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188
188화
이안의 눈매가 꿈틀댔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산 능선 사이로 드러난 저 먼 밤하늘을 눈에 담으며 내뱉었다.
“꿈틀대는 그림자였다고?”
“응. 확실히. 엄청 먼데도 커다랬어. 마치-”
그때 다시 한번 구름이 번뜩였다.
눈을 멀게 할 것 같은 빛이었지만, 이안은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하지만 테사이아가 말한 아른거리는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불길한 보랏빛과 천둥뿐.
하늘을 돌아보았던 테사이아가 황급히 덧붙였다.
“말했다시피, 이젠 사라졌어. 하지만 잘못 본 게 아니야. 정말-”
“알아.”
말을 자른 이안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저 혹시 싶어 한 번 더 확인해 봤을 뿐이었다.
테사이아가 아, 그래? 하고 중얼거리는 사이. 이안은 그녀의 말을 들은 순간 떠올렸던 기억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흡혈 여제의 주마등 속, 흑백의 하늘을 가르던 균열. 그리고 그 사이로 드리우던 기다란 무언가.
그것의 아른거리던 그림자를 떠올린 이안이, 문득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일행 모두가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닥불 타들어가는 소리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짧게 헛웃음을 지은 이안이 내뱉었다.
“왜 항상 다들, 내가 모든 문제의 답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군.”
“그야… 나리는 수많은 괴물을 상대한 전문가이자… 금단의 지식을 탐구하는 마법사이시니까요…? 거기다 지금은….”
잠시 말을 멈춘 필립이, 이안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짐작 가는 부분이 있다는 눈빛이시기도 하고요. 나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다 같은 무표정이라 여기겠지만, 전 나리의 표정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게 됐거든요. 아마, 다른 분들도 그러실 테고요.”
일행들이 저마다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 없게 하네, 새끼.
입맛을 다신 이안이, 이윽고 내뱉었다.
“여제가 생긴 균열이 확실히 확실히 치명적인 틈을 만들어 낸 것 같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저 너머에서 뭔가가 넘어올 만큼.”
“……! 저 너머라면, 공허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글쎄, 그거야 모르지.”
내뱉은 이안이 손을 뻗었다.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필립이 쥐고 있던 술병을 그에게 내밀었다.
술병의 마개를 열면서, 이안이 메브를 돌아보았다.
“이 세계의 이면에 공허만 존재하는 건 아니니까.”
“…틈새를 말하는 것이구나. 이 세상의 이면.”
메브가 가라앉은 눈으로 대꾸했다. 이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디서건 뭔가 넘어오긴 한 모양이오. 언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술병을 입에 가져가며, 그가 툭 덧붙였다.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일어났군.”
“…….”
“…….”
술을 마시는 이안을, 메브와 필립이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 너머의 존재가 어떤 괴물들인지, 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이미 경험한 그들이었다.
변방에 얼마나 끔찍한 변화가 일어날지 상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하지만 진짜 엄청 커 보였는데. 그런 괴물이라면 어디 숨을 수도 없을 거야.”
테사이아가 덧붙인 건 그때였다.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필립이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공허의 존재들은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냅니다. 모습을 바꾸거나, 어쩌면 일부만 이 세계에 넘어왔을지도 모르죠. 그도 아니면 저 너머에 남은 채로도 이 세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게 됐을지도 모르고요. 적당한 마경을 찾아 거기 뿌리를 내렸을 수도 있겠죠.”
“아하….”
“확실한 건 하나 뿐입니다.”
테사이아와 샬롯을 번갈아 바라본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세상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치리라는 것이요.”
“그런 괴물들이 그렇게 많다면… 이 세상은 진작 멸망하고도 남았어야 하지 않을까?”
“놈들은 대가 없이 이 세계에 머물 수 없다더군. 마경을 거닐 때를 제외하고는.”
