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181
181화
“이안…?”
“쉬고 계시오.”
고개를 갸웃하는 메브에게 덧붙인 이안이 몸을 돌렸다.
거꾸로 세운 도낏자루에 양팔을 얹은 샬롯과 멍하니 선 병사들의 시선이 따라붙는 가운데. 이안은 절뚝대면서도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의 시선이 잔해 사이에 박힌 흑검을 차근히 훑었다. 끝이 뾰족하게 튀어나온 무게추. 중앙이 살짝 튀어나온 기다란 자루. 용의 날개를 형상화한 듯한 십자 막이와 거뭇하고 매끈하게 이어진 검신.
그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검날에 서린 광택이 일렁였다.
어서 쥐란 거지?
내심 피식한 이안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곧바로 자루를 움켜쥐었다.
푸확-!
기다렸다는 듯 자루를 타고 검의 마력이 밀려들었다. 검을 쥔 이안의 주위로 검붉은 마력의 아지랑이가 휘몰아쳤다.
이안의 눈동자가 흰자까지 모두 검붉게 물들었다. 온갖 잔인한 환영과 비명, 그리고 살의와 증오를 머금은 감정들이 함께 쏟아졌다.
-죽여…. 모조리 죽여라… 저들에게 끝없는 공포를…
속삭임이 이안의 뇌리를 울렸다. 커졌다가 작아지고, 윽박지르듯 하다 다시 부드러워지는 사념이 메아리치듯 어지럽게 오갔다.
잘 단련된 기사라도 단숨에 타락시키고, 평범한 농노조차 피에 미친 살인귀로 만들어 버릴 강력한 사념.
“…그래, 확실히 마검이군.”
하지만 이안은 조금 짜증스럽게 읊조릴 따름이었다.
사념은 그의 영혼을 조금도 물들이지 못했다. 그저 시끄럽고 거슬리는 환청과 환영일 뿐.
혼돈력을 살짝 끌어올린 것만으로도 이안의 눈동자가 본모습을 되찾았다.
솨아아-
반지에서 멋대로 번진 신성력도 이안의 전신을 감쌌다.
이안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검을 향해 혼돈력을 밀어 넣었다.
-전부 죽여라. 죽….
뇌리를 시끄럽게 울리던 사념이 문득 잦아들었다. 키이잉, 검신이 밀려드는 혼돈력에 저항하듯 날카로운 울음을 토해냈다.
소용없는 저항이었다. 이안을 감싼 마력이 맥없이 흩어졌다. 그 사이로 검을 뽑아 든 이안의 모습이 드러났다.
놀란 듯 일어서는 메브와, 언제라도 달려올 자세를 잡던 샬롯이 동시에 멈칫대는 가운데.
치이잉-
이안이 혼돈력을 거둬들이자, 검신에서 짧고 섬뜩한 울림이 번졌다.
더는 환청과 환영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안은 검의 내부 어딘가에 존재하는 의지를 여전히 느낄 수 있었다.
기세가 다소 누그러졌지만, 여전히 그를 향한 악의를 가득 머금은 채였다.
“…아무래도, 교육이 좀 필요하겠네.”
읊조린 이안이, 허리춤의 빈 검집에 마검을 밀어 넣었다.
정보창도 확인하지 않은 채였다. 이미 손에 넣은 물건이니, 그딴 건 나중에 확인해도 충분했다.
검집이 상대적으로 짧은 탓에 검날 일부가 여전히 훤히 드러나 있었지만, 이안은 상관하지 않고 검집을 허리춤에서 떼어냈다.
뒤이어 검을 쥔 그의 손이 아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웅- 우웅-
마검이 울었다. 하지만 이안은 그대로 검을 놔버리고는 아공간 밖으로 손을 뺐다.
마검에서 번지던 불길한 존재감이 증발한 것처럼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저 내부가 어떤 식인 건지는 나도 전혀 모르는데.’
딱히 답을 알고 싶지는 않은 의문을 떠올리며, 그가 저릿한 오른손을 툭툭 털 찰나.
