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258
258화
오랜 시간 아공간에 보관되어 있던 꼬리는, 썩지도 말라비틀어지지도 않았다. 털에서 여전히 윤기가 흘렀다.
이안이 입을 열었다.
“진작 돌려주려고 했는데. 그냥 편의상 내가 보관하고 있었던 거다. 이제, 가지고 돌아가.”
이안이 꼬리를 내밀었다. 귀를 뾰족하게 세운 채 떨리는 손을 홀린 듯 내뻗던 샬롯이, 곧이어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허공에서 손을 말아쥔 그녀가, 다시 손을 허벅지 위로 내렸다.
“지금은 받지 않겠다.”
“……?”
이안의 고개가 설핏 기울어졌다.
긴 숨을 내쉰 샬롯이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마로 텔은, 본래 수인 이외에는 그 누구도 발을 들일 수 없는 곳이다. 예외는 황실과 교단. 그리고 그들의 명을 받은 자들뿐이지. 그 이외의 이종족이 발을 들이면, 죽음을 각오해야 해. 그러니까…”
그녀의 시선이 이안의 손에 들린 자신의 꼬리로 되돌아갔다.
“그걸 징표로 만들겠다. 일족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모두에게 알릴 거야. 내 꼬리를 들고 나를 찾는 이는, 일족 전체가 빚을 진 은인이라고.”
“…….”
이채가 서리는 이안의 눈을 다시 마주 본 샬롯이, 설핏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럼 네가 누구를 마주쳐도, 아무런 문제 없이 나를 만나러 올 수 있을 거다.”
“…내가 남부에 들르지 않으면, 어쩌려고?”
“어…? 아니….”
샬롯이 언제 웃었냐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럴 거냐? 전에는 분명히….”
“농담이야.”
이안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그렇게 하지. 그런 규칙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고맙다. 네가 이런 생각을 다 할 줄이야.”
“…네게 배운 거다. 이안.”
대답하는 샬롯의 얼굴에도 미소가 되돌아왔다. 피식한 이안이 샬롯의 꼬리를 다시 아공간으로 넣었다. 낮게 가르릉대며,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선택을 했다는 듯이.
“야옹이가 똑똑한 짓을 다 하네.”
테사이아의 콧소리가 이어졌다. 어느새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둘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곧이어 덧붙였다.
“요정들의 지역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안. 나도 가문에 정착하면, 네 이름부터 알려 둘 테니까.”
“그래. 서로 연락을 주고받을 방법도 잘 고민해 봐라. 분명 골치 아픈 과정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걱정 마. 알아서 잘해 볼게. 어차피 야옹이랑 나는, 운명 공동체잖아?”
그 말도 오랜만에 듣네.
이안이 웃음 짓는 그때, 마차가 멈췄다.
어느새 바다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마차 문을 열고 냉큼 내린 테사이아가, 한차례 주위를 돌아보고는 다소 거만한 표정이 되어 걸음을 옮겼다.
샬롯에게 턱짓한 이안도 마차에서 내렸다. 몇 걸음을 옮기자, 마차에 가려져 있던 부둣가의 전경이 펼쳐졌다.
“…….”
군도와 상단의 배들이 여럿 떠났지만, 아직 정박해 둔 배가 여러 척 남아 있었다. 아직 아침인데도 주위를 오가는 뱃사람들이 많았다.
스펠로와 병사들은 일렬로 멈춰 선 마차의 앞뒤에 적당한 간격을 두고 서 있었다. 다른 이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이리라.
어쨌든 눈에 띌 수밖에는 없는 광경이었다. 주위를 오가는 이들이 연신 마차 쪽을 힐끔댔다.
테사이아가 텐시아 아이나스의 얼굴이 된 건, 저들의 시선을 의식해서일 터였다.
‘가까이에도 세웠군.’
샬롯과 테사이아가 타고 갈 배는, 바로 앞에 정박해 있었다. 무슨 잎사귀인지 모를 나뭇잎을 깃발에 새긴 상선이었다.
“빨리 옮겨! 시간 없으니까.”
“아침은 가면서 먹을 것이오, 다들 게으름 피우지 말고 움직이시오.”
선원들이 바쁘게 배 안으로 나무 상자들을 옮겨 대고 있었다. 선장과 상단주가 연신 소리치며 그들을 재촉했다. 짐을 거의 다 실은 걸 보니, 시간을 잘 맞춰 도착한 것 같았다.
이안이 넘실대는 검은 바다와 그 너머로 솟은 해상 성벽, 그리고 활짝 열린 수문들을 차례로 눈에 담는 사이.
“함께 해서 영광이었다, 메브. 필립.”
“나야말로. 넌 내가 본 전사 중에 가장 용맹했다. 샬롯. 앞으로도 무운을 빌지.”
“찬란한 광명이 함께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샬롯. 그리고 공. 언젠가 꼭 다시 뵐 날이 오면 좋겠군요.”
