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183
183화
“저 녀석을 중심으로 적당한 사연을 더해 봐라, 필립. 말을 지어내는 건 네가 잘하는 거니까.”
“물론이죠. 염려 마십시오. 가장 어려운 부분이 해결되었으니, 나머지는 일도 아닙니다. 그야말로 묘책이로군요. 검문을 피해 다닐 필요가 없어졌으니 말입니다.”
싱글대며 대답한 필립이, 이윽고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걱정이 되어서 한 번 더 여쭙는 겁니다. 두 분 나리와 샬롯 모두, 그 몸으로는 아주 힘든 여정이 되실 테니까요.”
“나는 괜찮다, 필립.”
“나도 마찬가지다. 이 정도는 아주 가벼운 부상이야.”
메브에 이어, 입맛을 다시던 샬롯도 대답했다. 이안은 대답 대신 자신의 손아귀를 내려다보았다.
사실, 상태는 전혀 좋지 않았다. 지금은 거동만 간신히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눈을 감으면 바로 곯아떨어지리라. 본래라면 적어도 며칠은 더 요양이 필요했다.
“나리…?”
“…이동하면서 쉬면 돼.”
***
시선을 거둔 이안이 태연하게 덧붙였다.
“전에 보니 마차 지붕이 아주 넓고 쾌적해 보이더군.”
“당분간 호위는 내가 전담하겠다. 말에도 내가 탈 테니, 이안 너는 휴식만 취하도록 해.”
메브가 결연하게 덧붙였다.
샬롯이 잔을 들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교대로 타지. 마차에만 앉아 있으면 좀이 쑤시니까.”
그녀의 눈을 마주 본 메브가 흐릿하게 미소 짓는 가운데, 테사이아가 불쑥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럼 나는?”
“감히 말에 탈 생각은 하지도 마라, 귀쟁아. 싸움도 못 하게 된 주제에.”
단호하게 내뱉은 샬롯이 필립 쪽을 턱짓했다.
“네 자리는 마부석이니까, 이 녀석과 상의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샬롯.”
테사이아의 말투가 귀부인처럼 나긋나긋해졌다. 미간을 찌푸리는 샬롯의 시선을 느긋하게 마주하며, 그녀가 미소 지었다.
“아이나스 가의 원로인 내가, 어찌 마부석에 앉는단 말이냐?”
“…제기랄.”
탄식한 샬롯이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테사이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부석은 네 자리다. 나는 마차와 말에만 탈 예정이니 그리 알거라. 하면, 나는 이만 잠자리에 들겠다. 때가 되면 깨우거라.”
이안을 향해 다리를 살짝 굽히며 인사한 테사이아가 그대로 침대로 걸어가 누웠다.
신이 잔뜩 났군.
이안이 생각하는 사이, 잔을 내려 놓은 샬롯이 뒤따라 일어섰다. 테사이아를 침대에서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이어진 둘의 소란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이안이 손에 낀 반지를 빼서 앞으로 내밀었다.
“미리 떠날 준비를 끝내 둬라, 필립. 이동 중에 마실 술도 잔뜩 실어두고. 상하지 않을 녀석들로.”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반지를 받아들며 일어선 필립이 덧붙였다.
“글루미르의 주민들에게 남기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자고 일어나니 우리가 모두 떠나고 없으면, 다들 상심이 클 텐데요. 제가 마구간지기에게라도 따로 나리의 전언을 남겨 두겠습니다.”
“별걸 다….”
코웃음 치다 잠시 말을 멈춘 이안이, 이윽고 앞에 놓인 잔을 쥐며 내뱉었다.
“루 사드는 구원 받은 게 아니라고 해. 그저 한고비를 넘겼을 뿐, 더 큰 어둠이 몰려오고 있다고.”
샬롯과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 필립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사라졌다. 이안과 메브의 건조한 눈빛을 번갈아 바라본 그가, 이윽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전하겠습니다.”
다음 날, 일행은 예정대로 도시를 떠났다. 해도 뜨지 않은 새벽에, 발을 들일 때만큼이나 조용하게.
일행이 탄 마차는 관도를 벗어나 남쪽으로 향했다.
국경을 넘을 때까지 최대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였다.
제국제 마차는 길이 없는 곳에서도 나쁘지 않은 승차감을 자랑했다. 과거 천칭 상단의 마차는 물론이고, 북부인들이 최선을 다해 만들어 줬던 마차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물론 승차감이 나빴더라도 달라질 건 없었을 터였다.