“용살자께서… 마검을… 봉인하셨다….”
“루 솔라여….”
병사들 사이에서 크고 작은 탄성이 번져 나왔다. 이안은 그제야, 아직 자신을 감싼 신성력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신성력은 빛무리로 변해 천천히 흩어지면서, 그의 주위를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병사들이 무릎을 꿇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루 사드의 구원자시여… 감사합니다….”
“찬란한 여신과 위대한 백금룡께 영광 있으라….”
“루 솔라께 영광 있으라….”
진심이 가득 담긴 기도가 이어졌다. 슬쩍 보니, 어느새 메브와 샬롯까지 한쪽 무릎을 꿇고는 저마다의 기도문을 읊조리고 있었다.
너희들은 또 왜 그래?
환장하겠네, 진짜…. 속으로 읊조리며 헛웃음을 짓던 이안의 시선이, 문득 난장판이 된 계단 위쪽으로 향했다.
경쾌하고 빠른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반파된 복도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예상대로 백발의 요정이었다.
“잠잠하다 싶더라니, 역시나네…. 다 끝난 거 맞지, 이안?”
난장판이 된 장내를 돌아보며 중얼댄 테사이아가, 이윽고 이안을 향해 소리쳤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내뱉었다.
“생존자들은?”
“저 위에 다 모여있어. 아까 갑자기 귀 따가운 고함이 울리면서 죄다 나자빠졌었는데, 어쨌든 이젠 괜찮아. 내가 뺨을 치니까 다들 깨어나더라.”
“…잘 됐군. 전부 성 밖으로 데리고 나와라. 성이 중간에 무너질지도 모르니까, 안전한 길로 안내하라고 하고.”
“알았어! 그런데, 왜 다들 무릎을 꿇고 있는 거야?”
그건 나도 묻고 싶은 말이야.
대답 대신 입맛을 다신 이안이, 연회장 입구를 향해 몸을 돌렸다.
***
문을 걸어 잠근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샌 글루미르의 주민들은, 다음 날 아침이 되고서야 성에서 일어난 소란의 전말을 알게 됐다.
흡혈 일족의 잔당으로 추정되는 마족이 쳐들어왔고, 루 사드의 구원자인 용살자가 그 마족의 목을 베었다는 것이다.
주민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이야기였다.
심지어 끔찍한 잔해만 남은 미로 저택에서의 사건과 달리, 이번에는 목격자도 여럿이었다.
“뎁의 말로는 불길 같은 신성을 온몸에 두르시고, 사람만큼 거대한 빛의 검을 휘두르며 날아다니셨다더군. 손길 한 번에 돌풍이 불고, 검을 휘두르면 천둥이 쳤대.”
“찬란한 여신의 화신이 아니라면 불가능할 기적이지.”
“아무렴. 동행한 붉은 기사와 수인 종자에게도 병사들부터 구하라 명하시고 홀로 마족과 맞서셨다는데. 그토록 숭고한 분이 찬란한 여신의 일부가 아니면 무엇이겠나.”
사람이 둘만 모여도, 저마다 들은 이야기를 떠들어대기 바빴다.
온갖 종류의 살이 붙어 대는 데에는 한나절이면 충분했다.
“듣자 하니 엄정한 여신과 더 각별한 사이시라던데. 붉은 기사도 그분의 사도라지, 아마?”
“예끼, 이 사람아. 루 솔라께서 들으시네. 엄정한 여신은 찬란한 여신의 따님이시잖나! 그러니 붉은 기사가 그분을 섬기시는 거겠지.”
“허어. 그렇겠군. 그럼 역시, 그분은 찬란한 여신의….”
“하, 한스가 부럽군. 그분께서 후광을 두른 채 저주받은 마검을 봉인하시는 모습을 직접 보다니 말이야. 진짜 기적이었다더군. 마법 따위가 아니라.”
“부러울 게 뭐 있나. 그 자리에 있다 죽은 사람이 몇인데.”
“하긴. 그나마도 그분들이 아니셨다면 살아남지 못했겠고.”
