
단검 집이 달린 가죽 띠를 어깨에 묶으며, 이안이 일어섰다.
“그거면 충분해. 알려 줘서 고맙군.”
메브와 샬롯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인 그가 걸음을 옮겼다. 엉거주춤 장비를 착용하던 필립이 다급하게 그를 돌아보았다.
“나리! 정말 두고 가실 거면, 이거라도 끼고 가십시오!”
그가 손에 든 것을 이안에게 던졌다. 반사적으로 받은 이안이, 손아귀에서 빛나는 황금 반지를 내려다보며 한쪽 입술을 말아 올렸다.
성 다미엘의 반지. 내부에 가득한 신성력이 전해졌다.
“아마도 나리라면, 그 성물의 힘을 끌어내실 수 있으실 겁니다.”
물론 이안은 그럴 수 있었다. 성물답게, 반지에는 신성 스킬이 두 가지나 붙어 있었다. 빛의 축복과 빛의 방벽. 어떻게 사용하는 건지는 설명을 읽어 볼 필요도 없었다.
곧바로 왼손의 장갑을 벗으면서, 이안은 주저앉은 앳된 얼굴의 병사를 내려다보았다.
“너는 여기 남는 둘을 도와라. 성에 남은 이들을 안전한 장소로 피신시켜.”
“네, 넷…!”
“이안, 그냥 나도 따라가면 안 돼?”
“필립은 아직 싸울 상태가 아니야. 그러니까 여차하면, 네가 사람들을 지켜야 돼.”
“아, 내가 호위였어? 난 또-”
테사이아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이안은 곧바로 방을 나섰다.
전투 도끼를 움켜쥔 샬롯과 투구를 손에 든 메브가 뒤따라 복도로 나왔다.
복도와 계단. 다시 이어진 복도를 지나 또 다른 계단으로 들어선 이안의 눈에, 비로소 정문으로 통하는 연회장의 전경이 펼쳐졌다.
“루 솔라여… 시발…!”
“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연회장은 이미 피바다였다. 토막 난 병사들의 시체가 즐비하고, 살아남은 열 명 남짓한 병사들은 멀찍이 물러난 채 간신히 창만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하지만 이안의 시선은 연회장 한복판에 고정되어 있었다.
방금 죽은 게 분명한, 사선으로 토막 난 시신 사이.
“…….”
기다란 검을 늘어뜨린 흑기사가 우두커니 서 있었기 때문이다.
제국제로 보이는 육중하고 정교한 판금 갑옷이, 병사들의 피를 머금고 불그스름한 광택을 흘렸다.
양쪽에 비스듬한 뿔이 돋은 투구. 그 아래의 안면 가리개는 위아래가 앞으로 뾰족하게 튀어나와 얼굴을 완전히 가렸다. 파충류의 머리 같아 보이기도 했다.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흑검이 불길한 예기를 머금고 번뜩였다.
푸르르…
흑기사의 뒤에서 숨소리가 이어졌다. 연회장 입구를 가로막듯 선 흑마가 내뿜은 콧김이었다. 머리와 목, 몸통을 대부분 가린 두꺼운 마갑 아래로, 근육질의 몸과 불그스름한 안광이 일렁였다.
그래, 정말 혼자서 다 죽일 수 있겠군.
흑기사의 시선이,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한 일행 쪽으로 돌아온 건 바로 그때였다.
“누가 용살자지?”
앞선 병사의 말대로, 쇳가루를 잔뜩 마신 것 같은 까끌까끌한 목소리가 번졌다. 목소리에 은은한 마력이 묻어 나왔다.
식은땀을 흘리던 병사들의 고개가 일제히 계단 쪽으로 돌아왔다.
“요, 용살자…! 용살자께서 오셨다…!”
“살았다…. 이제 우린 살았어…!”
병사들의 탄성이 번지는 가운데, 흑기사의 시선이 비로소 이안에게서 멈췄다.
“네놈이로군. 백금룡의 대행자….”
그 양반 이름은 왜 튀어나오지.
생각하며, 이안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럼 너는 뭐하는 새끼냐?”
흑기사는 대답 대신 검을 양손으로 고쳐 쥐며 검날을 투구 앞까지 치켜들었다.
솨아아-
놈의 전신에서 검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신성력처럼 느껴지는 힘. 하지만 그게 사실은 그렇게 보일만큼 밀도 높은 마력이라는 것을 깨달은 이안의 미간이, 비로소 굳어졌다.
‘용의 마력…?’
“오늘이 너의 마지막 날이 될 것이다, 용살자. 내가 너의 목을 베고, 주의 유일한 대전사로 거듭날 것이니…!”
검붉은 아지랑이가 검을 타고 번지기 시작했다. 이안의 눈앞에 비로소 퀘스트 창이 이어졌다.
역천의 세 번째 사도.
이안의 뇌리로, 대륙에 남은 두 마리 용 중 하나의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참칭하는 자, 라크마흐. 놈이 자신의 대행자를 보낸 게 분명했다. 이유는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지금, 백금룡의 대행자였으니까.
