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214
214화
“준비해야겠군.”
내뱉은 이안이 눈을 떴다. 테사이아가 홱 그를 돌아보았다.
“준비? 그럼 정말 우리가 포위 당했단 거야?”
“아마도.”
“그럼, 난 유능한 게 맞았네.”
물론, 그 사실에 미소 지은 건 테사이아 뿐이었다.
이안이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파편의 공명을 가라앉히는 건 포기한 채였다. 어쩌면 테사이아가 느낀 게 이 울림의 원인일지도 몰랐다.
놈들을 다 죽여야 편해질지도.
“…….”
곧, 누런 독 안개 사이로 온갖 실루엣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차 뒤를 응시하던 필립이 나지막이 탄식했다.
“루 솔라여… 부디 저 몰골이 되느니 죽게 해 주소서….”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들만 해도 족히 수백은 되어 보였다. 곰팡이에 뒤덮여 누런 안개 속에서도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부패와 질병의 권속들. 생긴 것도 가지각색이었다. 뒤틀린 몸에 넝쿨이 칭칭 감긴 놈이 있는가 하면 머리에서 버섯이 자라거나 네 발로 기는 놈도 있었다.
독 안개가 앞길을 인도하듯 번지는 가운데, 그들이 뿜어내는 푸른 빛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확실히, 이번엔 그냥 구경만 할 것 같진 않군.”
샬롯이 도끼를 고쳐 쥐며 뇌까렸다. 그녀의 시선은 좌우의 포도밭 너머를 훑고 있었다.
넝쿨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것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고블린과 트롤. 변이된 개나 염소, 곰 같은 동물들의 모습까지도 보였다. 넝쿨 위로는 온갖 종류의 곰팡이 벌레들이 안개 속을 헤엄치듯 유영했다.
끼이이이-
수도원의 대문이 열린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그 뒤에도 백 단위는 족히 될 법한, 가지각색의 권속들이 서 있었다.
다만, 놈들은 문밖으로 나서지 않았다. 일렁이는 누르스름한 안광을 마차에 고정한 채, 그저 자리를 지켰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포위망을 좁혀 오는 건 후방과 좌우의 마물들이었다.
“하나가… 되자….”
“합일을… 위대한 순환의 일부가….”
“혼돈이여… 순환의… 합일을….”
고막을 간지럽히는 듯한, 주문 같은 속삭임이 사방에서 번졌다.
알아듣기 힘들 만큼 작은 목소리였지만, 이안의 귀에는 이상할 정도로 또렷하게 파고들었다.
파편의 울림이 그 음성들을 증폭시켜 주는 것 같았다.
“이, 일단 마차를 멈출까요? 내려서 돌파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차는 후방으로 돌려서 시간 벌이용으로 쓰고… 어어…?”
고삐를 당기던 필립이 눈을 치켜떴다. 말들이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녀석들은 고삐를 아무리 당겨도 그저 터덜터덜, 수도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내 말도, 이제 멈추지 않는군.”
무덤덤하게 내뱉은 메브가, 좌우의 포도밭을 돌아보며 안면 가리개를 내렸다.
마차 지붕에 우두커니 선 테사이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것들이 왜 저러는 걸까. 분명히 자유 의지가 있어 보였는데, 지금은 그냥 꼭두각시 같아. 내 시선을 어떻게 느낀 건지도 모르겠고.”
“그딴 게 지금 무슨 상관이냐, 귀쟁아. 활이나 들어라.”
핀잔을 준 샬롯이, 마차 아래로 휙 뛰어내리고는 덧붙였다.
“저놈들, 그리 빠르지 않아. 그냥 다 같이 달려서 정면으로 돌파할 시간은 충분할 거다.”
“예. 수도원의 저 괴물들을 뚫고 들어가서, 좁은 곳에서 막도록 하죠. 여긴 너무 열려 있습니다.”
왼팔에 원형 방패를 단단하게 고정한 필립이 마부석에서 뛰어내리며 대답했다.
마차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테사이아가 뒤로 손을 뻗었다.
