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195
195화
“……!”
이어진 말에 백작의 눈이 커졌다. 오벨리와 조라도 마찬가지였다.
이안은 슬쩍 테사이아의 옆얼굴을 돌아보았다. 아무리 대화를 길게 가져가지 않기로 했다지만, 중간 과정을 지나치게 많이 건너뛴 것이다. 분명 서부를 방문한 이유에 대해서도 그럴듯한 대답을 준비해 놓았었건만.
‘주입식 교육이 과했나. 아니면.’
나름대로 생각이 있는 건가.
테사이아의 표정만으로는 유추할 수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입가에 띤 채였다.
이안이 다시 시선을 돌릴 찰나.
“역병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다시 주름진 미간을 찌푸린 백작이 물었다. 테사이아가 그의 눈을 헤집듯 응시하며 내뱉었다.
“전혀 모르셨다는 말씀이시군요. 이 도시는 백작님의 것일 텐데요.”
“내 도시에 그런 일이 있을 리도 없지만. 일어나고 있다 해도 귀공이 상관할 바는 아니오. 귀공의 목적과는 관련 없는 말은 언급하지 마시오.”
“관련이 있답니다.”
“뭐라?”
“지금 번지고 있는 역병은, 흑마법으로 탄생한 저주의 결과물이니 말이지요.”
“……!”
“그리고 말씀하셨다시피, 나는 타락한 족속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아이나스 가의 원로죠. 그러니 답변을 신중하게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백작의 인상이 더 구겨지는 가운데, 굳어져 있던 오벨리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오, 오늘은 이만 물러나시는 게 좋겠습니다, 공.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모르겠으나, 지금 귀공은 드네로브 뿐 아니라 아버님의 명예에도-”
“증거는 있소?”
벌떡 일어선 백작이 말을 잘랐다. 흐릿한 눈으로 테사이아를 노려보면서, 그가 씹어 뱉듯 말을 이었다.
“귀공의 주장을 뒷받침할 합당한 증거 말이오. 이 자리에서 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내 통치력뿐 아니라 영지의 명예를 더럽히려 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오.”
“당장 성 밖의 판자촌으로만 가 보더라도 알게 되실 테지만. 굳이 이 자리에서 보시겠다면 그리 해드리지요. 그러나 그 후엔….”
테사이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백작께서도 결백을 증명하셔야 할 겁니다.”
백작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가 홱 고개를 돌렸다.
“이반 경? 이리 나와 증거를 보이도록 하세요.”
이런 게 메소드 연기란 건가.
테사이아의 싸늘한 눈빛에 헛웃음을 삼킨 이안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 오른손의 장갑을 벗었다.
중지에 끼워진 늪지의 원한이 뱀의 형태로 돌아가, 그 아래에 펼친 왼손 손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녀석은 뒤이어, 소화 시키고 있던 저주의 잔재를 전부 토해냈다.
“……!”
백작이 해괴한 광경을 본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악취가 번진 것도 잠시. 이안의 손에 고인 새카만 점액질이 검은 연기로 화하기 시작했다.
다시 백작을 돌아본 테사이아가 보란 듯 말을 이었다.
“역병의 증거이자 저주의 잔재입니다. 역병 환자들에게서 직접 빨아낸.”
“그런 괴상한 술수를 증거랍시고 들이댄단 말이오?”
“말장난 하지 마십시오, 백작.”
뻔뻔하게 내뱉은 테사이아의 눈가로 실핏줄들이 꿈틀대며 돋아나기 시작했다.
백작의 낯이 굳어졌다. 표정을 보아하니, 이것이 원로 요정만이 보여 줄 수 있는 기예라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증거를 원하기에 증거를 보였을 뿐. 이로 인해 내가 얻는 이득은 아무것도 없음을 백작께서도 아실 텐데요. 그러니-”
테사이아가 문득 말을 멈췄다. 흐릿한 마력이 아른거리는 그녀의 시선이 백작을 지나쳤다.
그녀는 물론, 이안조차 예상하지 못한 현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새카만 연기가, 바람도 불지 않는데 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느리지만 선명하게, 마치 허공에 길을 내듯이.
테사이아를 비롯한 일행 모두의 시선이, 연기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
뒤늦게 그 현상을 깨달은 백작의 시선도 같은 방향으로 돌아갔다.
“아니….”
“…….”
모두의 시선을 받은 오벨리와 조라의 얼굴에 당혹이 번졌다. 입술을 파르르 떨던 백작이, 곧이어 일갈했다.
“네 이놈! 지저분한 반투르 놈들을 거둬 주었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는구나!”
그제야 이안을 제외한 모두의 시선이 오벨리의 등 뒤에 선 조라에게로 향했다.
