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192
192화
“맞는데.”
이어진 대답에, 필립이 눈을 질끈 감았다.
“루 솔라여…. 아니, 거길 대체 왜 가시려는 겁니까? 그러다 병이 옮기라도 하면-”
“난 안 옮아. 너도 성물이 있으니 걱정 없고.”
“아니… 저를 콕 집어서 데려오신 게, 그래서였습니까?”
“어느 정도는.”
“그러다 저랑 나리 둘 다 병에 걸리면요?”
마물 마족 할 것 없이 몸을 던져 썰어 대는 주제에, 풍토병이 무서워서 벌벌 떨다니.
본성이란 건 아무리 무뎌져도 사라지지 않는 모양이라 생각하며, 이안은 필립을 돌아보았다.
“그럼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되겠지.”
“증거라뇨…? 무슨 증거요?”
“뭐긴.”
돌고 있는 병이 단순한 돌림병이 아니라는 증거지.
속으로만 덧붙인 이안이 앞서 걸어갔다.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던 필립이 이내 미간을 좁혔다.
“나리, 왜 말씀을 하다 말-”
“따라오기나 해. 뭐든, 가서 보면 확실해질 테니까.”
“…….”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꾸한 이안이 멀어졌다. 한숨을 푹 내쉰 필립이, 이윽고 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코 아래를 덮어 묶으며 그 뒤를 따랐다.
***
오벨리의 말대로, 성벽 뒤쪽에는 농노들의 거처와 조금 거리를 두고 지어진 판잣집들이 여러 채 지어져 있었다.
밖에 횃불을 밝혀 두긴 했지만, 근처를 오가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
이안은 차례로 집을 방문해, 내부의 상태를 확인하고 나오는 일을 반복했다.
처음 몇 채는 빈집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한두 명씩의 병자들이 누워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대충 지어진 침상과 바닥에 널브러져 앓고 있었다. 시설이 전혀 위생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새삼스럽게 놀랄 일도 아니었다.
강도처럼 얼굴 절반을 가린 필립은, 그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끝내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입을 연 순간 병이 옮으리라 여기는 게 분명했다.
이안은 그깟 천을 얼굴에 두르는 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말을 굳이 하지 않았다.
덕분에 필립이 조용해졌으니까.
“……?”
이안의 미간이 좁아진 건, 제법 깊은 곳에 위치한 집의 문을 열었을 때였다.
뒤에 선 필립이 순간 헐떡일 정도의 악취. 하지만 이안이 미간을 좁힌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장내를 돌아보는 그의 눈동자에 흐릿한 광채가 서렸다. 마력 탐지. 동시에 신경이 곤두서면서, 육감이 한층 더 날카롭게 벼려졌다.
“역시….”
이윽고 그가 나지막이 중얼댔다.
어지간해선 느끼기 힘들 만큼 미세한 오염된 마력이 제법 선명해졌기 때문이다.
흑마법이나 저주의 흔적.
아직도 문밖에 선 필립에게 들어오라 손짓한 이안이, 나란히 누운 두 명의 병자에게로 다가갔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숨소리.
이안은 등을 지고 누운 병자 하나를 끌어당겨 바로 누였다.
“으으….”
본능적인 반응일 뿐, 병자는 이미 의식이 없어 보였다.
그의 상태를 훑는 이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피부가 나무껍질처럼 벗겨지고, 그 끝이 검게 변색 되고 있었다.
그 사이로 종기들이 부풀어 오르고, 반개한 눈은 하얗게 먼 채였다.
‘…역시, 똑같네.’
그의 뇌리로 게임 속 라클리프의 전경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의 라클리프는 이미 부패와 역병의 도시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부패와 역병을 흩뿌리는 권속들이 배회하는 죽음의 도시.
비단 라클리프만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서부 전체에 되살아난 망자와 마물이 배회했고, 대지 자체가 썩어 버렸다.
인근의 바다도 마찬가지였다. 이지를 가진 존재는 그들의 목숨을 대가로 강대한 힘과 영생을 얻은 타락자들 뿐이었다. 물론, 그들 역시 아주 끔찍한 몰골로 변이되어 있었지만.
이안이 라클리프의 보스만 간신히 클리어하고 서부를 떠난 건, 지역 전체가 그저 걸어 다니기만 해도 체력이 깎이는 죽음의 땅이 되어서였다.
‘그걸 견디기엔, 독과 질병 내성이 꽤 부족했지.’
보아하니 그 모든 사태의 원흉이, 그때 죽인 보스가 아닌 모양이었다.
“루 솔라여….”
필립이 속삭이듯 탄식했다. 그는 병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안이 턱짓을 하고서야 화들짝 정신을 차린 그가 문을 닫았다.
이안이 덧붙였다.
“와서 신성력 좀 부어 봐.”
필립은 왜 그래야 하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가라앉은 눈으로 다가와, 병자의 몸 위에 손바닥을 펼쳤다.
그의 손아귀에서 은은한 빛이 번져, 이윽고 병자의 몸으로 내려앉았다.
“…컥. 커어어….”
