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253
253화
한차례 입술을 달싹인 이안이, 이윽고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로 내뱉었다.
“내가, 왜 네 대부지?”
“그분의 대행자이시니까요. 저는 그분의 딸이니, 대행자이신 이안 호프 경께선 당연히 제 대부님이 되시죠.”
엘리야가 똑 부러지게 말했다. 그녀를 내려다보던 이안이 입을 꾹 다물며 눈을 감았다. 그가 한숨을 삼키고 있음을 알 리 없는 엘리야가 말을 이었다.
“그분께서도 당부하셨어요. 용은 당대에 단 한 명의 대행자만을 두니, 대부님을 만나게 된다면 자신과 같이 생각하고 예를 다하라고요.”
“…그리고?”
눈도 뜨지 않은 채, 이안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내뱉었다.
“또 무슨 얘기를 들었지?”
“말씀드렸다시피, 대부님에 대해서 들었죠. 휴식에 들어가신 후로도, 자주 제 머릿속에 속삭이셨거든요. 아주 오랜 시간 기다려 온, 완벽한 조건의 대행자를 찾으셨다고요. 그 조건이 무엇인지까지는 말씀해 주지 않으셨지만….”
다시 눈을 뜬 이안이 엘리야를 내려다보았다. 놀란 눈빛이 아닌 걸 보니, 그 조건이 무엇인지를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궁금했지만, 엘리야는 내색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 외에도 많은 걸 알려 주셨죠. 덕분에 대부님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던 거예요.”
“또 뭐라고 했는데?”
“……!?”
소파 아래에서 목소리가 튀어나온 건 그때였다. 화들짝 놀란 엘리야는, 그제야 이안의 소파 아래에 빼꼼 튀어나온 하얀 얼굴을 발견하고는 눈을 치켜떴다.
‘왜 저기 누워 있지…?’
그리고 난 왜 저걸 못 봤지?
생각할 찰나, 요정이 덧붙였다.
“묻잖니. 백금룡께서, 이안에 대해 또 뭐라고 하셨냐구.”
“어… 무뚝뚝하고, 무모하고, 철저하시다고요. 고약한 농담도… 즐기시고요.”
“역시. 위대한 분은 안목도 남다르시네. 그리고?”
“그리고….”
요정이 씩 미소 짓는 가운데, 엘리야가 다시 이안에게 시선을 돌리며 덧붙였다.
“언행에 상처받지 말라고요. 마음은 따듯하고 선한 분이시니까.”
“환장하겠군….”
비로소 이안의 입에서 장탄식이 번졌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그가, 이번에는 오른팔의 갑주를 조율하기 시작하며 입을 열었다.
“나와 같이 다니는 동안에는, 내 규칙에 따라야 할 거다.”
“네. 대부님.”
“첫 번째는 날 그렇게 부르지 않는 거야.”
“…그럼, 어떻게 부르나요? 이안 경? 이안 님…?”
“그 정도면 충분하겠네.”
이건 너무 버릇없는 것 같은데.
엘리야는 내심 생각했지만, 이안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개만 까딱였다.
“부럽네, 이안. 대자가 생긴 거잖아.”
“…….”
이어진 요정의 말에 이안의 미간이 다시 좁아졌다. 그는 코로 긴 한숨을 내쉴 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곧이어 요정이 미끄러지듯 빠르게 소파 밖으로 기어 나왔다. 일어선 그녀가 옷을 탁탁 털며 엘리야를 마주 보았다. 늪 같은 눈동자가 장난기를 가득 머금고 반짝였다.
“아쉽네. 너희 둘이 같이 다니는 걸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을 것 같은데. 내가 아는 난쟁이들은 죄다 괴팍하고 이상했거든. 그런데 넌, 예의 바르게 이상한 편이네. 반 토막.”
이상한 요정한테 이상하단 말을 듣다니.
생각하며, 엘리야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누구세요?”
“테사이아 에레노스라고 해. 아마도.”
