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187
187화
생각해 보니 아예 불가능할 것 같진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은 죽여 없애 버릴 놈들이니, 정보를 얻는 데 실패한다 해서 잃을 것도 없었다.
물론 원탁 의회에 타락자만 모여 있는 건 아니겠지만. 메브의 근본적인 복수를 돕는 동안에는 타락자를 여럿 마주치게 될 터였다.
그게 몇이나 될진 몰라도, 계속 시도하다 보면 의문을 조금은 풀어 줄 놈이 하나쯤은 있으리라.
‘죄다 실패하더라도 뭐, 타락하는 놈들은 끝도 없이 나올 테니까.’
결론을 내린 이안이 손을 털었다. 그의 손아귀에서 뿜어져 나간 불덩이가 횃불을 밝히고는 동굴 벽면에 부딪혀 흩어졌다.
공동의 전경이 드러났다. 분명 공허의 괴물과 싸웠건만, 그런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증거는 손아귀의 두개골, 그리고 텅 비어 버린 혼돈의 파편뿐이었다.
그래, 정말 별개의 공간이었단 거지.
생각하며, 이안은 비로소 두개골의 정보창을 열었다. 내용을 확인하던 그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진 건 몇 초 지나지 않아서였다.
‘모든 공허 주문 레벨 증가…?’
공허 주문이라니. 혼돈력 회복이나 하나 더 올려 줄 것이지.
하긴, 암흑 성물은 애초에 타락자 전용 아이템이었다. 언제 이런 옵션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게다가 어쨌건, 이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 옵션들은 그에게도 적용이 되는 것들이었다.
체력과 정신력은 물론 상대적으로 부족한 지능까지 하나 올려 주는 데다가, 각종 저항력 옵션들도 깨알같이 붙어 있었으니까.
그는 바닥에 떨어진 보관함까지 주워들며 비로소 일어섰다.
틈새를 걷는 자의 두개골을 다시 이 안에 넣을 필요는 없었다. 저주받은 물건을 안전하게 봉인하는 용도인 것 같으니, 가지고 다니다 보면 쓸 일이 있으리라.
‘하다못해 제국의 상인에게 팔아 치우기라도 할 수 있겠지.’
보관함과 두개골을 아공간에 던져 넣은 그는, 횃불도 들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건지는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고작 몇 분이 지났어도, 몇 시간이 훌쩍 지나 버렸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
이안의 미간이 좁아진 건, 저 멀리 동굴 입구가 보이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희미한 기합성과 고함. 병장기가 맞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마물의 것이 분명한 악취가 코끝을 스쳤다.
시간이 문제가 아니었군.
헛웃음을 지은 이안이 몸을 날렸다.
“우- 워억-!”
“자꾸 앞으로 나가지 마십시오, 테사! 간격 유지하세요!”
마물들의 비명. 일행이 저마다 내지르는 고함이 삽시에 선명해졌다.
동굴 입구를 향해 달려가는 이안의 미간이 절로 좁아졌다. 귀를 파고드는 마물들의 비명과 고함이 한두 종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동굴 트롤의 둥지 근처에 다른 마물이 많을 리가 없는데.’
보통은 있을 리 없는 일이 일어난다는 건, 당연히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힘껏 땅을 박차 동굴 밖으로 나서며, 이안은 세 번째 사도의 흑검을 꺼내 들었다.
서늘한 자루의 감촉. 미끈한 검날이 소리도 없이 검집을 빠져나오는 가운데.
‘…역시는 역시군.’
이안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단숨에 눈에 담았다.
안에서 들은 그대로였다.
고블린과 코볼트는 물론이고 식인 늑대와 거대 박쥐 같은 광기에 물든 짐승들. 거기다 구울과 해골 같은 되살아난 망자까지.
평소에는 저들끼리 죽고 죽이는 것들이 한데 뒤섞여 밀려들고 있었다.
심지어 마차와 동굴 입구를 등진 채 늘어선 일행의 주위로, 이미 죽어 널브러진 것들이 한가득이었다.
평소라면 진작 겁을 집어먹고 흩어져도 이상하지 않건만. 어둠을 뚫고 달려오는 것들은 뭔가에 홀린 것처럼 멈추지 않고 달려들고 있었다.
…뭐, 흑마법에라도 홀린 건가.
“나리! 드디어…!”
뒤를 돌아본 필립이 반색을 하며 소리쳤다. 각자의 자리를 지키던 일행들도 시선을 돌리는 가운데.
“고생들 했다.”
내뱉으며 그들 사이를 지나친 이안이, 곧바로 흑검을 휘둘렀다.
콰직-!
