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230
230화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어서 가서 말부터 챙겨라. 도망이라도 치기 전에. 두 마리 다 덩치가 상당히 보이던데 조심하고. 마차를 끌고 돌아와.”
“염려 마십쇼. 다녀오겠습니다!”
곧바로 몸을 돌린 필립이 달려갔다. 신이 난 듯한 뒷모습.
‘꺼림칙 해하더니, 벌써 다 까먹었나 보군.’
내심 헛웃음을 흘린 이안이 테사이아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고티어의 장비를 요리조리 살펴보는 중이었다. 놈의 시신은 어느새 흔적도 남지 않은 채였다.
그의 손짓에 테사이아가 냉큼 달려왔다.
“왜?”
“도시를 수색해 주면 좋겠는데.”
“…뭘 찾아야 되는데?”
멈칫한 테사이아가 되물었다.
귀찮은 작업이 되리라 직감한 게 틀림없었지만. 이안은 전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내 부러진 칼. 어딘가 떨어져 있을 거다.”
부러진 단죄의 검은 이제 내구도가 거의 다 떨어진 상태였다.
단죄의 일격을 많아야 두어 번 쓸 수 있을 수준이었는데, 이번 싸움에서 그중 한 번을 사용해 버린 것이다.
심지어 힘껏 패대기치기까지 했으니, 어쩌면 이제는 한 번 더 쓰려는 시도만 해도 검날이 산산 조각나 버릴지도 몰랐다.
어쨌건, 그렇다 해도 버리고 갈 수는 없었다.
“알았어. 찾을게.”
“죽은 놈이 걸쳤던 로브도. 도시 안 어딘가에는 있을 거다.”
“…지금 주위가 어떤 상태인지는 알고 있는 거지, 이안?”
“그래서 너한테 부탁하는 거다. 넌 눈도 좋고 감도 좋으니까. 보다시피 지금은 나도 이 꼴이라, 할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어.”
질색하는 표정이었던 테사이아의 콧대가 점점 위로 올라갔다. 곧 텐시아 아이나스의 미소를 입가에 건 그녀가 내뱉었다.
“이 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니. 별수 없지. 너그럽게 도와주도록 하마.”
이 녀석, 이제 저게 본체 같은데.
멀어지는 테사이아를 바라보며 피식댄 이안이, 이내 메브의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왜 그렇게 보시오?”
“별거 아니야. 그냥, 우리가 용병단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도적 떼가 아닌 게 다행이군.”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몸을 돌렸다. 샬롯을 지나쳐 그의 뒤를 따르며, 메브가 말을 이었다.
“걱정이구나. 본 교단에 너를 노리는 자가 있다면, 그 정체를 밝혀낸다 해도 손을 쓰기 쉽지 않을 텐데.”
“뭔가 방법이 있지 않겠소.”
보아하니, 놈들을 죽인다고 여신의 진노를 살 것 같지도 않고.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고티어의 잔해 옆으로 다가가며 덧붙였다.
“신경 쓰지 마시오. 대교회와 충돌할 일이 있다 해도 경을 끌어들이지는 않을 거니까. 물론, 필립도 마찬가지고.”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네 곁에 서겠다는 얘기다. 이안.”
“……?”
멈칫한 이안이 메브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지친 녹색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본 교단이 너를 타락자나 이단으로 규정한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모든 교단이 적이 된다 해도, 나는 기꺼이 너를 위해 싸울 거야. 아마 그건 필립도 마찬가지겠지.”
“…….”
그녀를 빤히 바라본 것도 잠시. 이내 이안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번졌다.
“가만 보면, 은근히 낯간지러운 말씀을 잘 하시는군.”
“……! 그저, 그렇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네가 방금 같은 생각으로, 곤경에 처하더라도 홀로 모든 걸 해결하려고만 할까 봐.”
눈을 치켜떴던 메브가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내뱉었다.
귀가 불그스름해 보이는 건 착각이 아닐 터였다.
“알아 두겠소. 그런 상황이 온다면, 꼭 경부터 찾도록 하지.”
