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196
196화
철컹, 철그렁-
아공간에 보관 중이던 무기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장검, 원형 방패, 전투 도끼를 비롯한 일행들의 무기가 차례로 바닥에 떨어졌다.
이안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손을 움직였다.
철컹- 철그럭-
쇠 장갑이나 강철 장화 같은 방어구들이 뒤를 이어 쏟아졌다. 비교적 부피가 작고 착용이 간편한 장비들이었다.
그가 허공에서 물건을 꺼내는 이적을 선보이고 있음에도, 테사이아에게 붙잡힌 백작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애초에 눈치조차 채지 못한 게 분명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오벨리를 집어삼킨 검은 안개에 못 박힌 듯 고정되어 있었다.
그때 테사이아가 움켜쥔 손을 놓았다. 그대로 주저앉은 백작이 비로소 탄식했다.
“안 돼… 오벨리… 안 돼….”
일행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흐릿한 연기를 신성의 장막으로 밀어내는 필립을 제외하고는, 각자의 장비를 분류하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윽… 그르륵….”
연기 속에서 진흙을 토하는 듯한 소리가 번졌다. 그 사이로 새카만 무언가가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오벨리가 변이를 일으키는 것이리라.
뿌득, 뿌드득-
섬뜩한 뼛소리가 이어졌다. 오벨리를 삼킨 검은 안개가 아지랑이처럼 번져나갔다.
동시에 단상 옆에 끔찍한 몰골로 죽은 시종장과, 문 앞에 쓰러져 있던 기사와 병사들의 시체도 꿈틀대며 변이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장화 착용을 끝낸 이안이, 팔목 보호대를 집어 들며 고개를 돌렸다.
치맛단 한쪽을 북 찢은 테사이아가 발을 가죽 장화에 쑤셔 넣으며 그를 바라보는 사이.
“백작.”
이안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백작은 대답은 물론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테사이아가 홱 고개를 돌려 백작의 뺨을 날린 건 바로 그 직후였다. 힘이 들어가지 않은 가벼운 손놀림이었지만, 백작의 정신을 일깨우기엔 충분하고도 남았다.
“이, 이게 무슨…?”
그제야 테사이아를 돌아본 백작이 피 맺힌 입술을 달싹였다. 테사이아가 싸늘한 눈빛으로 내뱉었다.
“정신 차리세요, 백작. 저 밖의 소리가 들리지 않나요?”
“……?”
어리둥절해 하던 백작의 눈이 뒤이어 커졌다.
어둑어둑해진 창밖 저 너머에서 희미한 비명이 번지고 있었다. 백작의 늙고 노쇠한 얼굴에 또 다른 충격과 두려움이 번졌다. 가뜩이나 작고 마른 그의 몸이 더 쪼그라드는 것처럼 보였다.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반 경의 말을 들으세요.”
“무슨… 말을?”
“두 번 말할 시간 없으니, 잘 들으시오.”
백작의 눈을 마주 본 이안이 기다렸다는 듯 내뱉었다.
“당신의 아들은 이미 늦었소. 그리고 여기서 꾸물대면 당신의 땅과 도시도 그렇게 되겠지. 막고 싶다면 대답하시오. 도시에 병력이 얼마나 있소?”
“백인대 둘이 조금 안 되오. …아니.”
눈을 깜빡이며 대답한 백작이, 이내 고개를 털었다.
“지금은 그보다 더 적겠군. 하지만 주민들 중 남자 절반은, 언제라도 병력으로 활용할 수 있소.”
“예비군은 필요 없소. 주군이 귀하를 모시고 밖으로 나갈 것이오. 남은 병력을 모으고 주민들을 통솔해 도시 밖으로 대피하시오. 그리고 조금이라도 수상한 건 절대 건드리지 않게 통제하시고. 할 수 있겠소?”
이안의 눈을 창백하게 응시하던 백작이, 목이 졸린 듯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내 아들은, 정말 늦었소?”
“대공자는 이미 죽었소.”
내뱉은 이안이, 새카만 연기 너머로 꿈틀대며 부풀어 오르는 실루엣을 눈에 담았다.