달려들던 고블린 한 마리가 종잇장처럼 썰려 나갔다. 날이 어찌나 예리한지 손에 걸리는 감촉조차 거의 없었다. 철퍽 허물어진 고블린이 그제야 크엑, 하는 단말마의 신음을 흘렸다.
“넌 마차를 지켜라, 귀쟁아!”
“필립! 부탁한다!”
거의 동시에 소리친 샬롯과 메브도 각자의 자리에서 돌격하기 시작했다.
본래부터 마차 앞을 지키던 필립이 방패를 고쳐 들고, 테사이아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 옆에 섰다. 마물을 제법 찔러 죽인 듯, 걸친 가죽 갑옷과 검에 마물의 체액이 범벅이었다.
그야말로 일사불란한 움직임이었다. 지금까지 자리를 지킨 건 그저, 한 마리의 마물도 동굴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일 뿐이었다는 듯이.
콰직-! 서걱-!
앞서간 이안은 쉬지 않고 검을 휘두르고, 때때로 돌풍이나 냉기 파장을 토해내며 마물들을 휩쓸었다.
말 그대로 일방적인 도륙이었다.
본래도 그다지 큰 위협이 되지는 않을 것들이라, 숫자가 많다 해도 그리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게다가 샬롯과 메브도 멈추지 않고 전진하면서 그가 포위당하지 않게 자리를 잡았다.
스걱-
“키… 엑….”
전투는 채 십 분도 지나지 않아 끝이 났다.
대부분의 마물들이 토막나고 짖이겨진 시체가 되어 널브러졌다.
뒤늦게 본능이 되돌아온 것처럼 주춤대던 남은 놈들은, 어느 순간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끼엑- 끼에에에-
도망치는 놈들의 비명이 산을 울리는 메아리가 되어 멀어졌다.
“정말 그냥 모여든 거라고…?”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린 이안이,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흑검을 휙 아공간에 던져 넣었다.
놈은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듯 낮게 울었지만, 이안의 손길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의식은 잘 끝낸 것이냐, 이안?”
숨을 고르며 다가온 메브가 물었다. 꽤 격렬한 전투였음을 증명하듯, 그녀의 갑옷은 온갖 마물들의 체액으로 범벅이었다.
“작은 사건이 있긴 했지만, 그럭저럭.”
대답하며 몸을 돌린 이안이, 어둠 저 너머의 마차를 눈에 담았다. 마차는 다행히 멀쩡했고, 말도 한 마리도 죽지 않았다.
테사이아가 그중 한 마리의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 쥐고 뭐라 속삭이고 있었다.
말은 투레질조차 하지 않고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녀석들이 차분한 건 그녀가 뭔가 한 덕분인 모양이었다.
이제 최면은 못 쓸텐데, 뭐지.
생각하며 마물 시체들을 칼로 뒤적대는 필립까지 눈에 담은 이안이, 비로소 덧붙였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요?”
“네가 동굴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대답한 건 전투 도끼를 늘어뜨린 샬롯이었다. 그녀가 숲의 어둠을 꿰뚫듯 돌아보며 덧붙였다.
“온 사방에서 모여들더군. 이것들, 동굴이 목표였다.”
“동굴이…?”
아 그래, 뭐에 홀렸나 했더니.
이안의 입가에 옅은 헛웃음이 번졌다.
두개골이 뿜어낸 공허의 마력이 마물들을 불러 모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불빛으로 날아드는 나방처럼,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으리라.
아무래도 동굴은, 타락자들의 밀실처럼 완벽하게 공허의 마력을 차단해 주지 못한 모양이었다.
“온 산의 마물이란 마물은 죄다 모여든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산 밖에서까지 왔을지도 모르죠.”
건질 게 없었던지 빈손으로 마차로 들어갔던 필립이, 가죽 수통을 여러 개 들고나오며 말했다.
마차로 다가오는 셋에게 차례로 수통을 건넨 그가 덧붙였다.
“요즘 거의 매일 마물을 보긴 했습니다만. 오늘은 특히 남달랐습니다. 이런 산속에서 이딴 것들에게 죽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니까요.”
“하여간 엄살은.”
“반쯤은 진심이었습니다. 보십쇼. 마물이 아무리 늘었다 해도, 이건 정말 너무 많잖아요.”
물을 마시며 피식댄 이안이, 대꾸도 없이 테사이아에게 수통을 건넸다. 하지만 필립은 아랑곳 않고 땅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정도 숫자면, 조만간 무리 지어 민가를 습격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입니다. 게다가 이것들, 뭘 먹고 자란 건지 하나같이 체구도 보통이 아니라고요.”