이안은 도시를 벗어난 순간부터 잠들었으니까. 정말 지붕에서 자려는 걸 일행 모두가 만류한 덕분에, 그나마 마차 내부는 그의 차지가 되었다.
지붕에는 대신 테사이아와 필립, 샬롯이 번갈아 올라갔다.
꼬박 하루가 지나도록 이안은 깨어나지 않았다. 식사를 한 끼 할 때만 잠깐 눈을 떴고, 그나마도 식사를 끝내자마자 바로 다시 마차에 올라 모포를 덮어썼다.
그는 밤중에 일행이 고블린 무리와 전투를 치르는 동안에도 눈을 뜨지 않았다. 겨울잠에 든 곰처럼.
그 와중에도, 일행은 아무렇지도 않게 저마다의 역할을 수행했다.
하루 반나절쯤 지났을 때부터는 대화도 스스럼없이 나누기 시작했다. 다소 시끄럽더라도 이안이 깨어나지 않으리라는 걸 다들 확실히 알게 된 덕분이었다.
“전부터 궁금하던 게 있습니다.”
“말 해. 뭔데?”
“뱀파이어로 사는 건 어떤 느낌입니까? 지금과는 많이 다른가요?”
“많이 다르지. 정확하게 표현하기는 어렵네.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이 훨씬 좋다는 거야. 배고프지 않다는 부분에선 특히.”
물론, 떠들어 대는 건 대부분 필립과 테사이아였다.
“피에 대한 굶주림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래. 난 항상 배고프고 목마른 상태였으니까. 피를 마셔도 단지 굶주리지 않게 됐을 뿐이지, 결코 포만감을 느끼지는 못했지. 지금은 그게 더 확실해졌어. 내가 포만감인 줄 알았던 건, 그저 목마르고 배고프지 않은 상태였을 뿐이야.”
“항상 배고프고 목마르다라…. 그야말로 참기 힘든 충동이었겠군요. 그걸 견디셨다니, 대단하십니다.”
“너도 여차하면 죽게 될 상황이라면 참게 될 거야, 주근깨. 어쨌든, 여한은 없어. 마지막엔 이안의 피를 실컷 맛봤으니까.”
“이안 나리의 피를… 드셨다고요?”
“그래. 내 인생 최고의 맛이었지. 물론 고기도 맛있고 술도 맛있지만, 그것들이랑은 비교도 안 돼.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야. 그런데, 왜 그렇게 봐?”
“…설마, 아직도 피를 마시고 싶은 충동이 남은 건 아니시겠죠.”
“들켰네. 보기보단 눈치가 빠르구나, 필립.”
“…….”
“농담이니까, 그 반지 내 쪽으로 내밀지 마.”
테사이아는 새로운 일행과도 아주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필립은 기본이고, 심지어 메브와도 그랬다.
그녀에게 틈틈이 글자와 예법을 배우는 데다가, 밤에는 얻어터지기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고 봐…! 내가 언젠가 한 번은 꼭 받은 걸 전부 몰아서 갚아 줄 거니까.”
메브가 휘두른 세검에 손목을 얻어맞고 검을 떨어뜨린 테사이아가, 얼얼한 손목을 어루만지며 씹어 뱉었다.
그나마 얼굴을 얻어맞는 일은 없어졌지만, 그럼에도 약이 바짝 오른 듯 눈가에 핏줄까지 돋아난 채였다.
세검을 검집에 미끄러뜨리듯 돌려놓으면서, 메브가 미소 지었다.
“배움이 빠르군. 한 5년쯤 지나면 정말 내게 한 방 먹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렇게 오래 걸린다고…? 칭찬이 아니라 놀리는 거지?”
“그럴 리가. 진심이다.”
“그치만, 우린 그 전에 헤어지게 되잖아.”
“그렇지.”
“…….”
“애석하게 됐네, 귀쟁아. 하지만 내가 돕는다면 시간이 더 단축될지도 몰라.”
모닥불을 뒤집던 샬롯이 툭 끼어들었다. 슬쩍 송곳니를 드러내며 미소 지은 그녀가 덧붙였다.
“그러니 언제든 말만 해라. 최선을 다해 도와줄 테니까.”
테사이아가 코웃음을 흘렸다.
“꿈 깨, 야옹아. 그 핑계로 날 두들겨 팰 생각인 걸 모를 줄 알아? 네가 덤비면 도망만 다닐 거야. 너도 알겠지만, 난 그걸 가장 잘해.”
“…….”
샬롯이 입맛을 다시는 가운데, 필립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그럼 저는 어떻습니까? 제 팔이 다 나은 다음에요.”