“저건 전혀 다른 괴물이오. 그의 목숨을 대가로 태어난. 그리고….”
이안이 이제는 가면처럼 보일 정도로 굳어진 백작의 얼굴을 다시 마주 보았다.
“저게 끝이 아니오. 대공자와 뜻을 함께하는 타락자들이 상황을 눈치챈 게 분명하니까. 아직 미완성일지라도, 준비하던 의식을 시작한 것이오.”
“의식…? 의식이라고…?”
“창밖의 저 어둠이 그 증거요. 자세히 설명할 시간은 없소. 대답이나 하시오. 대공자가 가까이 지낸 자들이, 교회의 사제들이 맞소?”
“그, 그렇소. 하지만 교회에는 루 솔라의 상징은 물론이고… 델라 루의 신상도 있는데….”
“믿으시오. 타락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그딴 건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
“비로소 정신을 차린 것이리라 여겼건만…. 제기랄… 아들아… 가문의 전통이 그리도 야속했더냐…?”
백작이 망연자실하게 탄식했다.
이안은 이미 샬롯과 메브를 돌아보는 중이었다.
“둘은 주군과 백작을 호위하고 길을 열어. 병사들을 통솔해 주민들을 대피시켜. 끝낸 후엔 교회로 오고.”
말을 멈춘 그가, 바닥에 놓인 부러진 단죄의 검을 들어 샬롯에게 던져 줬다.
“네가 지녀라. 검의 신성력이 저주를 조금은 막아 줄 거야. 대공자는 땅을 더럽힌댔지. 아마 부패의 저주일 거다. 조심하는 게 좋아. 꺼림칙한 건 가능하면 몸에 닿지 않게 해라.”
“알았다. 그러지.”
샬롯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때, 메브는 손을 뻗어 백작의 멱살을 쥐고 있었다. 노인을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기며, 그녀가 내뱉었다.
“내 눈을 보시오. 백작.”
“……!”
“당신의 아들을 저리 만든 자들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소?”
잠시 숨을 멈췄던 백작의 눈빛이, 비로소 가라앉았다.
“…하고 싶소.”
그가 메브의 눈을 마주 보며 씹어 뱉었다.
“내 모든 걸 바쳐서라도.”
“그럼, 당신의 복수는 내가 대행하겠소.”
“……?”
메브의 대답에 미간을 좁혔던 백작의 눈이 뒤이어 커졌다. 자신을 마주 보는 메브의 녹색 눈동자에, 피처럼 붉은빛이 진득하게 번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귀하는, 귀하의 백성들을 구하시오. 우리가 도울 테니.”
내뱉은 메브가 멱살을 쥔 손을 놓고는, 곧바로 판금 장갑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철벅-
변이를 끝낸 망자들이 일어서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비쩍 말라붙었던 그들의 몸은, 이제 타르처럼 검고 끈적한 점액으로 뒤덮여 있었다. 녹아내려 뻥 뚫린 눈코입에서는 암녹색 진액이 뚝뚝 떨어졌다.
그런 와중에도 생전에 착용한 방어구는 그대로였고, 무기 역시 고스란히 집어 든 채였다.
장비를 전부 착용한 이안이 흑검을 집어 들며 일어선 건 거의 동시였다.
“탈출은 창문으로 하시오. 필립, 창문 앞까지 안전하게 호송해. 장비를 착용하고 나선 내 뒤를 보조해라. 여긴 우리 둘이 맡을 거니까.”
“예…! 뒤에 두 분, 다 끝나시면 제 장비 좀 챙겨 주십쇼! 창가까지만요!”
소리친 필립이, 신성의 장막을 유지한 채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백작이 그제야 비로소 일행들의 면면을 훑기 시작했다.
드레스의 허리춤에 검을 묶고 있는 테사이아. 간단한 무장을 끝내고 몸통만 한 전투 도끼를 한 손으로 쥐어 든 샬롯. 전신에 피처럼 붉고 끈적한 신성력을 머금은 메브. 한 손을 내뻗어 흐릿한 신성력의 장막을 피워내고 있는 필립과, 새카만 검을 움켜쥔 채 그를 등지고 선 이안까지.
