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233
233화
그러거나 말거나, 이안은 게임에서의 기억을 곱씹고 있었다.
그때의 크랄렌 공작은 원탁 의회와 관련된 퀘스트는 주지 않았었다. 만약 놈이 의회의 한 자리를 차지한 의원이라면, 조건부 퀘스트가 있으리란 의미였다.
그걸 끄집어내는 게, 이안의 가장 큰 목적이었다. 그가 아겔 란을 비롯한 여러 타락자들을 암중에서 후원한 원흉이라는 사실도, 겸사겸사 함께 밝혀내고.
놀람을 추스른 나세르가 말했다.
“그러시려는 이유가 뭡니까? 크랄렌 공작이 어떤 분인지는 아십니까?”
“타락자지. 일단은.”
나세르의 미간이 좁아졌다.
“에드워드 크랄렌이, 타락자라고요?”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그래. 서부가 이 꼴이 된 건, 그가 자신의 실패작들을 방치한 결과지.”
“…믿기 힘든 얘기군요. 하지만 사실이겠죠. 경이 거짓말을 하실 이유가 없으니.”
이안이 나세르의 연갈색 눈을 마주 보았다.
“그자에 대해 잘 아나 보군.”
“중앙에까지 알려진 사실들 정도는요. 라클리프는 물론, 사실상 서부 전체를 다스리는 대귀족이잖습니까.”
“좋아. 그럼 그 얘긴 가면서 듣지. 떠날 준비를 해라.”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샬롯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샬롯이 네가 해야 할 것들을 지도해 줄 거다.”
“…예, 이안 경. 아니, 나리.”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샬롯의 손길이 나세르를 일으켜 세웠다.
***
“…그 비극적인 사건 후로, 공작은 후사를 두는 것을 포기했다더군요. 대신 영지를 부유하게 일궈내는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구요. 매년 대교회에도 엄청난 금액의 헌금을 보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마부석으로 뚫린 간이 창문 너머, 나세르의 목소리가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제국 내부의 사정에 어두운 이들만 모인 터라, 일행들은 저마다 묵묵히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크랄렌 공작은 자식들을 모두 잃었다. 전쟁에서. 중앙에서의 정치적 암투 끝에. 그리고 병으로.
새로운 타락자를 탄생시키기엔 충분한 비극이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새삼스럽게 동정심이 들지는 않았다. 비극적인 일을 겪었다 해서, 모두가 잘못된 선택을 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혹시 써먹을 만한 단서가 있을까 싶어 귀 기울여 들은 것뿐.
사실 이안에겐 그리 특별하지도, 인상적이지도 않은 이야기였다.
“덕분에 황실과 교단 모두에 큰 신임을 얻고 있다더군요. 군도 쪽과는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러니 공작이 타락자로 밝혀진다면… 한동안 중앙이 떠들썩해 질 겁니다.”
나세르가 말을 멈췄다. 마차 내부에는 여전히 적막만이 감돌았다. 슬쩍 뒤를 돌아본 그가 덧붙였다.
“제가 아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수고했어, 짝귀. 제법 재미있는 이야기였어. 좀 길었지만.”
창가에 기대앉은 테사이아가 말했다. 나세르가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더 물을 게 있나, 이안?”
이어진 샬롯의 물음에, 창틀에 팔을 걸치고 있던 이안이 고개를 저었다.
“없어. 충분해.”
“마차가 조금 빠른 것 같습니다, 샬롯. 말들이 지치지 않게 신경 써 주십시오.”
테사이아의 건너편에 앉은 필립이 덧붙였다.
“알았다. 그러지.”
대답한 샬롯이, 나세르를 돌아보았다. 나세르가 눈치껏 고삐를 살짝 당겼다.
새로운 마부가 생기면서, 일행의 자리에도 변화가 생겼다.
샬롯은 나세르의 감시를 자처하며 마부석에 나란히 앉았다. 물론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닐 터였다.
나머지 일행이 모두 마차 안에 들어와 있었으니까.
마차는 본래 여섯 명까지는 탈 수 있게 설계되어 있었지만, 그건 승객이 가벼운 차림일 때의 얘기였다.
“얘기를 듣고 보니 확실히, 라클리프는 다른 곳과는 상황이 다를 것 같군.”
잠깐의 침묵 끝에, 필립과 나란히 앉은 메브가 읊조렸다.
그녀는 여전히 전신 판금 갑옷 위에 로브를 걸치고, 얼굴만 드러낸 채였다. 그건 필립도 마찬가지였다. 둘이 나란히 앉은 것만으로도 마차 한 면이 꽉 찬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반대편, 테사이아의 옆에 앉은 이안이 한쪽 어깨를 까딱였다.
“어떤 상황이건, 달라지는 건 과정뿐일 거요. 공작이 이미 죽어버린 거면 모를까. 그게 아니면 그자의 앞에 서서, 하려던 걸 하면 그만이니.”
