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235
235화
“…….”
스펠로 경은 두툼한 미간을 찌푸리며 저만치의 마차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미간이 좁아진 건, 저 크고 단단해 보이는 마차의 모든 부분이 범상치 않아서였다.
은색 마갑을 걸친 백마 두 마리도. 그 뒤에 앉은 갈색 피부의 마부와 그 옆에 앉은 중무장한 수인. 그리고 저들이 등장한 시기까지.
심지어 여긴 테센으로 이어지는 길목이 아니던가.
“어쩌시겠습니까? 검문부터 할까요?”
그의 곁에 선 부관이 물었다. 말을 탄 건 그와 부관, 둘뿐이었다.
스펠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관이 말을 한 걸음 앞으로 몰았다.
부관의 얼굴에 긴장이 묻어나는 건, 그 역시 저 마차가 범상치 않다 여기기 때문일 터였다.
“마, 마차를 멈추고 신원을 밝히시오!”
곧 부관이 소리쳤다.
“이곳은 크랄렌 공작께서 다스리시는 땅이오! 절차에 따르지 않는다면 더 이상 들어오실 수 없소!”
마차는 멈추지 않았다. 그저 오르막을 오르는 속도가 조금 느려졌을 뿐이었다. 부관이 침음하는 가운데, 마부석 한 쪽에 앉아 있던 수인이 일어섰다.
“…….”
수인답게 크고 단단한 체구. 목덜미까지 돋아난 갈기가 바람결에 흔들렸다.
그리고 그녀의 주황색 눈동자는 부관이 아니라 스펠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상당한 거리가 있음에도,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절로 긴장감이 돋아났다.
스펠로의 한쪽 눈매가 꿈틀댈 찰나.
“크랄렌 공작의 병사들인가?”
수인이 서늘하게 내뱉었다. 그리 크지 않음에도 스펠로의 귀에까지 또렷하게 박히는 목소리였다.
부관에게 물러나라 눈짓한 스펠로가 숨을 고르며 앞으로 말을 몰았다. 그는 자신의 긴장을 드러내지 않으려 더 힘껏 소리쳤다.
“그렇소! 나는 라클리프의 정당한 지배자이자 푸른 함대의 주인이신 내해의 수문장, 에드워드 크랄렌 공작 각하를 섬기는 기사, 스펠로요!”
“훌륭하군.”
수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공작의 이름을 듣고도 전혀 주눅 든 기색이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를 공작께 안내하시오, 스펠로 경. 안에 타고 계신 분들이 그분께 용무가 있으시니.”
“…….”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한 말투에, 스펠로의 미간이 더 좁아졌다. 부관과 눈빛을 교환한 그가 내뱉었다.
“나는 공작 각하의 기사이며, 그분의 명령을 그 무엇보다도 우선해야 할 의무가 있소. 대체 어떤 분들이 타고 계시기에 이토록 당당하게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지 모르겠군.”
“병사들을 물려 길을 트고, 말에서 내려 기다리시오. 귀하들이 내려다보며 들을 이름이 아니니.”
“……”
스펠로의 볼에 힘줄이 돋았다. 수인을 바라보던 부관이 속삭였다.
“어, 어쩌시겠습니까…?”
“…병사들을 물려라. 길을 터.”
스펠로가 말 머리를 돌렸다. 내심 화가 났지만, 동시에 그보다 더 큰 호기심이 일었다.
대체 마차에 누가 타고 있기에 저토록 자연스럽게 헛소리를 늘어놓을 수 있는지.
물론 기대에 부응할 정도가 아니라면, 저들이 누구건 오늘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할 터였다.
그의 말 한마디면, 잘 훈련된 병사들이 저들을 걸레짝으로 만들어 놓을 테니까.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저 수인의 목은 그가 직접 칠 생각이었다.
