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259
259화
“…….”
필립의 시선이 그제야 마차 앞으로 향했다.
이안의 말대로 갈림길이었다. 한 가닥 관도는 북쪽으로, 또 하나는 비스듬하게 북동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입술을 달싹인 필립이, 이윽고 억지로 지은 듯한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그럼 그냥, 북쪽으로 조금 더 올라갈까요? 어차피 급할 것 없다고 하셨잖습니까. 아니면 그냥 이 근처에 야영지를 꾸릴까요? 적당한 곳에서 하루 쉬고 내일 아침에 다시 출발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이안은 평소처럼 이제 정오가 막 지났는데 무슨 야영지를 꾸리냐 거나, 다음 갈림길이라고 속 편히 헤어질 수 있겠냐는 식의 핀잔을 하지 않았다.
“…….”
그저 가만히 필립을 바라보기만 했을 뿐이었다.
필립의 미소가 울상으로 바뀌는 데는 몇 초면 충분했다. 입술을 떨던 그가 읊조렸다.
“그럼 그냥 조금만이라도 더….”
“그만하거라, 필립.”
메브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두꺼운 판금 장갑을 착용한 손이 필립의 한쪽 어깨를 쥐었다.
“때를 늦춘다 해서 아쉬움이 줄어드는 건 아니잖니.”
“나리….”
필립이 울상을 지으며 마차 안을 돌아보았다. 메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기서 헤어지자꾸나.”
“…….”
“오늘 나눈 대화를 잊지 말렴. 너라면 잘 해 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아.”
“그건… 생각해 보겠습니다.”
대답하며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필립이, 마차 밖으로 휙 뛰어내렸다. 그가 마부석의 나세르를 올려다보았다.
“따라오십쇼. 마차의 말을 교체할 겁니다. 나리를 모시며 주의해야 할 부분들도 알려 드릴 테니,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해 두십쇼.”
그대로 걸음을 옮긴 그가, 갈색 말의 앞을 지나쳐 마차 반대편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눈가의 습기를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리라.
“알겠습니다.”
선선히 대답한 나세르도 마부석에서 내렸다. 그가 갈색 말에 묶인 고정을 푸는 사이, 메브가 마차 밖으로 내렸다. 정화자의 망토는 마차 안에 벗어둔 듯, 전신 판금 갑옷을 고스란이 드러낸 채였다.
“와서 어떤 녀석을 데려갈 건지 고르십시오.”
두마리 백마 옆으로 온 필립이 나세르에게 내뱉는 가운데. 여전히 마부석에 선 이안을 가만히 올려다보던 메브가 미소 지었다.
“결국 이 순간이 왔구나, 이안. 사실, 너를 다시 만났을 때만 해도 상상도 하지 못했었는데.”
“죽기라도 할 줄 아셨소?”
“그랬지. 사실, 그러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고. 눈치 채고 있는 줄 알았는데.”
“뭐, 어느 정도는.”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메브가, 흉갑에 손을 얹으며 말을 이었다.
“내게 그랬듯, 필립도 잘 부탁해. 이안. 무모한 짓 하지 않고, 무사히 제도에 도착할 수 있도록.”
옆에서 필립이 숨죽여 코를 훌쩍댔다.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는 그를 슬쩍 돌아본 이안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건 의뢰요, 부탁이오?”
“의뢰라고 하고 싶지만, 이제 줄 수 있는 게 없구나. 모두 네게 받은 것이나, 네게 줄 것이니. 그러니, 이번엔 부탁이라고 할 밖에.”
“그럼 그 부탁은 받아들이겠소.”
메브의 미소가 짙어졌다. 이안을 잠시 가만히 응시하던 그녀가,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방식은 알고 있지만… 계속 거기에 서있기만 할 거야? 작별이니, 잠깐이라도 내려와 주면 좋겠는데.”
“그것도 어려운 부탁은 아니군.”
소리 없이 웃음 지은 이안이 훌쩍 마차 옆으로 뛰어내렸다. 비로소 그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메브가 물었다.
