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237
237화
나세르가 무슨 의미냐는 듯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술을 마저 마신 이안이 말을 이었다.
“네 말처럼 우리가 올 걸 알기만 해도 경계하고 의심할 테니까. 굳이 없애려고 노력하지 않을 거다. 대신 반대로 할 거야.”
필립과 슬쩍 시선을 교환한 이안이 덧붙였다.
“그런 자들은, 또 막상 본인이 의심받는 건 못 견디는 법이거든.”
어차피 들어야 할 말이 많은 것도 아니고. 나세르의 고개가 슬쩍 기울어지는 가운데, 이안은 더 덧붙이는 말 없이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그, 설명 정도는 해 줘도 되지 않을까요?”
필립이 조심스럽게 물은 건 그때였다. 눈을 빛낸 나세르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빈 술잔을 채우며,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간단하게만 끝낸다면야.”
“물론이죠.”
냉큼 대답한 필립이 나세르를 돌아보았다.
“소위 착한 기사 나쁜 종자라고 부르는, 가장 기본이 되는 전략이 있습니다. 이번 건 그걸 살짝 응용한 방식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수제자가 따로 없군.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는 나세르를 눈에 담은 이안이, 헛웃음을 삼키고는 다시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
똑똑.
닫힌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번졌다. 명상 중이던 이안이 번쩍 눈을 떴다.
그의 왼손 검지에는 한때 나세르의 것이었던 유물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정신력은 물론 명상 스킬의 레벨도 하나 올려 주는 물건이었다.
나세르는 여기에 그런 옵션이 붙었다는 것도 모를 것 같았지만.
어쨌건 덕분에 이제 명상이 4레벨에 이른 이안은, 어떤 자세나 상황에서도 자유자재로 명상에 빠졌다가 깨어날 수 있게 됐다.
‘최고 레벨을 찍으면 움직이면서도 할 수 있는 것 같던데….’
생각하며 장내를 한차례 확인한 이안이 창문을 열었다.
스펠로의 얼굴이 드러났다.
“곧 도착할 것 같습니다, 경.”
“그래? 알겠소.”
이안의 대답에 가볍게 고개를 숙인 스펠로가 마차를 앞질러 걸어갔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행군은 정오가 지나서까지 멈추지 않았다.
휴식 없는 급속 행군. 물론 그 누구도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집으로 빨리 돌아간다는 데에 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을 터였다.
있다 해도, 행렬 최후미의 마차에까지 들리지는 않았겠지만.
“예정보다 반나절은 일찍 도착하는 것 같군요.”
테사이아의 건너편에 앉은 필립이 나지막이 내뱉었다.
그와 메브는 창문을 닫은 채로도 두건을 벗지 않았다. 적어도 필립은 조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서가 분명했다.
이안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차는 뱀처럼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언덕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저 너머. 잿빛 천장 같은 구름 아래, 검푸른 수평선이 펼쳐져 있었다.
바다였다.
“짠 냄새가 착각이 아니었네….”
테사이아가 멍하니 읊조렸다. 이안 쪽 창문 너머를 홀린 듯 바라보는 채였다. 처음 본 바다에 시선이 사로잡힌 것이리라.
물론, 이안의 감상은 조금 달랐다.
‘이놈의 세상은, 바다도 우울하게 생겨 먹었네.’
겨울 바다처럼 짙은 남색인 수면은, 심지어 그리 고요해 보이지도 않았다.
먹구름 자욱한 하늘과 어우러져 금방이라도 폭풍우가 몰아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쨌건, 게임에서 본 것처럼 시커멓게 죽어 있지는 않았다.
물론, 게임에서와 다른 건 바다만이 아니었다.
“정말 크군요…. 제국 서부의 중심이라더니….”
중얼대는 필립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이안은 해안가로 펼쳐진 정경을 눈에 담았다.
바다에서 이어진 널찍한 수로가, 한복판에 성벽을 품은 채로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덕분에 라클리프는 거대한 인공섬처럼 보이기도 했다.
수로 양 끝에서 뻗어 나온 성벽은 앞바다까지 원을 그리며 이어졌다.
중간중간 솟은 망루와 등대. 거대한 수성 병기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끝에 솟은 여러 개의 해상 수문들은 듬성듬성 이가 빠진 것처럼 열린 채였다.
범선 몇 척이 마침 수문을 통과해 진입하는 중이었다. 좌우로 튀어나온 긴 노가 검푸른 바닷물을 연신 떠밀었다.
그 안쪽, 해안 성벽 아래로 길게 이어진 항구에는 이미 여러 척의 배가 정박해 있었다.
저마다 다른 문양이 새겨진 검은 깃발이 돛대 위에 펄럭였다.