샬롯이 새 술병을 꺼내 마개를 열며 대답했다. 테사이아가 아하,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필립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지금 변방 곳곳에는 마경이 열리고 있죠. 분명 더 가속화되었을 테고, 완성된 후엔 그 범위도 넓혀 갈 겁니다.”
이안가 메브를 돌아본 그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러니까… 다시 변방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글쎄….”
읊조리며, 이안은 알아서 하라는 듯 술병을 입에 가져갔다.
물론 그는 변방에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가 보기에 이건, 막을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었으니까. 심지어 당장은 아는 게 전혀 없지 않은가.
단서를 찾는답시고 돌아다녀 봐야, 소득 없이 시간만 보내게 될 터였다. 경험치조차 없는 무의미한 살육으로 귀결될 귀찮은 상황들이나 잔뜩 기다리고 있겠지.
그보단 해야 할 일에 집중하는 편이 나았다. 백금룡의 의뢰 같은.
하지만 물론, 메브와 필립이 돌아간다고 한다면 그 결정도 존중할 생각이었다.
이들이 쫓는 주르도라는 사제는, 그가 대신 찾게 되겠지만.
“…아니.”
메브가 내뱉은 건 그때였다.
샬롯에게 술병을 건네받은 그녀가, 이안처럼 병째로 한 모금 마시고는 덧붙였다.
“우리는 돌아가지 않을 거다, 필립.”
“…….”
“내 이 선택에 대한 대가와 착임은… 모든 일이 끝난 후에 치를 거야. 피하거나 외면하는 일 없이.”
여러 의미를 함축한 말이었다. 정확히 어떤 생각으로 내뱉은 말인지는, 아마도 그녀 본인만이 알고 있으리라.
메브를 가만히 바라보던 필립이,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리만 그런 짐을 짊어지시게 할 순 없죠. 저도 같이 지겠습니다.”
“…….”
묘한 눈빛이 된 메브가, 대답 대신 다시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녀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필립이 애써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생각해 보면, 무작정 최악이기만 한 건 아닙니다. 어쩌면 이게 계기가 되어서 전쟁이 끝날지도 모르잖아요? 안 그렇습니까, 나리?”
“살아남으려면 그래야 할 순간이 온다면… 그럴지도 모르지.”
이안이 대충 대답했다. 말 그대로 생존의 문제가 되기 전까진 전쟁이 계속될 것이라거나. 그 전까진 영지민들의 목숨 따위엔 관심도 없는 용병과 타락자들이 더 활개를 치게 되리란 식의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이안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세상은 이미 충분히 개판이야.”
테사이아가 툭 끼어들었다. 가방에서 햄 덩이와 치즈, 육포를 주섬주섬 꺼내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에 하나하나 신경을 쓰다간 끝도 없을 거란 얘기지. 게다가 세상에 어둠과 싸우는 게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단검을 뽑아 햄을 썰기 시작한 그녀를 보며, 이안이 짧게 헛웃음을 흘렸다.
이젠 꽤 그럴듯한 말도 하는군.
술을 한 모금 들이켠 필립이, 소매로 입가를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옳은 말씀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싸움을 계속해 나가야겠죠. 이럴 시간에, 각자 제국에서 맡은 역할에 대해서나 한 번 더 복습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그것도 식사 중에?”
“꿈에서도 나올 정도로 해 둬야,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는 법입니다. 테사. 제가 구울 테니, 테사부터 다시 시작해 보세요.”
필립이 잡념을 떨치려는 듯 움직이고, 테사이아가 떨떠름하게 자신의 위조 신분에 대해서 읊어 대기 시작했다.
다음 차례임을 직감한 듯 내키지 않는 눈빛이 된 샬롯과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술을 들이켜는 메브를 차례로 바라본 이안이, 이윽고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이제는 조용해진 밤하늘을 잠시 응시한 그가 눈을 감았다.
지옥처럼 변한 변방의 전경이, 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필립의 인도 아래 멈추지 않고 남동쪽으로 나아간 일행은, 이윽고 산길을 벗어났다.
완만하게 이어진 평야와 숲.
