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210
210화
굳어진 와중에도, 루스의 눈은 그들의 모습을 충실하게 담아냈다.
빈틈없이 몸을 가린, 본래는 순백이었을 빛 바랜 로브. 하지만 그 한복판을 크게 가르며 새겨진 황금색 원은 여전히 선명했다.
둘 다 두건을 깊이 눌러 쓴 덕분에, 하관만이 간신히 드러났다.
그 밑으로 넓고 두툼하게 이어진 어깨선은, 로브 아래에 육중한 갑옷을 걸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케 했다. 루스가 방금 떠올렸던 이름을 되새기게 하기에도, 충분한 모습이었다.
‘정말, 정화자인가…?’
물론, 속단할 수는 없었다. 그저 교단의 성전사나 성기사일지도.
절그럭. 절그럭.
장내로 들어서는 둘의 육중한 발소리가, 루스의 정신을 일깨웠다. 애써 침착한 미소를 입가에 걸면서, 루스가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아 쥐었다.
“찬란한 빛에 영광 있으라….”
둘이 그의 앞에 멈춰 섰다.
“찬란한 빛에 영광 있으라.”
두건 아래에서 낮은 목소리가 번졌다. 둘 다 남자였다. 턱수염으로 보아 한 명은 중년이었고, 다른 한쪽은 청년 같았다.
“임시로 사제직을 맡은… 루스입니다. 두 분은….”
조심스럽게 덧붙인 루스가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루스는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정화자들은 교단 내에서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밝히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로브를 걸친 채 사제의 물음에 침묵하는 것만으로도, 자신들의 정체를 밝힌 것과 다름없었다.
잠깐의 적막 끝에, 중년의 정화자가 입을 열었다.
“타락자들이 이곳 교회에서 저주받은 의식을 벌였다 들었소. 사실이오?”
“예. 사실… 입니다.”
조금 목이 메는 듯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루스는 단상 위의 신상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 그러나 의식은 많은 이들의 용기와 희생 앞에 저지되었으며, 찬란한 여신의 가호가 델라 루의 신상을 굽어살피셨습니다. 도시에 깃든 어둠은, 모두 물러났습니다.”
“…….”
중년 정화자가 고개를 들어 신상을 바라보았다.
두건 아래로 턱수염과 콧날, 서늘한 눈동자가 설핏 드러났다. 그의 눈동자에 막을 씌운 것 같은 황금빛이 스친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그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건, 아직 알 수 없지.”
루스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는 사이. 뒤에 선 청년 정화자가 몸을 돌렸다.
성큼성큼 대문으로 걸어간 그가, 곧바로 문에 빗장을 걸었다.
철컹-
둔탁한 소리가 번지는 가운데, 빈 의자에 걸터앉은 중년 정화자가 내뱉었다.
“더 자세히 설명해 보시오.”
“…….”
닫힌 문을 바라보며 굳어 있던 루스의 눈에, 일순간 갈등이 스쳤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에 대한 갈등이었다.
말을 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자리를 피하는 것도.
그런다면 그저 얼굴을 붉히는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터였기 때문이다.
교단의 정화자는, 타락자로 판명된 사제들을 즉결 심판할 권리가 있었다. 심판은 물론 사형이며, 그 정체를 밝히는 과정에서 끔찍한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고 들었다.
물론 오판으로 밝혀질 경우에는 자격이 박탈되며, 말단 성전사로 여생을 보내게 된다고는 하지만.
그런 법이 제대로 지켜질 리가 없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타락자로 밝혀진 사제들이 그에게 해 준 이야기였다. 지금 와 돌이켜 보면, 그들은 교단의 눈에 띄는 것을 늘 조심하고 있었다.
그러니 정화자에 대한 그들의 이야기만큼은 거짓이 아니었으리라.
“루스 사제?”
“예. 마, 말씀드리겠습니다….”
화들짝 정신을 차린 루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적 갈등과 달리, 그의 설명은 간소하고 담백했다.
“…그게 끝이오? 백작과 백작의 귀빈, 그의 기사들. 그리고 병사들이 의식을 막아내고 어둠을 몰아냈다?”
어쨌건 이들을 믿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예고 없이 찾아와 도시의 일을 캐묻는 중앙의 정화자들이라니.