평소라면 눈살을 찌푸리며 불경하다 호통쳤을 성의 관리들과 병사들도, 그들의 입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몇몇 병사들은 더 열성적으로 용살자의 업적을 칭송했다.
대부분 용살자 일행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자들이었다.
성의 관리들과 영주 대리인은 용살자 일행을 도시에서 가장 좋은 저택에 모시고, 병사들과 시종들까지 붙여 보필했다.
내성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조사도, 그들이 저택을 방문해 진행했다.
용살자와 붉은 기사가 휴식을 취해야 했기 때문에, 조사는 붉은 기사의 종자와 용살자의 시종인 백발 요정이 대리했다.
물론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모든 과정이 신속하게, 그리고 막힘없이 진행됐다.
“용살자께서 떠나지 않으시면 좋겠군. 그럼 그 누구도 감히 우리를 건드리지 못할 것 아닌가.”
“위대하신 백금룡의 뜻을 대행하기 위해 떠나셔야 한다잖나.”
“하지만 혹시 모를 일이지. 성심을 다하면, 성스러운 임무를 다하신 후에 돌아와 주실지도.”
“말 나온 김에, 기도를 올리러 가지 않겠나?”
“또…? 그래. 좋지, 뭐. 가세.”
***
“…환장하겠군.”
창밖을 슬쩍 내려다본 이안이, 한숨을 삼키며 다시 몸을 돌렸다.
아직도 주민들이 저택을 향해 기도를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전에도 저러더니. 꼬박 하루를 자고 난 지금도 이 모양이었다.
“이젠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나?”
느긋하게 식사를 이어가던 샬롯이 말했다. 그 건너편에 앉은 메브도 빵을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은 이안이 식사를 끝내갈 때쯤에야 깨어났다. 주민들을 대피시키기가 무섭게 기절했던 이안과 달리, 둘은 귀족들이 적대적이지 않다는 걸 확신한 뒤에야 잠에든 까닭이었다.
“마땅히 받아야 할 대접이지. 교단이 너를 새로운 성인으로 추대한다 해도 전혀 놀랍지 않다, 이안.”
그건 죽어야 되는 거 아닌가.
빈자리에 걸터 앉은 이안이 실소를 흘렸다.
“성인은 무슨…. 난 루 솔라를 섬기지도 않는다니까.”
그가 앞에 놓인 술잔을 쥐는 사이, 메브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신앙은 그저 구실일 뿐이다. 언행이 고결하다면 전혀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지. 괜히 신들이 앞다퉈 네게 힘을 빌려주시겠느냐?”
“그건….”
내가 게임 캐릭터라 가능한 걸 텐데.
이안은 뒷말을 포도주와 함께 삼켰다. 그가 보기에 메브의 말은 반만 진실이었다.
적어도 루 솔라는 신도들의 믿음과 신앙을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신이니까. 그녀가 그런 족속이라는 건, 게임의 맹신자들만 떠올려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메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방금도 보지 않았느냐? 네 덕분에 백성들의 신앙심이 한층 더 깊어진 것을. 찬란한 여신께서 흡족해하실 일이지.”
“저들은 그저 이 현실을 잠시 잊을 구실이 필요할 뿐이오.”
“그게 신의 사도가 하는 일이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
말을 말아야지.
샬롯이 메브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가운데, 입맛을 다신 이안이 술잔을 들었다.
‘뭐,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게 맞긴 하지.’
내 경우엔 즐기는 게 아니라 이용하는 거지만.
이안이 포도주를 마시는 사이,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한쪽 팔에 여전히 붕대를 감은 필립, 그리고 망토를 근사하게 두른 테사이아였다.
진중한 얼굴로 장내에 들어선 둘의 표정이, 문을 닫음과 동시에 확 달라졌다.
몸을 앞으로 축 기울인 필립이 중얼댔다.
“피곤해서 쓰러질 뻔했습니다….”
“내 말이. 용살자는 이안인데, 왜 우리한테 자꾸 손을 잡아 달라고 하는 거야?”
바닥에 벌렁 드러누우면서 투덜대던 테사이아가, 메브의 시선을 받고는 혀를 차며 일어섰다.
