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225
225화
그들이 걸친 로브의 소매는 아주 길고 품이 넓어서, 고삐를 쥔 손 위까지 덮고 있었다.
거기다 둘 다 왼손으로만 고삐를 쥔 채였다. 반대쪽 소매는 팔이 들어 있지 않은 것처럼 축 처진 채였다.
“대교회의 성기사들이로군….”
메브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저들이 로브 안에 갑옷을 걸치고 있음을, 오른손은 언제든 검을 뽑아 들 수 있게 안으로 넣어 둔 것임을 눈치채서였다.
저 로브는 생긴 것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도 망토에 소매를 붙여 놓은 것에 가까웠다.
두건을 깊이 눌러 쓴 그들을 바라보며, 메브가 덧붙였다.
“서부의 소문을 듣고 달려오기라도 한 것인가?”
그녀를 돌아본 필립이 옅게 미소 지었다.
“잘됐군요. 도움을 받을 수 있겠어요. 우리가 이곳의 의식을 이미 저지했다는 걸 알리면-”
“그렇다기엔, 분위기가 이상한데.”
샬롯이 말을 잘랐다. 그녀의 주황색 눈동자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필립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이 도시 한복판에 있으면 누구라도 우릴 수상하게 여길 겁니다. 오해야 풀면 그만이죠. 안 그렇습니까, 나리? …나리?”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필립이 비로소 반대편을 돌아보았다.
이안 역시, 우묵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저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
필립이 고개를 갸웃할 찰나.
다각, 다각-
잠시 멈췄던 기수 중 하나가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섰다.
다른 하나는 여전히 성문 앞에 멈춰 선 채였다.
기수는 몇 걸음을 더 앞으로 나오고서야 멈춰 섰다. 여전히 일행과는 꽤나 거리를 둔 상태였다.
깊이 눌러쓴 두건 아래에서, 낮고 굵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이나스가의 원로이신가?”
“……!”
“……?!”
이안을 제외한 모두가 눈동자를 굴려 테사이아 쪽을 바라보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첫마디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일행들은 물론 테사이아도 당황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곧바로 텐시아 아이나스의 얼굴이 된 그녀가, 앞으로 느긋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역시, 드네로브를 거쳐 온 모양입니다.”
그사이 간신히 놀람을 수습한 듯 눈을 깜빡인 필립이 속삭였다.
“역시, 우리를 조사하기 위해 따라온 것인가….”
메브가 나지막이 덧붙였다. 티 나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지나친 테사이아가, 이안에게도 슬쩍 눈빛을 보냈다.
“…….”
이안은 별다른 반응 없이, 두건을 눌러쓴 성기사만을 눈에 담았다.
그의 육감도 샬롯과 마찬가지로 위험을 속삭이고 있었다.
적어도 저들이 좋은 의도로 따라온 것은 아니리라고.
하지만 어쨌든 상대는 교단의 성기사였다. 그 정체와 따라온 이유가 명확해지기 전까지는, 먼저 적대할 이유가 없었다.
“순서가 잘못된 것 같군요.”
멈춰 선 테사이아가 입을 연 건 그때였다.
“대뜸 길을 막고 이름부터 부르는 건, 범죄자들이나 할 행동이죠.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선 분들은 대교회의 망토를 걸치고 계시군요.”
차분하고 냉랭한, 텐시아 아이나스의 말투. 성기사를 마주 보며, 그녀가 덧붙였다.
“그러니 용무가 있다면 먼저 이름과 신분을 밝히고, 대화를 청하도록 하세요.”
잠깐의 서늘한 침묵이 이어졌다.
곧 두건 아래에서 짧고 낮은 웃음이 번졌다.
“과연… 원로 요정다운 말씀이시군.”
중년 성기사가 말에서 내렸다.