제국이었다.
적당히 따듯한 날씨와 건조한 공기. 하지만 날이 맑지는 않았다. 변방에서 번진 먹구름이 어느새 제국의 하늘까지 조금씩 잿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이안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어쩌면 자신이 어둠을 몰고 다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는 그 반대겠지만. 어쨌건, 가는 곳마다 하늘이 우중충해 지는 게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다.
“지도가 틀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제국 서부와 중부의 경계선 어디쯤 있을 겁니다. 이 숲이 끝나면 관도를 타도록 하죠.”
필립의 예고대로, 그들은 곧 관도에 접어들었다.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지만, 꽤 잘 다듬어진 도로였다.
관도 오른쪽으로는 숲이, 왼쪽으로는 드넓은 평야가 이어졌다.
하지만 마냥 목가적인 여정은 아니었다. 메브가 예지한 것처럼, 밤에는 숲의 어둠 너머에서 마물들이 기어 나와 어슬렁댔다.
물론, 마물 퇴치도 일상의 일부가 된 일행에겐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역시, 이제 제국도 그리 치안이 좋지 않군요.”
“여기가 변경이라 그런지도 모르지. 변방으로 통하는 길이 인접한 것도 아니고, 중부로 이어지는 길은 이곳 말고도 많으니까.”
“잘 아시는군요, 샬롯. 제국에 살 때 서부에도 와 본 적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없다. 하지만 서부 사람들이 배를 타고 들어오는 건 몇 번 봤지.”
“아하…. 아, 남쪽으로 가면 내해가 있었죠. 전 변방 촌놈이라 그런지, 내해가 있다는 게 어떤 건지 잘 상상이 되질 않습니다.”
“상상할 필요도 없다. 최악이니까. 배는 끔찍해. 타는 동안에도 멀미가 나는데, 하선하고 나서도 한동안 이어지지.”
“그래도 그걸 타면 내륙 깊은 곳까지 편하게 이동할 수 있다던데요.”
“시간을 아낄 수 있을 뿐이야. 언젠간 너도 타게 될 날이 있을지도 모르지.”
시답지 않은 대화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어졌다.
이안은 묵묵히 그들의 대화를 귀에 담았다. 제국 서부에 대해서는 그도 거의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임에서 그가 이곳에 발을 들인 건 서부의 중심인 라클리프가 전부였고, 그 시기의 서부는 이미 사람 살 동네가 아니었다. 심지어 라클리프 조차도 그랬다.
하지만 지금 일행의 앞에 펼쳐진 서부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제 막 구름에 덮이기 시작한 하늘. 지평선이 보이는 평야와 숲. 아직은 별 볼 일 없는 마물들. 개간 중인 듯 나무 밑동만 남은 들판과 그마저도 다 뽑아낸 빈 땅.
“…이안.”
지루한 여정에 변화가 생긴 건, 며칠이 지난 오후였다.
마차에 탄 샬롯이 마부석으로 이어진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마부석 구석에 기대 술을 홀짝대던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
샬롯은 테사이아의 시종 역할을 하게 된 덕분에, 어쩔 수 없이 마차에 함께 타고 있었다.
마부석은 필립과 이안의 차지였다. 제국에 들어선 이후로 일행은, 보는 사람이 없어도 자신의 가짜 신분에 맞게 행동하고 있었다.
언제 제국인을 마주칠지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샬롯이 어느 순간부터 조금 더 울창해진, 그리고 저 너머로 산기슭이 보이는 숲을 돌아보았다.
“비명이 들렸다.”
“비명…?”
“그래. 마물 같은데. 사람 고함과 발굽 소리도 들리는군.”
“…….”
필립의 시선을 받으며, 이안이 자세를 바로 했다. 곧 그의 눈매도 가늘어졌다.
“그래. 들리는군.”
“마차를 세울까요, 나리?”
“아니. 계속 가라.”
