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201
201화
검 자루가 손아귀에 뿌리를 내린 것 같은 묘한 감각. 흑검이 혼돈력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였다.
십자 막이에서 넓게 시작돼 검날 끝으로 모여들며 일렁이는 보랏빛 아지랑이는, 이름대로 송곳니처럼 보이기도 했다.
흑기사가 사용할 때와 달리 보라색인 건, 동력원이 용의 마력이 아니라 혼돈력이기 때문일 터였다.
푸스스스슷-
장내에 가득한 이끼와 버섯들이 떨리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삽시에 암녹색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한눈에 봐도 들이마시면 안 될 것 같은 색. 본능적으로 숨을 멈춘 이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게임 생각나네, 시발.
그때의 서부 곳곳에서 피어오르던 독 안개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부패의 안개. 부식의 연무. 병균 덩어리 등, 저마다 다른 이름과 효과를 가지고 있던 것들.
치이이이-
이건 부패의 안개인 모양이었다. 강철 장화를 신은 발이 타들어 가는 듯한 느낌이 이어졌다.
독, 병균, 포자. 정확히 무엇이 원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몸을 발끝에서부터 녹이고 있었다. 재빨리 멈춰 선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아직 단상까지의 거리는 꽤 멀었다. 루스의 말대로 예배당은 작은 운동장만 한 공간이 되어 있었다. 이만하면 흡혈 여제의 알현실과도 필적할 만한 넓이였다.
저 검은 덩어리에 닿을 때쯤엔 온몸이 녹아내리고 있으리라.
물론 시간만 충분하다면 회복하지 못할 부상은 아닐 터였다. 그런데도 멈춰 서서 피할 공간을 찾는 건, 눈이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분명 눈이 멀어버리리라.
일격에 덩어리를 끝장내지 못한다면 남은 싸움을 장님이 된 채로 치러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걸 피하기 위해 눈을 감는다 해도 결과적으론 달라질 게 없었다.
시각 없이 싸우는 게 아예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샬롯처럼 능숙하게 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아직 정체도 알 수 없는 보스와의 전투에서는 더더욱.
‘왜 보스전 인트로는 다 이따위지.’
혀를 차면서도, 이안은 몸을 돌려 물러났다. 가장자리에는 이끼와 버섯이 자라지 않는 공간들이 있었다. 적어도 당장은 안전한 공간이었다.
쩍, 쩌저적-
돌에 균열이 가는 듯한 소리가 번진 건, 이안이 예배당의 텅 빈 가장자리에 도착한 직후였다. 미끄러지듯 멈춰선 그는, 역천의 송곳니를 비활성화하며 소리의 근원을 찾아 시선을 돌렸다.
‘역시. 저것들도 단순한 배경은 아니었고.’
부자연스럽게 불룩 튀어나와 있던 사제들의 등이 순식간에 더 크게 부풀고 있었다. 안개에 부식되어 녹아내리는 사제복 사이로, 뭔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탈피하는 거군.’
필사적으로 의식을 치른 보람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저게 저들이 원하던 방식의 보상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어쨌든, 너희들도 타긴 하겠지.’
자욱한 암녹색 안개와 탈피 중인 사제들을 응시하는 이안의 눈동자에는, 어느새 불그스름한 마력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홍채 한복판에 아른거리는 보랏빛이 번쩍였다.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이딴 이벤트 컷씬 따위가 끝나기를 멀뚱히 기다릴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이 부패의 안개가 금방 사그라들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다 해도 언제든 다시 피어올라 발목을 붙잡으리라.
게임에서라면 안전지대를 찾거나 방어 스킬을 활용하는 식으로 공략해야 했겠지만, 현실이 된 지금은 훨씬 쉬운 방법도 선택할 수 있었다.
혼돈력과 뒤섞인 마력이 흑검으로 밀려 들어가며 끌어 올랐다.
흑검이 짜증스럽게 울었지만, 이안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가 끝이 붉게 물드는 검날을 앞으로 내뻗었다.
콰아아아-
기다렸다는 듯 터져 나온 샛노란 불길이, 거칠게 넘실대며 번지기 시작했다.
자욱한 암녹색 안개가 화염 해일에 휩쓸려 타들어 갔다. 그 아래의 이끼와 버섯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안은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불길을 넓게 퍼뜨렸다. 넘실대는 붉은 물결에 휩쓸린 이끼와 버섯들이, 지렁이처럼 꿈틀대며 요란하게 타들어 갔다.
쩌저적-
화염 해일에 휩쓸리는 것보다, 사제들의 탈피가 조금 더 빨리 끝났다. 눅진한 점액에 뒤덮인 괴물들이, 잠자리의 그것과 비슷한 여러 겹의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올랐다.
탈피하고 남은 껍데기들이 힘없이 널브러지고, 곧 불길의 파도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여전히 검을 앞으로 내뻗은 채, 이안의 붉게 물든 눈동자가 날아오르는 것들을 훑었다.
거대한 벌레에 가까운 형태였다.