‘검은 군도에서 온 배들인가….’
그리고 그 한복판. 크고 작은 건물들이 빼곡하게 솟은 도시는, 들은 것처럼 여전히 의식의 여파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무너지거나 반파된. 혹은 허물고 다시 짓는 중인 집이 즐비했다.
길가 곳곳에서 흐릿한 검은 연기가 번지고 있기도 했다. 아마도 지하 수로에서 괴물이나 저주의 잔재를 태우고 있는 것이리라.
전체적으로 거무튀튀한 느낌이긴 했지만. 어쨌건 게임일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멀쩡하고, 거대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그때랑 같은 게 아예 없진 않네.’
이안은 도시 끝, 바다와 마주 보게 솟은 커다란 성을 눈에 담았다.
게임에선 3챕터의 보스 중 하나인 역병 공작이 기다리던 장소였다.
물론, 게임과 같은 건 공작과 싸우리란 부분까지였다.
이번에 만나게 될 공작은 그때보다 훨씬 약할 테고, 놈을 만나기까지 겪을 귀찮고 험난한 과정도 없을 테니까.
‘…앞에서 그 개고생을 했는데. 쉽게 갈 수 있을 땐 쉽게 가야지.’
그때, 마차가 굽이진 길을 돌았다. 테사이아가 냉큼 반대편 창문을 여는 가운데, 이안은 등받이에 뒤통수를 기댔다.
아직 도시에 들어서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남아 있었다.
***
퀴퀴한 곰팡내와 탄내가 비린내와 짠 내에 뒤섞였다.
도시가 가까워질수록 콧잔등을 씰룩대던 테사이아의 표정이, 어느 순간 다시 평온해졌다.
아마도 후각이 마비된 것이리라.
다각- 다각-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진 건, 마차가 도시로 이어진 다리 위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스펠로 경이었다.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저는 먼저 내성으로 달려가 보겠습니다. 각하께 상황을 전하고, 귀빈들께서 바로 입장하실 수 있도록 준비해 두겠습니다.”
“알겠소.”
거참 친절하기도 하군.
이안은 내심 읊조리며 대답했다. 스펠로 경은 자신이 인도하는 이들이 공작을 죽이러 왔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이안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진실은 밝혀질 테고, 그때 그걸 믿는 건 이자의 몫이었다.
“귀빈들께선 병사들과 함께 이동하시면 됩니다. 부관이 대신 행렬을 지휘할 겁니다.”
고개를 한 차례 숙인 스펠로가 말을 몰아 달려나갔다.
잠시 느려졌던 마차의 속도가 다시 빨라졌다.
“길을 트시오! 다들 물러나시오!”
행렬 선두에서 부관의 외침이 연신 이어지는 가운데, 마차가 도시로 접어들었다.
이안은 반쯤 열린 창문으로 도시와 시민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길가로 물러난 시민들은, 딱히 일행의 마차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저마다 떠들며 하던 일을 이어나갔다.
본래 꽤 부유한 삶을 살고 있었으련만. 지금은 죄다 난민이 따로 없는 몰골이었다.
하지만 표정이나 행동은 그리 우울하거나 지쳐 보이지 않았다.
그건 관리로 보이는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우렁차게 소리쳐 대며 도시의 수복 작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드네로브의 주민들이 그렇듯. 이들 역시 상황에 적응하고 삶을 이어나가려는 의지로 가득해 보였다.
어쩌면 이런 게 서부 사람들의 특징인 건지도 몰랐다.
북부나 변방과는 또 다른 의미의 강인함.
‘…뭐, 성주를 잃는 것도 금방 극복할 수 있겠네.’
게임에서처럼 죄다 권속이 되어 버린 것도 아니고.
심드렁하게 생각하던 이안의 눈매가 이내 슬쩍 가늘어졌다.
각양각색의 무장을 갖춘 자들이 시민들 사이사이에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병사보다는 도적이 더 어울릴 것 같은 행색들이었다.
“…군도에서 온 자들이군.”
“예. 천벌을 받아야 할 자들이죠.”
필립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이안이 돌아보자, 두건 아래로 드러난 그의 입매가 머쓱한 호선을 그렸다.
“죄송합니다. 옛날 생각이 나서 그만.”
“옛날 생각?”
“아겔 란 남부 국경에 있을 때를 말하는 겁니다. 이젠 정말 아득한 옛날 같군요.”
필립이 덧붙이자, 이안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해적 놈들이 어쩌고 했었지. 그것들이 군도 출신이었나?”
“거기서 쫓겨난 범죄자들과 인근의 해적들이 뭉쳐 만들어진 세력이었습니다. 공식적으로는요.”