소리 없이 웃으며 손을 뻗은 이안이, 옆에 떨어져 있던 고티어의 양손 검을 주워들었다.
적당한 두께에 곧고 흰 검날은, 여전히 이 하나 나가지 않고 날카롭게 빛났다. 심지어 보이는 것처럼 무겁지도 않았다.
정화자의 진은 강철 검. 무려 유일 등급 양손 검이었다.
“왜 이렇게 튼튼한가 했더니. 진은을 섞어 만든 칼이었군.”
“진은…? 말로만 듣던 그 진은말이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던 메브가 홱 고개를 들며 내뱉었다.
드물게도 놀란 표정을 지은 채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진은은 이 세계에서 가장 귀한 금속 중 하나였으니까.
은처럼 빛나며 강철보다 단단하고, 심지어 가벼웠다. 게다가 신성을 가장 잘 받아들였다. 그래서 신성한 금속이라 불리기도 했다.
물론 그런 만큼 제련하기 어렵고 구하는 건 더 어렵다고 알려져 있긴 했지만. 어쨌건, 그래서 이름난 무구 중에는 운철이나 진은을 섞어 만든 것들이 많았다.
날을 이리저리 확인한 이안이 날 윗부분을 쥐었다.
“경이 쓰기에 딱 좋은 칼이군.”
“……!”
그가 그대로 자루를 메브의 품에 내밀었다. 엉겁결에 받아든 메브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내가…? 난 이미 세검도 받았고, 갑옷까지 받기로 했는데. 그냥 네가….”
“난 저걸 가질 생각이라서.”
이안이 저만치를 돌아보며 말했다. 방패와 함께 떨어져 있는 장검. 검집은 물론이고 십자 막이와 자루의 형태로 보았을 때, 저것도 평범한 칼은 아닐 터였다.
“그러니 그건, 그냥 경이 쓰시오.”
“이렇게 귀한 검을….”
메브가 탄식하듯 중얼대며 검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어느새 양손으로 날을 곱게 받쳐 든 채였다.
희게 빛나는 검날을 훑는 그녀의 눈빛이 보석을 바라보듯 일렁였다.
“그래서….”
실소를 삼킨 이안이 일어섰다. 고티어의 전신 판금 갑옷과 샬롯이 분해 중인 나세르의 갑옷을 차례로 돌아본 그가 덧붙였다.
“갑옷은 뭘 가지시겠소?”
“…….”
마찬가지로 좌우를 번갈아 돌아본 메브가, 이윽고 시선을 슬며시 내리깔며 읊조렸다.
“하나씩 걸쳐 보고 결정해도… 되겠느냐?”
쑥쓰러워 하고 난리야.
이안이 풀썩 웃음 지었다.
“얼마든지.”
***
다각- 다각-
흐릿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나세르는 의식을 되찾았다.
가장 먼저 밀려든 건 거대한 상실감이었다. 내면에 늘 느껴지던 가장 중요한 무언가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
눈을 감은 채 텅 빈 어둠을 응시하던 그는, 곧 입안 가득 느껴지는 쓴맛에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의식이 선명해질수록 목덜미도 뻐근해졌다. 목과 어깨가 담이라도 온 것처럼 욱신거렸다.
목을 어루만지려던 그는, 곧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양팔이 등 뒤로 교차 된 채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묶은 건지는 몰라도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양 무릎과 발목이 딱 붙은 채로 묶여 있었다. 팔을 움직이려 하자, 이상하게도 다리가 더 불편해졌다.
“읍….”
이게 뭐냐는 말을 내뱉는 것도 불가능했다. 입에 재갈이 물려 있었기 때문이다. 천을 뭉쳐 만든 것 같았는데, 입안 가득 느껴지는 쓴맛의 정체이기도 했다.
나세르의 뇌리로, 비로소 정신을 잃기 전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찬란한 여신의 손길. 깨달음과 상실. 참회의 기도. 그리고 암전.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덜컹-
바닥이 한차례 흔들렸다.
