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252
252화
눈을 감은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손가락 사이로 스며들던 눈부신 빛이 이내 잦아들었다. 장내를 휩쓸고 지나간 신성력이 사방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
눈을 뜬 이안이 몸을 날렸다.
아르케아스, 아니 엘리야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허물어지고 있었다.
촤악-
이안은 그녀의 몸이 땅에 닿기 직전에, 낚아채듯 붙잡아 안아 들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지만 거의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아르케아스가 부탁했으니까.
‘…정말 그래서일 뿐인가?’
엘리야를 어깨 위까지 치켜들며, 이안이 미간을 좁혔다.
방금 그가 느낀 두통은, 일종의 사념에 가까웠다. 그리고 거기엔 묘한 애틋함도 섞여 있었다. 엘리야를 본 순간 더 짙게 느껴진 감정이었다. 아마 몸이 먼저 움직인 것도 그 때문이리라.
“끝난… 겁니까? 떠나셨나요?”
필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일행들은 아직도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이안이 대답했다.
“그래. 가셨다.”
“하….”
그 말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일행들이 풀썩풀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아르케아스와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건 이안이건만.
다들 전투라도 끝낸 것처럼 기진맥진해 보였다.
“평생 오늘을 잊지 못할 겁니다. 백금룡을 만난 것으로도 모자라… 그분께 이런… 영광스러운….”
필립이 피로와 감격이 뒤섞인 목소리로 읊조렸다. 다들 고개를 주억거렸다. 테사이아조차도 마찬가지였다.
“듣던 것보다 훨씬 고결한 분이셨다….”
“…왜 위대하다고 불리는지도 알겠군.”
“심지어… 자비로우시기까지 하셨고요.”
혼잣말 같은 감상을 늘어놓는 일행을 눈에 담던 이안이, 툭 덧붙였다.
“방금, 뭔가 다른 게 느껴지진 않았고?”
“찬란하고 따스한 신성… 말고 도요?”
필립이 나른하게 되물었다.
“아냐. 아무것도.”
고개를 저은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아무래도, 두통을 느낀 건 그 뿐인 모양이었으니까.
‘백금룡의 사념 같은데. 그게 어떻게 나한테도 전해진 거지.’
어쩌면 서로의 기억을 오갔던 여파인지도 몰랐다. 잠깐이지만 하나로 이어졌던 의식이 공명한 것이다. 물론, 정확한 이유나 원리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추측만 할 뿐.
분명한 건, 신성력이 아르케아스에게 고통을 준 것 같다는 사실 뿐이었다. 어째서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무슨 긴고아라도 차고 있나.’
아르케아스의 기억에서 본 조여 들어오는 빛의 고리를 떠올린 이안이,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당장은 알 수도, 중요하지도 않은 부분이었다.
지금은 그보다, 그의 어깨에 기댄 채로 축 늘어져 있는 이 난쟁이가 차라리 더 중요했다.
“…….”
엘리야는 전혀 의식이 없었다. 잠든 게 분명했다. 쌔근쌔근한 숨소리가 전해졌다. 이안은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살짝 벌어진 입가가 반짝였다.
‘…이거, 침인가?’
분명 이목구비는 그대로이건만.
인상이 전혀 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아르케아스가 깃들어 있을 때는 신비로워 보였는데, 지금은 평범하다 못해 어리숙해 보였다.
‘영… 믿음직 스럽진 않은데.’
이안은 짧게 입맛을 다셨다.
아무리 의뢰라 해도, 이 녀석의 뒤치다꺼리나 하는 상황은 사절이었다.
하던 대로, 강하게 키워야겠군.
내심 중얼대며 식탁으로 돌아간 이안이, 한 손으로 술잔을 들었다.
“루 솔라여….”
의자에 축 늘어진 일행들은 저마다 백금룡과의 대화를 곱씹는 얼굴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소리 없이 웃은 이안이 잔에 남은 술을 전부 들이켰다. 역시 훌륭한 맛이었다. 잔을 내려놓은 그가 식탁 한복판의 술병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마셨는데도, 아직 일행이 한 잔 정도씩은 충분히 더 나눠 마실 만큼이 남아 있었다.