“정말 계획대로 잘 될지 걱정이군요. 나리가 원탁의 일원이라는 말을, 그자가 순순히 믿어 주겠습니까?”
필립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공작의 앞에서 원탁의 일원인 척 연기하는 게 이안의 계획이었다.
메브와 필립이 정화자로 위장한 건, 공작을 속이기 위한 근거 중 하나였다. 공작이 정말 의원이라면 여명단의 존재 정도는 알고 있을 테니까. 교단과도 각별한 사이라지 않던가.
이안이 손바닥으로 턱을 괴며 대답했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야. 잘 안 되면, 원래 하려던 대로 싸우면 그만이니까.”
“중요한 건, 불필요한 희생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안의 계획은 충분히 의미가 있지.”
덤덤하게 내뱉은 메브가, 테사이아와 필립을 돌아보며 덧붙였다.
“우리가 이안의 권위에 힘을 더할 테니까. 비록 그것이 거짓일지라도.”
…거기까지 의도하진 않았지만.
속으로 읊조리면서도,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세르의 이야기 덕에, 일행은 공작의 세력이 예상보다 더 크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됐다. 그를 죽이면 뒤따르는 부작용도 더 크리라는 의미였다.
이안이 아무리 백금룡의 대행자라 할지라도 전부 무마할 수는 없을 수도 있었다. 북부라면 모를까. 여긴 제국 서부였고, 상대는 서부 최고의 권력자였으니까.
하지만 원로 요정과 정화자까지 함께라면 상황이 또 달라질 터였다. 적어도 불필요한 피를 볼 가능성은 훨씬 줄어들게 되리라.
‘뒷수습은 뭐, 아르케아스 그 양반이 어떻게든 해 주겠지.’
이안이 무책임하게 생각하는 사이, 기대된다는 눈빛이 된 테사이아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걱정할 게 뭐 있어. 이번엔 이안이 다 알아서 할 텐데. 너희랑 나는 그냥 분위기 잡으면서 서 있기만 하면 되고. 어차피, 이제 처음도 아니잖아?”
“…그래야겠군요. 하긴. 이때가 아니면 제가 언제 또 정화자가 되어 보겠습니까.”
필립이 풀썩 웃음 지었다.
이안이 턱을 괸 손을 까딱이며 말했다.
“방심만 하지 마라. 어떤 돌발 상황이 생길지 모르니까.”
“그래. 모든 게 확실해지더라도. 네가 신호를 주기 전까지는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겠다. 이안.”
메브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변이된 채로 말라 죽어 있던 식물들은 어느새 찾아볼 수 없었다. 평범한 들판과 숲이었다. 칙칙한 잿빛 하늘과 텁텁한 공기만 제외하면.
테센 외곽으로 접어들었다는 증거였다. 아직 공기에 짠내가 섞이지는 않았지만, 라클리프가 그리 멀지는 않았을 터였다.
일행이 마차 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도 그래서였다.
언제 라클리프의 병사나 귀족, 최악의 경우엔 피난민들을 마주칠지 알 수 없었으니까.
“어쨌든, 테센에서와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는 않았으면 좋겠군요. 일이 더 어려워지더라도요.”
필립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게임에서의 라클리프를 다시 한번 떠올리며, 이안이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뭐, 가 보면 알게 되겠지.”
***
날이 어두워지도록 아무것도 마주치지 않았다. 피난민은 물론이고 인적을 아예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이 인근에는 마물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없었던 건 아닐 터였다. 타락자들의 의식에서 비롯된 공허의 마력에 홀려 뿔뿔이 흩어진 것이리라.
덕분에 일행은 관도 밖의 들판 한복판에 대놓고 야영지를 꾸렸다.
샬롯은 나세르를 끌고 다니며 짐꾼으로 부려먹고, 나세르는 그녀의 구박에도 미소를 잃지 않은 채 궂은일을 도맡았다.
‘묘한 놈이라니까.’
이안은 마차를 정리하는 나세르를 바라보며 육포를 우물댔다. 그는 정말 모든 게 속죄의 과정이라 여기는 것 같았다.
앞의 모닥불에는 온갖 것들을 넣은 꿀꿀이 죽이 끓고 있었다. 생긴 건 저래도, 막상 먹어 보면 나름대로 먹을 만한 잡탕 스튜였다.
콰장창-!
그때, 건너편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안이 입을 멈추지 않은 채 시선을 돌렸다.
필립이 바닥에 나자빠져 있었다. 그를 내동댕이친 건 메브였다.
대련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건만. 필립은 벌써 세 번이나 바닥을 나뒹굴었다.
필립의 흉갑 위로 올라탄 그녀가, 녀석의 얼굴 앞에 검날을 들이밀었다.
한 손은 자루에, 다른 한 손은 칼날 중앙을 잡은 채였다.