뒤에서 대기하던 또 다른 성기사도 거의 동시에 말 아래로 내려왔다. 그러나 앞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몇 걸음 더 앞으로 나온 건, 이번에도 중년 성기사뿐이었다.
그와 일행 사이에는 여전히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그가 타고 온 백마는, 홀로 몸을 돌려 온 길을 되돌아갔다. 아주 훈련이 잘 된 말인 모양이었다.
“…….”
멈춰 선 중년 성기사가 왼팔을 들었다. 품이 넓고 긴 소매 아래로 육중한 강철 장갑이 드러났다.
두건을 천천히 젖히면서, 중년 성기사가 입을 열었다.
“찬란한 여신의 사도이자 어둠을 밝히는 빛의 한 가닥. 정화대의 일원인 고티어라고 하오.”
고티어의 얼굴이 드러났다.
적당히 짧은 연갈색 머리칼. 마찬가지로 연갈색 수염을 기른 선 굵은 얼굴에는, 날카로운 것에 베이고 찔린 흉터들이 가득했다.
한쪽 눈은 선명한 갈색인 것에 반해, 반대쪽 눈은 검은자위가 하얗게 슬어 있었다.
눈이 먼 것이 분명했지만, 안대로 가리지도 않은 채였다.
“루 솔라 맙소사….”
하지만 필립이 탄식을 흘린 건, 그의 그런 흉측한 외모 때문이 아니었다.
“정화자….”
가장 신실한 성기사와 성전사, 사제들로 이루어져 있다 알려진 신의 엄벌.
가장 어두운 곳에 발을 들여 목숨을 불살라 빛을 밝힌다고 알려진 그들은, 동시에 온갖 흉흉한 소문의 주인공들이기도 했다.
타락자와 관련된 자들을 심문하고 처단하는 것도 그들의 역할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소문에 따르면, 그들은 어둠과 티끌만큼만 연관이 있어도 예외 없이 극형으로 다스린다 했다.
신의 엄벌에는 자비가 없으니까.
물론 필립은 소문을 전부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절반, 그 이하만 사실이더라도 그리 달라질 것은 없으리라.
“이 이상의 신분을 밝힐 수 없음을 이해하시오. 정화자는 본래, 정확한 소속과 출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철칙이니.”
고티어가 외눈으로 테사이아를 마주 보았다. 여상하게 턱 끝을 치켜든 테사이아가 내뱉었다.
“그래요, 고티어 경. 무슨 용무로 나를 찾았죠?”
고티어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귀공에게 가진 용무는 여기까지요. 귀공은 이정표일 뿐이니까. 우리는, 이안 호프 경을 찾고 있으니.”
일행들이 저마다 일순간 숨을 멈췄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이름이 또다시 튀어나온 것이다. 심지어 본명으로.
이안은 눈썹조차 까딱이지 않았다.
물론, 내심까지 그런 건 아니었다.
‘정화자가 나를, 왜?’
저들은 게임에서도 아주 위험한 던전에서나 가끔 마주칠 수 있던 자들이었다.
오로지 어둠을 빛으로 밝히는 것과 어둠의 잔재를 처단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던 자들.
물론 든든한 우군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저들 자체도 위험했다.
한순간에 타락자로 돌변하거나, 맹신자가 되어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덤벼들기도 했었으니까.
게다가 이미 그와 텐시아를 연결 짓기까지 했다니.
“잘못된 이정표를 쫓으셨군요.”
테사이아는 이번에도 당황한 티를 내지 않았다.
그저 태연하게 고개를 한번 갸웃했을 뿐이었다.
“나는 이안 호프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함께 하고 있지도 않고.”
“그래… 드네로브에서도 그러더군. 이안 호프라는 자는 없다고.”
예상했다는 듯, 고티어가 읊조렸다.
이안은 그제야 저들이 웨스트우드 백작에게서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그건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그를 쫓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고티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니 직접 신분을 확인해 보도록 하겠소. 귀공은 물론이고, 귀공의 부하들 모두들.”
