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226
226화
이안의 눈매가 꿈틀댔다.
고티어가 적의를 드러낸 건 전혀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놈의 눈에 아른거리는 황금빛은 조금 다른 문제였다.
‘신성력…?’
깊게 생각할 틈은 없었다.
펄럭이던 고티어의 로브가 좌우로 확 벌어지며 위로 솟구쳤기 때문이다.
그 아래로 놈이 걸친 육중한 전신 판금 갑옷이 드러났다. 흉갑에 새겨진 커다란 황금빛 원이 빛났다. 전신 곳곳에 박힌 크고 작은 마석들이 명멸할 찰나.
“잠깐…! 잠깐만요! 두 분 다 잠시만 멈춰주십시오!”
다급한 외침과 함께, 이안의 앞으로 신성의 장막이 피어올랐다.
“……?”
이안은 물론 고티어도 일순간 미간을 좁혔다.
외침과 동시에 달려 나온 필립이, 오른손을 내뻗은 채 이안의 앞을 막아섰다. 이안을 돌아본 그가 재빨리 속삭였다.
“잠시만 시간을 주십쇼, 나리.”
“헛수고일 텐데.”
“그, 그래도요.”
“…….”
짧게 입맛을 다신 이안이, 반쯤 뽑았던 검을 다시 검집에 밀어 넣었다.
어쨌건 필립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갓 루 솔라의 성기사가 된 참인데, 교단의 정화자와 갈등을 빚는 상황은 막고 싶지 않겠는가.
적어도 최선이라도 다한다면 미련은 남지 않으리라.
게다가 이안에게도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설마 사도 제안을 거절해서 앙금이라도 남은 건 아닐 테고….’
방금 본 것들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생겼으니까.
장막을 거둬들인 필립이 고티어를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오해가 있는 것 같군요. 다툼보단 대화로 해결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찬란한 여신을 섬기는 신도끼리.”
“성물의 소유자라도 되는 건가?”
고티어가 내뱉었다. 기다려 준 이유는 정말 단지 그뿐이라는 듯이.
그의 눈에는 여전히 황금빛이 아른거리고, 로브는 벗겨질 것처럼 넘실댔다.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이안은 생각을 이어 나갔다.
‘어쨌건 내가 혼돈력을 품은 건 알 테니, 타락자 취급이라도 하는 건가? 하지만 그렇다면 티르 엔이나 델라 루가 내게 힘을 빌려줄 리가 없는데.’
교리나 법령에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상대가 누구건 신성을 내리고 보는 건가.
차라리 이쪽이 더 신빙성 있는 추측이었다.
이안의 뇌리로 게임의 맹신자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이안이 타락자가 아님에도 신성을 마구 휘둘러 댔었다. 그들은 세상을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자들이었다.
물론 대부분 그 힘을 영원히 휘둘러 대지는 못했지만, 어쨌건. 현실이 된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신 중에 인간 출신은 카르하 뿐이었다. 탄생한 순간부터 신이었던 존재들이, 인간의 보편적인 상식대로 움직이지는 않으리라.
게다가 따지고 보면, 이안은 루 솔라의 신도조차 아니었다. 성물의 힘을 몇 번 멋대로 쓴 게 전부.
아르케아스의 의뢰 역시, 신의 시선을 피해 이루어지기까지 했었다.
‘교단이 아니라 백금룡의 하수인 취급을 당해도 할 말 없긴 하네.’
사실 공허의 힘도 다루고 있고.
이안이 내심 입맛을 다시는 사이, 자신의 흉갑에 한 손을 얹은 필립이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제 소개가 늦었군요. 필립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저 역시, 찬란한 여신의 사도입니다. 계시를 받은 지는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요.”
“성기사라고…?”
되물은 고티어의 안광이 가라앉았다. 펄럭이던 로브도 비로소 다시 축 늘어졌다.
이안은 로브 자락 사이로 모습을 감추는 전신 판금 갑옷을 마지막까지 눈에 담았다.
‘확실히, 더럽게 베테랑이겠고.’
답을 알 수 없는 추론보다, 이쪽이 훨씬 더 중요한 부분이었다.
곧 저 자와 싸워야 할 게 분명했으니까.
게다가 그가 게임에서 마주친 정화자들은 하나하나가 인간 병기나 다름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저들은 극소수의 인원만으로 흉지나 마경을 정화하는, 교단의 최정예니까.
