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186
186화
“키- 에에엑-!”
육성과 사념이 뒤섞인 비명을 토해낸 괴물이 달려들었다. 덩치가 제법 큰데도 엄청난 속도였다.
이안은 그 와중에도 놈이 치켜든 길고 끝이 날카로운 네 개의 앞다리와, 지네처럼 마디진 몸통에 돋은 수많은 다리가 물결치듯 움직이는 것을 전부 인식할 수 있었다.
적어도 특성까지 전부 비활성화된 건 아닌 모양.
심지어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균열에서 흘러나온 혼돈력과 괴물이 뿜어내는 사념과 공허의 마력이 만들어내는 파장까지 전부 또렷하게 눈에 보였다.
저마다의 색을 가진 파장이 뒤엉키며 흑백의 동굴에 색을 불어넣었다.
내가 이걸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게 맞긴 한가.
생각하며, 이안은 놈을 향해 마주 몸을 날렸다.
쒸아아악-
괴물이 기다렸다는 듯 기다란 앞발 하나를 내뻗었다. 집중력이 최고조인 상황에서도 빠르게 느껴지는 속도.
이안의 자세가 바닥에 깔리듯 낮아졌다. 샬롯을 따라 해 본 것인데, 평소엔 불가능하던 자세가 아주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콰드득-!
그의 머리 위를 사선으로 스친 앞발이 옆의 땅에 박혔다. 폭발이나 흙먼지가 튀어 오르는 일은 없었다. 그저 바닥이 깊이 파였을 뿐.
이안이 땅을 박찬 건 거의 동시였다.
콰과과과-
그의 오른손이 색색의 파장을 가르며 뻗어나갔다. 손톱보다는 발톱이라 불러야 할 손끝의 칼날이 허공에 보랏빛 궤적을 아로새겼다.
육체를 구성하는 혼돈력이 아주 조금씩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시간 제한이 있다 이거지.’
깊게 생각할 틈은 없었다. 괴물의 상반신에는 아직 끝이 낫처럼 날카로운 다리가 세 개나 더 남아 있었다. 게다가 상체와 몸통이 이어진 부분 좌우로는 사슴벌레의 뿔 같은 길고 굽어진 다리 한 쌍이 튀어나와 있기까지 했다.
쒸아악-
세 개의 앞다리가 저마다 다른 궤적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방어보다 공격을 택한 모양이었다.
이안의 전신에서 보랏빛 아지랑이가 번진 건 거의 동시였다. 사냥의 시간.
시야가 일그러지는 가운데, 모든 감각이 곤두섰다. 이안은 재차 허공을 박차며 몸을 휘돌렸다.
쒸에에에엑-
그의 몸이 좌우에서 밀려드는 두 개의 다리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통과했다. 그대로 손을 뻗은 그가 사선으로 떨어져 내리는 또 다른 앞다리의 옆면을 내리쳤다. 손끝의 칼날이 갑옷처럼 딱딱한 외골격을 단숨에 잘라냈다. 그리고는 어느새 자신을 스치고 지나가 멈춰선 다리의 뒷면을 힘껏 발로 걷어찼다.
괴물의 상체가 순간 흔들리고, 반발력에 몸을 맡긴 이안이 땅으로 튕겨 나가듯 떨어졌다.
콰과과과-
그 와중에 자세를 다잡은 그가 손가락을 땅에 박으며 속도를 줄였다. 그의 앞으로 열 가닥 흑백의 고랑이 깊이 파였다.
‘이게 되네.’
이안은 내심 감탄을 흘렸다. 모든 게 거의 본능적으로 이루어진 움직임이었기 때문이다.
투쟁의 축복을 받을 때와는 전혀 다른 감각. 모든 근육과 신경계가 새롭게 구성된 것 같았다.
푸확-!
그때, 이안이 팔다리를 동시에 박차며 솟구쳤다. 콰과과곽, 방금까지 그가 있던 자리로 거무튀튀한 가시들이 틀어박혔다. 괴물의 머리 주위로 삐죽삐죽 돋아 있던 가시들이 연달아 발사된 것이다.