거 새끼. 하여간 적당히를 몰라.
혀를 차며 고개를 숙였던 이안은, 이내 슬쩍 미간을 좁히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확실히, 그렇긴 하네.”
“그렇죠? 전에 마경에서 본 놈들만큼 크고 끔찍하게 생기지는 않았습니다만. 고블린조차도 여간 몸이 좋은 게 아닙니다. 제국 근처라 더 강한 놈들만 남은 건지….”
“그보단, 놈들이 살기에 더 좋은 환경이 된 거겠지.”
장작 주위의 시체들을 발로 툭툭 차 밀어내면서 이안이 내뱉었다.
“더 좋은 환경이라뇨?”
“변방 전체가 검은 벽의 광기에 물들고 있다고 했잖아.”
불꽃을 던져 다시 모닥불을 밝힌 이안이 덧붙였다.
“마경이 아닌 곳의 마물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거다.”
게임에서도 변방이 마경 천지가 되었을 무렵엔, 일반 마물들도 더 크고 강해졌었다.
본래 있던 몹을 색만 바꾸거나 덩치만 키워서 재탕하는 건 게임에선 놀랄 일도 아니었지만.
현실이 된 지금도 비슷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모양이었다.
‘굳이 이런 것까지 현실성이 더해질 필요는 없지 않나…?’
필립이 이안의 건너편에 걸터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대륙에 마물들이 이렇게 창궐한 건, 전부 검은 벽 때문이었군요.”
“이젠 제국 땅도 안전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군. 마물들은 숫자가 많아지면 무리를 나눠 이동하는 습성이 있으니. 국경을 가리지 않고 번지고 있겠어.”
모닥불 옆에 앉은 메브가 투구를 벗어 옆에 놓으며 덧붙였다. 테사이아가 짐가방을 필립의 옆에 툭 내려놓은 건 그 직후였다.
“무슨 상관이야. 어딜 가도 있는 놈들이고, 보이는 족족 죽이면 그만인데. 언제는 안 그랬어? 쓸데 없는 소리들 그만하고, 나 배고파 죽겠으니까 얼른-”
그 순간 먼 하늘이 번쩍이며 테사이아의 얼굴에 순간 짙은 음영을 새겼다. 쿠르릉, 한 박자 늦게 천둥이 뒤를 이었다.
말들이 놀란 듯 투레질하고, 미간을 찌푸린 테사이아가 다시 일어나 녀석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때 또 한 번 먼 하늘이 번쩍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천둥.
“…동굴로 들어갈까요? 비가 올 것 같은데.”
가방에서 술병을 꺼내던 필립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앉으려다 말고 멈춰 선 샬롯이, 저 먼 하늘을 응시하며 내뱉었다.
“아니. 비는 안 와.”
“…이렇게 천둥이 치는데요?”
“난 수인이다. 오늘 날씨가 어떨지 정도는 바로 알 수 있다는 뜻이지. 비는 안 와. 이건 비를 몰고 오는 천둥 같은 게 아니야.”
샬롯의 말에 대답하듯 밤하늘이 요란하게 번쩍였다.
이어진 천둥도 하나가 아니었다.
멀리서부터 비교적 가까운 곳까지, 굉음이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연달아 이어졌다.
“화, 확실히. 평범한 벼락 같진 않아 보이긴 합니다만-”
애써 가벼운 목소리로 내뱉던 필립이 얼어붙었다. 이번에는 일행의 머리 위를 덮은 먹구름까지 눈부시게 번쩍였기 때문이다. 온몸이 울리는 듯한 굉음에 멍하니 입을 벌렸던 필립이, 이윽고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제가 잘못… 본 겁니까? 아니면, 정말 구름이 보라색으로 번쩍인 게 맞는 건가요…?”
“…내가 보기에도 그랬다. 필립.”
메브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하고, 샬롯도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말에 긍정할 찰나.
“아무래도, 뭔가 일어난 것 같아.”
테사이아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말들을 진정시키던 그녀는, 어느새 저 먼 북쪽 하늘을 뚫어질 듯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상한 게 보였어. 저 멀리, 구름 너머에서.”
“정확히 어떤… 이상한 거요?”
“정확히는 모르겠어. 이제는 사라졌거든. 하지만 분명히 봤어.”
내뱉으며, 테사이아가 모닥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그녀의 눈가를 따라 돋아난 핏줄이 꿈틀대고 있었다. 늪처럼 짙은 녹색의 눈동자에 흐릿한 마력이 아른거렸다.
이안의 눈을 마주 보며, 그녀가 덧붙였다.
“아주 커다란 그림자였어. 손가락처럼 꿈틀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