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193
193화
“이제야 마음이 좀 놓이는군. 고맙소, 경.”
이안의 가라앉은 눈빛을 눈치채지 못한 듯, 오벨리가 기분 좋게 웃으며 내뱉었다. 이안이 손을 놓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별말씀을.”
“돈은 곧 시종을 통해 올려 보내겠소.”
“그리 알고 있겠소. 그럼 이만 올라가 보겠소.”
“편히 쉬시오. 아마 지금쯤 다들 저녁 식사 중일 것이오. 그럼, 내일 아침에 봅시다.”
몸을 돌리다 멈칫한 이안이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내일 아침에, 뭔가 있소?”
“아. 올라가면 아시게 되겠지만, 아버님께서 내일 오전에 귀하들과 대면을 요청하셨소. 자주 있는 일은 아닌데. 이런 마물을 손쉽게 처치한 용사들과 고귀한 원로 요정을 직접 뵙고 싶으신 모양이오.”
“…밤이 아니라 오전에?”
오벨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본래는 저녁을 원하셨소만, 저녁엔 내가 만찬을 준비할 예정이라서 말이오. 내 손님이니 아버님이 양보하실 수밖에. 정작 공께선 아버님의 요청은 수락하시고, 내 요청은 고민해 보겠다 하셨소만.”
아, 그런 식이었던 거군.
고개를 끄덕이는 이안을 바라보며 오벨리가 목소리를 낮췄다.
“경이 설득 좀 해 주시오. 감사를 표하려 마련하는 자리에, 주인공들이 빠지셔야 되겠소?”
“말씀드려 보겠소.”
만찬이 열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속으로만 덧붙이며,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벨리가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혹여 술을 마시고 싶다면 언제든 내려오시오. 계속 술판을 벌일 예정이니까.”
대답을 기대한 말이 아닌 듯, 장난스럽게 잔을 들어 보인 오벨리가 몸을 돌렸다. 그가 그대로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며 멀어졌다.
빵과 맥주의 수호자라더니. 술을 마시면 성격이 호탕해지는 권능이 있는 모양이었다.
“접견이라니….”
내내 전혀 웃지 않고 있던 필립이 중얼댔다. 그를 돌아보며 건조하게 웃은 이안이, 별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오벨리의 말대로, 일행은 테사이아의 방에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이안. 벌써 대공자가 왔다가 갔다구.”
테사이아가 입가에 고기 양념을 묻힌 채 말했다.
이안이 허리춤의 검을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밑에서 만났다.”
“아, 그래? 그럼 얘기도 다 들었겠네?”
“그래. 백작의 요청을 받아들였다지?”
되물으며 자리에 앉은 이안이, 메브가 건넨 술잔을 받아들었다. 테사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요청을 그 자리에서 딱 잘라 거절할 수는 없잖아. 그래서 말인데.”
고기 조각을 입에 날름 넣으면서, 그녀가 미소 지었다.
“내일 오전에 떠나자. 괜히 백작이랑 한자리에 엮여서 좋을 거 없잖아. 방금까지 그 얘기 중이었어. 무슨 핑계를 대는 게 좋을지. 마땅한 게 나오진 않았지만.”
그녀의 건너편에 앉은 샬롯이 맥주잔을 들며 덧붙였다.
“그래서 널 기다렸다, 이안. 너라면 분명 뭔가 묘수가 있을 테니.”
“글쎄….”
필립과 슬쩍 눈빛을 교환한 이안이 내뱉었다.
“백작을 만나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엥…?”
테사이아가 고개를 기울이고, 샬롯이 미간을 찌푸리는 사이.
필립의 표정을 보고 있던 메브가 입을 열었다.
“가짜 신분이 들통날 위험성은 이미 알고 있을 테고…. 그래야 할 이유가 있겠구나.”
“그렇소.”
“밖에서 뭔가 일이 있었구나. 어딜 다녀온 건데, 이안?”
테사이아가 뒤이어 물었다. 이안이 술잔을 들며 대답했다.
“성 밖. 판자촌.”
“판자촌…?”
“병자들을 격리한 곳 말입니다.”
필립이 덧붙였다. 이안의 시선을 받은 그가, 밖에서 본 것들을 가라앉은 목소리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이안은 입만 축이려던 맥주를 한잔 전부 마셨다. 최근에 마신 맥주 중에 가장 맛이 좋았다. 물론 미지근하긴 했지만, 아직도 코끝에 감도는 악취를 날려 버리기엔 충분했다.
“그러니까 역병이, 그것도 저주로 만들어진 게 분명한 역병이 돌고 있단 말이로군. 그것도 주민들은 전혀 모르는 사이에.”
설명을 듣고 난 메브가 심각해진 얼굴로 읊조렸다. 다시 잔을 채우면서,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아직은 돌고 있다고 말할 만큼 번지진 않은 것 같소만.”
필립에게 다시 한번 눈짓을 보내며, 이안이 오른손 장갑을 벗었다. 배가 부푼 채로 손가락에 감겨 있던 늪지의 원한이 식탁 위로 툭 떨어졌다.