“나머지는, 내일 밤에 마시는 게 어떻겠소?”
이안이 말했다. 일행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돌아왔다.
“…좋은 생각 같은데.”
이윽고 메브가 대답했다. 냉큼 일어난 필립이, 마개와 술병을 잡았다.
“술은 제가 챙겨 나가겠습니다.”
그 말이 신호가 된 것처럼, 일행들이 주섬주섬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다들 가장 먼저 아르케아스에게 받은 영약부터 품에 쑤셔 넣고 있었다.
웅웅 대는 흑검을 아공간에 던져 넣은 이안은, 정화자의 망토로 엘리야를 감쌌다. 체구가 워낙 작은 덕분에, 그녀는 망토에 완전히 가려져 발끝도 드러나지 않았다.
조금 수상해 보이긴 하지만, 설마하니 난쟁이를 품에 안고 있으리란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하리라.
“술이 생각보다 독한 모양입니다. 일어나니 취기가 느껴지는데요.”
일어선 나세르가 중얼댔다. 이안이 몸을 돌리며 대꾸했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라.”
숙취를 걱정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다들 한숨 자고 일어나면, 오히려 몸이 가뿐해질 터였다. 신의 물방울은 술의 형태를 한 회복 약이나 다름없으니까.
“필립, 돌아가면 방패만 들고 마당으로 내려와라.”
계단을 내려가 예배당으로 들어서면서, 이안이 문득 내뱉었다.
술병을 신줏단지처럼 품에 안은 필립이 고개를 갸웃했다.
“방패를요? 왜요?”
이 녀석도 술기운이 도는 모양이었다. 조금의 취기조차 느끼지 못하는 이안은, 내심 부러워하며 입을 열었다.
“기본적인 방패술을 알려 줘. 나도 이젠 쓸 줄 알아야 하니까.”
“아…! 그렇지요!”
술이 확 깬 얼굴이 된 필립이 덧붙였다.
“이따, 그 방패를 다시 한번 자세히 보여주시면 안 됩니까? 전설에서나 나올 법한 방패인데, 제대로 보고 싶어서요.”
“어차피 싫어도 자주 보게 될 거다. 이번 여정 내내, 나한테 방패 쓰는 법을 전수해 줘야 하니까.”
“저야 영광이죠. 나리께서 제게 배울 게 있으시다니. 나세르에게 배운 기술들까지 전부 전수해 드리겠습니다.”
듬직하네, 새끼.
피식 웃으며 교회의 대문을 연 이안이, 곧이어 멈칫했다.
“……?”
다시 걸음을 옮기는 그의 미간이 절로 좁아졌다.
“오, 오오… 나오신다….”
“찬란한 빛에 영광 있으라….”
“빛이여….”
계단 아래에서 입구와 마차를 지키던 스펠로와 병사들이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아하니 기도를 올리는 모양이었다. 어느새 거리 곳곳에 모여든 주민들도, 마찬가지로 무릎을 꿇고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아쥔 채였다.
“이게 무슨….”
메브가 중얼대는 가운데, 계단을 내려가는 이안의 입가에 헛웃음이 번졌다.
“작은 선물이라더니….”
백금룡이 마지막 순간 신성을 뿜어낸 이유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일행이 아니라, 도시 사람들에게 보여 주려는 것이었으리라.
“…찬란한 여신께, 계시라도 받으신 것입니까?”
이안이 다가서자, 일어선 스펠로가 물었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더 공손해진 말투였다.
일행이 안에서 만난 게 백금룡이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왜 다들 모여 있소?”
이안이 대답 대신 되물었다. 고개를 숙인 병사들이 서로를 돌아보는 가운데, 스펠로가 대답했다.
“교회 안에서 터져 나온 빛을 보고 모인 것이지요. 빛의 고리가 도시 상공을 훑고 흩어졌습니다. 경께서 올린 기도에, 여신께서 응답을 주신 것 아니었습니까?”