세 쌍의 기다란 잠자리 날개.
여러 겹의 홑눈이 달린 머리는 꼽등이에 날카로운 턱을 더한 것처럼 생겼고, 점액에 뒤덮인 몸은 키틴질의 갑피를 두른 것처럼 단단해 보였다.
가슴부터 몸통까지 이어진 여덟 쌍의 긴 다리 끝, 가위처럼 날카로운 집게가 독액을 뚝뚝 떨어뜨렸다. 앞쪽으로 두툼하고 길게 휘어진 몸통 끝에는 송곳니 같은 가시가 삐죽삐죽 돋은 구멍이 커다랗게 뚫려 있었다.
‘거참 징그럽네.’
몸에 뒤덮인 점액이 마르기를 기다리듯 날갯짓하던 놈들이, 곧이어 일제히 이안 쪽으로 몸을 돌렸다.
쩌저적-
가시 돋은 구멍이 벌어졌다. 그 너머에 깊숙이 감춰져 있던 얼굴들이 드러났다. 진흙으로 빚은 안면상 같았다. 놈들이 하나둘씩 눈을 떴다. 흰자위 하나 없이 새카만 눈동자.
“애석한 일이로구나….”
날벌레들이 윙윙대는 듯한, 마력이 실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진리를 탐구하는 자가, 어째서 이토록 명료한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단 말이냐?”
“…스테판 주교?”
이안이 툭 내뱉었다.
입을 우물대던 놈이 빙긋이 미소 지었다. 입술 아래로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그리 불리던 때도 있었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나는 필멸의 굴레를 벗어나 거대하며 영원한 순환의 일부가 되었으니…. 이제 나, 아니 우리는 부패와 질병을 흩뿌려 순환의 진리를 설파하는 전도자이자, 위대한 아버지의 참된 자손이며-”
놈의 목소리가 점점 더 고양됐다. 순환의 전도자로 거듭난 타락자들이 듣기 싫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집게발을 멋대로 딱딱댔다.
공허의 존재로 거듭난 쾌감이 엄청난 모양이었다.
물론, 놈들을 응시하는 이안의 눈빛은 여전히 심드렁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여전히 저 타락자란 것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불로불사나 힘, 금단의 지식에 대한 유혹이 아무리 크다 한들, 그 대가로 저딴 몰골이 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본인들은 인간을 초월한 존재가 됐다고 여기겠지만. 이안이 보기엔 많고 많은 공허의 괴물들 중 하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쩌면 저들 대부분은 이미, 머잖아 이 세계가 멸망하게 되리라 확신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래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이후를 준비하는 걸지도.
“그래… 확실히, 평범한 아버지는 아니군.”
비로소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이안이 내뱉었다. 왼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긴 그가, 뒤이어 꾹 주먹을 천천히 움켜쥐며 덧붙였다.
“자식들 얼굴을 엉덩이에 박아놓을 생각을 하다니.”
“한번 시작된 순환은 이제 그 누구도…. 뭐라고 했지?”
자아도취에 빠진 것처럼 떠들어대던 스테판이 뒤늦게 되물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대수롭지 않게 덧붙인 이안이, 그를 턱짓했다.
“너희는 이제 어디로 먹고 어디로 싸지?”
“그게 무슨 조잡한- …?!”
뭔가 내뱉으려던 스테판이 멈칫했다. 곧 그가 날개를 흔들어 홱 뒤를 돌아보았다.
콰르르르르-
예배당을 불태우며 멀어지던 화염 해일이, 어느새 더 거칠게 넘실대며 되돌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길은 냇물이 합쳐지듯 이안을 향해 모여들면서, 점점 더 격렬하고 빠르게 출렁였다.
콰아아-
“갸- 아아악-?!”
계곡을 흐르는 격류처럼 밀려든 불길이 후미의 전도자 몇을 휩쓸었다. 아직 채 점액을 다 떨쳐내지 못했던 그들이 괴상한 비명을 내지르며 추락했다. 그 바로 뒤의 몇이 다급하게 위로 솟아올랐다.
마찬가지로 더 높이 날아오르던 스테판이 몸통 아래의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몸을 돌렸다.
“네 이놈, 참으로 마법사다운 잔머리를-”
하지만 그의 말은 이번에도 끝을 맺지 못했다. 어느새 이안이 돌풍에 휩싸인 채 그의 앞까지 쇄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잘 아네.”
내뱉음과 동시에, 이안은 다시 역천의 송곳니를 활성화한 흑검을 내리쳤다.
뾰족하게 일렁이는 보랏빛 아지랑이가 스테판의 윗머리에 틀어박혔다.
카드드드득-
머리와 가슴이 반으로 갈라짐과 동시에, 몸을 웅크린 이안이 스테판의 몸통 위에 발을 얹었다.
놈이 돌진력에 뒤로 밀려나는 가운데, 이안은 끝까지 멈추지 않고 가랑이 사이로 검을 내리찍었다.
콰직-!