어깨를 으쓱인 요정, 테사이아가 다소 건방져 보이는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요정 일족의 최연소 원로지.”
“원로… 요정이시라고요?!”
이어진 말은 엘리야의 큰 눈을 더 커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반응이 만족스러운 듯, 테사이아가 턱을 슬쩍 치켜들었다.
“그래. 따끈따끈하지. 다시 태어난 지 한 해도 지나지 않았거든.”
“하지만… 어떻게요? 마력의 황혼기가 찾아온 이래 모든 생명수가 생장을 멈춰서, 더는 꽃을 피우거나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들었는데요.”
“어머. 박식하다더니, 정말 아는 게 많구나?”
눈을 동그랗게 뜬 테사이아가,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그건 내가 아니라 이안에게 물어야 돼. 난 그냥 죽다 살아난 것밖에는 한 게 없거든.”
엘리야의 반짝이는 눈이 이안에게로 돌아갔다. 시선을 느낀 듯 입맛을 다신 이안이, 손짓을 멈추지 않은 채 내뱉었다.
“변방에 이미 다 자란 채로 죽어 있던 생명수가 있었다. 끔찍한 의식으로 타락한 채로 되살아났지. 하지만 본래 품고 있던 씨앗은 그대로 남아 있었어.”
“…변방의 밀림에 다 자란 생명수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론이 사실이었던 거군요. 요정들에게 알려진다면-”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변방은 지금 검은 벽의 광기에 뒤덮여 있을 테니까.”
이안이 말을 잘랐다. 다소 귀찮은 듯한 말투였다. 잠시 눈을 깜빡인 엘리야가, 이윽고 덧붙였다.
“검은 벽의 광기가, 변방 지역 전역을 물들이고 있다고요? 어쩌다가요?”
이안의 입에서 옅은 한숨이 번졌다.
“…대자가 생긴 것도 기가 막힌 데, 물음표 살인마이기까지 했군.”
“그게 무슨 뜻인가요?”
“두 번째 규칙이 생겼다는 뜻이지.”
내뱉으며 엘리야를 바라본 이안이, 이번에는 오른팔을 휘휘 돌리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질문은, 하기 전에 허락을 구하고 해라. 백금룡께선 네 질문에 전부 대답해 주셨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야.”
“네…? 아니, 어… 네.”
입술을 달싹이던 엘리야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입술 끝만 당긴, 건조한 미소였다.
“똑똑하다더니. 역시 배움이 빠르네.”
이게 그 고약한 농담인가…?
엘리야가 멍하니 생각하는 그때, 이안이 옆의 식탁에 얹어져 있던 검을 집어 들며 덧붙였다.
“조금 더 쉬고 있어라, 엘리. 우리는 잠시 나갔다 올 테니까. 아래층에 간단한 식재료와 부엌도 있으니까, 출출하면 뭐라도 찾아 먹고.”
“어딜 가시는… 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물으려던 엘리야가 고개를 숙였다. 깔깔 웃은 테사이아가 입을 열었다.
“아주 못된 야옹이가 있거든. 그 녀석을 끌고 와서, 우리가 원하는 이야기를 할 때까지 괴롭힐 거야. 그 뒤엔, 아마도 죽일 거고.”
“…….”
놀러 가는 듯한 말투였지만, 내용은 무시무시했다.
말문이 막힌 엘리야가 입만 벌리는 사이, 검을 허리에 찬 이안이 문으로 걸음을 옮기며 덧붙였다.
“모르는 사람들이 들어와도 놀라지 마. 적어도 보자마자 네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은 내 동료들이니까, 안심해도 돼. 필립이란 녀석이 있는데, 뭔가 필요하면 그 녀석에게 부탁하고. 어지간한 건 다 들어줄 거야.”
“예. 그런데… 이안 님, 하나만 더 여쭤봐도 되나요?”