“날아다니는 것들은 내가 맡을게. 이안. 화살 좀 꺼내 줘. …이안?”
그녀가 지붕 한복판의 이안을 돌아보았다. 숨을 고르던 이안이 아공간에 손을 넣었다. 곧 그가 화살이 잔뜩 담긴 가죽 화살통을 꺼내 내밀었다. 화살촉이 제대로 박힌 것들이었다.
받아든 테사이아가 묵직한 무게감에 미소 짓는 사이.
“말씀드렸다시피, 두 분은 최소한으로만 싸우십시오. 저희가 앞장서겠습니다.”
마차와 나란히 걸으며 필립이 말했다. 그 옆으로 훌쩍 뛰어내린 메브가 양손검을 뽑아 들었다.
“돌파의 선봉은 내가 서는 게 맞다. 필립. 이안을 중심으로 쐐기 진형을 구축하자.”
“그럼 내가 좌익을 맡겠다.”
내뱉은 샬롯이, 홀로 멍하니 걸음을 옮기는 말의 앞다리를 도끼로 후려쳤다. 그대로 허물어진 말이 꿈틀댔다.
“그럼 내가 오른쪽에 설게. 주근깨, 뒤를 맡아 줘.”
“그러죠. 사실, 여기가 제일 저에게 걸맞은 자리이긴 합니다.”
화살통을 허리에 꽉 묶은 테사이아가 오른쪽에 서고, 필립이 검을 쥔 손목을 휘휘 돌리며 뒤에 자리를 잡았다.
테사이아가 지붕 위에 선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이안. 여기 중심으로 내려와.”
“이번엔 내가 선택권이 없군.”
내뱉은 이안이 진영 중앙의 빈 공간으로 뛰어내렸다.
“……!?”
그의 눈이 커진 건, 발과 무릎이 땅에 닿은 순간이었다.
파편이 시야가 흔들릴 정도로 고동치더니, 혼돈력을 일제히 토해낸 것이다. 전신의 혈관이 보랏빛으로 물들고, 뒤이어 눈앞도 그렇게 됐다. 검을 떨어뜨린 이안의 손바닥이 절로 땅에 닿았다.
“이안-?!”
이어진 테사이아의 외침이 늘어졌다. 시간이 한없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감각.
그의 전신에서 터져 나온 혼돈력이 동심원을 그리며 번졌다.
그 한복판, 이안의 시야가 다시 밝아졌다. 흑백으로 반전된 세상. 보랏빛 혼돈력의 파장이 주위를 흑백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새하얀 대지 아래, 혈관 다발처럼 뻗어 나가는 자줏빛 그림자가 선명해졌다. 모든 게 색을 잃은 가운데 보라색과 자주색만이 선명했다.
타락자만이 인식할 수 있을,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던 이면.
‘이게 파편이 공명한 이유였나…?’
이안은 파편이 날뛰기 시작한 이래 땅에 발을 디딘 적이 한 번도 없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대부분은 마차 지붕에서. 그게 아니라도 말 안장이나 내부에서만 시간을 보내지 않았던가.
게임에서 이건, 탈 것에서 내린 순간 시작되는 이벤트였던 게 분명했다. 어쩌면 본래는 그 산길에 접어든 순간 겪었어야 했던 걸지도 몰랐다.
눈앞으로 퀘스트 창이 이어졌다.
잠식.
거절할 수도 있는 선택 퀘스트였다.
‘타락자 전용 퀘…?’
설명은 한 줄에 보상도 하나였다.
능력치에 따른, 혼돈의 주도권.
게임에선 수락을 누르기만 해도 알아서 진행되던 퀘스트이리라 유추하는 건, 이제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잠깐의 갈등이 뒤를 이었다. 선택 퀘스트인 이유가 있을 테니까. 물론, 그저 잠깐의 망설임일 뿐이었다. 거절한다면 아무런 소득도 없이 혼돈력만 소모한 셈이 될 터였다.
“혼돈이여… 순환의… 합일을….”
늘어진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속삭임을 귀에 담으며, 이안은 퀘스트를 수락했다.