“이렇게 말해서 미안하지만, 주근깨. 내가 너한테까지 질 것 같진 않은데.”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알지 않겠습니까?”
“자신만만하네. 좋아. 부상이 완벽하게 나으면 덤비도록 해. 그 도전, 받아 줄 테니까.”
“제가 도전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필립은 검술만큼이나 방패술도 뛰어나지.”
고개를 끄덕이며 내뱉은 메브가, 테사이아를 마주 보았다.
“분명 배울 게 있을 거다. 테사.”
“하지만 난 방패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걸.”
“…왜요?”
필립이 미간을 찌푸렸다. 테사이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다들 안 쓰잖아. 너만 빼고.”
“아니… 그건 어디까지나… 이분들이 하나같이 특출나신 겁니다. 방패는 공격과 방어 양면에서 아주 훌륭한-”
“약해 보여.”
“-어찌 보면 최고의, 뭐라고요?”
“하지만, 뭐. 네가 날 이기면, 가르쳐 주는 걸 허락할게.”
“…….”
멍하니 입을 벌렸던 필립의 시선이, 이윽고 샬롯 쪽으로 돌아갔다.
“왜 샬롯이 항상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이제야 알겠군요. 이분은 정말,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재주를 타고 나셨어요.”
“그게 귀쟁이의 본성이니까.”
샬롯이 심드렁하게 덧붙인 말에, 테사이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맞아. 심지어 난, 귀쟁이 중의 귀쟁이지.”
“전 마족이기도 하고.”
“그렇지. 이안의 표현에 따르면….”
문득 말을 멈춘 테사이아의 시선이 홱, 어둠 너머로 돌아갔다.
그녀의 눈가에 핏줄이 돋아나고 동공이 확장된 것도 잠시.
“마물이다.”
“…또요?”
이어진 속삭임에, 필립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래. 어제랑 비슷하네. 작고 귀여운 것들.”
“그것들을 귀엽다고 생각하는 건 너밖에 없을 거다.”
혀를 찬 샬롯과 메브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어섰다.
테사이아와 함께 마차에 오르며 필립이 중얼댔다.
“이틀 연속 습격이군요. 아무리 관도를 벗어났다지만… 확실히 비정상적인 수준입니다. 이안 나리 말씀대로 흡혈 여제의 저주 때문일지도 모르겠군요. 그게 아니라면 뱀파이어들의 영향력이 사라지면서 마물들이 모여들고 있는 것이거나요.”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빨강 머리랑 야옹이가 알아서 다 처리할 텐데.”
마차 지붕에 가볍게 올라선 테사이아가 가장자리에 걸터 앉았다.
“우린 마차만 잘 지키면 돼. 이안이 깨어날 일 없게.”
곧 어둠 너머에서 크고 작은 숨소리가 번졌다. 금속이 맞부딪치는 소리와 마물 특유의 비명이 그 뒤를 이었다.
마부석에 앉은 필립이, 이윽고 심드렁하게 읊조렸다.
“보아하니, 그럴 일은 없겠군요.”
그의 말대로, 단 한 마리의 마물도 마차 근처에 도달하지 못했다.
***
“그런데 말야, 샬롯.”
어느덧 사흘째였다.
마차 지붕에 축 널브러져 있던 테사이아가 문득 입을 열었다.
샬롯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내뱉었다.
“징그러우니까 이름으로 부르지 마라. 네 옆에 있는 녀석이나 데리고 놀아.”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는 필립을 슬쩍 일별한 테사이아가 고개를 저었다.
“슬슬, 주근깨한테 듣고 싶은 얘긴 다 들었어.”
“그래서, 놀아달라고?”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까 네 덩치가 전보다 더 커진 것 같아서.”
“…그게 또 무슨 헛소리인지.”
“확실해. 물론 넌 전에도 좀 멍청해 보일 정도로 근육질이긴 했지만.”
“흠….”
그제야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 샬롯이 가르릉댔다.
“글쎄. 나는 전혀 모르겠는데.”
“나는 확실히 알겠군.”
“……!”
마차 안에서 번진 목소리에, 눈을 치켜뜬 샬롯이 득달같이 고개를 돌렸다. 지붕 옆으로 상반신을 늘어뜨린 테사이아도 마차 문에 달린 창문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언제 깼어, 이안?”
“방금.”
짧게 대답한 이안이, 여전히 누운 채로 마부석의 샬롯을 마주보았다.
“요 몇 달 사이에 근육이 훨씬 더 많이 붙었군. 육체가 극한까지 단련된 걸지도 모르겠어.”