보랏빛 칼날이 스테판의 아래 얼굴을 가르며 튀어나왔다. 짙은 녹색의 체액을 뿜으며 반으로 갈라지는 몸통을, 이안이 힘껏 박찼다.
“갸- 아아아-”
반으로 갈라지며 비명을 토해내던 스태판이 밀려드는 불의 격류 속으로 떨어져 타들어 갔다.
놈을 박차고 솟구친 이안은 정작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미 또 다른 순환의 전도자에게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꾸웨에엑-!”
이안을 노려보던 놈의 아래 얼굴이 쩍 아가리를 벌렸다. 새카만 토사물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 건 거의 동시였다.
진짜 얼굴로 싸네.
속으로 읊조린 이안이 허공을 박찼다. 몰아친 돌풍이 그의 궤적을 나선으로 비틀었다. 이안이 토사물을 지나치며 밀려들었다.
여덟 개의 다리가 발작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이안이 그 사이를 뚫고 놈의 품에 안기듯 파고든 게 조금 더 빨랐다.
콰득-!
역수로 쥔 보랏빛 칼날이 놈의 몸통 한복판에 틀어박혔다. 동시에 양발을 놈의 몸통에 디딘 이안이, 자루를 똑바로 고쳐 쥐며 힘차게 박찼다.
콰지직-!
칼날이 몸통 옆면을 썰며 빠져나오고, 뒤따라 이어진 아지랑이의 궤적이 전도자의 한쪽 날개를 두 개나 찢어발겼다.
“키- 아아아악-!”
전도자가 아래 얼굴로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빙글빙글 추락했다. 짝이 맞지 않는 날개로는 균형을 잡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이안은 이미 왔던 방향을 되돌아 포물선을 그리며 멀어지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황급히 흩어지는 순환의 전도자들을 훑었다.
놈들은 이제 다섯밖에 남지 않았다. 여유와 환희로 가득하던 얼굴에는 당혹과 충격이 뒤엉켰고, 몇몇은 구멍을 오므려 아예 얼굴을 감춘 채였다.
이안의 입꼬리에 옅은 실소가 스쳤다.
‘나도 해 봐서 아는데. 새 육체와 힘이라는 게, 그렇게 바로바로 적응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공허의 존재로 거듭났을 뿐, 놈들의 본질은 달라진 게 없었다.
제대로 싸워 본 적 없는 사제들.
제아무리 강대한 힘도, 제대로 다룰 수 있어야 의미를 가지는 법이었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수의 과정을 거쳐 온 이안처럼.
“…….”
잿빛 가운데 보라색을 머금은 이안의 눈이, 이윽고 정면에서 밀려드는 불길의 격류를 마주 보았다.
그는 피하려 하는 대신, 허공에서 몸을 웅크리며 자세를 다잡았다.
콰르르르-
역류하는 화염 해일과 이안이 금방이라도 맞닿을 것처럼 가까워진 다음 순간.
푸화악-!
혼돈력으로 증폭된 휘몰아치는 방벽이 불길을 빨아들이듯 휘어 감으며 터져 나왔다.
일순간 속도가 줄어든 전도자들이 휘청댔다.
불길을 머금은 돌개바람이 천장까지 치솟았다가, 곧이어 사방으로 휘몰아치며 흩어졌다.
콰아아아아-
“키아아악-?!”
전도자들이 불길을 머금은 돌풍에 휩쓸렸다.
그사이 천장까지 튕겨 오른 이안은, 몸을 돌려 천장에 발을 내디디고 있었다.
구구국, 천장에 거꾸로 선 그의 전신이 압력에 짓눌렸다. 그의 양발을 중심으로 균열이 번졌다.
‘사실상 이 정도면 화염 폭풍이랑 다를 바 없는 거 아닌가.’
아직 익히지 못한 고위 마법 중 하나를 떠올리면서도, 이안은 곧장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길이 향한 건 불길에 뒤엉켜 추락 중인 전도자들 쪽이 아니었다.
불길이 휩쓸고 간 단상. 그 위의 거대하고 새카만 덩어리.
찰나에 불과한 순간이었지만, 거기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변화가 단숨에 인식됐다.
몇 번의 원치 않는 능력치 배분 이후로, 그의 인지능력과 반사 신경은 초인적인 수준에 가까워진 상태였다.
집중력과 육감 특성이 한계치까지 활성화된 지금 같은 상황에선 더더욱.
불길에 휩쓸려 끈적하게 타들어 가는 표면. 그 너머로 아른거리는 선명한 자줏빛과 그 사이로 득시글하게 일렁이는 그림자들.
그리고 쩌적, 꼭대기에서부터 시작돼 순식간에 번지고 있는 균열까지 인식한 순간, 이안은 굽히고 있던 다리를 힘껏 박찼다.
억눌려 있던 그의 전신이, 압력을 떨쳐냄과 동시에 포탄처럼 뿜어져 나갔다.
쒸아아악-!
화염 돌풍의 잔재를 뚫고 지나가면서, 이안은 흑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보랏빛 아지랑이가 만들어낸 궤적이 맹렬하게 타오르며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