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211
211화
동의하듯 짧게 혀를 찬 중년 정화자가 문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백작의 앞을 느릿느릿 지나치며, 그가 덧붙였다.
“이 도시에 여죄가 없기를 바라시오. 백작. 그렇지 않다면 다시 나를 만나게 될 테니. 그리고 그때는, 지금처럼 대화만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오.”
“염려 마시오. 죄가 있다면, 기꺼이 벌을 받을 것이니.”
백작의 무덤덤한 대답을 등진 채, 두 정화자가 계단을 내려갔다.
길을 튼 병사와 주민들이, 그들이 지나치자 다시 틈을 메우며 모여들었다. 백작의 시선이 예배당 쪽으로 돌아갔다.
“괜찮으신가?”
“예… 덕분에. 감사합니다.”
문으로 다가오며 루스가 고개를 숙였다. 곧 백작의 눈을 마주 본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저분들께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알고 보니 이반 경이….”
“그만.”
백작이 말을 잘랐다. 입을 다문 루스의 눈매가 이내 꿈틀댔다. 백작이 이미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건조하게 웃음 지은 백작이 덧붙였다.
“자세한 얘기는, 내 집에서 단둘이 나누도록 합시다. 서로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군.”
“…예. 그런데, 교단에 서신은 언제 보내셨습니까?”
“안 보냈소. 거짓말이었지.”
“예…?!”
루스의 눈이 다시 커졌다. 소리 없이 콧방귀를 뀐 백작이, 인파를 뚫고 멀어지는 정화자들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제는, 더 미룰 수 없겠군.”
저들의 귀에 들어갔다면 당장 칼을 뽑아 들고 달려 왔을 이야기였다. 하지만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백작의 목소리는 정화자들의 귀에 닿지 않았으니까.
그들은 익숙하지 않은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말을 묶어둔 성문으로 걸음을 재촉할 따름이었다.
청년 정화자가 내뱉은 건, 주민들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됐을 때였다.
“적어도 서부에선, 교단의 권위가 예전 같지 않겠군요. 앞으로도.”
“진작 서부 지부를 뒤엎었어야 했다. 평화에 젖은 돼지 새끼들….”
혀를 찬 중년 정화자가 곧 씹어 뱉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 곧 이 땅의 불경한 자들도, 그동안 우리가 어떤 싸움을 이어 왔는지 알게 될 테니.”
그는 아주 오랜 시간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둠과 싸워온 자였다. 교단의 다른 정화자와 성전사들이 그러했듯이.
그런 이들의 결말은 둘뿐이었다. 어둠에 물들거나, 더더욱 빛에 의지하거나. 그는 후자였다. 그렇기에 찬란한 빛에 감사할 줄 모르는 자들에 대한 실망과 혐오도, 깊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어둠을 물리치는 빛이 얼마나 위대한지 다시금 깨닫게 되겠지.”
청년 정화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선배의 속내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이야기를 한 귀로 흘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이윽고 읊조렸다.
“아까 그 사제도 그렇고. 백작도 분명 뭔가 아는 게 있었습니다. 하지만 절대 말하지 않을 게 분명했어요. 아마도 그자가, 저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은 것이겠죠.”
“…….”
중년 정화자가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넌, 아직도 그자가 정말 신의 선택을 받은 구원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나?”
청년의 입가에 옅은 호선이 스쳤다.
“대주교의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자를 죽이러 가는 게 아닙니다. 그를 처단하는 건, 그가 정말 빛의 선택을 받은 참된 용사인지 확인한 후가 되어도 늦지 않습니다. 저를 함께 보내신 건 아마도 그래서겠지요. 그러니 저는, 제 역할을 다할 겁니다.”
“…현명한 자는 보지 않아도 믿으나, 어리석은 자는 보아야만 믿는 법이지. 그자의 본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나세르. 그리고 그 순간이 오면, 그자의 목을 베는 건 네가 될 것이야.”
“그자가 정말 선지자의 탈을 쓴 혼돈의 첨병이라면, 기꺼이.”
대답하며 앞서 걸어간 청년, 나세르가 곧 성문에 묶어 둔 말들을 이끌고 돌아왔다. 먼저 안장에 오른 중년 정화자가 내뱉었다.
“교단에 매를 날려라. 아이나스, 그 역겨운 귀쟁이들에게 연락을 넣으라고 해. 텐시아라는 원로가 왜 관련도 없는 서부로 향하는 전지, 그 이유를 밝히라고.”
“예. 용살자와 관련된 일이라 첨언하면, 빠르게 처리될 겁니다.”
대답하며 말에 올라탄 나세르가 덧붙였다.
“대주교와 본단에도 연락을 넣겠습니다. 우리가 그를 찾았다고.”