몸을 돌려 가까워진 천장에 착지하듯 부딪힌 이안이, 그대로 괴물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의 전신에서 피어오른 보라색 아지랑이가 기다란 직선을 아로새겼다.
괴물이 발작하듯 앞다리들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안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콰지직-
놈을 지나친 이안이 바닥을 구르듯 착지했다. 그의 손아귀에는 괴물의 몸통 일부가 걸려 있었다. 사마귀의 앞발 같은 기다란 다리 하나가 고스란히 붙은 채였다.
“키… 이이악-!”
다리 하나를 잃은 괴물이 비명을 토해냈다. 그 와중에도 다리째로 뜯겨 나간 몸통이 엄청난 속도로 재생되고 있었다.
이 새끼, 보기보다 별거 아닌데.
‘아니면 지금 내가 센 건가…?’
후자 쪽이 더 설득력이 있었다.
상태창만 봐도 능력치가 멋대로 잔뜩 늘어나지 않았던가.
심지어 저놈은 공허의 괴물이었다.
아무리 본체에서 떨어져 나온 졸개 하나라 해도, 본래는 이보다 훨씬 강하게 느껴지는 상대였을 터였다.
그가 사방에 일렁이는 파장들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덕분도 있으리라. 손아귀에서 부글대며 녹아내리고 있는 몸통도, 본래라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쥐고 있을 수는 없었을 터였다.
지금은 나도 일종의 공허의 존재인 건가.
“키… 아아앗-!”
괴물이 고막을 찢을 듯한 포효를 터뜨린 건 거의 동시였다. 다시 달려들려던 이안은 팔로 얼굴을 가리며, 뒤따라 터져 나온 혼돈력의 파장을 막아냈다.
몸이 뒤로 밀려나는 압력.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무게 중심을 낮춰 견디면서, 이안은 진짜 문제는 저 괴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육체를 구성한 혼돈력이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이렇게 저놈의 공격을 막아내는 순간에는 더더욱.
‘저놈을 죽이기 전에 힘이 먼저 다 떨어지면…?’
생각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이안은 압력이 사라짐과 동시에 고무줄처럼 앞으로 튀어 나갔다. 포효하며 육체의 재생을 끝낸 괴물이 기다란 앞다리를 연달아 내리찍었다.
콰과과과곽-
쏟아지는 칼날 사이를 이리저리 피한 이안이 그대로 몸을 날렸다. 쒸아악, 괴물의 좌우에서 동시에 파공음이 이어졌다. 좌우로 벌어져 있던 기다란 다리가 그의 궤도를 노리고 밀려들고 있었다.
저기 휩쓸려 토막 난다 해도, 지금의 육체라면 충분히 본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정말 그런지 시험해 볼 생각은 없었다.
이안이 왼손을 내뻗었다.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간 혼돈력이 괴물을 옭아맸다. 다리들의 움직임이 우뚝 멈추고, 이안을 노려보는 붉은 눈알들에 흐릿한 당황이 스쳤다.
쒸아아악-
쇄도한 이안이 그 한복판으로 오른손을 내뻗었다. 놈의 머리가 몸속으로 쑥 파고 들어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콰직-!
이안의 오른손이 흔적만 남은 몸통 한복판에 틀어박혔다. 콰직, 왼손까지 몸통에 박아넣은 이안이 오른손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끈적하고 엿 같은 감촉이 번질 뿐, 놈의 머리는 느껴지지 않았다. 미간을 찌푸린 이안의 전신에서 혼돈력의 잔재가 불길처럼 타올랐다.
우지지지직-!
괴물의 단단한 갑피에 균열이 일더니 쩍 벌어지며 갈라졌다.