당혹스러워하던 조라의 검은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곧 결연한 눈빛이 된 그가 삽시에 소매에서 단도를 뽑아 들어, 앞에 선 오벨리의 목 앞에 가져다 댔다.
“다들 물러나시오!”
“……!”
일반적인 단검보다 날이 짧은 단도였지만, 목줄을 베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을 터였다. 눈을 치켜뜬 오벨리가 숨을 들이켜는 사이, 반대쪽 팔로 그의 가슴팍을 감싸 안은 조라가 백작과 이안 일행을 돌아보며 씹어 뱉었다.
“이렇게 들키다니…. 제기랄…. 다들 물러나! 당장!”
“반투르에서 굴러 들어온 천것들을 먹이고 씻겨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더니. 기어코 짐승의 습성을 버리지 못했군. 내 도시에서 무슨 역겨운 짓을 벌인 것이냐?”
백작이 개의치 않고 내뱉었다. 조라가 그를 노려 보았다.
“닥치시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같으니. 그 핑계로 나와 내 부모를 일평생 부려먹었지. 여기 이 대공자란 놈도!”
“네 부모가 그리 가르치더냐? 나병에 걸렸을 때 알아보았어야 했거늘. 그때부터 이미 사악한 짓거리를-”
“닥치라고 했을 텐데? 눈앞에서 아들이 죽는 걸 보고 싶나?”
조라의 단도가 오벨리의 목덜미를 살짝 긁었다. 두툼한 오벨리의 목에 불그스름한 핏기가 번졌다.
그제야 백작이 굳어졌다. 조라가 일행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안 들리나? 다들 물러나. 길을 터라. 당장.”
“…….”
하지만 이안 일행은 아무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저 한차례 서로를 돌아보고 이안의 표정까지 살피고는 다시 조라를 바라보았다.
조라의 이마에 설핏 식은땀이 돋아났다.
“이, 이대로 대공자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말이냐? 이 피도 눈물도 없는 것들…!”
직후, 어느새 가까워진 검은 연기가 조라와 오벨리의 코앞까지 다가들었다. 조라가 단도 날을 앞으로 휙 내뻗었다. 그 순간 검은 연기가 그의 손아귀로 빨려들듯 밀려들었다. 조라의 연갈색 눈동자가 거무스름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뭐, 뭣들 하시오? 당장 물러나지 않고! 진정 내 아들을 죽게 내버려 둘 참인가!”
비로소 백작도 일행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무표정하게 서 있던 이안이 내뱉은 건 그때였다.
“연기력이 형편 없군. 여기 와서 좀 배워야겠어.”
“뭐, 뭐라고…?”
조라가 눈을 부라리며 되물었다. 하지만 이안은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당신들 둘 다.”
그의 시선은 처음부터 오벨리에게서 떨어진 적이 없었다. 오벨리의 낯이 굳어지는 가운데, 조라가 일갈했다.
“미친 소리 그만해라! 당장 물러나지 않으면-”
“그어 봐.”
말을 자른 이안이, 비로소 부릅뜬 조라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어 보라고. 할 수 있으면.”
“…….”
조라가 순간 숨을 멈췄다. 그의 눈동자에 거무스름한 빛이 아른거리는 가운데.
“…저들은 물러나지 않아, 조라.”
오벨리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이안을 노려보던 백작의 시선이 그에게로 돌아가고, 오벨리가 한 손을 들어 뒤에 선 조라의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고마워. 날 위해 나서 줘서.”
“…도련님.”
조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오벨리의 손에 볼을 비비던 그가, 단도를 쥔 손을 툭 떨어뜨렸다.
“이게 무슨…?”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백작이 어리둥절하게 뇌까렸다.
“둘이… 한패 였다고…?”
필립이 멍하니 중얼대는 가운데.
조라가 양손을 오벨리의 어깨 옆으로 치켜들며 일행들을 노려보았다.
“다가오지 마시오. 조금이라도 다가오는 순간….”
푸스스, 조라의 눈동자에 맺힌 검은 빛이 아른거렸다.
테사이아를 비롯한 일행 모두가 또다시 이안 쪽을 곁눈질했다. 이안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보기에 지금 이건, 일종의 이벤트 컷씬 같았다. 이게 끝나고 나면 새로운 퀘스트가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적어도 새로운 정보라도.
게다가 조라는 오벨리를 인도해 조금씩 뒤로 물러나고 있었지만, 어차피 뒤로 가 봐야 벽만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조라에게서 느껴지는 영문 모를 혼돈력은, 그리 대단해 보이지도 않았다.
이안의 시선을 받은 필립이 준비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저, 저 말이 사실이냐…? 저 빌어먹을 반투르 놈이 너까지 끌어들인 게야…?”
믿기 힘들다는 듯 되묻는 백작의 얼굴을 마주 보며, 오벨리가 내뱉었다.