“당신들은… 도대체…?”
“아까 못다 한 질문의 답을 드리죠. 백작 각하.”
그런 그의 어깨를 붙잡아 일으켜 세우며, 테사이아가 말을 이었다.
“우리는 서부에 암약한 타락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그것은 또한 누군가의 복수이며. 저 위대한 백금의 뜻이기도 합니다.”
“백금…? 설마, 당신들은-”
“그딴 생각은 나중에 하시오.”
말을 자른 이안이, 다가오기 시작한 망자들을 눈에 담으며 덧붙였다.
“지금은 각자의 역할에 집중해야 할 때니까.”
“…진정 저것들을 단 둘이서 상대할 참이오? 아무리 뛰어난 실력자라도, 이건 자살 행위나-”
“교회에서 다시 보자. 가라.”
이안이 백작의 말을 무시한 채 내뱉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도끼를 등에 멘 샬롯이 한 팔로 백작을 안아 들고, 필립의 장비를 품에 안은 테사이아와 샬롯이 걸음을 옮겼다.
솨아아아-
빛의 장막이 이안의 몸을 훑고 지나쳤다. 눈을 감은 이안이 흑검의 자루를 고쳐 쥐었다.
지잉, 자루가 손아귀에 착 감기며 가볍게 떨렸다.
그래, 말만 잘 들으면, 오늘 더러운 피를 잔뜩 마실 수 있을 거다.
피부가 따가워지는 것을 느끼며, 이안이 내심 중얼댔다.
변이 중인 오벨리가 뿜어내는 저주의 여파. 하지만 영향력은 그게 전부였다. 혼돈의 파편이 그를 지켜내려는 듯 혼돈력을 토해냈고, 그것만으로도 통증이 가라앉았다.
비로소 이안이 눈을 떴다.
비척대며 다가오는 망자들.
그의 시선이 그 너머, 변이를 거의 끝마쳐 가는 실루엣을 훑었다.
‘다 끝내기 전에 처리하는 건, 무리겠지?’
“그… 르륵…!”
그 생각에 응답하듯, 가까워진 망자 하나가 역겨운 소리를 흘렸다. 이안이 기억하는 게임 속 부패의 망자와 여러모로 흡사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진흙 같은 점액을 뚝뚝 떨어뜨리는 것까지도.
“교회에서 봐!”
소리친 테사이아가 훌쩍 몸을 날리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이안이 달려 나갔다.
기다란 창을 움켜쥔, 한때 병사였던 망자가 가까워졌다.
서걱-!
적당히 얇고 기다란 검날이 병사의 몸을 사슬 갑옷째로 사선으로 갈랐다. 평소처럼 진공 폭발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랬다간 저주가 깃든 저 살덩이가 사방으로 튈 터였다.
철퍽-
잘려 나간 상반신이 찰흙 덩어리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러고도 여전히 꿈틀대는 놈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이안은 바로 옆의 또 다른 망자에게 검을 휘둘렀다.
스걱-! 콰지직-!
흑검이 연달아 호선을 만들어냈다. 삽시에 셋을 베어낸 이안의 시선이 창틀의 필립 쪽으로 돌아갔다. 정확히는 비로소 장비를 줍고 있는 그에게 다가가는, 아우렐 경이었던 망자에게로.
타탓-
확인과 동시에 그가 달려 나갔다. 예리하게 뻗어 나간 흑검이 판금 갑옷 위로 훤히 드러난 뒤통수를 갈랐다. 아우렐 경이었던 망자의 머리가 반으로 잘렸다. 놈을 지나친 이안이 몸을 돌리며 멈춰 섰다.
“그… 으으….”
코 아래만 남은 입에서 끈적한 신음이 번졌다. 망자가 검을 들었다. 그보다 이안이 놈의 흉갑을 발로 걷어차 밀어내는 게 더 빨랐다.
콰장창, 잘린 머리 단면에서 체액을 흩뿌리며 넘어지는 놈을 향해, 이안이 왼손을 내뻗었다.