병자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번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벗겨진 피부 사이로 핏줄이 울룩불룩 돋아나고, 크고 작은 종기들이 터질 것처럼 꿈틀댔다.
“……!”
필립의 눈이 커졌다.
신성력이 질병의 회복에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눈에 보이는 변화를 만들어내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건 질병이 치료되는 것보다, 저주가 정화되는 현상에 더 가까웠다. 혹은, 신성력에 죽어가거나.
“이게 대체….”
나지막이 탄식한 필립이 이안을 바라보았다. 설명이 필요하다는 눈빛.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보이는 그대로다.”
“그럼 이건… 정말….”
필립의 멍한 시선이 신음하는 병자의 전신을 훑었다. 그 와중, 신성력이 집중적으로 닿은 부분은 조금씩 지글대며 타들어 가고 있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라는 뜻이리라.
“……!”
이안의 시선이 문 쪽으로 돌아간 건 그때였다.
필립이 주먹을 움켜쥐자 손아귀의 빛이 단숨에 사그라들었다.
시선을 교환한 이안과 필립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창가에서 떨어진 어둠에 몸을 숨겼다.
“으… 으으….”
남겨진 병자가 흘리는 신음만이 번지고, 발소리가 근처까지 가까워졌다. 필립이 소리 없이 단검을 뽑아 들고, 이안도 운철 단검의 자루에 손을 얹는 가운데.
“오… 오오오…!”
“뭐 저런 엄청난 괴물이…?!”
“대공자 만세!”
성벽 너머에서 왁자지껄한 탄성과 함성, 휘파람 소리가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집으로 다가오던 발걸음이 멈추더니, 곧이어 왔던 길을 되돌아 빠른 속도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거참 타이밍도 좋군.
이안은 단검 자루에서 손을 뗐다.
발소리를 쫓아갈 필요는 없었다.
타락자와 관련된 인물이라 해도, 원흉이라 할만한 핵심 인물이 아닌 이상 당장 처리하는 건 득보다 실이 더 많았다.
이쪽은 아직 아는 게 별로 없지 않은가. 필요한 정보를 다 얻기 전까진, 저들이 꼬리를 밟혔다는 사실을 모르게 두는 편이 나았다.
‘어차피 목적을 이루기 전까진 어디로 떠나지도 않을 테고.’
병자들을 내려다보던 이안은, 이내 몸을 돌려 다음 집으로 향했다. 병자들을 향해 짧게 기도한 필립이 숨죽여 그의 뒤를 따랐다.
이안은 다음 몇 채의 집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내부만 확인했다. 전부 좀전의 병자들과 비슷한 상태였다.
“…….”
이안이 다시 장내로 들어선 건, 고작 네 채의 집만을 남겨뒀을 때였다. 죽음의 냄새가 났다. 그가 장내에 누운 병자에게로 다가갔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그가 병자의 상태를 눈에 담았다. 머리카락 한 올 남지 않은 병자는, 새카맣게 물든 앙상한 알몸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였다. 몸 곳곳에 툭툭 튀어나온 손바닥만 한 종기가 살아있는 것처럼 맥동했다.
종기 내부에서 오염된 마력이 한층 또렷하게 느껴졌다.
병자의 생명을 빨아먹고 자라난 덕분이리라.
그때 이안의 눈앞으로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역병의 원흉.
그가 퀘스트의 내용을 눈에 담으며 오른손의 장갑을 벗는 그때.
“이해할 수가 없군요…. 이들도 가족이 있을 텐데요. 가족이 이런 상태인 걸 안다면… 저렇게 평화로울 리가….”
필립이 나지막이 중얼댔다. 이안이 장갑을 벗은 손을 병자 위로 내밀며 대꾸했다.
“테센에 보내진 줄 알겠지. 초기 증상이 나병과 비슷하니까.”
“그런….”
필립이 탄식하는 가운데, 이안의 중지에 끼워져 있던 검은 반지가 스르르 움직여 뱀의 형태가 됐다.
늪지의 원한. 어느 순간부터 이안에게 반항조차 하지 않게 된 녀석은, 지금에 와선 자의식조차 거의 남지 않은 상태가 되어 있었다.
생사를 오가는 전투와 온갖 종류의 신성력에 장시간 노출된 탓이리라. 지금은 그저 이안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인형에 더 가까웠다.
삼킬 수 있다면 조금 삼켜 봐라.
이안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녀석이 스르르 손가락 사이로 기어 내려가 병자의 몸 위에 떨어졌다.
늪지의 원한이 종기를 콱 깨물고 꿈틀대는 사이.
“…나리는, 어떻게 아신 겁니까?”
필립이 문득 물었다. 이안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내뱉었다.
“뭐가.”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으리란 것을요.”
그래, 궁금해 할 줄 알았지.
건조하게 코웃음 친 이안이 대답했다.
“잘.”
“…조금만 더 친절하게 설명해 주시면 안 될까요?”
“혹시나 했을 뿐이야. 아까 대공자가 그랬잖아. 평소보다 이른 시기에 병이 돌았다고. 알다시피 테센에는 타락자가 있고, 서부에는 어둠이 깃들고 있으니까. 한 번 확인차 들러 본 거다.”