“살 만해지면 남부로 오세요, 필립 경. 메브 경도. 아니… 어쩌면 그보다 내가 중앙으로 진출하는 게 빠를지도 모르죠. 그리된다면, 어떻게든 소식을 전하도록 할게요.”
일행들이 작별 인사를 나눴다. 꽤 밝은 분위기였다. 나세르와 엘리야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옆에 서 있었지만, 샬롯과 테사이아는 그들에게도 한마디씩 인사를 건넸다.
엘리야는 갑자기 기품 있게 말을 건네는 테사이아의 모습에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깍듯하게 무릎을 구부려 인사했다.
곧 샬롯과 테사이아가 다시 이안 쪽으로 다가왔다.
이안은 그들을 눈에 담았다. 둘 다,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샬롯의 얼굴과 드러난 몸 곳곳에는 함께한 시간 만큼의 흉터가 새롭게 새겨졌고. 테사이아에겐 전에는 상상도 한 적 없던 기품이 흘렀다.
“…….”
샬롯이 이안을 바라보며 멈춰 섰다. 이안은 그녀의 주황색 눈을 가만히 마주 보았다. 씩 미소 지은 샬롯이 안팎을 뒤집은 정화자의 두건 망토를 보란 듯 뒤집어썼다.
두건을 깊이 눌러 쓴 그녀가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또 보자. 이안.”
“그래. 또 보자.”
이안도 고개를 끄덕였다. 작별 인사는 그게 전부였다. 홱 몸을 돌린 샬롯이, 필립이 준비해준 짐가방을 어깨에 걸치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빈 자리를 테사이아가 채웠다.
이안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드물게도 쓴웃음이 맺혀 있었다.
“마지막 인사를 이런 식으로 드려야 하다니. 아쉽기 그지없군요. 이안 경.”
귀족 흉내를 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이안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짙어졌다.
“앞으로는 지금 이 모습에 더 익숙해져야 할 것이오. 공.”
“그래… 그렇겠죠. 조언 고마워요. 명심하죠.”
고개를 옆으로 까딱인 테사이아가, 이윽고 무릎을 굽히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진심으로. 그러니까 꼭 다시 만나요. 내가 중앙에 진출하기 전에.”
…그거 진심이었냐.
이안이 내심 읊조리는 사이. 일행들을 한 차례 더 눈으로 훑은 테사이아가, 마지막으로 이안에게 한쪽 눈을 찡긋대고는 몸을 돌렸다.
그녀가 벌써 저만치에 걸어가는 샬롯의 뒤를 따라 멀어졌다.
두건을 눌러 쓴 수인 전사와 원로 요정이 배에 올랐다.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였다.
“정말이지… 작별은 늘 적응이 안 되는군요. 몇 번을 겪어도, 매번 똑같이 아쉬워요.”
옆에 선 필립이 읊조렸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입가의 미소를 잃지 않고 배를 바라보았다.
기분이 마냥 나쁘지는 않았다.
오래 함께한 전우들이 비로소, 자신들의 삶을 살기 위해 돌아가는 것이었으니까.
곧 짐을 모두 실은 상선이 고정끈을 풀고 닻을 올렸다. 배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후면의 갑판 위로 테사이아와 샬롯이 모습을 드러낸 건 그때였다. 둘 다 가만히 선 채 일행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부두를 떠난 배가 너울대는 물살을 가르고, 이윽고 활짝 열린 수문을 통과해 멀어졌다.
이안의 시선이 메브와 필립 쪽으로 돌아온 건, 배가 해상 성벽에 가려져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였다.
평소와 다름없는 눈빛으로 둘을 번갈아 바라본 이안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이제, 우리도 떠납시다.”
***
라클리프를 떠나는 과정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이미 메브와 필립, 아니 고티어와 나세르가 대교회로 돌아갈 것이라 이야기를 끝내 놓은 덕분이었다.
도시의 관리들은 오히려 책이라도 잡힐까, 일행이 나눠 탄 두 대의 마차를 검문조차 하지 않았다.
다각- 다각-
스펠로와 그가 지휘하는 병사들이 마차를 호위해 도시의 동쪽 성문을 지났다.
열린 창문으로 멀어지는 라클리프의 성벽을 가만히 바라보던 이안이, 이윽고 마주 보고 앉은 엘리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엘리야는 눈만 깜빡일 뿐,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 다른 색의 두 눈이 차분했다. 부두까지 가는 동안 메브와 필립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을 텐데도, 그 이야기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사려 깊은 난쟁이라.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데.’
하긴. 주문쟁이 난쟁이도 어울리지 않긴 마찬가지였다.
“잠깐 기다리고 있어.”
그녀에게 내뱉은 이안이, 마차의 문을 열었다.
“이안 경…?”
마차 밖으로 몸을 내미는 그를 바라보며, 스펠로가 고개를 갸웃했다.
