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218
218화
메브는 이안에게 자신이 묻고자 하는 것들을 간단하게 털어 놓았다.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이안도 그녀가 어떤 것들에 대한 답을 얻고자 하는 지를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을 수도 있소. 그때는….”
“…본래 하려던 방식을 선택하겠다. 부담 가질 필요는 없다. 이안. 모든 일이 끝난 후에 단서를 수색하는 방법도 있으니. 썩지 않고 남은 게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겠지만.”
그 와중에도 이안은 이끼와 곰팡이, 온갖 색의 버섯으로 뒤덮인 내부를 거침없이 나아갔다.
독 포자는 일행에게 그리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하지만 장비들은 어느새 눈에 띄게 부식되고 있었다.
특히 메브의 갑옷이 변색이 심했다. 앞선 전투를 생각하면, 사실 아직도 멀쩡한 게 오히려 대단하다 할 수 있었다.
그녀가 진작부터 철저하게 관리해 둔 덕분이리라. 그게 아니었다면 이미 진작 삭아서 부서지거나 이음매가 분리되었을 터였다.
‘어쨌든, 이번 일이 끝나면 또 장비를 싹 다 바꾸긴 해야겠네.’
남은 돈을 다 털어도 부족할지도.
벌어도 벌어도 끝이 없다고 생각하며, 이안은 마침내 걸음을 멈췄다.
굳게 닫힌 대문 앞이었다.
이 너머가 예배당이었다. 공허의 힘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여기까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올 수 있었떤 건, 아마도 그가 만들어낸 혼란 덕분일 터였다.
저들은 깨진 순환을 다시 이어 붙이고, 날뛰는 이안의 권속들을 제압하려 총력을 기울이고 있으리라.
‘내가 도착하기 전까지 끝내고 싶겠지.’
이안의 권속들은 이 순간에도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남은 숫자가 적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가 지하에 도착할 때까지는 충분히 버틸 수 있으리라.
문에 손을 얹으며, 이안이 샬롯과 테사이아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해야하는 지는 알고 있겠지?”
“걱정마. 하수인인 척하고, 뒤에서 손 놓고 구경만 할게.”
이럴땐 참 믿음직스럽다니까.
테사이아의 대답에 코웃음으로 화답한 이안이, 메브를 돌아보았다.
“잊지 마시오. 내가 검을 건낼 때가….”
“…내가 나설 때.”
메브의 안면 가리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비로소 문을 열었다.
끼이이이-
원형을 그리며 펼쳐진 널찍한 예배당의 전경이 드러났다.
이안은 느긋하게 장내로 걸음을 옮겼다. 샬롯과 테사이아가 문 좌우에 멈춰선 채 고개를 숙이고, 메브가 그의 기사인 것처럼 뒤를 따랐다.
예배당은 밖과 다름없이 이끼와 곰팡이로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정 중앙에, 바닥을 뚫고 솟아오른 듯한 새카만 나무 둥치가 나선을 그리며 튀어나와 있었다. 끝부분은 누가 뚝 부러뜨린 것처럼 삐죽삐죽하게 잘린 채였다.
새카만 넝쿨들이 둥치 곳곳에서 뻗어 나와 주위를 칭칭 휘감았다.
넝쿨의 끝은, 둥치 위 삐죽삐죽한 가장자리에 둘러앉은 사제들의 로브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로브와 두건을 깊이 눌러쓴 채 웅크리고 있던 그들은, 이안이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것처럼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이안의 눈앞으로 퀘스트 창이 이어졌다.
불결한 거목의 제단.
‘불결한 거목이라….’
이안은 곧바로 놈들에게 달려들지 않고, 계획대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그리고는 아공간에서 날이 곧게 뻗은 양손 검을 꺼냈다. 그는 검의 날 끝을 땅에 찍고, 무게추에 왼팔을 걸쳤다.
당장은 싸울 생각이 없다는 의사 표현임과 동시에, 언제든 오른손으로 자루를 움켜 쥘 수 있는 자세였다.
푸스스….
그사이 둥치를 박찬 사제들은 허공을 유영하듯 날아올라, 허공에 넓게 산개하고 있었다. 총 여섯.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거목의 둥치를 감싼 넝쿨들이 표면을 비볐다.
나무껍질이 썩은 것처럼 바스러지며 거뭇한 분진을 흩날렸다.
분명 중독이나 감염 같은 상태 이상을 유발하는 분진일 터였다.
사제들은 정말 날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뱀처럼 길게 이어진 넝쿨들이 몸을 지탱하고 있어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살아 움직이는 넝쿨 정도는, 이제 전혀 놀라운 광경이 아니었다.
이안 쪽을 돌아보는 그들의 로브는, 어깨 뒷부분 양쪽이 부자연스럽게 솟아 있었다. 그 아래로 날개라도 감춰둔 것처럼.
‘뭐, 당연히 변이 됐겠지.’
곤충 다음은 뭐, 식물이냐?