괴물의 몸을 좌우로 찢어발긴 이안이 검은 체액을 흩뿌리는 속살을 노려보았다. 놈의 머리는 보이지 않았다. 잘린 단면을 움켜쥔 이안의 양팔에 더 힘이 들어갔다.
콰지지직- 퍼억-!
괴물의 상반신이 완전히 좌우로 찢겨 나갔다. 동시에 이안이 놈의 단면을 박차며 물러났다. 축 늘어지는 와중에도 놈의 앞다리들이 등판을 노리며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키… 에에에에엑-!”
명백한 고통을 담은 비명이 뒤를 이었다. 축 늘어지는 상체가 아니라, 바닥에 깔린 넓적한 몸통 아래에서 번진 비명이었다.
이안이 공중제비를 돌며 착지하는 사이, 괴물이 지네 같이 기다란 몸통을 치켜들었다. 반으로 쩍 갈라진 상체는 그대로 늘어뜨린 채였다.
잘린 단면에서 체액이 멈추지 않고 뚝뚝 흘러내리며 증발했다.
그리고 놈의 머리는, 마디마디로 이루어진 복부 한복판에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키- 이이이익-!”
놈이 수많은 다리를 꿈틀대며 울부짖었다.
이제 너도 공평하게 타임어택이네.
증발하는 양팔의 체액을 털어낸 이안이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말아 올리고는 질주했다.
정신파와 혼돈력의 파장이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듯, 괴물이 비명을 멈췄다.
이안은 이미 놈의 몸통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좌우로 늘어진 앞발들이 반사적으로 날아들었다. 이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허공에서 몸을 젖혀 피해내고, 그 와중에도 손을 털어 만들어낸 기다란 궤적으로 다리 하나를 잘라내기까지 했다.
그는 새로운 힘을 사용하는 것에 벌써 익숙해지고 있었다.
듣도 보도 못한 힘을 다루게 된 게 처음이 아닌 덕분이리라.
그런 와중에도 이안은 문득, 자신이 타락한 상태였다면 본래의 스킬들도 사용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어쨌건 특성까지 비활성화된 건 아닌 것 같은 데다가, 새로 얻은 스킬들은 하나하나가 일종의 권능에 가까운 성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만큼 혼돈력을 소모하는 속도도 엄청났다.
흑마법 같은 걸 다룰 수 있었다면 훨씬 더 여유로운 전투가 되었으리라.
‘나는 그럼 이 상태에서도 반쪽짜리라는 건데….’
물론, 확인할 방법은 없는 가정이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반쯤 본능적으로 전투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어느새 쉴새 없이 날아들던 앞다리들은 전부 잘리거나 뜯겨 나가 축 늘어져 있었다.
징그러운 눈알들에 서린 감정도완전히 달라졌다. 위기감.
변이하듯 길어지던 몸통의 다리들이 파도치듯 좌우로 밀려들었다.
이안이 왼팔을 가볍게 떨친 건 거의 동시였다. 터져 나온 혼돈력의 파장이 괴물을 얼어붙게 했다.
‘다음번엔 똥구멍으로 튈 거냐?’
이안은 가까워지는 놈의 머리를 노려보며 내뱉으려 했다. 그저 그러려고 했을 뿐이었다.
정작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그르렁대는 울음소리였다. 아무래도 말을 하기에 적합한 구강 구조는 아닌 모양이었다.
상관없는 일이었다.
콰직-!
놈의 머리가 더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게 분명해졌으니까.
이안의 손아귀가 괴물의 머리통을 파고들었다. 마른 두부를 손으로 으깨는 듯한 감촉. 동시에 놈의 아가리가 좌우로 쩍 벌어졌다.
여러 겹의 이빨이 돋은 주둥이가 촉수처럼 앞으로 쭉 뻗어 나왔다.
깜짝이야, 시발. 몸을 옆으로 휙 젖혀 피한 이안이, 시계추처럼 되돌아오며 놈의 몸통에 양발을 디뎠다.