곧 녀석이 웩, 삼키고 있던 것을 일부 게워냈다. 아주 적은 양이었지만 일행들의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타르처럼 새카맣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점액질이었으니까.
푸스스-
점액은 곧바로 녹아내리듯 검은 연기로 변해 피어올랐다.
필립이 기다렸다는 듯 오른손을 내뻗었다. 손아귀에서 뻗어 나온 흐릿한 빛이 연기와 점액질을 그대로 태워 버렸다.
저주의 부산물이라는 걸 보여 주기엔 충분한 증거였다.
“드네로브에도 타락자가 암약하고 있었던 거군…. 이미 희생자들까지 만들어 내면서.”
메브가 탄식했다. 다시 늪지의 원한을 반지로 되돌린 이안이 포크를 들었다. 그가 접시에 놓인 고기를 입에 넣는 사이.
“내가 본 그 괴상한 그림자의 영향일 수도 있지 않을까? 변방의 어둠이 내려오고 있다며.”
고기를 우물대던 테사이아가 물었다. 아직도 음식을 먹고 있는 건 그녀와 이안뿐이었다. 샬롯과 메브는 포크를 내려놓고 술잔만 손에 들고 있었고, 필립은 아예 처음부터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이안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게 이곳의 타락자들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할 계기가 되었을 거다. 그 전부터 시작된 거라면, 이미 도시가 쑥대밭이 됐을 테니까.”
“…어쩌면, 우리가 쫓는 자와도 연관성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메브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안이 고기를 씹으며 대답했다.
“그럴지도. 그건 확인해 보면 알게 되겠지. 물론, 경이 그냥 테센으로 떠나시겠다 해도 그리하겠소. 난 지금, 경의 복수를 돕고 있으니까.”
형식적인 말이었다. 역시나, 메브는 고민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확인해 보도록 하자. 내 복수를 떠나, 타락자들의 음모를 알게 되고도 외면할 수는 없는 법이니.”
“그러시다면야.”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다시 식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남은 얘기는 식사를 끝내고 해도 충분할 터였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일행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백작과 대공자도 한 패일까?”
테사이아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내며 물었다. 술잔을 들며 필립이 내뱉었다.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들은 이번 일과는 무관하지 않을까 합니다.”
“무슨 근거로?”
“그들이 한패라면 병자들을 격리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역병을 퍼뜨려서 얻는 게 무엇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그냥 병이 퍼지게 뒀겠죠. 우리에게 굳이 열병에 대해 떠들지도 않았겠고요. 아마 백작과 대공자는 상황을 모르고 있을 겁니다. 아무리 백성을 아낀다 해도, 병자들을 직접 보러 갈 일은 없을 테니까요.”
“호오. 제법 그럴듯한 소리를 하네, 주근깨.”
싱긋 미소지으며 고기를 씹던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하지만 그건 틀렸어.”
“…틀렸다고요?”
“그래. 그게 백작과 대공자의 결백을 증명하진 않아.”
“이유를 설명해 주시죠.”
“저주로 만들어진 역병이라며. 흑마법은 나도 좀 아는데. 보통 치명적일수록 큰 대가를 필요로 해. 아마 도시에 환자를 던져 놔도, 네 생각처럼 크게 번지지는 않을 거야. 고작 몇 정도를 죽이고 사라지겠지. 물론, 다른 부작용을 일으키는 부산물을 만들어 내겠지만.”
그녀가 메브와 샬롯을 차례로 돌아보고는 미소 지었다.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 정도가 되려면, 저주의 힘을 축적할 시간과 준비가 필요할 거야. 아니면 이 일대를 마경으로 만들거나. 아무리 이 일대가 어둠에 덮이고 있다고 해도, 꼭 필요한 과정이지. 그래서 격리한 걸수도 있어. 때가 무르익기 전까지, 주민들이 모르게 하려고.”
술잔을 든 테사이아가 느긋하게 덧붙였다.
“어쩌면 애초에, 그 병자들 자체가 제물일지도 모르지. 저주의 힘을 키우기 위한. 내가 보기엔 거의 확실해.”
“…마족 출신 귀쟁이다운 말이군. 설득력이 있어.”
샬롯이 코웃음 치며 술잔을 들었다.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던 필립이 덧붙였다.
“백작과 대공자의 결백은, 결국 알 수 없는 거군요.”
“그렇지. 하지만 확실한 게 없진 않아.”
포크를 들어 고기 조각을 푹 찌른 테사이아가 자신만만하게 덧붙였다.
“사제들. 그자들은 분명히 타락했어. 앞뒤가 딱 맞잖아. 테센의 수도원에는 너희가 찾는 타락한 사제가 있고. 여기도 병자들을 돌보는 건 사제들이니까. 내가 볼땐 죄다 한통속이 분명해. 그러니까….”
샬롯을 돌아본 그녀가 눈썹을 들썩였다.
“말 나온김에 확인해 보자. 기척 없이 다니는 건 너랑 내 전문이니까. 조용히 교회에 잠입해서 하나씩 족쳐 보자고. 그럼 뭐라도 나오겠지.”