엘리야가 재빨리 덧붙였다. 문을 열던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인 엘리야가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만약, 제 이름을 모르는 분들이 들어오면요?”
“그땐….”
이안의 시선이, 탁자 위에 놓인 또 다른 검으로 향했다.
“저걸 들고 휘둘러. 그리고 도움을 요청해. 밖에 경비병들이 달려올 테니까.”
“…….”
이안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염려 마라. 그럴 일은 없어. 여긴 안전한 곳이니까. 못다 한 대화는 나중에 다시 하자. 대화를 나눌 시간은, 앞으로 차고 넘치게 있을 거야.”
이안이 밖으로 나갔다. 이따 봐, 반 토막. 하고 속삭인 테사이아가 문을 닫고 사라졌다.
발소리가 빠르게 멀어졌다.
“이게… 바깥세상?”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엘리야가, 이윽고 중얼댔다.
색이 다른 눈을 몇차례 깜빡인 것도 잠시.
“일단은….”
그녀의 시선이 장내로 돌아갔다.
보기만 해도 어지러워지는 광경에 작게 한숨 쉰 엘리야가, 옷 소매를 걷어 올렸다.
“…청소부터 시작하자.”
***
‘대부라니….’
규칙적으로 번지는 말발굽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이안이 옅은 헛웃음을 흘렸다. 심지어 논리도 그럴듯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아르케아스가 그렇게 알려준 걸지도 몰랐다. 그의 성격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고개를 턴 이안은, 건너편에 앉은 테사이아의 장난스러운 눈빛을 마주하고는 다시 한번 헛웃음을 삼켰다.
그녀는 의자가 불편한 듯 연신 몸을 꼼지락 대면서도, 눈썹을 들썩이며 실실 웃음 짓고 있었다.
이안을 놀리는 건 물론이고, 좀전에 보고 들은 이야기를 일행들에게도 전해주고 싶은 것이리라.
‘마음대로 해라. 마음대로….’
입맛을 다시며, 이안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평소에 타던 것보다 훨씬 작고, 의자도 불편한 마차였다.
마차를 끄는 말도 한 마리였다.
스펠로가 따로 준비해 준 물건이었다. 본래 타던 마차는 나머지 일행들이 내성으로 타고 갔다.
마차가 멈춘 건 그때였다.
끝이 뾰족한 귀를 쫑긋대던 테사이아가 입을 열었다.
“인적이 드문 곳이군요. 제대로 도착한 것 같습니다, 이안 경.”
텐시아 아이나스의 말투였다. 그녀가 이 말투를 쓰는 건, 마부를 의식하고 있어서였다.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말을 아낀 것 역시, 같은 이유였다.
드륵-
때마침, 마부석 쪽으로 난 조악한 간이 창문이 열렸다.
두건을 깊이 눌러쓴 스펠로의 얼굴이 드러났다.
“시간을 잘 맞춘 것 같습니다. 바로 오는군요.”
속삭이듯 내뱉는 그는, 그는 검은 망토와 두건으로 온몸을 가린 채였다. 라클리프를 구한 영웅들을 은밀하게 돕는 조력자가 된 기분을 만끽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오히려 더 수상해 보이는 차림이었지만, 이안은 굳이 그런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어쨌건 그의 은밀한 부탁을 전부 충실하게 수행해 주고 있지 않은가.
“계획대로 수행하시오.”
이안의 나지막한 대답에, 굳게 고개를 끄덕인 스펠로가 다시 창문을 닫았다.
다각- 다각-
스펠로의 말대로, 정면에서 또다른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일행이 탄 마차일 터였다.
이안이 턱짓하자, 테사이아가 마차 한쪽 문을 끝까지 활짝 열어젖혔다.
다각- 다각-
열린 문 앞으로, 다가온 두 마리 백마의 머리가 드러났다. 녀석들의 은빛 마갑이 눈에 들어올 때쯤, 마부석 쪽이 부산스러워졌다.
