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224
224화
메브와 필립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서, 설마… 저 위대한…?”
더듬대는 필립을 바라보며,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교단의 성자이시니, 어쩌면 손쉽게 끝내주실지도 몰라.”
“루 솔라 맙소사…!”
필립이 헐떡대는 가운데, 짧게 침음한 메브가 내뱉었다.
“백금룡을 뵐 수 있다면 일생의 영광이긴 하겠으나… 그렇다 해도….”
“그렇게 해주십시오…!”
냉큼 끼어든 필립이 가슴팍에 손을 얹은 채 떠들어 댔다.
“심장이 터질 것 같군요. 위대한 백금룡을 뵙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분께 성기사로 인정받게 될지도 모른다니.”
“말했듯이, 안 될 수도 있어. 합당한 명분 없이는 세상사에 개입할 수 없는 분이니까. 어디까지나 시도만 해 보겠단 얘기다.”
그러니까 진정 좀 해라.
이안이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필립이 목이 떨어질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염려 마십시오. 전혀 실망하지 않을 겁니다. 뵙기만 해도 영광인걸요. 어렸을 때는, 혹시 제가 용의 아이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꿈꾼 적도 있었을 정도거든요.”
이안이 고개를 기울였다.
“용의 아이?”
“…용의 아이가 뭔지도 모르시는 겁니까?”
오히려 어리둥절한 표정이 된 필립이 되물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이자, 필립이 눈을 끔뻑이며 읊조렸다.
“참, 나리는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군요. 평소엔 그렇게 박학다식하시다가, 가끔씩 이렇게 어린아이도 아는 걸 모르실 때가 있으시니.”
그야, 파고들어야 알아낼 수 있는 설정 따위엔 관심도 없었으니까.
내심 읊조린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설명이나 해. 짧게.”
“일종의 전설 같은 겁니다. 과거 전쟁의 시대에는 고아가 많았으니까요.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 중에 착하고 똑똑한 아이는 백금룡이 거둬 가신단 얘기가 있었죠.”
필립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걸었다.
“그 아이는 세상 그 누구도 위치를 알지 못하는 용의 둥지로 가서, 따듯한 잠자리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살게 된다고요. 그리고 둥지를 관리하고 백금룡의 시중을 들며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된다는 겁니다. 평화롭고 행복하게.”
…평생 동굴에서 용 수발이나 들며 사는 게 행복할 것 같진 않은데.
생각하며 소리 없이 콧방귀를 뀐 이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시시한 얘기였군.”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저 같은 고아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누군가 지어낸 걸 겁니다. 뭐, 부려먹기 편하게 하려는 걸 수도 있겠고요. 착하고 똑똑한 아이가 되려면,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들어야 할 테니까.”
필립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본인의 과거를 돌아보며 짓는 것이리라.
생각이 많은 표정이 된 메브를 일별한 이안이 덧붙였다.
“어쨌든. 그 양반이 거절하면 그땐 중앙으로 가야 할 거다. 필립.”
필립의 미소가 곧바로 사그라들었다. 그가 시무룩하게 웅얼댔다.
“나리까지 왜 그러십니까….”
“경의 말이 옳으니까.”
메브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그가 자신의 뜻에 힘을 실어 주리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피식한 이안이 말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거다. 네가 교단의 성기사로 인정받는 건, 반드시 해야 할 첫 단추지.”
“…….”
“그 뒤엔 너 하기 나름이야. 혹시 모르지. 몇 개의 단추를 더 끼우다 보면, 변방으로 가게 될 지도.”
“……!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필립이 홱 그를 바라보았다.
”알다시피 변방은 혼란스럽고, 유능한 성기사의 도움을 필요로 할 테니까.“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첨언했다.
”물론 노력과 운이 따라야겠지만. 그렇게만 된다면 경도 어쩔 수 없으시겠지. 안 그렇소?“
“…그래. 그렇겠지.”
뭔가 생각하듯 허공을 바라보던 메브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찬란한 여신께서 인도하신 길을, 내가 어찌 막겠느냐.”
말투를 보아하니, 필립이 다시 변방으로 가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으리라 여기는 게 분명했다.
