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206
206화
“델라 루…?”
고개를 갸웃한 테사이아가, 이안의 손아귀에서 번지는 은은한 빛을 눈에 담았다.
“이게, 델라 루의 신성이야?”
“…성물이군. 아니, 성물의 파편인가.”
벽에 기대선 메브가 말을 받았다. 이안의 손바닥에 놓인 돌 손가락들을 응시하며, 그녀가 덧붙였다.
“어떻게 손에 넣은 것이냐? 신성의 근원은 자른다고 쪼개지는 것이 아니며, 본래라면 그저 평범한 돌 조각이 되었을 것인데.”
“여신께 달라고 했소.”
“……?”
메브가 귀를 의심하듯 눈을 깜빡였다. 샬롯의 목덜미와 팔뚝을 비롯한 상처 부위에 델라 루의 은총을 하나씩 얹으며, 이안이 말을 이었다.
“타락자들은 신상을 더럽혀 의식의 주체로 삼았소. 그걸 내가 정화했으니, 그 보답을 달라 청했을 뿐이오.”
“그랬더니… 보답을 주셨다고?”
“보다시피.”
“그런 말도 안 되는…. 아니, 아니다. 의미 없는 의문이군. 이미 그 결과물이 버젓이 있으니.”
멍하니 내뱉던 메브가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말을 맺었다.
하긴 뭐, 나도 정말 될 줄은 몰랐으니까.
속으로 중얼댄 이안이, 마지막 남은 엄지 조각을 쥐며 덧붙였다.
“이 녀석이 회복되고 나면, 각자 하나씩 나눠 가질 것이오. 겪어 보셨다시피, 독과 병을 뿌리는 것들을 언제 또 마주칠지 모르니까. 이걸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거요.”
“그래. 그렇겠지. 감사합니다, 풍요로운 여신이시여….”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은 메브가, 그대로 입술만 달싹이며 델라 루에게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샤아-
환부에서 입을 뗀 늪지의 원한이 만족스러운 숨소리를 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이안은 오른손을 내뻗었다. 냉큼 튀어 오른 검은 실뱀이 그의 중지에 감기기 시작했다.
…이 놈, 조금 길어진 것 같은데.
착각이 아니었다. 녀석이 손가락에 반 바퀴 이상 더 감긴 것이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평소엔 이 녀석을 끼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었으니까.
전에도 그러더니, 저주가 이 녀석에게는 양분이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이 녀석, 정말 성장형 아이템인 건가.
‘아직 능력치는 그대로인데….’
생각하며, 이안은 마지막 남은 엄지를 샬롯의 옆구리 위에 얹었다.
이런다고 능력치가 중첩되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신성력이 닿는 면적이 넓어지면 회복에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모든 정보가 반드시 수치상으로만 표시되는 건 아니었으니까.
흐릿한 주황색 눈을 마주 내려다보며, 이안이 덧붙였다.
“자라. 버티지 말고. 다 끝났으니까.”
“그래…. 정말이지… 면목이….”
중얼대던 샬롯이 눈을 감았다.
왜 자꾸 면목 타령이야. 이안은 짧게 웃음 지었다. 하긴. 샬롯은 유독 부상이 잦은 편이긴 했다. 전투 방식이 워낙 과격하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겠지만, 본인은 여러모로 신경이 쓰일 터였다.
어쨌든, 샬롯의 표정과 숨결은 한층 편안해 보였다. 안도의 한숨을 삼킨 이안의 시선이, 비로소 그녀가 누운 침대를 훑었다. 빈말로도 깨끗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여기선 없던 병도 생기겠는데.”
“여봐라!”
테사이아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리쳤다. 재빨리 문을 열고 들어온 시종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를 바라보는 테사이아의 눈가에 핏줄이 돋아나 꿈틀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로 요정의 늪색 눈동자가 마력을 머금고 일렁였다. 평범한 사람은 제대로 마주 볼 수조차 없는 안광.