“무례하군요. 경에게 그런 권리는 없을 텐데요. 교단의 권위를 앞세워 핍박이라도 하겠다는 건가요?”
테사이아가 되물었다. 고티어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아서, 오히려 삭막하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평소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은 그럴 권리가 있소. 귀공이 발을 들인 서부에 어둠이 내려앉았으니.”
폐허가 된 도시로 시선을 옮기며, 고티어가 말을 이었다.
“아이나스가의 원로가 서부에 발을 들인 이유는 무엇이며, 드네로브의 타락자들이 왜 때마침 준동한 것인지. 평화롭던 테센이 어쩌다 이런 몰골이 되었으며, 귀공이 또 그 한복판에 있는 것이 정말 우연의 일치인지까지.”
고티어의 시선이 다시 테사이아에게로 되돌아왔다.
“우리는 교단의 이름으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심문할 권리가 있소. 귀공은 우리의 조사에 응할 의무가 있으시고. 귀공과 귀공의 가문이 여전히 찬란한 여신을 섬기는 충실한 신도라면 말이오.”
“…….”
테사이아의 눈매가 꿈틀댔다. 어느새 그녀의 눈가에 핏줄들이 꿈틀대고 있었다.
적어도 이건 연기가 아닌 게 분명했다. 빠져나갈 구멍이 곧바로 떠오르지 않는 것이리라.
“…이안.”
이안을 돌아본 샬롯이 속삭인 건 그때였다. 아무래도 자신이 나서야 할 것 같다는 의미였다.
이안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저들이 다 알면서도 장단을 맞춰 주고 있다는 걸 안 이상, 계속 정체를 숨기는 건 의미가 없었다.
“물러나십시오.”
샬롯이 앞으로 나서며 내뱉었다. 테사이아가 휙 몸을 돌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콧잔등을 씰룩이며, 그녀가 성큼성큼 일행에게로 다가왔다.
이안과 눈이 마주친 그녀가 속삭였다.
“미안, 이안. 도움이 안 됐네.”
“아니. 충분해.”
이안이 내뱉는 그때, 고티어를 노려보던 샬롯이 멈춰 섰다.
그녀의 넓은 어깨가 일순간 부풀듯 커졌다.
“당장 합당한 예를 갖추시오! 여기 계신 이분은 북부의 초인이자, 저 위대한 백금룡의 유일하며 공식적인 대행자인 이안 호프 경이시니!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신분을 숨기셨으나, 알고도 지금 같은 무례를 계속 저지른다면 신성 모독으로 간주할 것이오!”
그녀가 숨소리조차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또랑또랑하게 내뱉었다.
하지만 고티어는 물론, 뒤에 선 또 다른 정화자 역시 한쪽 무릎을 꿇지 않았다.
“…역시. 제대로 찾아왔군.”
그저 서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읊조린 게 반응의 전부였다.
샬롯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지금, 백금룡의 대행자께 예를 갖추지 않겠다는 것인가? 교단의 정화자를 칭하면서?”
“교단의 모든 이들이 백금룡을 성자로 추앙하는 것은 아니지. 우리가 섬기는 건 오로지 찬란한 여신뿐이오. 물러나시오. 그와 직접 대화해야겠으니.”
고티어가 냉랭하게 내뱉었다. 샬롯의 갈기가 일순간 넘실댔다.
“네 이놈-”
“…됐어. 괜찮아.”
이안이 앞으로 나선 건 그때였다. 입을 앙다문 샬롯이 낮게 가르릉대며 몸을 돌렸다.
뒤통수에서 메브와 필립의 시선을 느끼며, 이안이 고티어와 마주 섰다.
“그래… 내게 무슨 용무시지?”
“…….”
이안을 바라보는 고티어의 눈매가 꿈틀댔다. 영문 모를 적의.
이 새끼, 싸우러 왔구만.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무기부터 뽑아 들지 않았다.