“마음에 드는 소릴 하는군.”
송곳니를 드러내며 미소 지은 샬롯이 덧붙였다.
“한 놈만 살려두면 충분해. 스무 번의 기회를 주면, 아는 걸 전부 굴게 될 거다.”
미간을 찌푸린 필립이 물었다.
“왜 스무 번입니까?”
“손가락과 발가락을 합치면 스무 개니까.”
“아, 아하… 그렇군요….”
“원한다면 스물세 번도 가능해. 코와 귀도 있으니까. 물론, 기회를 다 쓰기 전엔 절대 죽지 않을 거다. 내가 보증하지.”
“…아쉬우시겠지만, 그 기회를 주는 건 다음을 기약하시는 게 좋겠군요. 아까 보니, 교회가 도시 한복판에 있었거든요.”
“그래. 테사의 말대로라면,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저주의 힘을 축적하고 있을 것이다. 비록 완벽하지 않더라도, 적지 않은 희생을 야기할 수도 있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인 메브가, 입맛을 다시는 샬롯과 테사이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순 없다. 민간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신중하게 접근하고, 단숨에 끝장을 내야 해. 적어도 밤에 충돌하는 건 피해야겠지. 밤은, 놈들의 시간이니까.”
“깐깐하긴. 그럼 어쩔 수 없이….”
혀를 차며 말하던 테사이아가, 문득 입을 다물었다. 곧 희미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문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금화를 들고 온 시중이었다. 금화 주머니를 받아드는 샬롯에게, 그가 덧붙였다.
“내일 백작님과 대면할 때는 무장을 모두 해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의상이 필요하시다면, 저희가 따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소.”
묘한 눈빛으로 일행을 돌아보았던 샬롯이 대답했다. 공손하게 인사한 시종이 밖으로 나가고, 돈 주머니를 든 샬롯이 자리로 돌아오며 미소 지었다.
“백작이 꽤 철저하군.”
“많이들 하는 조치입니다만. 상황이 이러니 맘 편히 받아들일 수 없군요.”
“무슨 상관이야, 우리에겐 이안의 마법이 있는데.”
덧붙인 테사이아가, 이윽고 돈 주머니를 받아드는 이안을 돌아보며 내뱉었다.
“우리 무기들을 따로 보관해 줄 거지, 이안?”
“당연하지.”
“차라리 잘됐네. 백작이 타락자인지 확인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수틀리면 바로 목에 칼을 들이밀면 되잖아.”
이안이 접시에 남은 마지막 고기 조각을 입에 넣으며 피식댔다.
“당연한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먼길을 돌아왔군.”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던 거야?”
고기를 삼킨 이안이, 맥주로 입을 헹구고는 말을 이었다.
“내일 백작을 대면하는 자리에는 분명히 타락자가 있을 거다. 그게 백작이나 대공자가 아닐지라도, 최소한 놈들과 직접 연결된 끄나풀이라도 있겠지.”
“확신하네.”
“당연하지. 원로 요정씩이나 되는 존재가 별다른 연고도 없는 서부에, 하필이면 이 시기에 나타났으니까. 왜 온 건지, 혹시 자신들의 계획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지 알아내려 하겠지. 그러기에 내일만큼 손쉽고 확실한 자리는 없겠고.”
“…반대로 우리에게도 손쉽고 확실한 순간이 되리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겠구나. 우리가 눈치채고 있다는 사실은 모를 테니까.”
메브가 서늘한 눈으로 읊조렸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가볍게 오른손을 흔들었다.
“그렇소. 증거도 있겠다. 마침 저쪽에서 먼저 판을 깔아 줬으니, 우리도 이용해 봅시다.”
“만약 웨스트우드 백작과 오벨리 대공자가 전부 타락자와 한패라는 게 확실해지면, 그때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필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술잔을 입에 가져간 이안이, 그의 눈을 마주 보며 내뱉었다.
“글쎄. 너라면 어떻게 하겠냐?”
“…처단하겠죠. 당장은 오명을 뒤집어쓰고 쫓기게 될지라도.”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잔에 남은 술을 전부 들이켜는 사이, 테사이아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쫓기는 건 정말이지 지긋지긋한데.”
“그게 싫으면 내일 네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야 할 거다, 귀쟁아.”
“뭐? 그게 무슨 헛소리….”
샬롯의 핀잔에 그녀가 미간을 찌푸릴 찰나, 필립이 눈을 번뜩이며 내뱉었다.
“그렇군요. 테사가 잘만 한다면, 가짜 신분이 들통나는 일 없이 백작을 심문하고 타락자를 처단할 수도 있겠어요.”
“아니, 왜 결론이 그렇게 나…?”
“염려 마십시오. 테사는, 그저 외우시기만 하면 됩니다. 말을 지어내는 건 저희가 할 테니까요. 도와주실 거죠?”
필립의 시선을 받은 샬롯과 메브가 당연하다는 듯 술잔을 들었다.
“…….”
마지막으로 술잔을 드는 이안까지 눈에 담은 테사이아의 입이, 결국 멍하니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