다각- 다각-
병사들과 보급품을 실은 마차가 길 밖으로 물러나는 가운데, 천천히 오르막을 오른 마차가 스펠로와 부관의 앞까지 다가왔다.
둘이 말에서 내리는 것까지 확인한 수인이 비로소 손가락을 튕겼다. 갈색 피부의 마부가 고삐를 당겼다.
마차가 한복판에서 멈췄다. 그사이 스펠로와 부관, 그리고 늘어선 병사들까지 찬찬히 눈에 담은 수인이 뒷짐을 지며 입을 열었다.
“안에 계신 분들을 소개하겠소. 찬란한 여신의 사도이자 어둠을 밝히는 빛의 한 가닥, 정화대의 일원인 고티어 경과 나세르 경.”
“……!”
그리 크지도 빠르지도 않은 목소리였지만, 그로 인한 파장은 거대했다. 스펠로와 부관은 물론 병사들까지 석상처럼 굳어진 것이다.
하필 이런 시기에, 그 악명 높은 이름을 듣게 됐으니까.
“또한.”
하지만 수인의 말은 이제야 시작된 참이었다.
“끝없는 지식의 탐구자이자 생명수의 막내딸. 죽음의 세례를 받고 눈뜬 자. 최연소이자 최후의 원로이신 텐시아 아이나스 공이 함께하고 계시며.”
원로 요정이라고…?
스펠로가 참고 있던 숨을 들이켰다. 도무지 현실성이라고는 없는 말들이었다. 정화자들은 그렇다 쳐도, 중앙이나 남부에 있어야 할 귀쟁이가 왜 서부에 있단 말인가.
더 기가 막힌 건, 소개 순서로 봤을 때 본론은 이제부터인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이들은 모두, 한 분의 신성한 과업을 돕는 중이시니. 모두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시오.”
그 예상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덧붙인 수인이, 좌중을 한차례 돌아보고는 말을 이었다.
“엄정한 여신의 성전사이며 타오르는 여신의 성화를 되살린 불씨의 운반자. 거인 왕국 최후의 징벌자이자, 북부의 진정한 대전사.”
“……!”
지금까지보다 한층 더 또박또박 내뱉는 말에, 스펠로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부관과 주위에 선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다들 눈을 치켜뜨고 입을 벌린 채로 수인만을 주목하고 있었다.
“타락한 고룡의 심장을 찌른 용살자이며, 저 위대하신 백금룡의 공식적이며 유일한 대행자. 또한!”
한순간 버럭 소리친 수인이 스펠로와 병사들을 싸늘한 눈빛으로 돌아보았다. 아직도 그들이 무릎을 꿇지 않은 것에 불쾌함을 느끼는 게 분명했다.
저도 모르게 한쪽 무릎을 꿇을 뻔했던 스펠로는 황급히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야말로 충격적이었지만, 저 말만 듣고 공작의 기사인 그가 무릎을 땅에 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애써 눈에 힘을 주며 수인의 번뜩이는 시선을 마주했다.
슬쩍 송곳니를 드러낸 수인이 말을 이어갔다.
“흡혈 일족을 멸족시킨 루 사드의 구원자이며, 공허에서 현신한 악마를 물리치고 부패와 역병을 정화한 초인, 이안 호프 경이시오!”
“…….”
말을 마친 수인이 고개를 살짝 치켜들었다. 사위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말들이 콧김을 뿜는 소리만이 흐릿하게 번질 따름이었다.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보던 스펠로가, 마른 침을 삼키며 내뱉었다.
“그 모든 말을… 증명할 수 있으시오?”
“…….”
스펠로를 뚫을 듯 내려다본 수인이 이윽고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뒤편,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다소 멍한 얼굴이던 마부가 화들짝 눈을 깜빡였다.
수인이 마차 쪽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마부가 마부석 뒤편의 간이 창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러나 그가 뭔가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끼이익-
기다렸다는 듯 마차의 한쪽 문이 열렸으니까.