“…….”
중년 정화자가 앞서 나아갔다.
그 뒤를 따르며, 나세르가 말을 이었다.
“해서, 이제 이제 어쩌실 겁니까? 지원을 기다리실 겁니까?”
“…아니. 그때는 늦다. 우리가 잡아야 해.”
중년 정화자의 시선이 성문 너머로 드러난 풍경을 훑었다.
“닷새 전에 떠났댔지. 방향만 제대로 잡는다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을 거다.”
“그럼 어디로 가실 겁니까? 테센? 라클리프?”
“…빛이 인도하는 곳으로.”
읊조린 그의 백마가 앞서 나아갔다. 그림자가 드리운 듯 어두운, 새카만 들판 너머를 향해서.
***
“테센이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 산만 넘으면 곧 도시가 나올 거예요.”
마부석에서 필립이 말했다.
마차 천장에 누워 밤하늘을 응시하던 이안이 느긋하게 상반신을 일으키는 사이.
마석등으로 지도를 비춰 보던 필립이 덧붙였다.
“이번엔 확실할 겁니다. …아마도요.”
“누가 뭐래?”
“하하. 괜히 찔려서요.”
필립이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가 이러는 건, 이미 한 차례 길을 잘못 든 전적이 있어서였다.
덕분에 길을 조금 돌아가게 되면서, 일행은 예상보다 하루쯤 늦게 테센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하지만 필립을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초행길이기도 한 데다, 이안이 보기에 진짜 잘못은 루스가 줬다는 저 낡아빠진 지도에 있었다.
저건 축척은커녕 애초에 길과 지형의 형태마저 틀려먹은, 현대인인 이안의 관점에선 지도라고 부를 수도 없는 그림 낙서였다.
사실 지금까지 저딴 것들로 길을 잘만 찾은 필립이 오히려 대단하다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주위 환경의 변화도 길을 찾기 더 어렵게 했다.
말라 죽거나 휴지기에 들어간 농작지나 텅 빈 농막 촌을 지날 때는 그나마 상황이 나았다.
완만하게 오르내리는 들판과 숲으로 접어들면서, 풍경이 본격적으로 기괴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드륵, 마부석 뒤의 간이 창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슬쩍 얼굴을 들이민 테사이아가 내뱉었다.
“그래서, 수도원까진 얼마나 남은 건데?”
“테센시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였으니까….”
지도를 잠시 가늠한 필립이 이내 덧붙였다.
“아무리 늦어도 이틀 반나절이면 될 겁니다. 저 산만 넘으면 금방이에요. 물론, 아무런 방해도 없거나….”
슬쩍 마차를 끄는 말들을 곁눈질한 그가 덧붙였다.
“저 녀석들이 그때까지 버텨 준다면 말이죠.”
말들은 엊그제부터 비실대고 있었다. 뭘 주워 먹는 빈도가 눈에 띄게 줄었고, 마차를 끄는 속도도 느려졌다. 어쨌거나 걷는 것보다는 빠른 속도를 유지하고 있긴 했지만,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산은 내일 넘지. 적당한 야영지를 물색해라.”
이안이 내뱉었다. 마부석 창문이 닫히는 가운데, 말에 탄 채 마차와 나란히 걷던 샬롯이 턱을 까딱였다.
“물 냄새가 난다. 멀지 않은 곳에 냇가가 있을 거야.”
그녀가 탄 말이 훅훅, 힘겨운 콧김을 내뿜었다. 머리를 아래로 축 늘어뜨린 채였다. 물론 샬롯은 때때로 녀석을 내려다보며 혀를 날름댈 뿐, 신경도 쓰지 않았다.
마차 문이 열린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몸 절반을 마차 밖으로 내민 테사이아가, 지붕에 앉은 이안을 올려다봤다.
“그냥 밤새 움직이면 안 돼? 말도 저 모양이고 주위도 이 모양인데. 쉬어서 뭐 해.”
“이 모양이니까 쉬어야지.”
관도 주위를 돌아보며, 이안이 덧붙였다.
“언제 마경이 시작될지 몰라. 그때부턴 쉬고 싶어도 못 쉴 거다.”
날씨는 후텁지근하고, 건조하던 공기는 눅눅했다. 낮이 되면 하늘의 먹구름은 음울한 황색이 뒤엉켜 일렁였다.
주위의 나무들은 비틀어 늘린 엿가락처럼 괴상하게 가지를 뻗은 채 시들어 있었다. 그 사이사이로 정체를 알 수 없는 곰팡이와 버섯들이 자랐다. 바위틈과 나무 둥치에도 형형색색의 이끼가 끼고, 점점 더 넓게 뒤덮이고 있었다. 밤중에는 자세히 바라보면 흐릿하게 빛을 뿜는 이끼였다.