과거라면 의심 없이 협조했겠지만, 교단의 이면을 본 지금은 아니었다.
모든 걸 이야기 하는 건, 이들의 진짜 목적을 알아내고 난 이후가 되어도 늦지 않으리라.
중년 정화자의 물음에, 루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찬란한 여신과 풍요로운 여신이, 그들을 가호해 주셨지요.”
“…….”
중년 성기사가 입을 다무는 가운데, 어느새 그의 뒤에 서 있던 청년 정화자가 가만히 루스를 바라보았다.
두건 아래로 설핏 드러난 그의 눈빛이 서늘했다.
“거짓말이 서투르시군요.”
그가 내뱉은 찰나, 중년 정화자가 일어섰다. 순간 숨을 멈춘 루스가 그를 바라보았다. 두건 아래로 심연이 펼쳐진 듯했다.
“타락자들은 그렇게 물리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오. 오직 그들과 싸우도록 훈련받은 자들만이 가능하지. 혹은, 신의 선택을 받았거나.”
싸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은 중년 정화자가, 한차례 숨을 들이쉬고는 덧붙였다.
“피처럼 붉은 신성을 휘두르는 성기사가 있다는 이야기를, 이미 들었소. 왜 그런 부분을 빠뜨렸지?”
“…백작의 귀빈들 중 하나가 바로 그분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모습을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그때 저는 교회에 있었으니까요. 저를 구한 건 전혀 다른 분이셨죠.”
“흑안 흑발에, 검의 달인이었나?”
“그… 랬습니다만. 어떻게 아셨습니까?”
입술 끝을 슬쩍 말아 올린 중년 정화자가 중얼댔다.
“…역시. 제대로 찾아 왔군.”
루스의 미간이 꿈틀댔다. 이들의 목표가 이반이라는 걸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대답하시오, 사제. 이안 호프는, 어디로 갔소?”
“……?”
하지만 이어진 중년 정화자의 말은, 다시 한번 루스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이안 호프라니요? 그게 누구입니까?”
“헛소리 마시오, 사제. 방금 직접 그자를 만났다지 않았소.”
“저를 구한 건 이안 호프가 아니라, 이반 경이셨습니다.”
“이반…?”
멈칫한 중년 정화자가, 이윽고 덧붙였다.
“그 백작의 귀빈이라는 자들에 대해, 아는 대로 털어 놓으시오.”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원로 요정인 텐시아 아이나스 공과, 그 분을 모시는 성기사들 이라는 것 밖에는요.”
“아이나스…? 아이나스 가의 원로가, 왜?”
이제는 중년 정화자의 목소리에도 의아함이 묻어 나왔다.
그의 뒤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진 건 그때였다.
“…글루미르에서 함께 있었다던 정체 모를 요정. 그게 아이나스가의 원로였던 모양이군요. 맞춰지지 않던 한 조각이었는데. 이제야 확실해 졌어요.”
중년 정화자의 시선을 받은 그가 말을 이었다.
“대리인을 찾은 겁니다. 자신의 정체를 감춰줄.”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군. 원로의 뒤에 숨어, 다른 사람인 척하고 있는 것인가. 과연, 거짓 선지자 다운 짓이군.”
이어진 둘의 대화는 루스를 굳어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반이 남긴 마지막 말이 떠오른 것이다. 그게 자신의 이름과 신분을 속인 걸 뜻하는 것이었다면.
“짐작가는 게 있으신 모양이군.”
어느새 다시 루스를 바라보던 중년 정화자가 내뱉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루스가 입을 열었다.
“대체, 그분의 진짜 정체는 무엇입니까? 무엇이기에, 정화자들께서 그분을 찾으시는 거지요?”
“이안 호프. 출생은 불명이며, 변방의 용병으로 활동하던 자이지. 흑안 흑발에 검의 달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북부 야만인들의 전사신과 엄정한 여신의 총애를 받는다더군.”
“카르하와… 티르 엔의…? 서, 설마.”
문득 뇌리에 떠오른 생각에, 루스가 눈을 치켜떴다.
“지금 그분이, 북부의 용살자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게도 알려져 있지. 대외적으로는.”