방구석의 의자를 끌고 온 필립이 식탁을 바라보며 앉았다.
“어쨌든, 다 끝났습니다. 더는 귀찮은 절차도 남아있지 않고, 전투 중에 파손된 세 분… 아니, 두 분 나리와 샬롯의 장비는 전부 새로 받기로 했습니다. 물론 공짜로요. 글루미르를 또다시 구해주신 보답이라더군요.”
“잘 됐군.”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메브가 건넨 술잔을 곧바로 입에 가져간 필립이, 잔에 담긴 술을 전부 들이켜고는 말을 이었다.
“도시의 장인들이 전부 달려들어 수선 중입니다. 심지어 주민들도 돕고 있고요. 아시다시피 제가 여러분들의 치수를 전부 알고 있어서, 일이 더 편했습니다. 끝나는 족족 마차에 실어 주기로 했고요.”
“언제쯤 끝나는데?”
“오늘 밤이면 됩니다. 아, 감사합니다. 나리.”
메브가 내민 술병 앞에 잔을 가져다 대면서, 필립이 묘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성이 반쯤 무너졌는데, 오히려 백성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고 있습니다. 심지어 아까는 마구간지기가 와서 고해성사하더군요. 사실 우리에게 내준 말이 가장 좋은 말이 아니었다고요. 용서하겠다고 했더니, 이미 가장 좋은 말로 바꿔 놨답니다.”
“별의별 얘길 다 들었어. 북부에서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긴, 그때는 다들 이안이 죽을까 봐 걱정하느라 바쁘긴 했지. 나도 목말라, 야옹아.”
“넌 손이 없냐?”
샬롯이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순순히 자신의 술잔을 내밀었다.
씩 웃으며 받아든 테사이아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아무튼, 이제 다 끝났어. 쉬기만 하면 돼.”
“잘 됐군. 그럼 내일 해 뜨기 전에 출발하면 되겠어.”
“그래. 해 뜨기 전까지 쭉-. 뭐라고? 내일?”
테사이아가 술잔을 입에 가져가다 말고 되물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눈을 치켜떴다.
“말도 안 돼! 난 하나도 못 쉬었다고. 너희 셋이 코 골고 잘 동안, 여기 이 주근깨랑 밤낮 가릴 거 없이 돌아다니고 떠들어 댔단 말야.”
“맞습니, 아니. 그것보다, 이번 전투로 몸이 다시 축나셨습니다. 세 분 모두요. 적어도 며칠은 더 쉬셔야-”
“그러다 또 비슷한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
이어진 필립의 말을, 이안이 잘랐다.
일행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돌아왔다.
짧게 입맛을 다신 이안이 덧붙였다.
“우릴 습격한 놈은, 흡혈 일족의 잔당이 아니었으니까.”
“예…?”
필립의 눈이 커지는 가운데. 눈빛을 교환한 메브와 샬롯이 역시, 하고 중얼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필립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설마, 나리는 알고 계셨습니까?”
“짐작 정도는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제게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 거고요? 제가 받은 조사는 교단으로 보내질 겁니다. 그럼 저는 신 앞에 거짓을 고한 셈이-”
“무슨 상관이야, 넌 몰랐는데.”
이안이 툭 끼어들었다.
필립이 입을 뻐끔댔다.
“그게 무슨….”
“넌 믿고 있는 대로 말 한 거니까, 거짓말을 한 건 아니지.”
“…….”
이안은 필립의 시선을 무시한 채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물론 사실은 너무 귀찮고 피곤해서 설명하지 않았던 거긴 하지만.
어차피 이런 말장난은 사제들도 곧잘 하는 짓거리였다.
“염려 말거라, 필립. 여신께서도 이미 알고 계실 것이야.”
메브가 덤덤하게 타일렀다.
이윽고 체념하듯 눈을 질끈 감은 필립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럼, 그놈은 대체 뭐였던 겁니까?”
“그놈은 용의 대행자였다.”
필립의 눈이 번쩍 뜨였다.
“용…? 용이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