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219
219화
그녀가 곧바로 달려가지 않는 건 적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서일 터였다. 그리고 그 의도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성기사가 또…? 그래… 이제야 알겠군….”
메브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주르도가 내뱉었다.
“변방을 떠도는 복수의 대행자가 있다더니… 혼돈의 하수인이었던가….”
메브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멈추지 않고 걸음을 옮기며, 늘어뜨리고 있던 검을 흉갑 옆까지 치켜들었을 뿐.
거목의 제단이 꿈틀대고, 넓게 포진한 사제들의 로브가 펄럭이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였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혼돈의 화신이여…! 이미 이 땅의 모든 것은 합일을 이뤘고, 위대한 순환의 굴레는 곧 다시 돌아가기 시작할지니…!”
그와 사제들이 걸치고 있던 로브가 일제히 벌어지며 찢어졌다.
놈들의 본모습이 드러났다.
접힌 날개처럼 보이던 건, 파리지옥 처럼 좌우로 벌어진 거대한 아가리였다. 끈적한 점액이 뒤덮여 번들거렸다. 사제들의 하반신은 그 아가리 사이에 박혀 있었는데, 가슴부터 복부까지 세로로 찢어진 거대한 구멍이 뚫린 채였다. 그 사이로 여러 가닥의 가늘고 긴 촉수가 뻗어나와 꿈틀댔다.
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름답지도 향기로울 것 같지도 않았지만.
복부에서 튀어나온 촉수들이 서로를 비빌 때마다 꽃가루 같은 암녹색 분진이 흩날렸다.
꾸득, 꾸드드득-
동시에 놈들과 이어진 거목의 제단도 변하고 있었다. 나무가 뒤엉킨듯한 줄기 사이가 벌어지더니, 거대하고 누런 눈알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자줏빛 핏줄을 머금은, 가로로 길게 누운 암녹색 동공이 느릿느릿 메브의 움직임을 좇았다.
차르륵… 철퍽…
제단 주위를 감싸던 넝쿨들이 풀어지면서 사제들의 주위로 일제히 치솟았다. 딱딱해 보이던 표면은 어느새 검은 점액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말미잘이냐고….’
몇 걸음 뒤로 물러나며, 이안이 내심 읊조렸다. 중요한 건 저 끔찍한 외형이 아니었다. 제단이 본모습을 드러내면서, 계단으로 이어진 길이 완전히 가려진 것이다. 게다가 메브가 저것들을 홀로 상대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물론, 메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놈들이 삽시간에 본모습을 드러내는 와중에도 그녀의 걸음은 전혀 느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전신에 맺힌 신성력은 더 붉고 진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우리는 신과 하나가 되었으니…! 엄정한 여신의 검이라 할지라도 두렵지 않으리라!”
홀로 제단 위까지 솟구친 주르도가 암녹색 안광을 흩뿌리며 소리쳤다. 동시에 사방으로 꿈틀대던 넝쿨들과 사제들이 일제히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후….”
메브의 전신에 신성력이 맹렬하게 끓어올랐다. 그녀가 사방에 검격을 토해내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콰과과과과-
수십의 붉은 궤적이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곧바로 사라지지 않고 뿜어져 나가면서 흩어지는 궤적이었다. 그것보다 검을 휘두르는 속도가 더 빨라서, 붉은 막이 그녀의 주위를 감싸고 피어오른 것처럼 보였다.
콰지지지직-
밀려들던 것들이 거꾸로 그 붉은 궤적의 폭풍에 휩쓸렸다. 앞에 걸리는 모든 것을 찢어 발기는 폭풍이었다. 제멋대로 토막 난 넝쿨과 사제들의 조각이 사방에 흩날렸다. 놈들은 신성력에 타들어 가는 것보다 빠르게 재가 되어 흩날렸다.
콰과과과과과-
메브는 멈추지 않았다.
그저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두르며 밀려드는 모든 것들을 썰어버렸다. 때때로 잘려나가고 남은 단면이 빈틈을 비집고 그녀의 갑옷을 후려치고 지나갔지만, 그녀의 전진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래. 전력을 다하면 저랬었지.’