“지금 너는 온몸이 철벽이며, 동시에 무기다, 필립. 그걸 무의식에 새겨야 해.”
칼날을 거둔 메브가, 손을 뻗으며 일어섰다. 그녀의 손을 잡고 간신히 일어선 필립이 숨을 헐떡였다.
“…지켜본 시간이 있어서 쉬울 줄 알았는데. 역시, 생각과 실전은 다르군요.”
“금방 익숙해질 거야. 다시 해보자.”
필립의 견갑을 두드린 메브가 몸을 돌려 거리를 벌렸다.
“가겠습니다, 나리!”
둘의 대련이 다시 시작됐다.
필립이 전신 판금 갑옷을 걸친 김에, 메브는 그에게 기사의 전투 방식들을 전수하고 있었다. 기사끼리의 결투 요령도 마찬가지였다.
아주 진지한 걸 보니, 헤어지기 전까지 자신의 모든 기술을 가르쳐 주려는 게 분명했다.
‘나름대로의 작별 준비이기도 하겠고.’
나세르가 건넨 그릇을 받으며, 이안은 그들의 대련을 눈에 담았다.
그가 보기에 지금 저건, 필립의 몸에 밴 여러 습관들을 빼는 과정이었다.
게다가 보이는 것만큼 무작정 필립이 밀리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과는 늘 메브의 승리였지만, 어쨌건 필립도 지렁이가 꿈틀대는 정도의 저항은 해내고 있었다.
“역시, 싸움 구경이 제일 재미있네.”
마찬가지로 그릇을 받아든 테사이아가, 그릇째로 스튜를 입에 가져가며 말했다. 옆에 앉은 샬롯이 낮게 콧방귀만 뀌는 가운데, 다시 한번 필립이 바닥에 처박혔다.
샬롯이 스튜 그릇을 들며 내뱉었다.
“먹고들 해라.”
“전… 됐습니다…. 나리만 드십쇼. 먹고 다시 했다간, 금방 다 토해 버릴 겁니다….”
대자로 드러누운 필립이 숨을 고르며 내뱉었다. 메브가 소리 없이 웃으며 모닥불로 다가왔다.
그녀도 숨이 꽤 거칠었지만, 필립에 비하면 여러모로 여유가 있어 보였다.
“방패를 겁쟁이처럼 쓰시는군요.”
메브에게 그릇을 건넨 나세르가 내뱉은 건 그때였다.
일행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인상을 찌푸린 샬롯이 이안을 곁눈질했다. 이안이 살짝 고개를 젓는 사이, 필립이 고개만 들어 나세르를 바라보았다.
“지금, 나한테 한 말입니까?”
죽이는 걸 반대하는 쪽이었음에도, 메브와 필립은 정작 나세르에게는 한마디도 말을 걸지 않았다.
입장과는 별개로 그를 좋아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혐오하는 쪽에 가까웠다. 나세르는 여명단의 일원이었으며, 끝내 신에게 버림받은 자이기까지 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이, 나세르가 합류한 이래 둘이 처음으로 말을 섞는 순간인 셈이었다. 그것도 꽤나 좋지 않은 시작으로.
“호오.”
필립의 표정을 본 테사이아의 입가에 삽시에 미소가 번졌다. 그녀가 눈을 빛내며 스튜를 홀짝였다.나세르가 미소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예. 모든 공격을 막아내려 하시니까요. 가벼운 차림이실 때는 그게 맞습니다만, 그걸 걸친 채로는 그러실 필요가 없어요.”
“그런 얘기라면 우리 나리의 가르침만으로도 충분히-”
“메브, 아니, 고티어 경께선 물론 대단한 실력을 지닌 기사이시지만, 방패를 다루지는 않으시죠. 하지만 아시다시피, 전 아니고요.”
지금 필립의 왼팔에 끼워져 있는 방패는, 본래 나세르가 사용하던 것이었다.
연 방패를 적당히 축소한 형태였고, 이안의 장검이나 메브의 양손 검과 마찬가지로 제국 강철에 진은을 섞어 만든 명품이었다.
공격 마법이 새겨져 있진 않았지만 대신 마법을 일정 수준 중화시킬 수 있었다. 심지어 중위 이하의 마법은 튕겨 내 버리는 것도 가능했다.
신성 스킬이 증폭되는 건 덤으로 느껴질 정도의 옵션이었다.
“주제넘은 소릴 지껄이는군.”
필립의 미간이 좁아지는 가운데, 나세르를 노려보던 샬롯이 씹어 뱉었다.
“반대쪽 귀도 반만 남고 싶은 모양이지.”
“…도움을 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무례했다면 죄송합니다, 경.”
선선히 고개를 숙인 나세르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스튜를 우물대며 그를 지켜보던 이안이, 비로소 툭 내뱉었다.
“야.”
“예, 나리.”
“너, 얼마나 잘 싸우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