싸늘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백작께, 별관의 수습과 정리를 최우선으로 하시라 전하거라. 부상자를 옮겨야 하니.”
“예, 예…!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공…!”
고개를 조아린 시종이 허둥지둥 몸을 돌렸다.
사람 부리는 게 너무 빨리 익숙해지는 것 같은데.
생각하며, 이안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잊고 있던 두통과 현기증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테사이아가 미간을 좁히며 읊조린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그런데, 왜 아직도 역겨운 마력이 느껴지지? 신상을 정화했다며. 분명히 망자들도 흐물흐물하게 다 나자빠졌었는데.”
“그야. 다 끝난 게 아니니까 그렇지.”
피곤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답한 이안이, 테사이아와 메브를 차례로 돌아보았다.
“이 녀석만 푹 쉬어야 하는 게 아니야. 우리도 오늘의 피로를 풀고, 떠날 준비를 바로 시작해야 돼. 어디로 가야 할지 확실해지면, 바로 떠날 수 있게.”
“의식은 막았다며? …설마, 여기가 끝이 아닌 거야?”
“자세한 얘기는 이따 필립에게 들어라.”
“조금만 해 줘. 궁금하단 말야.”
귀찮아 죽겠네, 진짜.
짧게 입맛을 다신 이안이, 별수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의식이 시작된 건 여기만이 아니야.”
“…다른 곳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그래. 신상에 새겨진 표식을 없앨 때, 잠시 그쪽이 보이더군. 마법적으로 이어져 있었던 거야.”
“같은 의식을 준비하고 있었다면 그럴 수도 있겠군. 서부의 타락자들은… 전부 한통속이었던 건가.”
어느새 싸늘해진 표정으로 메브가 읊조렸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확실한 건, 또 다른 의식은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것뿐이오. 여기서 넘어온 것들보다 훨씬 강한 무언가가 실체를 갖췄더군. 그곳의 타락자들도 더 큰 보답을 받았겠지. 어쩌면….”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을 마주 보며, 이안이 말을 맺었다.
“그 사이엔, 경이 쫓는 놈도 섞여 있을지도 모르지.”
“그래. 그럴지도….”
가라앉은 눈으로 읊조린 메브가, 이내 덧붙였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외면하고 지나칠 수는 없다. 이안.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막아야 해.”
“기대되네.”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이안과 메브의 시선을 받은 그녀가 배시시 미소 지었다.
“또 어떤 괴상한 놈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실전이 최고의 연습이란 말이 맞았어. 오늘만 해도, 실력이 늘어나는 게 느껴졌다니까. 분명 그것들을 다 족칠 때쯤엔 나도 한 사람 몫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거야.”
“…마음은 알겠다만. 기대된다는 말은 옳지 않다. 테사.”
잠시 그녀를 마주 본 메브가, 이윽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런 일은, 일어나선 안 되는 비극이니까.”
“나도 알아, 빨강 머리.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면 나도 기꺼이 막으려고 노력했을 거야. 하지만 이미 일어났잖아? 이안도 그랬다구,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안 그래, 이안?”
“…틀린 말은 아니다만. 타락자에게 가족을 잃은 사람 앞에서 할 말은 아니군.”
이안의 싸늘한 핀잔에, 테사이아가 흠칫한 얼굴로 메브를 돌아보았다.
“아, 그, 그랬지. 미안. 고의는 아니었어. 내가 귀쟁이라 그래. 생각 짧고 이기적이라서.”
자학까지 곁들인 사과에, 메브가 옅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나는 괜찮다. 그래도 사과해 주어 고맙구나, 테사.”
“…사과의 의미로 앞으론 군말 없이 도울게. 그게 아니라도 도울 거긴 했지만, 어쨌든. 그래서….”
머쓱하게 샬롯의 정수리 갈기를 쓰다듬던 테사가, 이안을 바라보며 말을 돌렸다.
“교회에 넘어온 괴물은 정확히 어떤 놈이었는데? 여기 있던 놈들만큼 역겨웠어?”