“혹시가 역시가 되셨겠군요.”
“그렇지.”
“맙소사… 이제야 왜 대공자나 백작에게 아무런 경고도 하지 않으시겠단 건지 알겠군요. 그자들도 믿지 않으셨던 거예요. 이 풍요로운 모습을 보고서도 방심하지 않으시다니, 역시 나리십니다….”
“그건 정말 귀찮아지기 싫어서였어. 의미 부여하지 마라.”
코웃음 친 이안이 손을 뻗었다. 종기에서 입을 뗀 늪지의 원한이 용수철처럼 그의 손으로 튀어 올랐다. 놈의 몸통 한복판은 어느새 메추리 알을 삼킨 것처럼 부풀어 있었다.
녀석이 낑낑대며 손가락에 감기는 사이, 일어선 이안이 다시 몸을 돌렸다.
“또 어딜 가시는….”
“이들에게 기도라도 해 줘라. 여기서 루 솔라의 신도는 너 뿐이니까.”
내뱉은 이안이 밖으로 나갔다. 필립이 선선히 무릎을 꿇었다. 얼굴의 반을 덮었던 천을 벗어버린 그가, 눈을 감고 기도문을 읊었다. 이윽고 기도를 끝낸 필립이 병자를 내려다보며 일어섰다.
“…당신들의 복수는, 반드시 해드리겠습니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읊조린 그가 비로소 집을 나섰다.
우두커니 선 채 어둠 너머를 응시하는 이안의 모습이 선명해졌다. 필립도 그가 바라보는 것과 같은 방향을 돌아보았다.
어둠에 휩싸인 성벽.
“뭘 보시는 겁니까?”
“…끝냈으면 돌아가자.”
시선을 거둔 이안이 몸을 돌렸다.
“도마뱀이 도착한 것 같은데, 너무 늦으면 이상하게 여길 테니.”
***
도시의 밤거리는 주민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주민들은 도시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는 듯, 하나 같이 흥이 돋은 얼굴들이었다. 다들 다리 여섯 달린 거대 도마뱀에 대한 온갖 종류의 헛소리들을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화제의 주인공인 바실리스크는, 백작 가의 장원 한복판에 놓여 있었다. 병사들과 시종, 하인들도 그 거대한 괴물의 시체를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오, 이반 경! 드디어 오셨군! 어디에 계셨었소?”
그 앞에서 병사들과 껄껄대고 있던 오벨리가 이안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이안의 건조한 시선을 받은 그가 얼굴 가득 웃음 지으며 덧붙였다.
“별관에 올라갔더니 부재중이셔서, 내려와서 기다리고 있었소. 저 놈을 안주 삼아 한 잔 마시면서 말이오. 경도 한잔 하시겠소?”
그를 가만히 응시하던 이안이, 비로소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바실리스크를 돌아보았다.
“이 큰걸, 정말 빨리도 옮기셨군.”
“다들 무거운 걸 옮기는 데에는 이골이 나 있어서 말이오. 그보다, 처분은 어떻게 하시겠소?”
오벨리가 나무 술잔을 들어 바실리스크를 가리켰다. 안에 찰랑거리는 액체는 볼 것도 없이 맥주였다.
“어떤 걸 원하시오?”
“통째로 팔아 주신다면 더 바랄 게 없지. 그래 주신다면 이대로 몇 시간쯤 놓아두고 구경하다가, 곧바로 해체 작업에 들어갈 생각이오. 아버님도 확인하고 들어가셨고.”
“가격만 맞는다면야. 못 그럴 것도 없지.”
“그럼 금화 다섯 개는 어떠시오? 물론 제국 금화로.”
곧바로 이어진 말에 이안이 짧게 웃음 지었다.
“아무리 운반비가 포함되어 있다고 해도, 너무 후려치시는군.”
“이런, 들켰군. 하하. 흥정이 몸에 배어 있어서 말이오.”
넉살 좋게 웃음 지은 오벨리가 덧붙였다.
“그럼 여덟 개는 어떻겠소?”
아마도 금화 열 개까지 올라갈 것을 염두에 둔 가격이리라. 이안은 그 기대에 부응하는 대신,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한 가지 조건만 받아들이신다면, 그렇게 하겠소.”
“한 가지라면, 어떤?”
“놈을 해체하다 보면 정수가 나올 수도 있소. 그건 이쪽에 넘겨주시오. 주군께서 요긴하게 쓰실 테니.”
“흠…. 저 정도 되는 마물의 정수는, 나오기만 하면 꽤 비싼 값에 거래되는 물건이라고 들었는데….”
두툼한 턱을 긁적이던 오벨리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저건 경의 전리품인데, 내가 고민하는 것도 우습군. 알겠소. 가죽과 피, 뿔에 이빨만 해도 금화 여덟 개 가치는 충분하니까.”
그가 이안에게 손을 내밀며 덧붙였다.
“찬란한 여신께 맹세코, 정수가 나온다면 경께 가져다드리리다. 이렇게 거래를 끝내시겠소?”
“그럽시다.”
그 맹세가 정말 의미 있을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속으로 덧붙이며, 이안이 손을 맞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