“루 솔라, 맙소사…!”
루스의 입에서 비로소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그의 눈에는 커다란 깨달음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동안 이반, 아니 이안에 가지고 있던 의문들이 단박에 해소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보여준 그 엄청난 전투력도. 홀로 타락자들의 한복판으로 향하던 영웅적인 면모와, 델라 루의 총애를 받던 그 모습까지.
어쨌건 그의 반응이, 중년 정화자의 마음에는 들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가 한층 더 싸늘해진 목소리로 씹어 뱉었다.
“하지만 그 실체는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르지. 그는 백금룡이 만들어낸 거짓 선지자이며, 어둠을 삼키고 혼돈을 낳는 자이니.”
“백금…? 교단의 성자께서, 왜 거짓 선지자를 만든단 말씀이십니까?”
“그 괴물이 성자라 불리는 건 신성하거나 명예로워서가 아니오. 놈은 수많은 동족을 상잔한 살육자이자, 인간 위에 군림하던 폭군이니. 그럼에도 찬란한 여신께선 자비롭게도, 놈에게 성자라는 이름의 재갈만을 물리셨지.”
“…….”
“그러니 놈은, 자신을 속박하는 빛이라는 족쇄를 벗어 던지고 싶을 것이오. 대륙을 어둠으로 뒤덮어서. 피에 굶주린 본모습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도록.”
루스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멍하니 정화자를 바라보던 그가 간신히 내뱉었다.
“하지만 그분은… 제가 보는 앞에서 공허의 존재들을 물리치고 도시를 구원하신….”
“그건 구원을 위한 행동이 아니오. 어둠과 혼돈은 그자의 힘이 되지. 그자는 이미 마검을 손에 넣었으며, 암흑 성물의 주인이기도 하니. 그렇기에 빛을 가져오는 사도처럼 보이나, 어둠과 혼란만을 낳는 것이오.”
중년 정화자가 고개를 숙였다. 두건 아래로 드러난 건조한 눈이, 더 가까이에서 루스를 응시했다.
“그자가 거쳐 간 모든 곳은 빠짐없이 어둠에 물들었으며, 그가 떠난 뒤에는 더 큰 혼란에 휩싸였소.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조차, 그가 만들어 낸 일의 결과물이오. 과연, 이 모든 것이 우연 같소?”
“…….”
“다시 묻겠소. 이안 호프와 그의 일당들은, 어디로 갔지?”
루스는 이안과 필립, 메브를 떠올렸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뒤엉키는 느낌이었다.
이안이 사용하던 검. 그건 루스가 보기에도 분명히 마검이었으니까. 게다가 그가 자신의 이름과 신분을 속인 것도 사실이었다. 정말 이들의 말처럼, 그는 빛을 참칭하는 거짓 구원자이자 혼돈을 낳는 자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순간 루스의 뇌리에 선명하게 떠오른 건, 어둠 속에서 그를 마주 보던 종자의 눈이었다.
두려움에 흔들리면서도, 끝끝내 그걸 이겨내려 안간힘을 쓰던 갈색 눈. 그 눈빛만큼은 결코 거짓일 수 없었다.
그를 살리려 안간힘을 쓰던 그 등도. 그리고, 잿더미 사이에서 만신창이가 된 채 일어나던 이안의 모습 역시.
‘…나는 이미, 혼돈의 하수인이 되어버린 건지도.’
귀 기울여서는 안 되는 속삭임. 내심 필립의 말을 뇌까린 루스는, 비로소 결정을 내렸다.
“아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말씀드리겠습니다, 정화자님. 하지만, 그들이 어디로 간 건지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자신이 본 것을 믿기로.
“그들은 자신들의 행선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꺼낸 적이 없으며, 저 역시 묻지 않았습니다. 그저 제 목숨과 도시를 구원한 은인으로 대우했을 뿐이죠. 그리고 그분들을 얼마 지나지 않아 떠나셨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
두건 아래의 눈이, 루스의 눈을 뚫을 듯 응시했다. 중년 정화자의 눈동자에 황금빛이 아른댈 찰나.
“거짓말이 아닌 것 같군요. 게다가 이분은, 타락하지도 않았고요.”