“뭐…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굳이 오해를 바로잡을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어쨌든 루 솔라의 신성력인 건 사실이지 않던가.
“역시…. 여신께서 서부를 버리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감사합니다, 경. 내일 이 사실이 알려지면, 많은 이들이 안심하게 될 겁니다.”
“감사는 정화자들에게 하시오. 그들의 공이니까.”
이안이 옆으로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이왕 써먹기로 한 김에, 확실히 시선을 돌릴 생각이었다.
“그, 그렇습니까…?”
스펠로가 놀란 듯 바라보는 사이, 말없이 그를 지나친 일행들이 차례로 마차에 올랐다.
마지막으로 마차에 탄 이안이, 엘리야를 옆자리의 샬롯에게 건네며 스펠로를 돌아보았다.
“부탁할 게 있소만.”
“말씀하십시오.”
“말 한 마리와 지붕 달린 마차를 구해 주시겠소? 눈에 안 띄는 걸로. 이 마차는, 너무 눈에 띄어서 말이오.”
“내일 오전까지 구해 마당에 가져다 놓겠습니다.”
스펠로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그리고 범죄자들이 좋아할 만한 장소가 어딘지도 알고 싶은데. 도시 구석이든, 성벽 밖이든.”
“예…?”
이어진 말에, 스펠로가 고개를 들며 되물었다. 이안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인적이 드물고 외진 곳 말이오. 다소간의 소란이 일더라도 아무도 오지 않을 만큼 으슥한.”
“그런 곳은 왜….”
“그래서, 모르시오?”
“…몇 군데 알긴 합니다만.”
“잘 됐군. 그중에서 가장 으슥하고 외진 곳으로 알려 주시오. 나 말고, 마부에게. 돌아가는 동안.”
“예. 알겠습니다.”
스펠로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대답했다. 이안의 의도를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물론, 이안은 설명해 줄 생각이 없었다.
“고생하셨소. 돌아가면 푹 쉬시오.”
싱긋 미소 지은 이안이 창문을 닫았다. 마차가 기다렸다는 듯 출발했다.
오늘 밤, 교회에서 일어난 빛의 축복을 널리 알릴 시민들을 뒤에 남긴 채로.
***
“……!”
엘리야는 눈을 뜸과 동시에 벌떡 상반신을 일으켰다.
푹신한 침대. 다소 퀴퀴한 냄새가 나는 이불이 그녀의 얼굴에서 흘러내렸다. 방에 가득한 술 냄새와 곰팡내, 짠 내가 느껴졌다.
“…….”
동그랗게 뜬 그녀의 두 눈은, 좌우의 색이 달랐다. 한쪽 눈은 선명한 파란색이었고, 반대쪽 눈동자는 연한 갈색이었다.
서로 다른 색의 두 눈에, 널찍한 방의 전경이 담겼다. 옷과 이불, 각종 병장기가 어지럽고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었다.
“딱 적당하게 일어났군, 엘리.”
“……!”
고저 없는 목소리가 번졌다. 화들짝 고개를 돌린 엘리야가, 비로소 창가에 놓인 쇼파를 눈에 담았다.
정확히는 그 위에 앉아, 느긋하게 팔목 보호대의 고리를 채우고 있는 무표정한 얼굴의 남자를.
잠시 멍하니 입을 벌렸던 그녀가, 이윽고 내뱉었다.
“그분이시군요. 북부의 초인, 용살자….”
“내 소개를 할 필요는 없겠군.”
남자, 이안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엘리야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였고, 말투도 그리 친절하지 않았다. 심지어 하던 일을 멈춘 것도 아니었다. 팔뚝을 만지작대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엘리야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제가, 독립할 때가 된 건가요?”
이안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의 검은 눈이 비로소 엘리야를 마주 보았다. 빨려 들어갈 것처럼 깊고 윤기 없는 눈동자.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설마, 백금룡께 아무 얘기도 듣지 못한 건 아니겠지.”
“그게….”
대답하려다 멈칫한 엘리야가, 이윽고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제가 둥지 밖으로 나온 이상… 저는 더 이상… 그분과의 일을 이야기할 수 없는데요….”