정작 이안이 주목한 건 전혀 다른 부분이었다.
‘세 번째라니. 하나가 전부가 아니었어…?’
이안은 의문을 제대로 끝마치기도 전에 몸을 날렸다.
콰과과-
그가 선 계단을 향해 검붉은 충격파가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흑기사가 그대로 검을 크게 내리친 순간 터져 나온 충격파였다.
샬롯과 메브가 거의 동시에 계단 아래로 몸을 날리고, 부서진 돌계단의 잔해가 튀어 올랐다.
그 사이로 몸을 휘돌리는 이안의 눈동자가 잿빛으로 물드는 가운데.
“다들 물러나! 여긴 우리에게 맡기고 대피해라!”
바닥을 구르며 착지한 메브가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거의 동시에 착지한 샬롯이 방향을 틀어 용수철처럼 튀어 나갔다.
고대 장인의 전투 도끼를 머리 위로 힘껏 치켜든 채였다.
“잔챙이들은… 빠져라!”
소리친 흑기사가 검을 휘둘렀다. 대답 대신 한차례 포효한 샬롯이 도끼를 내리쳤다.
쩌엉-!
두꺼운 도끼날과 기다란 검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샬롯은 물론 흑기사도 밀려나지 않았다. 충돌한 둘의 움직임이 일순간 멈추고, 충격파가 동심원을 그리며 터져 나왔다.
휩쓸려 튕겨 나가면서, 샬롯이 소리쳤다.
“평범한 검이 아니다, 이안!”
“나도 봐서 알아.”
충격파를 거슬러 달려가며 이안이 내뱉었다. 황금빛이 아른거리는 그의 검이, 검붉은 검을 늘어뜨리는 흑기사를 향해 뻗어나갔다.
빛의 축복과 바람 칼날이 더해진 황금빛 궤적을, 흑기사는 피하지 않았다.
카가가각-
이안이 휘두른 검이 놈이 치켜든 왼팔에 막혔다. 요란한 불티와 번쩍임이 남았을 뿐, 이안의 검은 그의 갑주를 가르지 못했다. 오히려 이안의 검에 작은 균열이 번졌다.
뿔 투구 아래의 안광이 일렁였다.
“기대 이하로군. 부상이 심한 모양이지?”
“딱 널 죽일 만큼만 별로지.”
아닌 척하면서 나불대는 새꺄.
속으로만 덧붙이며, 이안은 준비하고 있던 진공 폭발을 사용했다.
쩌엉-
“……!”
소리 없는 폭발에 흑기사의 팔뚝과 몸이 일순간 꺾이더니, 그대로 튕겨 나갔다.
카가가가-
허공에서 자세를 다잡은 흑기사가 바닥의 판석을 깨뜨리며 멈춰섰다. 놈이 왼팔을 탁탁 털며 다시 일어섰다.
‘뭐 이렇게까지 단단하지…?’
이안의 미간이 좁아질 찰나, 놈이 쥐고 있던 검을 고쳐 쥐었다.
용의 날개처럼 생긴 십자 막이에서 검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라 검신으로 번졌다. 놈이 이안을 향해 다시금 검을 휘두르려는 찰나.
쒸에에엑-
자루 대신 검날 끝부분을 움켜 쥔 메브가, 섬전처럼 달려들며 팔을 내리쳤다. 거꾸로 뻗어 나온 십자 막이와 뾰족한 무게추가 철퇴처럼 떨어지며 흑기사의 투구를 노렸다.
콰지직-!
흑기사는 검을 치켜들어 막았다. 그는 메브의 투구를 향해 왼 주먹을 뻗으려 했다.
그보다 검은 궤적이 그 옆으로 다가오는 게 더 빨랐다. 도끼자루를 몸 앞에 바싹 붙인 샬롯이었다.
콰지직-!
흑기사가 고개를 돌릴 찰나, 그녀가 그대로 놈에게 충돌했다. 쇠끼리 맞부딪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흑기사의 몸이 옆으로 밀려났다.
샬롯이 놈의 투구 앞으로 오른손을 뻗은 건 거의 동시였다.
안면 가리개를 덮은 새카만 손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쩌엉!
흑기사가 그대로 판석 위에 처박혔다.
뒤이어 놈의 몸 위에 올라타듯 달려든 샬롯의 오른손이, 다시 도끼자루를 움켜쥐었다.
콰직! 빠각! 콰지직!
샬롯이 난도질하듯 흑기사의 투구와 흉갑을 내리쳤다. 인간을 한참 초월한 속도와 힘. 흑기사의 안면 가리개와 흉갑, 목 가리개가 조금씩 우그러들었다.
투구 사이에 번지는 검붉은 안광이 타오른 건 바로 그다음 순간이었다.
“꺼져라-!”
쩌어엉!
터져 나온 검붉은 충격파가 샬롯을 휩쓸고 날려 버렸다. 주춤주춤 계단과 통로 쪽으로 흩어지던 병사들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볼과 손등이 찢겨 나간 샬롯이 아무렇지도 않게 공중제비를 도는 사이.