슈확-
동시에 세상을 물들이며 번지던 혼돈력이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이안의 의식도 함께 빨려 들어갔다. 시야가 새카맣게 물들었다.
‘…이럴 것 같더라니.’
물론, 그는 의식을 잃지 않았다.
그저 온몸이 엿가락처럼 늘어나며 끝없이 추락하는 듯한 감각에 휩싸인 채, 염려하던 상황이 펼쳐졌음에 잠시 탄식할 따름이었다.
그의 육체는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안은 일행들을 믿었다.
그들이라면 적어도, 그가 퀘스트를 완료하고 정신을 차릴 때까지는 충분히 버틸 수 있으리라.
물론, 그가 지금 느끼는 것과 달리 실제로는 찰나의 순간에 불과한 이벤트일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러면 좋겠지만… 아니라도 이미 낙장불입이야.’
이 선택 퀘스트의 완료 보상이, 위험을 감수한 가치가 있길 바랄 수밖에.
그때 모든 감각이 씻은 듯 사라졌다. 찰나의 고요. 다음 순간 이안의 시야가 밝아졌다.
새카만 어둠 한복판. 거대하게, 그리고 수없이 많은 갈래로 뻗어 나간 자주색 덩어리가 선명해졌다.
얽히고설킨 뿌리나 인간의 신경계를 형상화한듯한 광경이었다. 다음 순간, 그의 의식이 그 덩어리의 한 점으로 순식간에 빨려들어 갔다. 동시에 이안의 뇌리로 파노라마 같은 광경들이 펼쳐졌다.
여자. 남자. 아이. 개. 트롤. 고블린. 심지어 벌레의 기억과 의식이, 난잡하게 편집한 뮤직비디오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통합 의식…?’
이안은 비로소 이게 수많은 의식 세계가 이어 붙은 군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영혼이 서로 이어져 뒤엉켜 있는 것이다. 개별적인 경계가 모호해진 채로.
어지럽게 이어지는 기억들 사이로, 흐릿한 자줏빛이 아른거렸다. 그 너머에서 선명하고 또렷한 하나의 존재가 느껴졌다.
‘그때 그 놈이구나?’
수백 수천의 의식은 결국 저 존재로 이어지고 있었다. 하나로 뒤엉켜 종속된 게 분명했다. 그가 늪지의 원한을 부리듯이.
그 순간, 이안의 의식이 파노라마를 뚫고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자줏빛은 거대한 구멍이 되었고, 필름을 빨리 감은 것처럼 스쳐 지나가던 기억들은 곧 자줏빛 통로로 화해 주위로 펼쳐졌다.
저 너머의 존재가 그를 마주 본 건 바로 그때였다. 그것만으로도 이안의 의식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시야 주위로 보랏빛이 아른거렸다. 이안은 비로소, 자신의 의식이 혼돈의 파편이 토해낸 혼돈력에 담겨있음을 깨달았다.
잠식이라더니, 이런 의미였나?
-기다렸노라… 혼돈이여….
이안의 뇌리로 속삭임이 울려퍼졌다. 언어라 부를 수도 없는 사념이었지만, 더없이 또렷했다.
-우리는… 하나가 되리라…
누구 마음대로 하나가 돼?
이안이 씹어 뱉었다. 물론 그저 생각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나마도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수많은 기억이 담긴 의식들이 해일처럼 밀려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안은 반항할 수도 없이 휩쓸렸다. 온갖 것들의 기억과 속삭임, 생각, 소망과 염원이 그의 의식을 뒤덮었다.
‘이런… 시발…?’
이안은 이 물결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그의 영혼의 경계가 허물어져, 모든 것과 뒤섞이게 될 순간까지.
***
“나, 나리! 나리…?!”
필립이 다급하게 이안의 어깨를 흔들었다. 일행은 곧 전투가 시작되리란 것조차 잊고 이안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차에서 뛰어내린 이안이 보랏빛에 휩싸인 채 무너져 내렸으니까.
안개처럼 자욱하게 쏟아져 내린 보랏빛 덩어리는 땅속으로 꺼지듯 사라졌고, 남은 건 쓰러진 이안 뿐이었다.