필립이 혀를 차며 읊조렸다.
“군도는 그들을 인정하지 않으며, 해적은 극형으로 다스리고 있다고 한다더군요. 하지만 제가 지켜본 바로는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오히려 군도가 그것들의 뒤를 봐주는 게 분명해요.”
“어떻게 확신하는데?”
테사이아가 입술만 달싹여 물었다. 창밖을 응시하는 얼굴은 고고하고 냉정하게 유지한 채였다.
“무장 상태가 늘 좋았거든요. 어딘가에서 인원이 끝없이 보충됐고. 그게 아니라도, 섬 조각들에 모여 사는 자들이 그렇게까지 부강하다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필립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이듯이 고저 없이 이어졌다. 내내 그랬지만, 도시로 들어선 후부터는 다들 특히 더 언행이 흘러나가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었다.
“제국의 지원금을 본인들의 세력 확장에 쓰고 있는 겁니다. 흑해의 괴물들을 사냥하고, 대륙 반대편으로 갈 신항로를 개척하라고 보내 주는 돈일 텐데요. 실제로도 항로 개척은 전혀 성과가 없잖습니까?”
“군도에 대해 아는 게 이렇게 많은 줄은 몰랐는데.”
이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입맛을 다신 필립이 대답했다.
“국경 지대의 병사들이 떠들던 말을 들은 겁니다. 다들 상륙한 해적 놈들에게 원한이 깊었으니까요. 듣자 하니 군도 너머에도 야만인들이 사는 섬이 여럿이라던데. 거기서 인력을 추려서 해적으로 만드는 거랬습니다. 본인들의 영향력을 더 키우기 위해서겠죠. 변방을 침략하는 것도 그래서일 테고요.”
낮게 콧방귀를 뀐 필립이, 군도의 병사들을 바라보며 씹어 뱉었다.
“어쩌면 항로 개척 같은 위험한 임무에도 해적들이나 보내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내해만 잘 지켜도, 제국에선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을 테니까요.”
나라 어쩌고 하던 게, 일종의 약탈 전초기지였단 거군.
이안은 짧게 콧방귀를 뀌었다.
어쨌건, 아예 터무니없는 추론은 아니었다.
게임에서 검은 군도에 가 본 적은 없었지만. 군도 출신인 자들은 기본적으로 도적 기질이 있었다.
이동을 위해 배를 탈 경우, 출항과 동시에 강도로 돌변하는 돌발 이벤트도 있을 정도이지 않았던가.
‘사실상 해적들이 모여 사는 동네란 거지….’
이안은 방금 들은 이야기들을 머릿속에 새겨 뒀다.
남부가 그렇듯, 검은 군도 역시 아는 게 없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애초에 스토리 진행을 위해 필수적으로 방문해야 하는 지역도 아니었다.
하지만 현실이 된 지금은, 언제 예상치 못한 이유로 가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공작을 죽인 뒤에 바로 가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거기다 슬슬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아지고 있기도 하니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들은 기회가 될 때 기억해 둘 필요가 있었다.
다각- 다각-
어느새 마차는 도시 깊은 곳까지 들어서고 있었다. 완만한 오르막길. 마차 뒤편으로 해안가를 감싼 성벽이 보였다. 아까 밖에서 본 내성이 이제 멀지 않았으리라.
다그닥- 다그닥-
앞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진 건 그때였다.
스펠로인가? 생각한 이안은, 곧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마차 근처로 다가와도 말의 속도가 전혀 줄지 않고 있었다.
다그닥- 다그닥-
곧 꽤 고급스러운 남색 정복을 걸친 중년 남자가 마차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 와중에도 마차 쪽을 힐끔 돌아보고 있었는데, 덕분에 이안과도 눈이 마주쳤다.
그야말로 찰나에 불과했지만.
“…….”
이안은 자신과 눈이 마주친 순간 중년인의 눈매가 꿈틀대는 것을 똑똑히 인지할 수 있었다. 그의 이목구비도 선명하게 뇌리에 남았다.
안색이 좋지 않고 신경질적인 느낌이 드는 얼굴이었다. 달리 말하면, 전형적인 주문쟁이의 관상이었다.
곧 마차의 속도가 느려졌다. 뒤이어 또 다른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졌다. 이번에는 아는 얼굴이었다. 스펠로.
“문제라도 있소?”
마차가 멈추는 가운데, 그의 표정을 본 이안이 내뱉었다.
마차 옆에 붙은 스펠로가 입을 열었다.
“그게… 지금 각하께서는 성이 아니라 저택에 계시다고 합니다. 피로 누적으로 잠시 쉬고 계시다고요. 해서, 방금 업무를 대행하던 마티아스 공이 직접 공작저로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습니다.”