그중에서도 오래 살아남은 자들은 초인의 영역에 발을 들인 자들일 수밖에 없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온갖 종류의 마법 무구와 성물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군일 때는 든든하지만, 타락하거나 맹신자가 되어 돌아 버릴 경우엔 그만큼 상황이 더 심각해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실상 필드 보스나 다름없었지….’
그나마 맹신자가 된 경우에는 조금 상황이 나았다. 엄청나게 강했지만, 일정 이하로 체력을 빼고 난 뒤엔 통제력을 잃고 자폭해 버리곤 했으니까.
어둠에 물들어 타락해 버린 경우엔, 망캐인 그로선 사실상 이길 방법이 없었다.
저들과 자주 마주치던 3챕터 후반부에는 더더욱 그랬다.
그래서 이안은 그냥 도망가는 걸 택하곤 했었다. 어쨌건, 저들은 반드시 죽여야 하는 네임드는 아니었으니까.
그때와는 달리, 피할 수 없는 상대인 고티어가 내뱉었다.
“소속을 밝히시오.”
“그게… 아직은 없습니다. 루 솔라께서 제게 계시를 내리신 건 바로 이곳 테센에서의 일이었으니까요.”
“여기서 계시를 받았다고…?”
“예.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덧붙이며 비스듬하게 몸을 돌린 필립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곧바로 눈을 감은 그가 기도문을 중얼대기 시작했다.
잠시 생각을 멈춘 이안이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대체 이게 뭔 지랄인가 싶었지만, 어쨌건 확인해 볼 기회였다.
솨아아-
루 솔라가 그의 편을 드는 필립에게도 신성을 내리는지.
필립의 전신에도 빛이 서리기 시작하자, 이안은 비로소 내심 코웃음을 흘렸다.
‘…빛은 만물을 두루 비춘다더니.’
루 솔라가 자신을 타락자라 여기지는 않는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정신 나간 빛의 여신은, 정말 그저 자신의 역할에만 충실한 것이다.
솨아아아-
전신에 신성을 머금은 채 일어선 필립이, 황금빛이 아른거리는 눈으로 고티어를 마주 보았다.
“이만하면, 증명이 되었습니까?”
“…그래. 충분하군.”
고티어가 떨떠름하게 내뱉었다. 그 역시 루 솔라의 성기사가 갑자기 튀어나온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게 분명했다.
“제 신앙을 걸고 말씀드리건대, 이안 호프 경은 타락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서부에 발을 들인 건, 이곳에 암약한 타락자들을 처단하기 위해서입니다.”
필립이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우리가 가는 길에 타락자들이 나타난 게 아니라, 우리가 놈들을 추적해 색출해 낸 겁니다. 공교로운 우연도, 텐시아 아이나스 공께서 그들과 관련이 있어서도 아니죠.”
“…그렇다면, 더더욱 조사에 불응할 이유가 없겠군.”
이어진 고티어의 대답에 필립이 멈칫했다. 그의 눈을 마주 보며, 고티어가 말을 이었다.
“저주받은 자들의 우상과 마검을 반납하라 이르시오. 필립 경. 그리고 본교단까지 동행토록 하시오. 경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안 경은 아무런 문제 없이 풀려나게 될 것이니.”
“아니… 이안 경의 말씀을 듣지 못하셨습니까? 저희는 지금, 백금룡의 사명을 대행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물건들은 때가 되면 백금룡을 통해 파기하게 될 겁니다.”
“경은 백금룡을 믿으시오?”
“예…?”
“한때 인간을 비롯한 수많은 종족들을 공포로 지배했으며, 끝내 찬란한 여신의 자비에 기대 동족마저 배신하고 살아남은 그 괴물을, 진정 믿느냔 말이오.”
“그게 무슨… 대체… 정화자께선 교단의 성자를 왜 그런 식으로 매도하십니까?”
“그게 진실이니까.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아주 불편한 진실이지.”
“……”
필립이 입만 뻐끔댔다.
반면, 이안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스치고 있었다.
‘설마 했는데, 이 새끼. 순수 교도인가 그거군.’
기적은 신의 은총만으로도 충분하며, 신의 뜻을 받드는 건 인간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기는 자들.
그리고 게임에서 이안이 검은 벽을 넘기 직전엔, 교단과 제국의 주류로 떠오른 자들이기도 했다.
그때는 이런 극단적인 자들이 득세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그러려니 했었지만.
보아하니, 그 이전부터 이미 교단 내부에 충분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가만. 그럼, 그 사제님이라는 자도…?’