이안은 내심 감탄했다. 과거 기사 클래스를 선택해야 했다고 몇 번이나 탄식하게 만들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아니, 그때보다도 더 강해진 것 같았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복수의 사도가 아니라 복수의 화신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하긴. 게임이었다면 레벨 업을 몇 번이나 했을 전투들을 치러 왔는데. 격이 높아졌다 해도 이상하지 않지.’
게다가 그녀는 이성을 잃은 것 같지도 않았다. 목표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녀는 거목의 제단에서 조금 어긋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벽면의 계단 입구와 제단 사이를 가로막는 방향이었다.
이안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그녀 역시 계단의 위치를 눈에 담아 뒀던 게 분명했다.
콰지직-
휘몰아치는 넝쿨과 사제들의 숫자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아직 반대편의 넝쿨과 사제들이 남아 있었지만, 놈들은 그녀에게 닿을 거리가 아니었다.
조금 놀란 듯 그녀를 지켜보던 주르도가 양팔을 치켜들었다.
“제법이구나… 하지만 위대한 순환의 기적은… 이제부터 시작이니….”
솨아아아-
제단의 눈알에 돋은 자주색 실핏줄들이 일렁였다. 동시에 잘려나갔던 넝쿨들이 다시 꾸득대는 소리를 내며 돋아났다. 몇몇 넝쿨 끝에서는 시든 꽃봉오리 같은 검은 덩어리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저 안에는 아마도 순환의 사제들이 들어 있을 터였다.
“후우… 후우….”
걸음을 멈춘 메브가 제단 쪽을 돌아본 건 그때였다.
검을 고쳐 쥔 그녀가 자루를 머리 위로 비스듬하게 치켜들며 자세를 다잡았다. 전신의 신성력은 더없이 짙어져서, 피를 뒤집어쓴 것처럼 보였다. 뚝뚝 흘러내리는 신성력이 주위에 자욱한 독을 중화하며 붉은 수증기를 토해냈다.
하지만 그녀를 내려다보는 주르도의 얼굴에는 여전히 여유가 맺혀 있었다.
정말 엄정한 여신의 화신이라 해도 믿을 만한 전투력이었지만, 결국은 인간에 불과했다. 숨결은 벌써 거칠어졌고, 그녀의 갑옷 역시 곳곳이 깨지고 구겨졌다.
무한한 재생으로 말미암은 공세를 영원히 버텨낼 수는 없으리라.
“……!”
주르도의 눈매가 꿈틀댄 건 바로 그때였다. 어느새 달리기 시작한 이안이 그녀의 뒤를 지나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르도의 시선이 비로소 그의 경로 끝, 벽면에 뚫린 계단의 입구로 향했다.
꾸드드드득-
제단 옆면에 돋아난 눈동자가 엄청난 속도로 옆으로 돌아왔다. 동시에 넝쿨들의 재생이 빨라졌다. 눈동자 한복판에 공허의 마력이 빠른 속도로 응집됐다.
“쉽게 주 앞에 발을 들일 수는-”
푸화악-!
내뱉던 주르도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거대한 붉은 섬광이 터져 나오더니, 메브가 토해낸 거대한 붉은 궤적이 제단의 눈알을 휩쓸고 지나간 것이다. 잘려나간 눈알이 고름을 토해내며 터져나갔다.
“—-!”
뇌리를 헤집는 강대한 사념에, 주르도를 비롯한 사제들이 괴성을 내질렀다. 넝쿨들이 발작하듯 뒤흔들렸다.
“어딜 보는 거지…?”
검을 내리친 자세 그대로, 메브가 내뱉었다. 차분한 음성. 일순간 막대한 양의 신성력을 토해낸 듯, 전신에 맺힌 붉은 신성력만이 흐릿하게 옅어진 채였다.
“네… 이년…!”
주르도가 절규를 멈추고 씹어뱉은 건, 터져나간 눈알이 부글대며 재생하기 시작한 때였다.