당연한 생각이었다. 자유 기사가 드문 시대였다. 자유 기사 출신 성기사는 더더욱 드물 수밖에 없었다.
분명 많은 이들이 필립을 주목하리라. 교단이든 황실이든, 제국의 유력한 귀족 가문이든.
그들 모두의 손길을 뿌리치는 건, 여러모로 쉽지 않은 일일 터였다.물론, 필립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땐 종자가 아니라 기사 후배로 동행할 수 있겠군요. 어쩌면, 새로운 종자들과 함께요.”
“벌써 종자를 부려먹을 생각부터 하다니.”
이안이 코웃음을 흘렸다. 필립이 아랑곳하지 않고 미소 지었다.
“그래도 이왕이면 백금룡께서 임명해 주시면 좋겠군요. 여러모로 편해질 테니 말입니다.”
“두고 보면 알겠지. 의외로 수다스러운 양반이니까, 하다못해 뭔가 도움 될 말이라도 해 주실 거다.”
“그럼 우리는?”
옆에서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툭 튀어나온 건 그때였다.
부스스 몸을 일으킨 그녀가 덧붙였다.
“빨강 머리랑 주근깨는 데리고 가면서, 우린 두고 가려는 거 아니지? 이안?”
쟨 또 언제부터 깨어 있었담.
테사이아를 돌아본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너는 샬롯과 함께 떠나야지. 이미 얘기해 뒀으니까, 자세한 얘기는 그 녀석에게 들어라.”
“아니, 그렇게 중요한 얘길 왜 날 빼놓고 해? 나도 백금룡 만나고 싶단 말야. 우리가 본 용이라곤, 북부의 그 너덜너덜한 뼈다귀가 전부라고.”
입술을 비죽이며 내뱉은 테사이아가 검지를 치켜들었다.
“게다가 혹시 알아? 백금룡이 내 진짜 이름을 알게 해 줄지?”
“그 양반이 무슨 수로….”
내뱉던 이안이 멈칫했다. 아르케아스라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주 오래 사셨고 그동안 많은 요정을 보셨을 테니. 도움을 주실 지도요. 어쩌면, 마법을 부려서 기억을 되살려 줄지도 모르고요. 용의 마법은 신의 기적에 버금간다지 않습니까.”
필립이 덧붙였다. 테사이아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말 잘했어, 주근깨. 역시 성기사는 다르네. 물론, 내가 알고 싶은 건 이름뿐이지만 말야. 게다가 얘도 뭔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을 거라고. 안 그래, 야옹아? …야옹아?”
옆에 누운 샬롯을 돌아본 테사이아가, 이내 한쪽 눈썹을 말아 올렸다.
“얜 이렇게 시끄러운데 어떻게 깨지도 않고 자는 거야? 일어나 봐.”
“음…? 뭐지? 적인가?”
테사이아가 팔을 흔들자, 샬롯이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이젠 깨우기까지 하다니.
헛웃음을 짓는 이안을 돌아보며,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이안이 빨강 머리랑 주근깨만 데리고 백금룡을 만날 거래. 너랑 나는 먼저 보내고. 이게 말이 돼?”
“그래…? 그러면 그렇게 해야지.”
“그렇게 해야지는 무슨 그렇게 해야지야. 넌 궁금하지도 않아? 용과 대화해 볼 수 있는 기회인데?”
“…고작 이런 말이나 하려고 깨우다니.”
어이가 없다는 듯 가르릉댄 샬롯이 내뱉었다.
“백금룡과 싸울 기회라면 절대 빠지지 않겠지만, 그게 아니면 아무래도 상관없어. 이안이 하라는 대로 할 거다.”
“정신 나간 야옹이 같으니…. 루 솔라의 신도라며, 교단의 성자가 궁금하지도 않아?”
“굳이 왜 그래야 하지? 물론 위대한 분이시지만, 내가 섬기는 건 찬란한 여신이지 백금룡이 아니야.”
“그럼 넌 빠지든가. 난 어떻게 해서든 이안을 설득해서-”
“…안 된다고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이안이 말을 잘랐다. 약이 오른 표정으로 샬롯을 노려보던 테사이아가 반색하며 고개를 돌렸다.