마부석에 앉은 병사의 곁으로 올라서며, 이안이 입을 열었다.
“배웅은 여기까지면 충분할 것 같소. 스펠로 경.”
“아, 예. 그리하겠습니다.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경.”
마부석의 병사에게 내려오라 손짓한 스펠로가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고삐를 받아든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별말씀을. 덕분에 내가 편했지. 수고 많으셨소.”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안은 스펠로를 슬며시 돌아보았다. 잘난 것도 부족한 것도 없는, 전형적인 제국의 기사.
명성에 압도당한 것일 뿐이겠지만, 어쨌건 그에게 많은 도움을 준 자이기도 했다.
“경은 지금 엄밀히 말해, 자유 기사나 다름없지 않소?”
이안이 툭 덧붙인 말에, 스펠로가 어리둥절해하며 입을 열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렇습니다만. 사실상 여전히 라클리프에 소속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작지만 봉토도 가지고 있으니까요. 차기 성주께서도 그 권리를 인정해 주실지는 의문입니다만….”
“그럼, 원한다면 도시를 떠나실 수도 있겠군.”
스펠로의 낯이 순간 굳어졌다.
“라클리프를 떠나란 말씀이십니까?”
“여기 남으면 피곤한 일을 많이 겪게 되실 거요. 감수하시겠다면 상관없으나, 그게 아니라면 드네로브로 가시오.”
“……?”
“웨스트우드 백작께 내 소개로 왔다고 하면, 아마 받아 주실 거요. 알다시피 거긴 경작지가 넓은데, 일손도 관리자도 부족하지. 이곳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스펠로의 입이 벌어졌다.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관도 앞으로 이어진 오르막길로 시선을 돌렸다.
“선택은 경의 몫이오.”
“가, 감사합니다, 이안 경…! 명심하겠습니다…!”
스펠로가 감격한 듯 소리치며 머리를 조아렸다. 물론, 이안은 더 이상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작은 호의일 뿐이었다.
그에게 의리를 지킨 백작과, 여러 귀찮은 일들을 처리해 준 별 볼 일 없는 기사에게 딱 적당한.
“드네로브로 가면, 대교회로 보낼 보고서를 하나 더 작성하겠습니다. 귀 공과 정화자들께서 이곳에서 이룩한 위업은, 단 하나도 빠짐없이 역사에 기록될 겁니다…!”
점점 멀어지며 이어진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린 이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안 그래도 된다고 말할 틈은 없었다. 멈춰 선 스펠로는 안장 위에서 깊이 고개를 숙이고는 곧바로 말머리를 돌려 버린 것이다.
이안이 짧게 콧방귀를 뀌었다.
‘…하긴. 하지 말래도 하겠지.’
본인의 이름이 역사에 남을 기회이기도 하니까.
게다가 정식 보고서가 있다면, 행방불명된 고티어와 나세르를 찾다 지친 대교회의 시선도 돌릴 수 있을 터였다.
어디 있는지도 모를 이안의 행방을 수소문하는 것 보다, 이미 수중에 들어온 보고서를 참고하는 게 더 빠르고 편하지 않겠는가.
그것도 나쁘지 않은 마무리였다.
사실, 이안은 자신이 귀찮아지지만 않으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되돌아가는 스펠로와 병사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안이 이윽고 고개를 돌렸다.
언덕길 측면. 저 멀리까지 이어진 완만한 내리막과 절벽 아래로, 내해의 검푸른 물결이 펼쳐져 있었다.
저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지평선은 아마도, 남서부 내륙일 터였다.
…정말 더럽게도 넓네.
다시 앞으로 돌아가려던 이안의 시선이 문득, 검푸른 물결 한복판에서 멈췄다.
배 한척이 마차와 같은 방향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돗대 위에 펄럭이는, 잎사귀 문양이 새겨진 깃발.
샬롯과 테사이아가 탄 상선이었다. 이대로 내해를 거슬러 나아가리라. 남부의 항구 도시에 닿을 때까지.
“…….”
이안의 가슴 한편에서 묘한 감흥이 번졌다. 이 세계에 떨어진 이래 몇 번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이 감정을 곱씹기엔 아직 조금 이른 시점이었다.
다그닥….
저들이 오늘의 마지막 작별은 아니었으니까.
오르막이 내리막으로 바뀌고서도 한동안 말없이 나아가던 이안이, 이윽고 고삐를 당겼다.
일어선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몇 미터 뒤, 한 마리의 갈색 말이 끄는 작은 마차가 따라서 멈추고 있었다.
마부석에 앉은 나세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릴 찰나.
“나리, 왜 벌써 멈추십니까…?”
먼저 마차 문을 연 필립이, 문 밖으로 상반신을 내민채 물었다.
녀석의 치켜뜬 눈을 마주보며, 이안이 고개를 옆으로 까딱였다.
“때가 돼서 멈춘 거다. 갈림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