불과 몇 초였지만, 이안이 계단 입구에 도착하게 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계단 앞에서 멈칫한 이안이 메브를 돌아보았다. 그가 휙, 그녀에게 무언가를 내던졌다. 평범한 길이의 장검이었다.
메브는 왼손만 내뻗어 날아드는 검을 낚아챘다.
이안이 다시 몸을 돌리는 사이, 그녀가 자세를 다잡았다.
기다란 양손 검을 오른손에, 그보다 짧은 장검을 왼손에 쥔 채 서로 날을 교차한 형태였다.
“그렇게 불안한가?”
메브가 덤덤하게 내뱉었다. 이안에게 배운,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도발이었다.
“그럴리가… 그저 신의 정원이 더럽혀지길 원치 않았을 뿐….”
주르도의 표정이 미소로 일그러졌다.
“네년을 정원의 거름으로 삼아 신께 용서를 빌어야겠군….”
그가 양팔을 치켜들었다. 전보다 더 길고 거대하게 돋아난 넝쿨과 사제들이, 일제히 뿜어져 나갔다.
메브의 두 자루 검이 무수한 궤적의 폭풍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
이안은 지하로 이어진 나선 계단을 멈추지 않고 내려갔다.
‘저것들, 게임에서도 못 죽이는 놈들이었을 것 같은데.’
물론 그의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들이 멋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아마 게임에서도, 저 순환의 사제들은 죽이는 게 아니라 무력화한 후에 지나쳐야 하는 놈들이었을 터였다. 죽여야 되는 줄 알고 반복적으로 도전하게 만드는 게 제작자의 목적이었겠지.
‘그렇게 내려가면, 불결한 거목과 저것들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겠고.’
정말이지 개 같이 어렵고 까다로운 전투가 되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메브가 있는 이상, 사제들이 지하로 따라 내려오지는 못할 테니까.
놈의 본체이기도 할 제단을 무방비 상태로 방치할 수는 없을 터였다.
물론 시간이 넉넉할 것 같지는 않았다.
메브의 체력이 떨어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물론 그녀는 피를 흘릴수록 강해지는 데다, 샬롯과 테사이아도 합류하게 되겠지만. 유예 기간이 조금 늘어나는 정도에 불과할 터였다.
거기다 순환의 굴레도 곧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다지 않던가.
‘…그러니까, 수단과 방법을 따질 때가 아니야.’
어느새 그의 손에는 세번째 사도의 흑검이 들려 있었다.
이안의 몸속에 꿈틀대는 강대한 혼돈력을 느낀 듯, 녀석이 낮은 울음을 토해냈다.
어쩌면 점점 더 짙어지는 어둠 때문일지도 몰랐다. 계단은 보기보다 훨씬 더 깊은 지하로 이어지고 있었다. 공간이 뒤틀리고 왜곡된 게 분명했다. 적어도 이 아래는 신의 시선이 닿지 않는 완전한 마경이리란 의미였다.
하지만 그 사실이 평소 같은 페널티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
심상 저 깊은 곳에서 꿈틀대는 공허의 힘을, 신들을 신경 쓰지 않고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이안의 눈동자는 어느새 흰자위까지 전부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허물을 벗은 것처럼 선명해지는 감각이 계단의 끝이 멀지 않았음을 알렸다.
곧 이안의 눈동자 한복판에 불그스름한 빛이 감돌며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손아귀의 흑검이 또 한 번 낮은 울림을 토해냈다. 지금까지와 달리 두려움이 담긴 떨림이었다.
이안의 입가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그의 심상은 어느새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던 이면까지 그려내고 있었다. 저 아래에 핏줄처럼 번진 자주색 순환의 뿌리들이 선명해졌다. 그 한복판에 높다랗게 솟은 불결한 거목도. 이름에 걸맞은 거대한 크기였다.
한쪽에는 보랏빛의 뿌리도 선명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의 것이 된 잘려나간 혼돈의 뿌리였다.