심드렁하게 생각하며, 이안은 오른손을 뻗어 아공간에서 목함을 꺼냈다. 궐련을 한 대 꺼내 무는 손길이 한결 느긋해졌다.
어쨌든 사제들도 곧바로 그에게 달려들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허공에 길게 늘어선 그들의 두건 아래로, 이안을 바라보는 암녹색 안광이 일렁였다.
화륵-
아공간에 목함을 휙 던져 넣은 그가 손가락 사이에 불꽃을 피워냈다.
궐련 끝에 불이 붙었다. 주먹을 쥐어 불꽃을 흩어 버리면서, 이안이 천천히 궐련의 연기를 들이마셨다.
사제들을 훑는 그의 눈은, 어느새 선명한 보랏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사제들의 안광에 묘한 두려움과 경외가 일렁였다.
‘…이게 정말 통하네.’
이안은 내심 실소를 삼켰다.
하긴. 저것들도 그가 순환의 뿌리를 혼돈력으로 물들이는 것을 이미 보았을 터였다. 그를 고위 타락자, 혹은 그 이상의 존재로 여기는 건 오히려 당연했다.
심지어 순환이 깨지면서, 이제는 완벽한 불사도 아닌 상태가 되지 않았던가.
오른손 손가락 사이에 궐련을 끼운 이안이 연기를 토해내는 그때.
“위대한 혼돈의 화신이여….”
사제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잠긴 것처럼 낮고,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심지어 이제는 사도를 넘어 화신 취급이었다.
“주께서, 혼돈과 순환은 공존하는 관계이니 서로를 파괴할 이유가 없다 전하셨습니다. 합일을 거부하셨으니 더는 권하지 않을 것이며… 화신께서 깨뜨린 순환의 굴레에 대해서도 책임을 묻지 않으실 겁니다. 그러니 불필요한 희생은, 이만 멈추는 게 어떠신지요.”
얼씨구. 휴전 제안까지.
이안은 코웃음 대신 궐련의 연기를 한 모금 더 들이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게임에서도 캐릭터를 타락시키면, 특정 타락자 세력과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는 게 가능했을지도 몰랐다.
그들에게 서브 퀘스트 따위나 자잘한 도움들을 받는 것이다. 교단이나 황실과는 적대할 수밖에 없을 테니, 당연히 필요한 컨텐츠인지도 몰랐다.
어쨌건, 적어도 지금 상황은 게임에서는 없었던 게 분명했다. 추가적인 퀘스트가 발생하지는 않았으니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툭 내뱉은 이안이 사제들을 눈에 담았다. 두건 아래로 드러난 사제들의 나무 껌찔 같은 입가에 옅은 안도가 번지고 있었다.
“말씀하시지요.”
“누가 주르도 주교지?”
“……?”
사제들의 안광이 어리둥절하게 흔들렸다. 물론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대열의 중앙. 거목의 제단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사제가 고개를 숙였다.
“제가 한때 그리 불렸습니다.”
이제 보니, 내내 말하던 놈이 바로 주르도였다.
거참 뻔한 놈들이군.
“플린트 자작을 알고 있나?”
“…플린트? 지클 플린트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주르도가 의아한 말투로 되물었다.
이안이 궐련을 입에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라 드린 왕국, 델러햄의. 너와 아는 사이일 텐데.”
“그… 렇습니다. 한때 제가 그에게 길을 제시해 주곤 하였지요. 연락이 끊긴 지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만. 저를 만나러 오셨던 겁니까? 플린트의 소개로요?”
“어느 정도는 그런 셈이지.”
“그는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죽었다.”
“…결국, 그리되었군요.”
잠시 입술을 달싹인 주르도가 이윽고 탄식했다.
“그는 본래 병약하게 태어나, 어떤 병마라도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한 생명력을 손에 넣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길을 잘못 든 모양입니다. 병마와 고통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그 하찮은 놈을 끌어들인 건, 네 의지였나?”
이안이 말을 잘랐다. 얼굴도 모르는 놈의 사연 따윈 그가 알 바 아니었다. 주르도의 암녹색 안광으 마주 보며, 그가 덧붙였다.
“아니면 크랄렌 공작의 지시인가?”
등 뒤에서 메브가 순간 놀란 듯 짧은 숨결을 토해냈다.
본래는 그저 배후에 대해 물을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안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로 했다.
어쨌든 크랄렌 공작은 게임에서도 존재하던 보스가 아니던가.
주르도가 다시 한번 탄식했다.
“대체 어디까지 알고 계시는…. 혹, 그자를 죽이기 위해 서부에 오셨던 겁니까? 그 냉혈한이, 화신께도 죄를 지었던지요?”
“그런 셈이지. 그러니, 묻는 말에나 똑바로 대답해.”
“…플린트를 택한 것은 제 의지가 맞습니다. 하지만 공작께서 씨앗을 뿌리라 명하셨던 것도 사실이지요.”
“너를 이 길로 끌어들인 것도, 그자로군.”
“예. 나병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줄 방법을 찾던 제게,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어리석게도 전, 그에게 감사했습니다. 그의 관심은 그저 영생과 불멸뿐임을 알지도 못한 채.”