“필립에게 들어라. 그 녀석이라면 네가 원하는 것 이상으로 신나게 떠들어 줄 테니까.”
맥없이 내뱉은 이안이 침대 아래로 내려가, 침대 맡에 뒤통수를 기댄 채 입을 다물었다.
입술을 비죽인 테사이아가 샬롯의 갈기로 시선을 돌리고, 메브도 생각에 잠긴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침묵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
울려 퍼진 노크 소리에 테사이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장내로 들어선 건, 물론 필립이었다.
“네가 이렇게 기다려지는 날이 올 줄은 몰랐네, 주근깨.”
테사이아의 말에 눈을 끔뻑인 필립이, 문을 닫고는 이안을 바라보았다.
“테사가 저러는 걸 보니, 샬롯은 괜찮은 모양이군요.”
“고비는 넘겼다.”
이안이 입술만 움직여 대답했다. 메브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구나. 필립.”
“예. 저도 꽤 길어질 줄 알았습니다만. 백작의 반응이 의외로 담백하더군요. 본인이 처한 상황을 모르지 않을 텐데, 이미 다 받아들인 모양이었습니다. 게다가 테사가 사람을 보냈던데요.”
“응. 맞아. 백작이 뭐래?”
“그러겠다고 전하라더군요. 그리고 나선 몇 마디 나누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상황이 종료되었으니, 지금은 보고 보다 수습과 정리가 우선이라면서요.”
말하면서 검과 방패, 장갑을 차례로 벗어 내려놓은 그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면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나면 마차를 보낼 테니, 우리는 잠시 쉬고 있으라고 하시더군요. 알았다 답하고 돌아온 길입니다. 루스 사제님이 함께 가셨으니, 못다 한 이야기는 그분께 따로 들으시겠죠.”
“그래… 잘 됐군.”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안이 고개만 까딱대는 사이, 테사이아가 벌떡 일어섰다.
“그래서, 우리한테도 네가 설명해 주기로 했다면서?”
“아, 예. 그렇습니다. 전부 설명해 드려야죠. 백작께 했던 것보다 더 자세히- 음?”
휙 날아온 물건을 받아든 필립의 눈에, 곧이어 화색이 돌았다. 술병이었기 때문이다. 이안이 아공간에 쟁여 뒀던 술을 꺼내 던진 것이다.
“감사합니다, 나리…! 맙소사, 이 한 병이 여신의 은총처럼 느껴지는군요.”
필립이 얼굴 가득 웃음 지으며 내뱉는 가운데, 술병에 시선을 고정한 테사이아와 메브가 잽싸게 그의 앞에 착석했다.
…이제야 좀 편히 쉬겠군.
술병 마개가 열리는 소리를 귀에 담으며, 이안이 눈을 감았다.
“마차가 오면 깨워라.”
이어진 필립의 목소리는, 훌륭한 자장가가 되어 주었다.
***
드네로브의 주민들은 평화에 익숙할지언정 나약하지는 않았다.
생존자들의 일부는 도시 밖에 커다란 구덩이를 파고, 나머지는 도시 곳곳에 남은 시체들을 그 안으로 옮겼다. 시체가 담긴 커다란 구덩이가 성벽 주위로 여럿 생겨나고, 곧 차례로 불에 타들어 갔다.
매캐한 연기가 밤새 성벽 밖을 뒤덮고, 주민들은 돌아가며 그 앞에서 기도를 올렸다.
영혼은 루 솔라에게, 육신은 델라 루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염원하는 서부식 추모 의례였다.
일행은 도시의 일에는 일절 개입하지 않고, 별관에서 조용히 휴식에 전념했다.
“백작께서 보내신 전갈입니다.”
노크와 함께 방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이어진 건, 다음날 정오가 조금 지나서였다.
“들어오시게.”
샬롯의 배 위에 머리를 대고 누워 있던 테사이아가 냉큼 바로 앉으며 내뱉었다.