자주색 뿌리들은 이 순간에도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대고 있었다. 놈에게 이어진 몇몇 굵은 마디에 심상치 않게 응축된 혼돈력이 이안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저건…?’
계단이 끝난 건 그때였다.
상념을 떨친 이안은,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문 너머로 이어진 지하 공간으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는 어느새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던 흑검을 앞으로 내뻗었다.
콰- 아아아아-
검날에서 샛노란 화염이 끝도 없이 토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안의 몸이 일순간 뒤로 흔들릴 정도의 엄청난 기세였다. 불길이 만들어내는 눈부신 섬광이 그의 시야마저 순간 하얗게 물들였다.
콰르르르르-
감상이나 탐색 따위는 처음부터 필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내부는 전부 놈의 소굴이었다. 가진 화력을 전부 퍼부어 시작부터 최대한 큰 피해를 입힐 생각이었다.
‘컷 씬 따위가 끼어들 틈도 없게.’
하얗게 물들었던 시야가 빠르게 되돌아왔다. 내뻗은 그의 검 끝에서는 아직도 화염 해일이 끝도 없이 토해져 나와 사방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이안은 해일이 멋대로 날뛰게 풀어 버렸다.
지옥불을 준비하지 않은 건, 이런 지하에서 사용했다간 그 여파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마력보다 혼돈력을 더 많이 퍼부어 시전한 마법이지 않던가.
힘이 다하기 전까진 절대 꺼지지 않는 불을 혼돈력으로 증폭해 사용했다간, 그도 함께 숯덩이가 되어 버릴 수도 있었다.
지금 사방을 불태우고 있는 화염 해일도 크게 달라 보이지는 않았지만.
쿠르르르르-
불바다에 뒤덮이고 있는 지하 공간의 전경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타락자들이 의식을 준비했을 지하실은, 용의 둥지처럼 거대한 지하 공동이 되어 있었다.
본래는 형형색색으로 빛났을 이끼와 곰팡이, 나무처럼 거대한 버섯들은 불길에 휩쓸려 매캐한 연기를 뿜으며 타들어 갔다.
‘질식해서 죽는 거 아니냐고….’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그 너머에 거대하게 솟은 거목의 둥치를 눈에 담았다.
여러 개의 나무가 뒤엉킨 듯한 놈의 줄기는 천장 너머까지 솟아 있었다. 저 끝부분이 예배당에서 본 제단이리라.
줄기에서 뻗어 나온 가지들은 허공을 층층이 뒤덮으며 수없이 뻗어 나갔다. 가장 높은 곳의 가지는 천장을 뒤덮고 있었다. 그것들은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대면서, 타르처럼 끈적한 점액을 곳곳에 뚝뚝 떨어뜨렸다.
‘저게 공격 수단 중 하나겠고….’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놈의 중심 줄기였다. 수많은 검은 뱀이 뒤엉킨 듯한 끈적한 줄기 사이사이로, 수백 개의 크고 작은 눈알들이 제멋대로 박혀 있었다.
염소의 그것처럼 가로로 길게 누운 암녹색 눈알들은, 장내를 엄청난 속도로 불태우는 화염 해일을 조금 놀란 듯 응시하는 중이었다.
이안이 들어오자마자 이런 공격을 퍼부으리란 건, 놈조차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고- 오- 오- 오-”
쉴새 없이 꿈틀대는 줄기 사이로, 뱃고동 소리 같은 괴성이 메아리쳤다.
눈앞으로 퀘스트 창이 이어졌다.
불결한 거목.
부패와 질병의 뿌리를 내린 거목이 다 자라기 전에 처치하라는 내용을 눈에 담은 이안이, 옅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게 덜 자란 거라고…?’
끝없이 뿜어져 나올 것 같던 불길이 잦아든 건 그때였다.
푸스스….
새빨갛게 달아오른 검날에서 잿빛 연기가 치솟았다.
…이러다 조만간 휘겠는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내뻗은 검을 내리지 않았다. 그는 이미 다음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