숨소리와 말발굽 소리, 나무에 뭔가 부딪치는 소리 등등에 귀를 기울이며, 이안은 숲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곧 어둑한 숲 너머로 소리의 정체가 드러났다.
일련의 기수들이 관도를 향해 부리나케 도망치고 있었다. 꽤 중무장을 한 자들이었다.
그들이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는지는 모를 수가 없었다.
집채만 한 크기에 머리에 뿔이 달린 암녹색 도마뱀이 그들의 뒤를 쫓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다리가 여섯 개나 달린 놈이었다.
이안이 들은 뭔가 부딪히는 소리는, 놈이 기수들을 추격하며 나무에 몸을 들이받는 소리였다.
“저거… 용입니까?”
필립이 자세히 보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댔다. 이안이 코웃음을 쳤다.
“넌 뭐 죄다 용이냐? 애초에 저건 날개도 없는데.”
“바실리스크로군.”
메브가 내뱉었다. 그녀는 어느새 투구를 머리에 쓰고 있었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다만.”
“내가 보기에도 그렇소.”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이 일어섰다. 저건 게임에서도 정예 마물로 분류되던 놈이었다. 경험치를 놓칠 수는 없었다. 전리품 역시.
그의 시선을 받은 메브가 말을 마차 옆으로 바짝 붙이는 가운데, 샬롯이 다시 마부석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나도 같이 가겠다, 이안. 바실리스크라니, 나도 싸워 본 적 없어.”
다급하게 내뱉은 그녀가, 숲 너머를 눈에 담으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메브의 뒤에 올라탄 이안이 피식댔다.
“넌 자리를 지켜라.”
도망자 무리 맨 뒤, 서코트를 걸친 퉁퉁한 체구의 사내를 눈에 담은 이안이 덧붙였다.
“저기 쫓기는 놈, 귀족이니까.”
“…….”
“천천히 따라와라, 필립.”
탄식하는 샬롯을 외면하며 덧붙인 이안이, 메브의 어깨를 두드렸다. 메브가 기다렸다는 듯 고삐를 후려쳤다.
말은 중무장한 둘을 태우고서도 힘차게 내달려, 거침 없이 숲으로 접어들었다.
“아니…?!”
이윽고 도망치던 기수들 몇이 이안과 메브 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경악성을 흘리는 사이.
“오, 오지 마시오!”
서코트를 걸친 퉁퉁한 사내가 소리쳤다.
“도, 도움은 감사하나, 날붙이만으로 상대할 수 있는 놈이 아니오! 숲 밖까지 따라오진 않을 테니, 말 머리를 돌리시오!”
저 살기도 바쁜 와중에, 착한 놈이군. 입꼬리를 말아 올린 이안이 내뱉었다.
“그렇다는데. 어쩌시겠소?”
“어쩌긴.”
짧게 웃음 지은 메브가 보란 듯 고삐를 한 번 더 후려쳤다.
뒤이어 고삐를 한 손으로 고쳐 쥔 그녀가 허리춤에서 늘씬한 양손 검을 뽑아 들었다.
“내가 내릴까?”
“마상 전투는 경 전문이잖소. 적당한 순간에 뛰어오를 테니, 갈라집시다.”
“그러지.”
옆으로 손을 뻗은 이안도 아공간에서 흑검을 꺼내 들었다. 목격자가 여럿이니 내장된 스킬을 쓸 수는 없겠지만, 예리한 칼날만으로도 충분하리라.
“키에엑-!”
곧 속도를 늦춘 바실리스크가 이 세계의 파충류 마물들 특유의 괴성을 토해냈다. 측면에서 달려오는 이안과 메브를 비로소 발견한 것이다.
콰르르르- 우지끈-
놈이 바닥을 굴러 아름드리나무 한 그루를 쓰러뜨리며 멈춰 서는 사이.
“눈을 똑바로 마주 보지 마시오. 경은 몰라도, 말은 바로 숨이 끊어질 수도 있소.”
속삭인 이안이 말 엉덩이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휘몰아친 바람이 그의 몸을 힘껏 떠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