나세르가 퍼뜩 눈을 깜빡였다. 비로소 자신이 누운 나무 바닥이 선명해졌다. 그는 지금 마차 안에 있었다. 앞뒤로 마주 보게 놓인 의자 사이의 바닥이었다.
머리맡과 몸 앞에 드리운 기다란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발톱처럼 뾰족한 징이 여럿 튀어나온 강철 장화.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려 위를 올려다본 나세르의 눈동자가 이내 굳어졌다.
“…….”
동공이 세로로 길게 찢어진 주황색 눈동자가 그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닥거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상황 파악이 빠르네. 재미없게.”
뒤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세르가 고개를 꺾어 간신히 뒤를 돌아보았다.
반대쪽 의자 위에 길게 누운 테사이아가, 턱을 괸 손을 까딱이며 미소 지었다.
“안녕, 나세르. 잘 잤어? 너무 오래 자서, 사실 죽은 건 줄 알았지 뭐야.”
“…….”
“그건 우리 일족이 사냥감을 산채로 포획했을 때 사용하는 매듭이다.”
샬롯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세르와 다시 눈이 마주친 그녀의 눈매가 슬며시 휘어졌다.
“움직일수록 더 강하게 조이지.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샬롯을 올려다보는 나세르의 눈빛은 도리어 차분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옅은 두려움까지 완전히 감추지는 못한 채였다.
샬롯이 만족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손톱 끝이 나세르의 턱 아래에 닿았다.
“난 찬란한 여신께 버림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 둬라. 난 그분을 섬기지만, 그분은 날 품어 주신 적이 한 번도 없거든.”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인 샬롯이 미소 지었다.
“그러니 부디, 쓸모없는 말은 많고 중요한 말은 아껴 주길 바라겠다. 우리식 매듭뿐만 아니라, 설득 방식도 경험하게 해주고 싶으니까.”
“…….”
나세르는 대답하듯 눈을 한 차례 깜빡였다. 샬롯이 그의 턱을 살짝 긁으며 손을 뗐다. 뒤에서 테사이아가 손을 뻗어 재갈의 매듭을 풀었다.
나세르가 입에 물었던 천 뭉치를 뱉었다. 장비를 닦을 때 썼을 법한 더러운 천이었다.
바닥에 침을 탁 뱉은 나세르가, 바닥에 힘없이 머리를 기대며 미소 지었다.
“…이러지 않으셨어도 순순히 협조했을 텐데요.”
“순순히는 무슨. 넌 그 반짝이랑 한 패잖아.”
테사이아가 핀잔을 줬다. 고개를 꺾어 뒤를 돌아본 나세르가 미소 지었다.
“말투가 많이 바뀌셨군요, 공. 지금 이게 본래의 모습이십니까?”
“응. 게다가 사실 난, 텐시아 아이나스도 아니야.”
“…아니시라고요?”
“반가워. 테사이아라고 해. 원로 요정이긴 하니까, 예의는 갖추고.”
나세르는 이들이 자신을 살려 보내지 않을 생각임을 직감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진실을 선뜻 먼저 털어놓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저 허탈한 웃음만을 흘릴 따름이었다.
“이것 참… 난처하게 됐군요. 전 그것도 모르고, 아이나스 가에 서신을 보냈거든요.”
“서신…?”
테사이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을 찰나, 샬롯이 손을 뻗어 나세르의 양 볼을 움켜쥐었다.
옆구리의 단검 자루에 왼손을 얹으며, 그녀가 덧붙였다.
“자세히 말해. 전부.”
“…저희는 공이 이안 경을 보호하는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나스가에 연락을 넣었죠. 가문의 원로가 서부에 발을 들인 이유를 소명하고, 공에 대한 정보를 알려달라고요. 이제 보니… 무의미한 일이었군요.”
“무의미하진 않지.”
대답은 밖에서 들려왔다.
마차 문이 열리고, 지붕에 앉아 있던 이안이 미끄러지듯 안으로 들어왔다.