“그래서 그에게 버림받았나?”
이안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는 이미 주르도의 말을 반쯤은 귓등으로 흘리고 있었다.
이 늙은이는 쓸데없는 말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는 건 메브 한 사람으로 충분할 터였다.
대신 그는 지하로 내려갈 길을 찾고 있었다.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대각선 반대편의 벽면에, 지하로 이어지는 게 분명한 나선 계단의 입구가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벽의 기관 장치 뒤에 숨어 있었을 비밀 계단이었다. 본래는 유사시에 사제들과 주민들을 숨기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대피 공간이었을 터였다.
수도원은 옛 양식으로 지어져 있었으니까.
“보시다시피 저희는 눈을 떴고, 위대한 순환의 진리를 따랐습니다. 하지만 공작은 아니었지요. 이건 본인이 원하던 불멸이 아니라더군요. 오히려 실패작이라 매도했습니다.”
“실패작…? 아, 그래.”
조건 반사적으로 되묻던 이안이 이내 궐련의 연기를 뿜으며 피식댔다.
“자아가 무너질 수도 있고 온전히 통제할 수도 없으니 그런 거군.”
“역시… 이해하시는군요. 저는 진정한 의미의 해방은 본래 통제할 수 없는 것이라 말했습니다만.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의식이 실패할 것이라 여기기까지 했지요.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어리석게도, 그는 우리를 버렸으니.”
그놈의 해방은.
내심 콧방귀를 뀌면서도,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건 크랄렌 공작이 의회의 의원이란 추론이 다시금 유력해지는 순간이었다.
영생과 불멸은 놈들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였으니까. 흡혈 일족을 하수인으로 부린 것도, 불사의 비밀을 연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지금쯤, 생각이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라클리프의 의식도 무사히 성공한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혼돈의 화신이여…. 가장 작은 규모의 의식이었으나, 위대한 순환의 진리를 설파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공작이 저항한다 하더라도… 우리와 하나가 되는 건, 이제 시간문제일 것입니다.”
주르도가 낮게 웃었다. 사제들도 가래가 낀 듯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이안은 연기를 들이켜며, 게임 속 크랄렌 공작을 떠올렸다.
그가 이들을 살려둔 건, 혹시 모를 가능성을 남겨두기 위해서일 뿐이었을 터였다.
이들이 자신의 감시를 피해 의식을 준비하고, 끝내 성공시킬 줄은 몰랐으리라.
‘그런 주제에, 막상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나니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던 건가.’
아니면, 내가 겪었던 합일의 환영을 겪고 맛이 가버렸거나.
후자 쪽이 조금 더 유력해 보였다.
의회의 의원이라면 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을 테니, 공허의 존재의 눈에도 들었을 테니까.
그럼 이것들이 없다면, 공작의 정신 상태가 그가 기억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상태일 가능성도 높아진다는 뜻이었다.
이안이 서늘하게 미소 짓자, 웃음을 멈춘 주르도가 덧붙였다.
“하지만 만약 혼돈의 화신께서 원하시는 게 그자의 목숨이라면… 기꺼이 양보하겠습니다. 주께서도, 귀하의 앞길을 막지 않을 것이라 전하셨습니다.”
“막아도 돼.”
툭 덧붙인 이안이, 보랏빛 눈동자로 주르도를 마주 보았다.
“난 너희가 섬기는 그 고목에게도 볼일이 있으니까. 내 영혼을 삼키려 한 대가는 받아야지.”
주르도와 사제들이 일순간 굳어졌다. 이안이 검의 무게추에 얹고 있던 팔을 뗐다.
턱.
뒤로 기울어지는 검을, 두꺼운 강철 장갑이 받아들었다.
메브가 말없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는 사이, 주르도가 내뱉었다.
“하지만 혼돈의 화신이여… 약조하지 않으셨습니까? 원하는 답을 드리면-”
“그건 너희가 김칫국을 마신 거고.”
“김칫국…?”
“처음부터 그럴 생각 같은 건 없었단 얘기야. 게다가….”
궐련을 툭 땅에 떨어뜨려 짓밟으며, 이안이 사납게 미소 지었다.
“그건 사실, 너희도 마찬가지잖아?”
“……!”
주르도의 안광이 일렁였다.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이안의 권속들은 여전히 줄어들고 있었다.
거기다 발아래 꿈틀대는 혼돈력의 파장도 잦아들지 않았다. 심지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다시 묵직한 울림을 토해내기까지 했다.
이들이 그의 대화에 어울린 건, 그저 시간 벌이에 불과 했던 것이다.
주르도의 입술이 느릿느릿 말려 올라갔다.
“네놈…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구나… 하지만 이미-”
내뱉던 주르도의 목소리가 순간 잦아들었다.
솨아아….
이안의 옆에서 붉은빛이 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맙다, 이안.”
피처럼 끈적한 붉은 신성력을 두른 채, 양손 검을 늘어뜨린 메브가 걸음을 옮겼다.
“이제 여긴, 내게 맡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