“그 반대입니다. 아버님. 조라는 그저 저를 위해 동참했을 뿐이죠.”
이상할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였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백작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왜. 네가 왜…?”
“정말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시군요. 하긴. 그러니 어머니께서 그토록 고통스러워하시는 동안에도 저 빌어먹을 땅만 보살피셨겠죠. 끝내 눈을 감으시던 그 날에조차 말입니다.”
“뭐, 뭐라…?”
“제가 어리석었지요. 이 가슴속의 슬픔이 분노로 변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기도나 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여신들은 끝내 제 기도에 응답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단 한 번도. 오히려 제게 손을 내민 건….”
오벨리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번졌다.
“생각지도 못했던, 과거였다면 불경하다 여겼을 이들이었죠. 그들은 제 증오를 이해하더군요. 그리고 저 역시 알았습니다. 제가 마땅히 동참해야 할 일임을.”
“대, 대체 무슨 짓에 가담한 것이냐…? 고작 그런 이유로… 도시에 역병의 저주를 풀었다고?”
“고작? 고작이라니요.”
오벨리가 신경질적인 웃음을 흘렸다.
“아버님은 늘 그러셨죠. 흙투성이 귀족이라는 위명에 취해, 저 땅과 거기서 나오는 작물 외에는 모든 걸 하찮다 여기셨어요. 어머니를 잃고 울던 제게, 어떻게 하셨습니까? 매질을 하셨지요! 여신께 돌아감은 자연의 섭리라고요? 그렇다고 아내의 시신을 밭에서 화장해 그대로 흩어지게 두십니까?”
“그래서 백성들에게 그 화풀이를 했단 말이냐? 아무런 관련도 없는 자들에게?”
오벨리가 멈칫했다. 슬며시 시선을 피한 그가 말을 이었다.
“그들의 희생은… 원치 않은 결과였습니다. 하늘이 어둠에 뒤덮이기 시작하며 일어난, 예상치 못한 비극이죠. 아니. 끝내는 겪었어야 할, 불가피한 비극이라 해야겠군요. 저는 이미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의 죽음으로, 이 땅이 더 빠르게 더럽혀지게 되었으니까.”
“델라 루여…. 그게 네 목적이었느냐? 대를 이어 일궈온 이 땅을, 네 손으로 다시 더럽히는 것?”
“물론이죠. 그것이 아버님의 전부니까요.”
거참 개판이군.
이안은 한숨을 삼켰다.
전혀 궁금하지도, 새삼스럽게 놀랍지도 않은 비극이었다. 타락자는 대부분, 거창한 대의명분이나 궤변 따위가 아니라 원초적인 감정에 이끌려 타락의 길로 빠져드는 법이었다.
메브의 동생인 버논도 열등감이 단초가 되어 타락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무덤덤한 건 그뿐이었다.
일행들은 저마다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와 달리, 저 넉살 좋고 친절하던 대공자가 타락자 중 하나라는 사실이 꽤나 충격적인 모양이었다.
하긴, 이안조차도 오벨리와 조라에게선 타락의 징후를 전혀 느끼지 못했었다.
‘그게 뜻하는 건….’
이안의 눈매가 가늘어지는 사이, 몸을 부들부들 떨던 백작이 내뱉었다.
“당장 어리석은 짓을 멈추거라. 저주를 거둬라. 네가 나는 물론이고 신까지 저버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복수로는 충분하니.”
오벨리가 헛웃음을 흘렸다.
“이미 늦었습니다…. 고작 저 하나가 멈추고 싶다 해서 끝낼 수 있는 선은, 이미 넘어 버린 지 오래입니다. 저는 그저, 전체의 작은 한 조각일 뿐이죠.”
“뭐라…?”
“그러니 지켜보십시오. 평생을 일궈낸 모든 것들이 썩어 문드러지고, 끝내 부패와 죽음이 가득한 죽음의 땅으로 변하는 것을요. 그럼 그때는 제 심정을 조금은 알게 되시겠지요. …그걸 제 눈으로 볼 수 없음이 아쉬울 따름이군요.”
애틋한 눈으로 옆의 조라를 돌아본 오벨리가, 곧이어 덧붙였다.
“저는 오늘, 조라와 함께 이 자리에서 죽게 될 테니까요.”
“네, 네가 진정…!”
백작이 기침을 토하며 비틀댔다. 오벨리를 마주 본 조라의 눈이 결연하게 가라앉았다.
“도련님은… 그날을 볼 수 있으실 겁니다.”
그는 동시에 오벨리를 와락 끌어안고는, 그대로 휙 몸을 돌려 자신의 뒤로 내팽개쳤다.