충격파에서도 튕겨 나가지 않은 메브가 다시 일어서는 흑기사를 향해 다시금 돌진했다.
쒸아악-!
거꾸로 쥔 양손 검이 망치를 휘두르듯 흑기사의 투구를 향해 떨어졌다.
우지직-!
마지막 순간 흑기사가 고개를 옆으로 피했다. 덕분에 투구 한복판을 맞는 건 피했지만, 십자막이가 놈의 목덜미와 견갑 사이에 박혀들 듯 떨어졌다.
일어서던 흑기사의 한쪽 무릎이 다시 꺾였다.
물론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솨아아아-
“……!”
놈의 전신에 맺힌 아지랑이가 타올랐다. 흑기사가 늘어뜨린 검이 사선으로 솟구쳤다.
카가가가각-
메브가 왼팔에 고정한 버클러를 치켜들며 물러섰다. 검붉은 궤적은 버클러 표면을 찢어발기고, 그 너머의 갑옷에도 깊은 흠집을 냈다.
“신성한 결투를 방해하지 마라! 하찮은 것들아!”
흑기사가 포효하고, 간신히 균형을 다잡은 메브가 검을 고쳐 쥐는 사이.
“물러나시오.”
이안이 그녀의 곁을 지나치며 내뱉었다. 어느새 그의 오른손에 들린 검에서 눈부신 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메브와 샬롯이 싸우는 사이에 주문을 완성한 것이다.
검을 사선으로 치켜든 채로 일어선 흑기사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누구 맘대로 결투냐?”
그의 검은 이미 뻗어 나가고 있었다. 흑기사도 치켜든 검을 내리쳤다.
이안은 피하지 않았다. 저 검이 아무리 빠르다 한들, 이 거리에서의 번개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콰릉-!
검과 검이 맞닿기도 전에 천둥 치는 소리가 났다. 실제로도 그랬다. 일순간 터져 나온 전격이 흑기사를 관통했다.
솨아아아-
흑기사의 뒤를 빛의 장벽이 감싸 안았다. 흑기사의 갑옷을 타고 거미줄 같은 뇌전 자락이 터져 나온 건 거의 동시였다.
파치치치치칫-!
황금빛까지 더한 눈부신 점멸이 이어졌다. 단 한 가닥도 밖으로 새지 않았다. 신성력의 장막에 부딪히자 굴절되어 흑기사에게로 도로 되돌아갔다.
“……!”
놈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고개를 한계까지 뒤로 꺾은 채로 그저 온몸을 바들댔다.
파칫, 파치칫….
곧 점멸이 가라앉았다.
흩어지는 뇌전 줄기 사이로, 흑기사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놈의 안면 가리개 틈에서 새카만 연기가 몇 가닥 피어났다. 전신에 아른거리던 아지랑이도 꺼질 듯 잦아들었다.
하지만 아직 퀘스트 완료 창은 뜨지 않았다. 이안은 연쇄 번개를 견디지 못하고 부러진 검을 던져 버리고는, 아공간에서 새 검을 꺼내 들었다.
투구 틈을 찔러야겠군. 그가 생각할 찰나였다.
키히이잉-!
울부짖은 흑마가 그대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마갑 사이로 흘러내리기 시작한 검은 안개가 거대한 궤적을 만들어냈다.
“……!”
마침 그 경로에 걸쳐 있던 샬롯은, 눈을 치켜뜨는 와중에도 전투 도끼를 횡으로 휘둘렀다.
두꺼운 전투 도끼가 돌진하는 말의 측면을 할퀴었다.
카가가가각-
마갑 표면에서 불똥이 튀고, 그 사이의 가죽도 길게 찢어졌다.
하지만 흑마의 돌진을 멈추지는 못했다. 도끼 날에 베인 상처에서는 피 대신 검은 안개가 뭉실뭉실 솟아나고 있었다.
그대로 샬롯을 지나친 놈이, 고개를 숙인 채 이안에게로 밀려들었다. 전신에 두른 안개가 맹렬하게 타올랐다.
저건 또 뭔.
인상을 찌푸린 이안이 결국 뒤로 몸을 날렸다. 간발의 차로 스쳐지나간 흑마가 그대로 궤적을 틀어 흑기사의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놈의 발자국마다 검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푸스스-
아지랑이는 삽시에 검은 안개로 화해 흑기사의 전신을 집어삼켰다. 어느새 흑마 역시 안개가 뭉친 듯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전신에 두른 마갑은 그 와중에도 말의 형태를 유지했다.
푸후우-
흑기사의 앞을 가로막은 유령마가 검은 연기가 섞인 콧김을 뿜어냈다.
바닥을 구른 이안이 고개를 들어, 놈의 적의 가득한 붉은 안광을 마주보았다.
그의 한쪽 입꼬리가 씁쓸하게 말려 올라갔다.
“부러운 새끼로군….”
저런 게 있다면, 말이 죽을 걱정은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