마부들이 마차를 옮겨 타는 소리일 터였다. 곧 두건을 눌러쓴 채 고삐를 집어 드는 스펠로가, 문 앞을 지나치며 이안을 돌아보았다.
“…….”
은밀한 사명감과 뿌듯함이 뒤섞인 눈빛.
내심 실소하면서도, 이안은 고개를 끄덕여 줬다.
두건을 더 깊이 눌러쓰는 스펠로가 지나가고, 단단해 보이는 마차의 몸체가 이어졌다.
이쪽과 마찬가지로 한쪽 문을 활짝 열어젖힌 채였다.
그 너머. 나란히 앉아 이쪽을 돌아보는 메브와 필립을 눈에 담은 이안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엘리가 깨어났다. 가서 잘 보살피고 있어. 굶고 있으면, 뭐라도 찾아서 먹이고.”
“예. 나리. 염려 놓으십시오.”
필립이 대답할 찰나, 이안의 마차 안으로 커다란 덩어리가 날아들었다.
쿠웅-
얼굴에 검은 복면이 덮이고 팔다리가 줄로 결박된 팔메르였다.
놈은 마차 바닥에 떨어지고도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놈을 집어 던진 샬롯이 뒤따라 마차에 올라탔다.
일행의 마차가 그대로 멈추지 않고 지나쳤다. 저대로 저택으로 돌아가서, 안에 이안이 있는 것처럼 대기하게 될 터였다.
귀찮은 짓거리였지만, 이목을 끌지 않고 움직이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팔메르의 등에 발을 얹으며, 테사이아가 마차 문을 닫았다.
드륵-
거의 동시에 마부석 쪽의 간이 창문이 다시 열렸다. 나세르의 갈색 얼굴이 드러났다.
“출발하겠습니다.”
“길은 확실히 알고 있겠지?”
“예. 걱정 마십시오.”
싱긋 미소지은 나세르가 창문을 닫았다.
마차가 다시 출발했다.
꽤 느린 속도였다. 승객을 다섯이나 태우고 있기 때문이리라.
…중간에 퍼지면 귀찮아 지는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옆에 앉은 샬롯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여러 생각이 오가는 눈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팔메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놈의 꼬리는 꼬리 갑주가 씌워진 그대로 샬롯의 한쪽 팔에 칭칭 감겨 있었다.
아주 자연스러워서, 특이한 형태의 팔뚝 보호대나 장신구처럼 보이기도 했다.
“야옹아. 아까 반 토막이 이안을-”
테사이아가 입을 연 건 그때였다. 눈빛으로 그녀의 입을 다시 다물게 한 이안이, 재빨리 내뱉었다.
“문제는 없었나?”
테사이아를 돌아보던 샬롯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문제 없었다. 다들 어젯밤의 일만 얘기하더군. 찬란한 여신께서 교회에 축복을 내리신 게 맞냐고 말이야. 그렇다면 자기네들의 무고가 증명된 것과 다름없다 여기는 모양이더군. 다들 메브와 필립에게 확인을 받고 싶어 했다.”
“그래서, 필립은 뭐라고 했지?”
“신께서 무슨 의도로 신성을 내리신 건지는 알 수 없다고 했지. 일개 종이 주인의 뜻을 예단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라고. 매번 같은 대답만 반복했다.”
“아주 모범적으로 둘러댔네.”
역시, 다 컸다니까. 새끼.
이안이 코로 웃음 짓는 사이, 샬롯이 덧붙였다.
“자꾸 달라붙는 작자들 때문에 조금 오래 걸렸을 뿐. 일 자체는 아주 쉽게 끝났다. 다들 이제 이놈에게는 관심도 없더군. 제대로 인도받았고, 온전히 우리 차지다.”
분명 다 듣고 있을 텐데도, 팔메르는 으르렁대거나 꿈틀대지조차 않았다. 억눌린 숨소리만 흘릴 뿐이었다. 입에 재갈을 물린 게 분명했다. 이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잘 됐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