어제부턴 꽃가루나 먼지 덩어리 같은 것들이 주위에 둥둥 떠다녔다. 자세히 보면 살아있는 것처럼 작게 꿈틀거리는 포자였다. 밤에는 이것들도 반딧불처럼 반짝였다.
말들이 비틀대는 건 아마도 이것들을 들이마셔서일 터였다.
다행히, 일행에게까지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그러니까 오늘 밤은 너도 푹 쉬어 둬라.”
내뱉은 이안이, 한쪽 눈두덩이가 퍼렇게 물든 테사이아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았다.
“대련도 하지 말고.”
음산한 전경과 달리, 일행의 여정은 뜻밖에도 꽤 평화로웠다.
마물이 아예 없진 않았지만 변방이나 북부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었다. 그나마도 본격적으로 오염되기 시작한 지역부턴 아예 나타나지도 않았다.
흉지에 마물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그것대로 이상한 일이었지만, 어쨌건 사실이 그랬다.
덕분에 남은 시간을, 일행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보냈다.
테사이아가 몰두 중인 두 가지 중 하나는 대련이었다. 상대는 주로 필립이었고 둘의 실력은 어느새 거의 호각이었다.
눈가의 멍은,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샬롯에게 도전했다 생긴 결과물이었다.
이안은 이런 평화가 마냥 달갑지만은 않았다.
그가 공허의 표식을 통해 저 너머를 엿봤듯, 공허의 존재 역시 이안의 존재를 마주했었기 때문이다.
분명 그가 드네로브의 의식을 저지했으며, 곧 자신을 찾아오리란 것도 알고 있으련만.
‘또 제 본진에 드글드글 집결시키고 있는 거겠지.’
시발.
그를 멀뚱히 바라보던 테사이아가 덧붙인 건 그때였다.
“그래도 활 정도는 쏴도 되지?”
“…….”
그녀를 돌아본 이안이, 짧게 입맛을 다시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화살 보충만 제대로 해 둔다면.”
“걱정 마. 그건 야옹이가 도와줄 테니까.”
“이젠 아예 맡겨 둔 것처럼 부려먹는군. 귀쟁아.”
샬롯이 헛웃음을 지으며 내뱉었다. 테사이아가 상체를 쭉 위로 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권했으면 책임을 져야지. 게다가 난 연습용 화살 만들 줄도 모른다고.”
“가르쳐 준다고 했을 텐데.”
“안 배울 거라고도 했을 텐데?”
“그게 무슨 미친…. 아니다. 대답할 가치도 없군.”
한숨 쉬는 샬롯과 눈이 마주친 이안이 어깨만 으쓱였다.
테사이아에게 활을 권한 건 그였다. 그녀의 근접 전투 수행 능력은 아직 다른 일행에 비해 여러모로 손색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요정이니 활 정도는 금방 능숙하게 사용하리라는, 지극히 현대인다운 이유도 더해져 있었다.
물론 테사이아는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 모습을 본 샬롯은 오히려 냉큼 백작의 병기고에서 튼튼한 장궁을 찾아 돌아왔다.
그리고 테사이아는 예상보다 더 빠르게 활을 다루는 데에 능숙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아예 재미가 붙었는지, 연습용 화살을 거의 매일 밤 쏴 댔다.
‘테센의 괴물들한테도 통할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일행은 곧 샬롯이 말한 냇가 근처에 도착했다. 숲에서 굽이져 흘러나온 물줄기였다.
“건너지 않고 여기 야영지를 꾸리는 게 좋겠습니다. 풍경이 심상치 않네요.”
“그래. 그러는 게 좋겠군.”
이안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산기슭으로 이어진 뒤틀린 숲 곳곳에서 푸르스름한 빛들이 선명하게 일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단 땅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반딧불 무리처럼 허공에 잔뜩 떠다니기까지 했다.
필립이 물가로 마차를 몰고 가는 사이, 메브와 테사이아가 짐가방을 든 채 먼저 내렸다.
말을 물가에 묶어둔 샬롯이 땔감을 구하러 냇가 너머로 달려가고, 메브와 테사이아가 능숙하게 모포와 식량들을 꺼내 늘어놓았다.
“조금 출출한데. 그냥 먹으면 안 돼?”
“안 돼. 기다려라.”
테사이아의 손에 든 육포를 낚아챈 이안이, 냄새를 맡고는 북 찢어 입에 넣었다. 뒤이어 나온 말린 빵과 치즈도 마찬가지였다.
음식이 상하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기미 상궁이라도 된 기분이었지만, 별 수 없었다.
저항력과 회복력 모두, 그가 압도적으로 뛰어났으니까.