문득 이안의 눈매가 꿈틀댔다.
흡혈 여제의 유언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을 이용하는 루 솔라의 광신도가 있다던.
비로소 모든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대체 어떻게 알고 따라와서 시비인 건가 싶었는데.
‘…이것들, 암흑 성물을 교단으로 회수하려는 게 아니군. 나도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었던 거고. 백금룡의 대행자니까.’
순수 교도들은 의회의 하수인인 것이다. 어쩌면 본인들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이들에게 명령을 내린 결정권자는 의회의 일원이 틀림없었다.
필립이 간신히 말을 이어간 건 그때였다.
“그, 그럼… 저희와 동행… 하시겠습니까? 모든 과업을 완수한 후엔, 백금룡을 직접 만나 뵐 수 있을 테니까요. 두, 아니, 눈으로 직접 확인하시면 되겠군요. 이안 경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그거, 거짓말인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태연하게 고티어를 바라보았다. 저자가 받아들일 리 없었기 때문이다.
백금룡을 마주 보는 상황 자체를 역겹다 여길 게 분명했으니까.
역시나, 그가 코웃음을 흘렸다.
“내가 받은 명령은 회수와 조사, 둘 뿐이오. 임의로 명령을 바꿀 수는 없으니, 비키시오. 아직 진실에 눈 뜨지 못한 사도여. 어리석음이 죄는 아니나. 무지에서 비롯된 죄업까지 면죄 받을 수는 없음이니.”
“도대체….”
숨이 턱 막힌 듯 탄식한 필립이 덧붙였다.
“진정 피를 보시려는 겁니까…?”
고티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불가피하다면. 기꺼이.”
“하….”
필립이 한숨을 내쉴 찰나, 이안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할 만큼 한 것 같은데.”
필립이 망연자실하게 이안을 돌아보았다.
“말이 안 통합니다, 나리. 이게 대체….”
“정 마음에 걸리면, 그냥 물러나 있어라.”
말을 자르며 내뱉은 이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경도 마찬가지요.”
“…….”
어느새 싸늘한 얼굴이 되어 있던 메브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의 시선이 그 뒤, 샬롯과 테사이아를 훑었다.
“이번엔 우리 셋이 싸울 테니까.”
“내 전투 도끼를 다오. 이안.”
샬롯이 손을 내밀었다. 테사이아는 이미 허리춤에 화살통을 고쳐 매고 있었다. 예비용 활도 손에 든 채였다. 이안이 아공간에서 샬롯의 전투 도끼를 꺼내는 사이.
“뭐, 저쪽의 제안도 아예 터무니없진 않은 것 같습니다. 선배.”
반대편에서도 또 다른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중이었다. 고티어의 뒤편, 말 두 마리의 고삐를 쥔 채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던 또 다른 정화자였다.
고티어와 달리 꽤 젊은 목소리.
“우리가 직접 조사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테니까요. 어쩌면 이번엔, 백금룡 본인도 함께 심문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고티어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어리석은 소리 마라, 나세르! 그 용이 진실을 알고 있는 우리를 살려 보낼 것 같으냐? 아직도 그 어리석은 갈등을 이어 가고 있다면, 그대로 빠져 있어라. 집행은 나 혼자로도 충분하니.”
솨아아-
동시에 고티어의 눈동자에 다시 황금빛 광채가 번지기 시작했다. 걸어 나온 메브가 이안의 앞에 선 건 거의 동시였다.
“빠져 계시라니까.”
이안의 말에, 그녀가 너덜너덜한 안면 가리개를 내리며 내뱉었다.
“내가 보기에 저 자는 눈 먼 사도다. 타락자만큼이나 위험한 부류지.”
이안이 한쪽 눈썹을 슬며시 말아 올릴 찰나, 필립도 등 뒤의 원형 방패를 왼팔에 차며 중얼댔다.
“성기사가 된 후의 첫 상대가 성기사 선배라니…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모르겠습니다.”
“교단 내부의 적을 상대할 운명인 모양이지.”
이안이 피식대며 덧붙였다. 필립이 그런 끔찍한 말씀 하지 마시라고 중얼대는 사이.
“정말 돕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또 다른 정화자, 나세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쪽은 다 나오려는 모양인데요. 혼자서는 쉽지 않으실 겁니다.”
“명예를 모르는 자들이라는 반증이지. 지켜보아라. 진실을 보게 될 테니.”