새로 임명된 시종장이 공손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백작 각하께서 접견을 청하셨습니다, 공.”
“그래? 언제…?”
“공께서 원하시는 때라면 언제든 상관 없으시다 전하라셨습니다.”
“그럼, 준비를 끝내는 대로 바로 가겠다 전하거라.”
“예. 그리고… 이반 경도 동행해 주십사 청하셨습니다만.”
테사이아가 건너편의 소파에 누워 있는 이안을 곁눈질했다.
이안이 슬쩍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곧바로 내뱉었다.
“알았다. 그리하지.”
깍듯하게 인사한 시종장이 몸을 돌렸다. 발소리가 멀어지자, 테사이아가 입술을 씩 말아 올렸다.
“잘됐네. 안 그래도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만나면 좋겠다 싶었는데.”
“왜?”
“우리 말이 또 죽었잖아. 보니까 백작의 말은 꽤 여럿 살아 남았더라구. 내놓으라고 하려고.”
“…너도 참 대단한 녀석이야.”
“역시 똑똑하지?”
이안은 코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대체 누구에게 배운 건지, 우는 놈 뺨치는 솜씨가 아주 제법이었다.
물론 하지 못할 요구는 아니었다. 사실 그보다 더한 것이라도 얼마든지 요구할 수 있으리라.
그들이 아니었다면 드네로브는 지금쯤, 공허의 거대 메뚜기들에게 남김없이 뜯어먹힌 후였을 테니까.
“이안 나리까지 뵙자는 걸 보면, 남아 달라는 부탁을 하시려는 게 아닐까요? 적어도 영지가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는요.”
느릿느릿 나갈 채비를 하고 있던 필립이 덧붙였다. 그는 교회로 가서 루스를 만날 예정이었다.
“글쎄. 가 보면 알게 되겠지.”
심드렁하게 대답한 이안이 외출복을 갈아입기 위해 일어섰다.
그가 옷을 갈아 입는 사이, 메브의 도움을 받아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모아 묶은 테사이아도 나갈 채비를 끝냈다.
“야옹이 잘 지키고 있어, 빨강 머리.”
“나도 도시로 나갈 거다. 떠날 채비를 해야 하니. 그 후엔, 교회로 갈 거고.”
이어진 메브의 말에, 테사이아가 미간을 좁혔다.
“그럼 야옹이 간호는 누가 해?”
“…내 스스로.”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한 샬롯이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녀의 몸 곳곳에 얹어져 있던 델라 루의 은총이 투투둑 침대 위로 떨어졌다. 이안이 옷깃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움직일 수 있겠냐?”
“덕분에. 아직 기운은 없다만. 반나절이면 충분히 쌩쌩해질 거다.”
“센 척하긴. 헛소리 말고 누워 있어. 약골아.”
테사이아의 핀잔에 혀를 날름대며 입맛을 다신 샬롯이,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디디며 덧붙였다.
“씻고 누울 거다. 다들 말끔한데, 나만 너무 지저분하군.”
“목욕물에도 미리 그 성물들을 넣어 둬라. 혹시 모르니, 물을 충분히 정화하고 씻도록 해. 미리 물을 팔팔 끓이라 전하는 것도 잊지 말고.”
“…알았다. 그러지.”
이안의 첨언에, 샬롯이 냉큼 침상에 흩어진 돌 조각들을 챙겼다.
일행들은 어느 순간부터 기회만 생기면 자발적으로 목욕을 하고 있었다. 물론, 이안의 영향이었다.
어쩌면 그들은 이 암흑시대에서 가장 청결한 방랑자들일지도 몰랐다.
“금방 돌아올 테니까, 나 없다고 울지 말고.”
샬롯에게 손가락을 까딱인 테사이아가 문을 열었다. 그 뒤로 따라붙으면서, 이안이 메브를 돌아보았다.
“교회에서 봅시다. 일이 끝나면 나도 그리로 갈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