콰르르르-
그의 손아귀에서 불길이 뿜어져 나갔다. 아무런 증폭도 더하지 않은 화염 방사. 하지만 아우렐 경과 그 근처에 토막 나 꿈틀대는 놈들을 함께 태우기엔 충분한 화력이었다.
화르르르-
불길에 휩쓸린 망자들이 매캐한 연기를 뿜으며 타들어 갔다. 꿈틀대던 움직임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역시, 상성은 게임이랑 똑같군.
“조, 조금만 시간을 벌어 주십시오, 나리. 금방 합류하겠습니다!”
뒤에서 필립의 다급한 외침이 이어졌다.
좀 걸린단 소리지? 속으로만 뇌까리며 정문으로 들어서는 망자들을 눈에 담은 이안이, 곧바로 불길에 휩싸인 놈들을 뛰어넘으며 몸을 날렸다.
단상 옆, 변이한 오벨리가 솟아오르는 방향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놈에게 도달할 수는 없었다.
“그웨에에엑-”
역겨운 소리와 함께, 새카만 점액질의 궤적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촤아악-
이안이 다급하게 옆으로 몸을 굴렸다. 벽과 바닥에 흥건하게 뒤덮인 점액이 증발하기 시작했다.
시발, 왜 안 나오나 했다.
썩은 토사물. 게임에서는 상당한 대미지와 추가적인 도트 대미지. 그리고 이동 속도 저하를 유발하는, 권속들의 스킬 중 하나였다.
토사물을 뱉은 건 시종장이었던 권속이었다. 곧바로 일어선 이안이 악취를 풍기며 증발하는 토사물을 건너뛰면서 팔을 내리쳤다.
콰직-!
시종장 권속의 목이 한쪽 어깻죽지와 함께 잘려 나갔다. 허물어진 놈의 상반신이 땅에 닿기도 전에, 그 위로 화염구가 떨어졌다.
퍼엉-! 화르르-
작은 폭발과 함께, 불길에 휩싸인 살덩이들이 비산했다. 이안이 그 사이를 뚫고 다시 솟구쳤다.
비로소 변이한 오벨리의 모습이 선명해졌다.
웅크린 것처럼 보인 건 착각이었다. 부풀어 오른 머리와 목만이 살점 사이에 파묻힌 채 형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 나머지는 그저 거대한 검은 살덩이에 가까웠다.
몸 곳곳에 앞니만 겨우 난 크고 작은 아가리들이 옹이구멍처럼 벌어져 주위의 검은 연기를 빨아들였다. 그 사이로는 자줏빛이 핏줄처럼 번져 일렁였다.
역시는 역시네.
이안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화르륵, 주위로 춤추는 불꽃이 연달아 피어오를 찰나.
콰아아아-
놈의 전신에 돋은 아가리들이 삼키고 있던 안개를 도로 토해냈다. 포자처럼 분출된 안개가 그대로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
이안의 전신에 푸른 역장이 피어올랐다. 거의 동시에 밀려든 안개의 물결이 그를 밀어냈다.
이글대던 불꽃들이 그대로 터져 나가고.
“으악?!”
장비를 착용하던 필립이 반사적으로 신성의 장막을 몸에 두르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튕겨 나간 이안이 미끄러지듯 착지하는 사이.
“그… 오오오-”
살점 사이에 파묻혀 있던 오벨리의 머리가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들었다. 비대하게 변이된 비대칭의 눈구멍이 암녹색의 안광만이 일렁였다. 진흙 덩어리를 뭉친 듯한 몸 곳곳에서 고름 같은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놈을 올려다 보는 이안의 뇌리로, 게임에서 본 적 있는 정예 마물의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부패의 뿌리.
철퍽- 철푸덕-
놈이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리가 아니라 비정형의 마물처럼 미끄러지듯 천천히 움직였다.
심지어 이안 쪽이 아니라 정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저택 밖으로 나가 땅에 뿌리를 내리려는 것이리라. 게임에서 그랬듯이.
‘그게 네 염원이기도 하겠다만….’
미안하지만, 그렇게 둘 순 없을 것 같다. 오벨리.
속으로 읊조린 이안의 눈동자가, 불길을 머금은 것처럼 달아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