“정말? 그럼 만나게 해 줄 거야?”
“예의 바르게 군다면. 어쨌건, 내가 데려가는 거니까.”
“당연하지. 걱정 마. 텐시아의 얼굴로 만날 테니까. 아니, 그건 너무 오만해 보이나? 어쨌든. 공손하게 굴게.”
테사이아가 방긋 미소 지었다. 메브와 필립도 어느새 옅은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이안이 술병을 들며 중얼댔다.
“안 그래도 물어볼 게 잔뜩이었는데. 날이 새도록 붙잡혀 있게 생겼군….”
이미 백금룡을 다시 만나면, 그를 살뜰하게 써먹을 생각이었던 그였다. 술을 마시며 다시 한번 생각들을 곱씹은 그가, 이윽고 덧붙였다.
“공작이 의원이면 좋겠군. 그게 아니면, 지금 한 얘기는 다 의미 없어질 테니까.”
“…동감이다.”
그에게 술병을 받아들며 메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필립과 테사이아는 그들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 표정으로 백금룡에 대해 떠들어댔다.
늘어지게 하품을 한 샬롯이 덧붙였다.
“그런데 왜 다들 일어나 있지? 내가 늦잠을 잔 건가?”
“그건 아니야. 더 자라. 정확한 시간은 모르겠지만, 이제 막 해가 뜬 것 같으니까.”
“그래. 더 자, 야옹아. 네가 세 번째였잖아.”
일어난 테사이아가 모닥불 옆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필립도 자연스럽게 이안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모닥불은 이제 불씨만 남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일행을 돌아보며 입맛을 다신 샬롯이 일어섰다.
“나도 충분해. 땔감이나 더 구해와야겠군.”
“일어날 거면, 그냥 여기 앉아라.”
이안이 빈자리를 턱짓했다.
“식사를 끝내고 떠날 채비를 하는 게 나을 것 같으니까.”
“…아. 그렇군.”
샬롯이 머쓱하게 모닥불 앞으로 다가왔다. 필립이 그녀에게 육포를 건넸다. 곧, 느긋한 식사가 시작됐다.
***
일행은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식사를 빨리 끝낸 덕분에 채비도 가장 먼저 끝낸 이안이 폐가 밖으로 나섰다.
강철 부츠가 발에 잘 맞는지 확인할 생각이었다.
이제부터는 걸어서 이동해야 하니 발에 딱 맞게 조절해 둘 필요가 있었다.
신발만 새 물건인 건 아니었다.
사실 그가 걸친 장비가 전부 그랬다. 혹시 몰라서 사슬 갑옷과 판급 흉갑, 각반 따위도 준비해 온 게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듬성듬성한 장비를 걸치게 되었을 터였다. 필립과 테사이아처럼.
“흠….”
다행히 신발은 발에 잘 맞았다.
폐허 주위를 한 바퀴 돈 이안은, 어느새 나와 있던 메브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구겨지고 부서진 갑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다가오는 이안을 돌아본 그녀가 내뱉었다.
“밤새, 또 분위기가 바뀌었군.”
도시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녀 옆에 멈춰선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변방 도시라 해도 믿겠소.”
메브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래. 변방의 도시들도 이런 상태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어.”
가만 보면, 은근히 사서 걱정하는 스타일이라니까.
메브를 돌아보며 내심 혀를 찬 이안이, 이내 입을 열었다.
“모두가 죽어가는 건 아닐 것이오.”
“……?”
“살아남기 위해 싸우거나 힘을 합치는 자들이 있을 테니까. 인간은 더없이 나약하지만, 동시에 그 무엇보다도 강하잖소?”
“…그래. 검은 벽의 광기가 변방 전체를 물들였다 해도, 이겨내고 살아남은 이들이 있겠지. 영원할 수는 없겠지만.”
메브가 읊조렸다. 보아하니 정말, 복수가 끝나면 곧바로 변방으로 달려가려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어떤 죄책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지, 이안은 짐작할 수도 없었다.
그저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서일 뿐. 그는 어떤 정의감이나 사명감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의 내면 깊숙한 곳 어딘가에는, 아직도 박봉에 시달리던 말단 사회인의 본모습이 남아 있었다.