싸울땐 싸우더라도 이러는 이유 정도는 알아 둬야 했다. 이들의 뜻이 교단 전체의 뜻을 대변하는 것인지도.
어쨌건 상대는 교단의 성기사가 아닌가. 심지어 정화자이기까지 했다.
“귀하가 루 사드에서 타락한 자들의 우상을 입수하였음을 이미 알고 있소.”
고티어가 낮게 으르렁대듯 말을 이었다.
“신원 불상의 흑기사로부터 저주받은 마검을 손에 넣었다는 것도.”
글루미르에서부터 따라온 건가.
내심 생각하며, 이안이 되물었다.
“그래서?”
“모든 물건을 반납하고 순순히 조사에 응하시오. 왜 백금룡의 뜻을 대행하는 자가 그런 불온한 물건들을 입수한 것인지. 귀경이 정확히 어떤 사명을 대행하고 있는지까지도, 전부 빠짐없이 밝히셔야 할 것이오.”
“…재미있군.”
이안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내뱉었다. 고티에와 마찬가지로 눈은 전혀 웃지 않는 싸늘한 미소였다.
시선을 고티어에게 고정한 채,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내게 암흑 성물이 있음을 안다는 건, 글루미르에 그것이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일 테니까. 그게 어떤 자들의 손에 있었는지도, 모를 리 없었겠지.”
“……!”
“그건 결국 경이 소속된 정화대가 루 사드에 암약하던 흡혈 일족의 존재를 알면서도 묵인하고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할 텐데. 대교회에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소, 고티어 경?”
“뭐라…?”
점점 구겨지던 고티어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 이안과 마주 선 이후 조금씩 냉정을 잃고 있던 그였다.
뒤에서 필립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이어졌다. 전혀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던 모양이었다.
곧 고티어가 내뱉었다.
“난 상부의 뜻은 알지 못하며, 상관도 없소. 그런 불온한 물건들이 지금 당신의 손에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
“암흑 성물은 백금룡께 운반해 적합한 절차를 거쳐 파괴할 것이고, 마검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기 위해 손에 넣은 것이지.”
이안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물론 거짓말이었지만,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족의 존재를 묵인했을지도 모르는 자들에게, 그분께서 내리신 사명을 밝힐 수는 없다. 교황 성하나 황제 폐하의 직인이 찍힌 명령서라도 가지고 온 것이라면 모를까. 하지만 보아하니….”
“…….”
“그런 건 없는 모양이군.”
흉하게 일그러지는 고티어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안이 더 짙게 미소 지었다.
이자가 지금 핵심을 찔렸으며, 교단과 황실의 뜻과도 무관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게 확실해지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교단 최상부와 황실은 그가 백금룡의 대행자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그들이 사람을 보낸 것이라면, 그에 걸맞은 명령서 하나쯤 동봉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러지 않는 건 백금룡을 모욕하는 것이나 다름없음을 알고 있을 테니까.
“돌아가시오. 고티어 경. 덕분에 백금룡께 보고할 사안이 늘었군. 그 보답으로 경의 무례한 언행은 문제 삼지 않겠소. 돌아가 경이 소속된 정화대를 먼저 조사하시오. 내가 아니라.”
순순히 들을 리 없다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끝까지 말을 맺었다.
상대가 교단의 직속 성기사인 만큼, 어쨌든 명분은 챙겨 둬야 했다.
일그러져 있던 고티어의 얼굴이 무표정해진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그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해서, 조사에 불응하겠다는 것인가?”
“요약하자면, 그래.”
“그렇다면….”
고티어의 눈동자에 황금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가 걸친 로브가 소리 없이 펄럭였다. 그의 왼팔은 어느새 안으로 사라진 후였다.
노랗게 빛나는 두 눈으로 이안을 응시하며, 고티어가 씹어 뱉었다.
“…절차대로 집행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