고티어의 로브가 크게 펄럭이며 어깨 위로 솟아올랐다. 전신 판금 갑옷이 다시금 본모습을 드러냈다.
철컹-!
뒤로 젖혀져 있던 투구가 스스로 올라와 고티어의 머리를 감싸며 재조립된 건 거의 동시였다.
그사이 로브는 완전히 펼쳐져 그의 머리 위로 둥실 날아올랐다. 연이 뜬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안감에 새겨진 황금빛 주문 회로가 번쩍였다.
‘용은 그렇게 증오하면서, 진언 마법은 또 좋아하나 보군.’
이안이 실소를 흘렸다. 저 로브에 새겨진 주문 회로가 진언이라 불리는 용의 마법임을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색으로 미뤄 볼 때, 심지어 아르케아스가 직접 주문을 새긴 물건 같았다.
“우리는 명예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명예를 알기에,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울 뿐이지.”
메브가 내뱉은 건 그때였다. 원형 방패를 치켜든 필립도 뒤따라 소리쳤다.
“무장을 해제하고 물러나십시오. 그러지 않는다면, 백금룡의 과업을 방해하는 것으로 간주할 겁니다.”
고티어의 표정을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그의 얼굴은 어느새 매끈한 안면 가리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일직선으로 뚫린 눈구멍에서 황금빛 광채만이 아른거릴 뿐이었다.
“신의 엄벌에는 자비가 없으니. 우매한 자들일지라도 예외는 아니리라….”
읊조린 고티어가 등 뒤에서 기다란 양손 검을 뽑아 들었다.
그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주 느긋한 걸음걸이.
하지만 전신 곳곳에 박힌 마석은 점점 더 밝게 번쩍이고, 검날에도 눈부신 신성이 맺히고 있었다.
마법 양탄자처럼 떠오른 로브도 소리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혼돈력은 쓰면 안 되겠군. 어차피 거의 있지도 않지만… 뒤에 놈도 곧바로 합류할 테니까.’
어지간한 마법은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은데….
검을 뽑아 들며, 이안은 차분히 생각을 이어갔다.
신중하게 싸워야 할 상대였다.
“잘 됐군.”
“……!?”
타타탓-
새카만 궤적이 그의 곁을 스치며 뿜어져 나간 건 그때였다.
“한 번쯤 꼭 싸워보고 싶었는데.”
샬롯이 남기고 간 말이 뒤늦게 이안의 귀를 파고들었다.
“빛이여…! 부디 이 무의미한 싸움을 멈추게 해 주소서!”
그게 신호라도 된 것처럼, 소리친 필립과 메브도 달려나갔다.
“저 머리통에 한 발 먹여 줘야 속이 풀릴 것 같아!”
테사이아도 그들의 뒤를 따라 내달렸다.
…신중하긴 글렀네.
순식간에 이어진 일행의 돌격에 헛웃음을 흘린 것도 잠시.
“……?”
뒤따라 달려가려던 이안이 문득 고개를 숙였다.
뱃속 깊은 곳에서 열기가 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갑옷 사이로 흐릿한 붉은 신성이 아른거렸다.
아니, 또…?
삽시에 몸속이 용암이라도 머금은 것처럼 뜨거워졌다.
이를 악문 이안의 무릎이 절로 땅에 닿았다.
북부도 아닌데 왜, 하는 의문은 끝까지 이어지지도 못했다.
열기가 사지로 퍼져 나갔다. 눈앞이 붉게 물들고 모든 감각이 흘러내렸다.
쩌어엉-! 콰지직-!
저 앞에서 온갖 굉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쉬지 않고 이어지는 굉음은, 곧 이안의 뇌리를 울리는 천둥소리와 시끄럽게 뒤엉켰다.
그게 웃음소리임을 깨달을 때쯤, 싸워라! 하는 일갈이 쩌렁쩌렁하게 그의 의식을 뒤흔들었다.
뭐, 대전사들끼리의 싸움이라도 된다 이거냐?
이안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이 고통은 엿 같았지만, 이번에는 카르하를 욕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 역시 내심은, 저 광신도의 면상에 주먹을 처박아 주고 싶었으니까.
전신을 뜨겁게 달군 열기가 조금씩 위로 치밀어 올랐다.
이안은 예전처럼 그것을 억누르려 애쓰지 않았다.
가라앉았던 의식이 함께 선명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저 고개를 뒤로 활짝 젖혔을 뿐이었다.
열기가 마음껏 분출될 수 있도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