갈수록 작아지고, 옅어져 가고 있긴 했지만.
“내게 줘야 할 의뢰비가 남아 있다는 것만 잊지 마시오.”
이안이 툭 내뱉었다. 메브의 시선을 받은 그가, 다시 눈길을 돌리며 덧붙였다.
“무모한 짓은 하지 마시란 얘기요. 아마 그때는, 필립도 곁에 없을 것 같으니.”
눈을 깜빡인 것도 잠시.
메브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그래. 그럴게. 걱정해 줘서 고마워.”
“걱정은 무슨….”
“그런데 말입니다.”
이안이 중얼댈 찰나, 밖으로 성큼성큼 나온 필립이 끼어들었다. 그가 이안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백금룡은 어떻게 만나실 겁니까?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정작 여쭤보질 않아서요. 그분은 대부분의 시간을 둥지에서 잠든 채로 보낸다고 들었거든요.”
“그건 네가 알 바 아니야.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넌 들뜨지 말고 긴장이나 유지해.”
“걱정 마십쇼. 위대한 분을 만날 기회를 앞두고 죽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 말, 지키거라. 다시는 먼저 목숨을 던지려 하지 마.”
메브가 엄하게 덧붙였다. 필립이 헤실대며 네, 하고 대답할 찰나.
“가자. 이안. 우리 준비 다 됐어.”
샬롯과 테사이아도 밖으로 나왔다.
이안은 테사이아가 들고나온 봉인함과 샬롯의 전투 도끼, 필립이 등에 멘 짐가방까지 전부 아공간에 넣었다.
그것만으로도 다시 아공간이 꽉 차서 샬롯이 든 가방은 그녀가 짊어져야 했다.
“제가 들어도 되는데요. 샬롯은 아직 몸이 온전하지 않으시잖습니까?”
“충분해. 이게 도끼보다 가볍다.”
“그럼 날 업을래, 주근깨? 걷기 싫은데.”
이안이 앞장서 반대편 성문으로 걸음을 옮기는 가운데, 필립과 샬롯, 테사이아가 주절주절 떠들어 댔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는 불과 몇 분도 이어지지 못했다.
“……?”
이안이 걸음을 멈췄기 때문이다.
성문이 그리 멀지 않은 대로 한복판이었다.
필립과 메브가 어리둥절하게 그를 바라보는 사이, 같은 눈빛이 된 테사이아와 샬롯이 성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미간을 좁힌 필립이 테사이아를 돌아보았다.
“뭔데요?”
“말발굽 소리야. 두 마리 같아.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어.”
“예…? 하지만… 저쪽에서 온다는 건, 그 정신 나간 산을 지나쳤다는 얘기일 텐데요.”
그제야 성문 쪽을 돌아보며, 필립이 덧붙였다.
“예사 인물들은 아니겠군요. 마물이야 죄다 여기로 몰려왔다 쳐도, 산의 독기는 그대로였을 텐데. 말까지 살려서 타고 온 걸 보면 말입니다.”
“그 비법은 나도 궁금한데.”
내뱉으며 검의 무게추에 손바닥을 얹은 이안이, 가까워지는 말발굽 소리를 귀에 담으며 덧붙였다.
“곧 알게 되겠지. 도시를 구하러 달려온 자들인지. 타락자의 끄나풀인지.”
메브가 고개를 끄덕이며 너덜너덜한 투구를 눌러썼다. 일행이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대열을 갖추는 사이.
다각- 다각-
웅얼대는 듯한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말발굽 소리가 성문으로 다가왔다. 어느새 속도를 줄인 채였다.
곧 열린 성문 너머로 은빛 마갑을 두른 두 마리의 백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위에 탄 기수들의 모습을 확인한 필립의 눈이, 이내 커졌다.
“저건… 대교회의…?”
그들은 망토처럼 몸을 완전히 가리는, 끝이 너덜너덜한 로브를 뒤집어 쓴 채였다.
하지만 그 한복판을 가르며 새겨진 황금빛 원 만큼은, 홀로 빛을 받은 것처럼 선명하게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