뒤에 선 청년 정화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옆으로 한 걸음을 내디딘 그가, 뱀 앞의 개구리처럼 얼어 있는 루스를 바라보았다.
“사제님의 품에서 찬란한 여신의 은총이 번지는 게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선배? 이분은 그저….”
설핏 드러난 그의 눈매가 휘어졌다.
“속았을 뿐인 겁니다. 다른 많은 이들이 그렇듯이.”
“…….”
중년 정화자가 시선을 돌리는 가운데, 여전히 루스를 응시하며 청년 정화자가 속삭였다.
“사제님. 만에 하나라도 아직 말씀하지 않으신 게 있다면-”
철컥, 철컥.
닫혀 있던 대문이 흔들린 건 바로 그때였다. 흔들림은 곧 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로 바뀌었다.
두 정화자들이 뒤를 돌아보는 가운데, 문 너머에서 우렁찬 외침이 이어졌다.
“당장 교회의 문을 여시오! 드네로브의 정당한 지배자이신 모르간 웨스트우드 백작 각하의 명이오!”
“…….”
서로를 돌아본 것도 잠시. 곧 청년 정화자가 걸음을 옮겼다. 그가 빗장을 풀자, 문이 곧바로 벌컥 열렸다.
“……!”
뒤에 선 루스의 눈이 커졌다. 교회의 계단 아래로 무장한 병사들과 쇠스랑을 든 주민들이 잔뜩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이끌고 대문 앞에 선 건, 웨스트우드 백작과 가신들이었다.
“호오….”
청년 정화자가 탄성을 흘리는 가운데, 중년 정화자가 문 앞으로 걸음을 옮기며 내뱉었다.
“아무리 이 땅의 정당한 통치자라 하더라도, 교단 내부의 일에 간섭할 권리는 없습니다. 백작.”
“평소라면 그렇겠지.”
그를 마주 본 백작이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타락한 사제들이 내 땅을 더럽힌 지 채 열흘도 지나지 않았소. 그래서 나는 신원이 검증되지 않은 그 어떤 외부의 사제도 믿지 않소. 대교회에서 나온 이들이라 해도 예외가 될 수는 없지.”
“불경한 말씀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는군. 우리가 누구인지는 아시오?”
“모르오. 알고 싶지도 않고.”
칼같이 말을 자른 백작이, 반박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신원을 알 수 없는 외부인들이 도시에 하나 남은 신실한 사제와 함께 있으며, 찬란한 여신과 풍요로운 여신을 모신 전당을 점령하고 있다는 사실 뿐이지. 내 허락도 없이.”
“목표가 아니기에 놓아두었을 뿐, 아직 귀하의 무고함이 밝혀진 것은 아니오, 백작. 타락자들은 늘 귀족들의 후원을 받으며 세력을 키우는 법이니.”
중년 정화자가 서늘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분을 억누르듯, 두건 아래로 황금빛 광채가 아른거렸다.
백작은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나는 이미 모든 일을 기록한 서신을 대교회에 보냈소. 내게 죄가 있다면, 교단의 조사단이 밝혀낼 것이오. 당신들이 아니라.”
“…….”
중년 정화자와 백작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작게 한숨을 내쉰 건, 그의 옆에 선 청년 정화자였다. 곧 그가 입을 열었다.
“오해가 있군요. 백작 각하. 우리는 그저, 누군가의 행방을 물으러 왔을 뿐입니다. 이곳에 머물렀던 텐시아 아이나스 공의 행방을요.”
“아이나스 공? 그들은 닷새 전에 이 도시를 떠났소. 또한 그들의 목적지에 관해서는 그 누구도 들은 바가 없지. 나 또한 마찬가지이고.”
담담하게 내뱉은 백작이 병사들 쪽으로 턱짓했다. 병사들과 그들의 뒤에 선 주민들이 길을 트는 가운데, 백작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니 이만 떠나시오. 순순히 물러나지 않는다면, 또 다른 비극을 낳고자 이곳에 온 것으로 간주할 것이오.”
“…이런.”
이윽고 짧게 혀를 찬 정화자가, 옆을 돌아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서부 촌구석이라고 얕보면 안 되겠군요. 못 당하겠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