아, 역시 주문쟁이군.
슬며시 한쪽 입술을 말아 올린 이안이 내뱉었다.
“그래서?”
“송구스럽습니다만,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절차가 있다 보니… 저도 달리 어떻게 할 수가….”
“설마, 병사들을 앞에 달고 기다리란 얘긴 아니겠지?”
“아. 아닙니다. 병사들은 이대로 복귀해 작업에 투입될 예정입니다. 물론, 저는 여기서 대기합니다.”
“뭐, 그럼 됐소.”
이안이 어깨를 으쓱이며 내뱉었다. 불쾌한 기색도 없이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는 듯 스펠로가 눈을 치켜뜨는 가운데, 그가 덧붙였다.
“길가로 마차를 인도하고, 아무도 근처로 접근하지 못하게만 해 주시오.”
“예. 그러겠습니다. 아량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펠로가 재빨리 대답했다.
뭘 또 아량 씩이나.
이안이 실소를 삼키는 사이, 스펠로가 마차를 인도해 길 가장자리로 향했다. 작은 반원을 그리며 정차해서, 자연스럽게 마차의 방향이 바뀌었다.
창밖, 마차 뒤편으로 내성 성문을 통과하는 병사 행렬과 높이 솟은 성이 얼핏 보였다.
마차에서 떨어지는 스펠로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이안이 다시 창문을 닫았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군.”
테사이아도 창문을 닫는 가운데, 메브와 거의 동시에 두건을 벗은 필립이 내뱉었다.
“그러게요. 시간이 조금 걸리겠군요.”
공작이 그들을 기다리게 하리라 이미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단의 성자 대행이 그 악명 높은 정화자까지 이끌고 나타난 셈이었으니까.
이안을 만나는 걸 피할 수는 없겠지만, 최악의 상황을 대비할 시간은 필요할 터였기 때문이다.
이미 켕기는 게 있으니 더더욱 신중해질 수밖에 없으리라.
“누가 오면 알려줘, 야옹아.”
마부석 쪽 간이 창문을 살짝 연 테사이아가 속삭이는 가운데. 이안이 느슨하게 걸치고 있던 장비들을 딱 맞게 조율하기 시작했다.
그게 신호라도 된 것처럼 일행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테사이아는 요정의 세검과 투척용 단검들이 달린 가죽띠를 몸에 둘렀고, 메브와 필립은 로브를 아예 벗어버리고는 갑옷을 재점검했다.
“저택이 따로 있을 줄은 몰랐는데.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군. 이리로 올지. 아니면 우리를 불러들일지.”
양손검을 등에 사선으로 고정하며 메브가 읊조렸다. 팔뚝 갑주를 조이던 필립이 곧바로 대답했다.
“저택으로 부를 것 같습니다. 여긴 보는 눈이 너무 많아요.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상황도 염두에 두고 있을 겁니다. 공허의 표식이 담긴 흉물을 성에 보관하고 있을 것 같지도 않고요.”
“이젠 정말 하산해도 되겠군….”
이안이 중얼댔다. 진은 강철 방패를 등딱지처럼 짊어지던 필립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같은 생각이란 얘기야.”
“저택으로 부른다면, 여차하면 우릴 죽일 생각도 있단 거겠군….”
메브가 서늘하게 중얼댔다. 다시 로브를 어깨에 걸치는 그녀의 눈매는, 어느새 전투가 시작되기라도 한 것처럼 날카로웠다.
허리를 이리저리 돌리던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하긴. 여긴 기분 나쁜 마력이 잔뜩 남아 있으니까. 소란이 너무 커지지만 않으면 들킬 염려는 없겠네.”
“공작도 어지간하면 그럴 생각까진 없을 거다. 우릴 죽이는 건, 뒤처리가 귀찮을 테니까.”
다시 등받이에 기대며 말한 이안이,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그런 만큼, 막상 시작하면 더 확실하게 하겠지.”
“방심하지 말란 거지? 이제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내뱉던 테사이아가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샬롯이 마부석 쪽 창문을 두드렸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빨리 왔는데….
이안이 내심 읊조리는 가운데, 로브의 매무새를 가다듬은 메브와 필립이 두건을 뒤집어 썼다.
다그닥- 다각-
곧 달려온 말발굽 소리가 마차 근처에서 멈췄다. 조용해진 것도 잠시, 마차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창문을 열자 이제는 익숙한 스펠로의 얼굴이 드러났다. 물론, 이번에는 그 혼자가 아니었다.
“…….”
스펠로의 뒤에 선 기수를 확인한 이안의 눈매가 설핏 꿈틀댔다.
수인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