곧바로 다시 일행 쪽을 돌아본 조라의 눈은, 어느새 흰자위가 하나도 없이 새카맣게 물들고 있었다. 꿈틀대는 어둠이 그의 주위를 감싸며 넘실댔다.
“필립!”
테사이아를 바라보며 턱짓한 이안이 소리쳤다. 양팔을 활짝 펼친 조라의 전신에서 새카만 연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건 거의 동시였다.
“조라-!”
오벨리가 울부짖는 가운데, 테사이아가 단상으로 몸을 날렸다. 넋을 놓은 백작의 멱살을 쥔 그녀가 쏜살같이 되돌아오는 사이.
솨아아아-
손을 내밀며 튀어나온 필립의 앞으로, 신성력의 장막이 눈부시게 피어올랐다.
조라의 전신에서 토해져 나온 연기가 삽시에 자욱하게 번지며 밀려들었다.
“아윽… 컥… 크흑….”
연기에 휩쓸린 시종장이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그의 전신이 순식간에 새카맣게 물들고 말라 갔다.
“장막 밖으로 나가지 마십시오! 지독한 저주입니다…!”
빛의 장막을 두른 필립이 조금씩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연기는 신성력의 벽을 넘지 못하고 타들어 갔다. 일행은 백작을 움켜쥔 테사이아를 필두로, 이미 그의 뒤에 모여 있었다.
“대낮에 이만한 흑마법을 펼치다니…?”
샬롯이 인상을 찌푸리며 읊조렸다.
“이건 흑마법이 아니야.”
내뱉은 건 이안이었다. 이안의 시선에, 그가 덧붙였다.
“이건 저것들이 모시는 신이 내려준 힘이지.”
아마도 대가로 목숨을 바쳤겠지만. 그의 말을 들은 것처럼, 주위가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장내를 뒤덮은 검은 연기 때문은 아니었다. 날 자체가 어두워지고 있었다.
필립이 창밖을 돌아보며 멈추지 않고 물러나던 그때.
“주, 주군-! 무사하십니까?!”
연회장의 대문이 벌컥 열렸다.
“아니, 이게 무슨…?!”
필립의 고개가 득달같이 돌아간 건 거의 동시였다.
“안돼! 오지마!”
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고여있던 안개가 기다렸다는 듯 흐르기 시작했고, 문을 열고 달려 들어온 아우렐 경과 병사들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끔찍한 비명. 연기가 복도와 창문 밖으로 끝도 없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비명과 신음이 멀리까지 번져나갔다.
“이렇게까지 막 나가다니….”
필립이 탄식하는 가운데, 비로소 넘실대던 안개가 조금씩 옅어졌다.
“컥… 쿨럭….”
그 너머, 피를 토하며 주저앉는 조라의 모습이 드러났다.
어느새 그의 전신은, 병자들의 그것처럼 새카맣게 물들어 있었다.
“안돼… 조라… 이럴 수는….”
주저앉아 있던 오벨리가 조라를 내려다보며 탄식했다. 이 와중에도 그는 저주의 흔적 없이 멀쩡했다. 곧 왈칵 눈물을 쏟은 그가, 다급하게 기어가 조라를 안아 들었다.
조라의 입술이 달싹였다.
“길은… 길은 열렸습니까…?”
“그래. 열렸어. 고맙구나, 나의….”
오벨리가 조라의 머리를 감싸 안으며 속삭였다. 조라의 검게 물든 피부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아니, 더는 아무것도 상관없다는 듯 비통과 슬픔에 잠긴 모습이었다.
“조라…? 안돼… 또 이렇게… 조라….”
오벨리가 더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조라를 쓰다듬던 그때.
“소, 손…! 그 손 떼거라! 당장!”
넋이 나간 채 테사이아의 손에 잡혀 있던 백작이 내뱉었다. 그가 아른거리는 황금빛 장막 너머로 오벨리를 노려보았다.
“너까지 죽고 싶은 것이냐? 당장 그 손-”
“이게 당신을 저버린 대가입니까, 델라 루여? 이렇게 또다시…. 아아… 위대한 부패와 질병의 아버지시여… 차라리… 나도 함께….”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중얼대던 오벨리의 어깨가 문득 굳어졌다.
“컥… 커억…?”
목을 움켜쥔 채 신음한 것도 잠시. 입으로 거무스름한 연기를 토해내기 시작한 오벨리가 조라의 위로 포개지듯 쓰러졌다. 새카만 안개가 삽시에 그의 전신을 뒤덮으며 끌어 올랐다.
백작이 숨이 넘어갈 듯 헐떡였다.
“아, 안돼…! 안….”
이안의 눈앞에 퀘스트 창이 떠오른 건 바로 그때였다.
…아, 그래. 드디어 시작이군.
심드렁하게 눈을 깜빡인 이안이, 그대로 아공간에 손을 쑤셔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