“도끼가 전보다 가벼워진 것 같다고 느낄 때가 있긴 했다만….”
샬롯이 자신의 커다란 손아귀를 내려다보며 중얼댔다.
이안이 피식 웃음 지었다.
“잘 됐지. 고향에 돌아가면 부족을 손에 넣어야 할 테니까.”
“……!”
“너희는 기본적으로 약한 자의 말은 듣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 동족끼리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냐?”
“그럴 리가. 강자가 모든 권리를 가지는 건 당연한 순리다. 그래… 어쩌면 내가, 정말 일족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을지도….”
샬롯이 생각에 잠긴 사이.
“몸은 좀 괜찮은 것이냐, 이안?”
말을 마차에 나란히 붙이며 메브가 물었다. 상반신을 일으켜 등받이에 기대앉은 이안이 대답했다.
“어느 정도는.”
현기증도 두통도 없었고, 몸도 쑤시지 않았다. 이제야 몸이 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테사이아의 반대편 창문으로 고개를 떨군 필립이, 거꾸로 이안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다행입니다. 편히 쉬십시오. 여정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계속 없고 싶으면, 문제없단 얘긴 하지 마라. 네가 그딴 소릴 할 때마다 뭔가 일어났으니까.”
“넵.”
“그런 의미에서….”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한차례 돌아본 이안이,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이제, 마저 쉬고 싶은데.”
메브와 샬롯이 시선을 돌리고, 테사이아와 필립도 마차 지붕으로 휙하니 사라졌다.
비로소 마차 밖의 풍경이 드러났다.
바닥의 짐가방에서 육포와 술병을 꺼내면서, 이안은 전경을 차근히 눈에 담았다.
꽤 남쪽으로 내려온 모양인데도 하늘은 여전히 흐렸다. 생기 없이 이파리를 드리운 나무들. 따듯하지만 텁텁한 공기.
‘슬슬, 2챕터의 끝이 머지않았네.’
이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게임에서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그가 만들어 낸 변화가 적지 않았지만, 큰 흐름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을 터였다.
여제가 세상에 새로운 균열을 새기기까지 했으니, 시기상으로는 오히려 더 빨라졌겠지.
글루미르와 루 사드의 귀족들이 그의 전언을 귀담아들으리란 기대는 전혀 들지 않았다. 설사 그런다 해도 루 사드에 국한된 변화일 터였다.
전쟁은 계속되리라. 검은 벽의 광기가 변방 전체를 물들일 때까지.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는 거지.’
생각하며 술병을 입에 가져간 이안이 등받이에 뒤통수를 기댔다.
눈은 여전히 창밖으로 향한 채였지만, 그의 시선은 오로지 그에게만 보이는 것을 응시하고 있었다.
상태창.
마법사라고는 볼 수 없는 능력치들을 체념하듯 훑던 그의 시선이, 비로소 스킬 창으로 향했다.
이게 본론이었다.
‘…이만하면 오래 버티긴 했다만.’
포인트를 사용할 생각이었으니까.
방대하게 펼쳐진 스킬 트리를 응시하는 이안의 눈에, 미뤄 왔던 여러 갈등이 오갔다.
갈수록 명확해지는 각 속성의 장단점. 한정적인 포인트와 이미 만성이 된 마력 부족.
“…….”
답이 없는 고민을 이어나간 끝에, 이안은 몇 개의 새로운 마법을 익혔다.
공통 스킬이나 비전은 단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건만, 그동안 모은 포인트의 절반 가까이가 사라졌다.
“후….”
이윽고 상태창을 닫는 그의 입에서 옅은 한숨이 번졌다.
더 망캐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예 틀린 생각은 아닐 터였다. 이번에도 결국, 여러 가지 속성을 골고루 올렸으니까.
물론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애초부터 마법사로서는 차고 넘칠만큼 망한 상태였으니, 이 길을 끝까지 밀어 붙일 수밖에.
‘하다가 멈추면 아니 함 만 못한 법이지….’
술을 몇 모금 마신 그는, 잡념을 떨치며 아공간에 손을 넣었다.
곧 맞지 않는 검집에 담긴, 불길하게 생긴 검이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검집 한복판을 쥔 손아귀를 타고, 흑검의 사념이 전해졌다.
증오와 분노.
하지만 저번처럼 그를 향해 곧바로 이빨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배운 게 있는 모양이지.
슬쩍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이안이, 비로소 정보창을 열었다.
세 번째 사도의 흑검. 간만의 유일 등급 무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