“덕분에 아이나스가에서 귀쟁이들을 파견할 테니까. 서부를 활보하면서 자신들의 이름을 멋대로 가져다 쓰는 요정을 붙잡기 위해서.”
이안이 의자에 걸터앉으며 덧붙였다.
“안녕하십니까. 이안 경.”
나세르가 턱을 잡힌 채로 미소 짓는 가운데, 테사이아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럼 난 또 쫓기게 되는 거야?”
“글쎄. 어쨌건 네가 원로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니까. 하기에 따라서 별문제 없을지도 모르지. 내가 피곤해지는 거면 모를까.”
허리춤의 검집을 풀어 건너편 의자에 대충 얹은 이안이 덧붙였다.
“아이나스가의 브로치를 어떻게 손에 넣게 되었는지, 대답을 들으려고 할 테니까.”
“어쩌면, 귀쟁이들의 멱을 여럿 더 딸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군.”
“그때까지 네가 나와 함께 있다면 말이지.”
이안의 말에 샬롯이 미소 지었다.
“기다려서라도 만나고 가고 가면 안 되겠느냐?”
“괜찮은 생각이네. 나도 요정들이 날 어떻게 대할지 궁금하거든.”
테사이아의 첨언에 나세르의 눈빛이 조금 어리둥절해지는 사이.
“그건 나중에 생각해도 될 문제야. 그보다 지금은….”
이안이 샬롯을 바라보았다.
샬롯이 기다렸다는 듯 왼손으로 자루를 쥐고 있던 단검을 뽑아 들었다. 길쭉한 단검 날이 나세르의 귀 위에 얹어졌다. 순간 굳어진 나세르의 눈을 바라보며, 이안이 미소지었다.
“우리 대화에 집중하도록 하지. 너에게 들을 말이 아주 많을 것 같거든. 나세르.”
마른 침을 삼킨 나세르의 시선이 귀 위에 드리운 검날로 향했다. 곧고 날카롭게 뻗은 흰 검날. 샬롯의 손아귀 사이로 슬쩍, 자루의 금장식이 드러났다.
“낯익은… 단검이군요.”
“좋은 칼이야. 날이 얼마나 잘 드는지 시험해 보고 싶을 만큼. 덕분에, 좋은 기회가 생겼군.”
샬롯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나세르의 시선이 이안에게 돌아왔다.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안 경. 아시다시피, 저는 처음부터 경과 싸울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럼 말렸어야지. 손 놓고 구경만 하는 게 아니라. 방관도 죄다, 몰라?”
테사이아가 놀리듯 말했다. 나세르가 곧바로 대답했다.
“겪으셨다시피, 선배는 고집이 센 분이셨으니까요. 경이 정말 그토록 위대한 용사이신지 확인하고 싶기도 했고요. 저에겐 그게 가장 중요했습니다. 다른 선배들과는 달리.”
“다른 선배라는 건, 네가 속한 정화대를 말하는 거냐? 아니면, 따로 뜻을 함께하는 자들?”
“후자… 라고 할 수 있겠군요.”
이어진 이안의 물음에 나세르가 곧바로 대답했다.
이안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럼, 바로 그 부분부터 시작하면 되겠군.”
“얼마든지 물으십시오.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선 전부 답하겠습니다. 다만….”
나세르의 시선이 아래와 옆으로 움직였다.
“이 칼날과 제 얼굴을 쥔 손만 좀 거둬 주시겠습니까? 적어도, 둘 중 하나라도요.”
코웃음 친 샬롯이 왼손을 살짝 움직였다. 단검 날이 나세르의 귀와 얼굴을 이어주는 살점을 살짝 파고들었다. 번져 나온 피가 나세르의 귓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꿈도 꾸지 마라. 네가 헛소릴 할 때마다 칼날이 조금씩 내려갈 거고, 네놈 눈깔에 신성이 맺힌 순간 이 손이 바로 네 목을 꺾을 거니까.”
“그래서라면… 더더욱 이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씁쓸하게 미소 지은 나세르가, 이안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저는 더 이상 신의 사도가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