턱, 동시에 그의 왼손이 놈의 머리통 한쪽을 움켜쥐었다. 그러면서 뽑아 든 오른손으로는 반대쪽 얼굴을 힘차게 후려쳤다. 까드드득, 벌어진 아가리가 강제로 닫히기 시작했다. 미처 다 되돌리지 못한 촉수가 사이에 걸렸지만, 이안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우지지직-
이안의 양팔과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손끝이 괴물의 점점 더 깊이 괴물의 머리통을 파고들고, 이윽고 놈의 머리가 끔찍한 소리를 내며 몸에서 뜯겨져 나왔다.
그대로 발을 박차 떨어져 내리면서, 이안은 손아귀 사이의 머리통을 내려다보았다.
반쯤 으깨지기까지 한 와중에도, 놈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멀쩡하게 남은 몇 개의 눈알에서 실지렁이들이 꿈틀대는 듯한 파장이 번졌다. 놈의 정신파가 전해졌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사념.
‘뭐, 살려라도 달라고?’
이안의 양팔에 힘이 들어갔다. 으스러지던 괴물의 머리통이, 더는 견디지 못하고 수박처럼 터졌다.
그리고 그 감촉이 묘하게 기분 좋았다.
‘기분이 좋다고…?’
이안이 괴물의 체액과 파편으로 범벅인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는 사이.
쿠웅-
머리를 잃은 몸통이 한 박자 늦게 바닥에 쓰러졌다. 다리들이 한차례 꿈틀댄 것도 잠시. 곧 형태를 잃고 점액질이 되어 녹아내리면서, 동시에 증발하기 시작했다.
이안이 비로소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장내에 자주색 공허의 마력이 자욱하게 피어나는 것으로 보였다.
‘끝인가…? 그럼 이제 뭘 어떻게.’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두근, 이안의 전신이 울렸다. 혼돈의 파편이 다시 공명하고 있었다. 동시에 전신을 구성한 혼돈력이 타오르듯 뿜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안은 체념한 채, 그저 그 변화에 몸을 맡겼다.
보라색과 자주색이 어지럽게 뒤엉키고, 곧 함께 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쩌적-
그 한복판으로 새카만 균열이 번졌다. 균열 너머의 어둠이 삽시에 커지더니, 시야 전체를 물들였다.
“……!”
이안은 숨을 들이켰다. 동굴의 퀴퀴한 냄새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칠흑 같은 어둠. 어느새 다시 동굴 한복판이었다. 눈앞으로 퀘스트 완료 창이 이어졌다.
이안은 상반신을 일으켰다.
손아귀에서 두개골의 감촉이 느껴졌다. 안에 담긴 힘도.
이제 이 암흑 성물의 소유권은 그에게 있었다. 어둠 사이로 드러나는 두개골의 눈구멍을 내려다보며, 이안은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세상의 틈새라니. 이것의 전 주인인 흡혈 여제가 뇌리를 스쳤다.
그녀의 마지막을 함께한 환영. 그리고 그녀가 만들어 낸 균열과 방금 그가 겪은 현상이 아예 무관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럼 설마, 앞으로 암흑 성물을 손에 넣을 때마다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건가. 거기선 그런 공허의 괴물 같은 모습으로 싸워야 하고?’
이게 대체 뭔 의미가 있는 건데.
이안은 짧게 입맛을 다셨다. 답을 알 수 없는 의문이 너무 많았다. 늘 그랬지만, 타락 DLC와 관련된 부분들은 특히 더 그랬다.
공략 글에서도 해당 카테고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지 않았던가.
그가 아는 건, 그저 게임을 진행하며 어쩌다 알게 된 몇몇 단편적인 정보가 전부였다.
공허나 틈새는 물론이고 내면에 품은 혼돈의 파편에 대해서조차, 여전히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훨씬 더 많았다.
‘그렇다고 타락자들 한테 직접 물어볼 수도 없… 잠깐만.’
물어 볼 수도 있지 않나?
멈칫한 이안이, 이윽고 턱을 긁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