뒤이어 빛바랜 은발에 새하얀 피부를 가진 요정이 고개를 살짝 치켜든 채로 모습을 드러냈다.
낡은 천 옷 위에 무두질한 가죽으로 만든 수수한 방어구들을 걸친 채였지만, 타고난 게 분명한 그녀의 기품을 가릴 수는 없었다.
마차에서 내린 그녀는 스펠로나 병사들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문 옆에 섰다.
“……!”
뒤이어 두건을 깊이 눌러쓴 둘이 마차에서 내린 순간, 스펠로의 눈에 비로소 커다란 파장이 번졌다.
기사임과 동시에 루 솔라의 신도인 그는 저 로브가 대교회의 상징임은 물론, 그 아래로 육중한 갑옷까지 걸치고 있음을 단숨에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저들은 정말 교단의 정화자인 게 틀림없었다.
두 정화자도 요정의 옆에 나란히 서는 가운데.
저벅-
스펠로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마차에서 내리는 남자에게로 자연스럽게 빨려 들어갔다.
검은 머리칼과 눈동자. 가면을 쓴 것 같은 무표정한 얼굴. 판금과 사슬을 엮은 무장은 평범해 보였고, 그건 그의 체구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허리춤의 검이 범상치 않아 보이긴 했지만, 어쨌건 앞선 이들에 비하면 특별히 존재감이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
하지만 원로 요정과 두 정화자는 그를 향해 깍듯하게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본 척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곧 스펠로의 앞에 멈춰 선 그가, 손에 든 서첩을 내밀었다.
“확인하시오.”
스펠로는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증명서를 받아 들었다.
이 모든 게 당연하다는 듯한 그의 태도에서 오히려 더 큰 권위를 느낀 것이다.
증명서의 내용을 눈에 담은 스펠로가, 비로소 탄식했다.
“맙소사, 루 솔라여….”
이건 트라벨가의 교회가 발급하고 북부 자치령의 지배자인 울라프 대공이 직접 날인 한 증명서였기 때문이다. 글자를 새긴 잉크에는 금가루까지 섞여 있었다.
북부에 초인이 나타나 용을 죽였다는 소문은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이건, 눈앞의 이 남자가 바로 그 용살자라는 사실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한 증거였다.
그건 곧, 저 수인이 한 모든 말이 사실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심지어 백금룡의 대행자이기까지 한 북부의 초인이, 정말 원로 요정과 정화자까지 대동한 채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아직도 부족한가?”
수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어깨를 떤 스펠로가 허물어지듯 한쪽 무릎을 꿇었다.
“무,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찬란한 빛에 영광 있으라…!”
그게 신호라도 된 것처럼, 부관을 비롯한 병사들이 줄지어 몸을 숙이기 시작했다. 들고 있던 창은 전부 땅에 내려놓은 채였다.
스펠로의 볼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릴 찰나.
“이곳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공작과 긴히 나눠야 할 대화가 있는데. 안내해 주시겠소?”
이안이 말했다. 고저가 거의 없어서 버석버석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스펠로가 더 깊이 고개를 숙이며 내뱉었다.
“부,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명령을 수행하러 떠나야 합니다. 대신, 존귀한 분을 안내할 병사들을 차출하겠습니다.”
“무슨 명령을 받으셨소?”
“저희는… 테센으로 가고 있습니다. 각하께선 테센에도 타락한 자들의 마수가 뻗쳤으리라 예상하고 계십니다. 해서, 저희는 테센의 상황을 파악하고 인근에 군영을 꾸릴 예정입니다.”
“그럼 이대로 나와 같이 돌아가셔도 되겠군.”
“예…?”
스펠로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며, 이안이 말을 이었다.
“테센의 상황은 이미 정리가 끝났소. 그래서 내가 공작을 만나려 하는 것이고.”
“…….”
스펠로의 입이 다시 한번 설핏 벌어졌다. 이안의 검은 눈을 바라보던 그가, 이윽고 간신히 덧붙였다.