마경을 앞두고 누군가 식중독에 걸려 앓아 눕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럼 난 활이나 쏘고 올게.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거든. 빨강 머리는, 말이 너무 없어.”
어깨를 으쓱인 테사이아가 휙 마차 쪽으로 달려갔다.
하여간,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군.
이안은 마차를 뒤지는 테사이아와 마차에서 말을 분리 중인 필립을 잠시 바라보았다. 비실대는 녀석들에게 물을 먹이려는 모양이었다.
곧 필립을 휙 지나친 테사이아가 냇물을 박차며 멀어졌다.
“평범한 혈통은 아닐 것이다.”
옆에서 이어진 목소리에, 이안은 고개를 돌렸다. 기름 주머니와 천을 꺼내 놓은 메브가 팔목 보호대를 분리하고 있었다.
드네로브를 떠난 이후, 그녀는 차분함을 넘어 경건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종일 말을 아꼈고, 밤에는 장비를 점검하고 아침에는 기도를 올렸다.
오랜 기다림 끝에, 또 다른 복수를 앞두고 있기 때문일 터였다.
“테사 말이오?”
이안의 물음에, 벗은 팔목 보호대를 옆에 놓은 메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가르친 건 예법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것들뿐이었어. 하지만 테사가 드네로브에서 보여준 모습은 그걸 한참 뛰어넘었지. 그걸 떠나, 아주 자연스러웠다. 타고난 것처럼.”
이안을 돌아본 메브가 덧붙였다.
“분명, 테사는 본래도 평범한 요정은 아니었을 거야.”
“그냥 타고난 거짓말쟁이일지도 모르지. 다른 귀쟁이들 처럼.”
이안의 농담에 메브가 옅게 웃음지었다.
“그럴지도. 어쨌든….”
견갑의 고정을 풀며 냇물 너머의 어둠으로 시선을 돌린 메브가 덧붙였다.
“저들이 무사히 고향에 돌아가게 하고 싶어. 내 복수 때문에 다치거나, 희생되는 일 없이. 필립도, 물론.”
별걸 다 신경 쓰는군. 이안은 짧게 웃음 지었다. 보아하니 샬롯이 다쳤을 때부터 은근히 신경 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일행 모두가 무사히 이번 여정을 끝낼 수 있을지는, 이안도 장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가 싸워야 할 적들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고, 심지어 이번엔 사전 정보가 거의 없는 공허의 존재이기까지 했으니까. 중간에 누군가 죽거나 크게 다쳐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물론 이안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차라리 자신이 다치는 쪽이 속이 편했다. 회복력만큼은 초인의 반열에 오르지 않았는가.
“다들 알고도 함께하는 것이오. 그 정도 각오는 당연히 했겠지.”
그런 속마음과 달리, 이안은 덤덤하게 내뱉었다. 흉갑을 벗으며 메브가 어깨를 으쓱였다.
“알고 있다. 하지만 죽거나 다쳐도 되는 건 나뿐이야. 이건 내 복수행이니.”
“내 의뢰이기도 하지. 아시다시피, 난 의뢰는 어떻게든 완수하는 편이라서 말이오.”
“…그래. 그럼, 너와 나로 하자.”
메브가 빙긋 미소 지었다. 그녀가 반대쪽 팔목 보호대도 벗는 사이, 육포를 더 찢어 입에 문 이안이 덧붙였다.
“경은 어쩔 생각이오?”
“……?”
메브가 고개를 돌렸다. 육포를 질겅대며, 이안이 턱 끝을 까딱였다.
“여기서 경의 복수가 끝날 수도 있잖소. 그 뒤엔?”
“그때는… 네게 밀린 보수를 지불해야 하겠지.”
육포를 삼킨 이안이, 고개만 돌려 그녀를 마주 보았다.
“내가 당장은 받을 생각이 없다고 한다면?”
“……!”
메브의 눈이 설핏 커졌다. 그것이 그녀의 복수가 끝나면 더는 동행하지 않겠다는 뜻임을 단번에 알아들은 것이다.
“그럴… 것이냐?”
“글쎄. 아마도.”
이안의 속내를 읽으려는 듯, 메브가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불가능할 터였다. 그의 눈빛은 평소처럼 미동도 없이 가라앉아 있었으니까. 이윽고 짧은 한숨을 내쉰 메브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때는….”
“으악?! 아, 아니…?”
물가에서 필립의 경악성이 번진 건 그때였다. 말을 멈춘 메브가 홱 고개를 돌렸다.
마찬가지로 필립 쪽을 바라본 이안의 미간이 슬며시 좁아졌다.
“…….”
필립이 허둥지둥 달려가는 가운데, 말 두 마리가 물가에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