그는 보라색으로 물든 눈을 반개한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눈동자를 뒤덮고 눈가까지 이어진 보랏빛 균열이 불길하게 아른거릴 뿐.
“비켜 봐…!”
샬롯과 눈빛을 교환하던 테사이아가 필립을 옆으로 밀쳐내며 다가 앉았다.
그녀가 이안의 눈 위에 자신의 손바닥을 덮었다.
눈 주위로 핏줄이 꿈틀대듯 돋아나고, 마력이 맺힌 녹색 눈동자가 허공을 훑었다.
“…헉!”
곧 소스라치게 놀란 테사이아가 손을 뗐다. 일행의 시선을 받으며, 그녀가 내뱉었다.
“심연…. 심연이 이안의 의식을 삼킨 것 같아….”
자세히 설명하라 다그치는 이는 없었다. 테사이아 조차 자신이 본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싸우고 있는 것이다.”
뒤이어 내뱉은 건, 안면 가리개를 올린 메브였다. 이안의 얼굴을 내려다 보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미 이안은 공허의 존재와 이어진 적이 있으니까. 놈이 다시 이안을 불러들인 거야. 이안은 아마도 지금, 심연 속에서 싸우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품은….”
잠시 멈칫한 메브가, 이윽고 내뱉었다.
“…혼돈으로.”
“루 솔라여….”
필립이 중얼댔다. 일행 중에 이안이 때때로 공허의 힘마저 부리곤 한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이는 없었다.
그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어둠이 이렇게 이안을 집어 삼킨 건 다른 문제였다.
어쩌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들이 알던 이안은 사라진 후일지도 몰랐으니까.
“이안은 돌아올 거다.”
샬롯이 그르렁대듯 씹어 뱉었다. 메브와 필립을 돌아본 그녀가, 주황색 눈을 번뜩였다.
“그러니 허튼 생각들 하지 마.”
“저흰 그저 걱정을-”
“그르륵… 그으으….”
“그워어어어-”
사방에서 번진 고막을 긁는 듯한 소리가 필립의 목소리를 삼켰다.
번쩍 고개를 치켜든 일행이 저마다 주위를 살폈다.
다가오던 권속들이 멈춰선 채 발작하고 있었다. 고요하게 밀려들던 안개도 격류가 휘몰아치듯 출렁이고, 누런 안광들이 타올랐다. 몇몇은 서로 뒤엉켜 달라붙으며 변이하기 시작했다.
“한 가지는 확실해.”
내뱉은 테사이아가 다시 일행을 돌아보았다.
“그놈은 이안의 육체까지는 필요하지 않은 거야.”
“오히려 육체를 죽여야 일이 쉬워지겠지. 그러면 이안의 영혼이 돌아올 곳을 잃을 테니까.”
“…혹은, 원하는 걸 이미 얻었으니 필요 없는 것들은 정리할 생각이거나요.”
메브에 이어 필립이 첨언했다.
그사이 말없이 전투 도끼를 등에 묶어 멘 샬롯이, 이안의 몸을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그는 갑옷까지 걸친 채였지만, 샬롯은 무게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는 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유 따윈 알 바 아니야. 이안을 지켜야 돼. 돌아올 때까지.”
“그 정도로 끝내길 바라진 않을 거다.”
가라앉은 눈으로 내뱉은 메브가, 양손검을 늘어뜨리며 일어섰다.
샬롯을 마주 보며 그녀가 덧붙였다.
“내가 아는 이안이라면, 우리가 목표를 잊지 않길 바랄 거야.”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을 번갈아 바라본 테사이아가 내뱉었다.
“그럼 뭣들 하고 있어? 당장 출발해, 빨강 머리. 선봉에서 길을 뚫어.”
“기꺼이. 그러니까….”
철컥, 안면 가리개를 내리며, 메브가 몸을 돌렸다.
“뒤쳐지지 마라.”
다음 순간 그녀가 길을 따라 전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일행 모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 뒤를 따라 내달렸다.
곧이어 포위망도 다시 좁아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