“테센은, 어떻게 됐습니까?”
“테센시는 멸망했소. 우리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이미.”
대답한 건 수인이었다. 눈을 치켜뜬 스펠로의 시선에, 그녀가 덤덤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여기 계신 이안 호프 경께서, 그곳에 뿌리내린 공허의 악마를 물리치고 더럽혀진 땅을 정화하셨지.”
그때, 이안이 스펠로의 앞으로 손을 뻗었다. 굳어진 스펠로와 눈을 마주친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가면서 나눠도 될 것 같은데.”
“…예.”
간신히 대답한 스펠로가 신분증을 고이 접어 머리 위로 들었다. 당연하다는 듯 집어 든 이안이 덧붙였다.
“안내하시오. 스펠로 경.”
***
걸음을 옮기는 병사들은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입가에 번진 안도 섞인 미소까지 감추지는 못한 채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위험하기 그지없던 임무가 고작 마차 호위로 바뀐 데다, 라클리프로 회군하고 있기까지 했으니까.
분명 다른 임무에 다시 투입되긴 하겠지만, 그렇다 해도 본래의 임무만큼 위험하지는 않으리라.
그리고 그건, 마차 옆을 나란히 따르는 스펠로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야말로 역사에 기록될, 위대한 업적입니다.”
샬롯에게 테센에서의 일을 간단히 전해 들은 그가 읊조렸다.
물론, 샬롯의 이야기는 상당 부분이 각색된 채였다. 정화자들이 이안을 죽이러 찾아온 부분은 특히.
그들은 테센 인근에서 이안에게 합류했고, 함께 타락한 의식을 저지한 것이 됐다. 적어도 스펠로가 쓸 보고서에는 그렇게 기록되리라.
“…….”
무표정하게 앉아 있던 이안이, 슬쩍 옆자리의 테사이아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아까부터 조용히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이리라. 이안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도 정보를 어느 정도는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다.
테사이아가 냉큼 입을 열었다.
“스펠로 경.”
“예, 공.”
스펠로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어느새 그의 표정과 말투는 더없이 깍듯해진 상태였다.
“테센으로 지원 병력을 보낸 정도라면, 라클리프는 무사히 모든 위기를 극복했다는 뜻이겠죠.”
텐시아 아이나스의 미소를 지은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어떻게 해낸 것인지 궁금하군요. 테센의 타락자들에게 듣기로는, 이곳에서도 의식이 이루어졌다고 하던데요.”
“그랬습니다. 모든 게 썩어들어갔습니다. 심지어 바닷물까지도. 지하 수로에서는 역겨운 괴물들이 기어 나오고, 놈들에게 죽은 이들은 끔찍한 몰골이 되어 되살아났습니다.”
스펠로의 시선이 저 먼 곳을 응시했다. 경치가 아니라 기억을 훑는 것이리라.
“각하께선 기사들을 이끌고 도시를 누비며 백성들을 구하셨습니다. 내성에 생존자들이 가득해질 정도였죠. 하지만 버티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며칠 뒤 군도에서 지원 병력이 도착했습니다만, 그들 역시 도시로 진입할 수는 없었습니다. 저희는 내성에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악몽 같은 시간이었죠. 죽음이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요.”
게임에선 결국, 그렇게 됐었지.
이안이 속으로 읊조리는 사이, 스펠로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 갑자기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지하 수로를 아래에서 절규가 메아리치고, 곧 도시 전체가 비명에 휩싸이더군요. 괴물들이 내지르는 소리였습니다. 각하께선 기회가 왔다는 것을 깨닫고, 반격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도시를 뒤덮은 저주와 괴물들이 힘을 잃고 있더군요. 그때는 왜 그렇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만….”
스펠로가 일렁이는 눈빛으로 이안의 옆얼굴을 돌아보았다.
“…이제는 이유를 알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