“그건 네가 용의 아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들에게나 지켜야 하는 규칙 아닌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내뱉은 이안이, 턱을 까딱이고는 덧붙였다.
“그게 아니라도 나는 예외로 해야지. 직접 그분의 부탁을 받았고, 그분의 대행자이기까지 하니까.”
“어… 그런가요…?”
엘리야의 고개가 저도 모르게 기울어졌다. 생각해 보니 틀린 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 마음대로 예외를 둬도 되는 건가…?
엘리야가 내심 중얼대는 사이, 이안이 말을 이었다.
“넌 이제 내 책임이야. 이건 중요한 부분이고. 그러니 대답해 주면 좋겠군. 지금 상황에 대해서, 제대로 전달받은 게 맞나?”
“…독립하게 될 날이 멀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이윽고 이안의 논리가 옳다고 결론 내린 엘리야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게 언제인지 확답을 주시지는 않았죠. 대행자를 다시 만날 날이 언제일지,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확실하지 않다고 하셨거든요. 대행자께선, 자신의 부탁이라도 무작정 들어주는 분이 아니시라고요.”
“…별 말씀을 다 하셨군.”
이안이 공기 섞인 목소리로 읊조렸다. 여전히 표정 변화는 크지 않았지만, 엘리야는 그가 웃었다는 걸 눈치챘다.
“어쨌든,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니라는 거네.”
“네. 일단은요.”
“그럼 대화가 편해지겠군.”
시선을 돌린 이안이, 다시 하던 일을 이어가며 말을 이었다.
“내가 널 제도까지 데려갈 거다. 미리 말하지만, 평화로운 여정이 되지는 않을 거야. 위험한 일도 많을 테고, 제도까지 직행하지도 않을 거니까. 먼 길을 빙 돌아서 가게 될 거야.”
“빙 돌아가신다고요…?”
“그래. 문제 있나?”
“그럴 리가요…!”
엘리야의 목소리가 순간 커졌다. 이안이 슬쩍 미간을 좁히며 그녀를 돌아보는 가운데, 그녀가 콧김을 뿜으며 말했다.
“저는 제가 기억하는 이래 단 한 번도 둥지 밖으로 나간 적이 없거든요. 세상은 오로지 책과 이야기로만 접했죠. 그 한복판을 거닐게 됐는데 불만이 있을 리가요.”
“하….”
서로 다른 색의 눈을 똑같이 반짝이며 말하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본 이안이, 짧은 탄식을 흘렸다. 입맛을 다신 그가 말을 이었다.
“성년이 지났다고 들었는데. 맞냐?”
“네. 맞아요.”
“네가 뭘 기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실은 네 기대와는 여러모로 다를 거다. 그러니까, 들뜨지 마.”
고저가 없어 건조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널 보모처럼 돌봐줄 생각은 없다. 너도 네 몫을 해야 할 거야. 물론, 사고도 치지 마라. 난 귀찮아지는 건 딱 질색이야.”
하지만 엘리야는 전혀 상처받지 않았다.
“정말… 들은 그대로시네요.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녀는 오히려 안도감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일어섰다.
“내 얘기를 많이 들었나 보군.”
그가 자신의 왼팔을 휘휘 돌렸다. 시선은 자신의 팔에 둔 채였다.
“물론이죠. 그에 대해 말씀드리기 전에….”
대답하며 침대 밖으로 나간 엘리야가, 이안을 바라보며 멈춰 섰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엘리야 마이어입니다. 여정 동안 불편함이 없으시도록 최선을 다해 모실게요. 대부님.”
“…….”
엘리야가 깍듯하게 무릎을 굽혔다. 이안의 팔이 우뚝 멈췄다. 미간을 찌푸린 그가, 고개만 돌려 엘리야를 바라보았다.
“방금, 뭐라고?”
“정식으로 인사-”
“아니, 마지막만.”
서로 다른 색의 눈을 깜빡이며 이안을 올려다 본 엘리야가, 이윽고 내뱉었다.
“…대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