“그래서, 다음 행선지는 어디지? 곧바로 제도로 가진 않을 거라며.”
“글쎄. 중앙은 넓으니까. 외곽부터 천천히 돌아볼 생각이오. 아마도.”
그녀에게 마주 다가가며 이안이 대답했다. 메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정해진 건 없는 거구나. 하긴 그래… 너는 떠돌이 용병 출신이지.”
“출신이라니. 지금도 그렇소.”
“뭐…?”
눈을 동그랗게 떴던 메브가, 재미있다는 듯 웃음 지었다. 복수가 끝난 뒤로 종종 볼 수 있게 된 표정이었다. 한쪽 턱을 가르는 흉터조차 잘 어울리는, 시원해 보이는 미소.
“그래. 지금도 그렇겠지. 넌 어디에도 묶이고 싶지 않아 하니까.”
“역시. 이제 날 지나치게 잘 아시는군.”
이안이 멈춰 서며 대답했다.
메브는 멈추지 않았다. 걸음이 조금 더 느려졌을 뿐, 여전히 이안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그를 올려다보는 녹색 눈에 담긴 여러 감정들도 선명해졌다.
이안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메브가 팔을 뻗어 그를 껴안았다.
체온이 전해지지는 않았다. 철그럭, 강철이 서로 맞닿는 소리만 번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메브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이안의 팔을 힘껏 감싸 안았다.
“……?”
분리한 백마 한 마리를 옮겨 오던 나세르가, 그들 쪽을 돌아보고는 눈을 깜빡였다. 뒤따라온 필립이 이안과 메브를 일별하고는 이내 다시 나세르를 돌아보았다.
“어딜 보십니까? 말 묶으시고, 집중해서 들으십쇼.”
“어…. 아니. 예. 그러죠.”
나세르의 당황한 듯한 대답에 이어, 필립이 주절대기 시작했다. 대부분 메브를 모시기 위해 주의해야 할 아주 사소한 부분들이었다.
이안이 풀썩 웃음 지었다.
“전에도 이러셨던 것 같은데.”
“그래. 그랬지.”
그때와 달리, 메브는 감싸 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이안의 쇄골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생각해 보니, 이번에도 제대로 감사 인사를 하지 않았더군요. 고마워요, 이안 경. 불가능할 줄 알았던 나의 복수를, 끝내 이룰 수 있도록 도와줘서.”
“마침 내 과업이기도 했지만, 그 감사는 기꺼이 받겠소. 그런데….”
그녀의 붉은 머리칼을 슬쩍 내려다보며, 이안이 덧붙였다.
“왜 갑자기 존댓말이오?”
“하고 싶으니까.”
“지금 껴안으신 것처럼?”
“그래. 하고 싶은 대로 편하게 하자고 한 건, 너였잖아?”
…이걸 이렇게 써먹네.
이안이 풀썩 웃음 짓는 사이, 메브가 덧붙였다.
“결국, 이번에도 남은 보수를 요구하진 않았구나. 끝까지.”
“아직은 필요하지 않으니까.”
“언제 요구할 거야?”
“아시잖소? 내 목숨을 거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때. 그때 경을 찾아가 요구할 것이오.”
“그래… 기다리고 있을게. 그날이 언제든, 죽지 않고. 그러니, 너도 그러길 바라. 이안.”
오늘 여러 번 선수를 치시네.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그러겠소. 그때 또 봅시다. 내 칼도, 잘 맡겨 주시고.”
“물론이지….”
이안의 등을 토닥인 그녀가, 안고 있던 팔을 풀며 반걸음 물러났다.
대신 이안의 양팔에 자신의 손을 얹은 채였고, 그의 눈에서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여전히,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네 안부도 잘 전해 주도록 할게. 이안.”
“며칠 전에 필립이 한 말도, 잘 생각해 보시오. 사원에서 루시와 함께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거요. 내가 경을 다시 찾기에도, 그편이 더 쉬울 테고.”
이안이 고개를 슬쩍 까딱였다.
“변방은 넓잖소?”
메브는 대단 대신 그저 빙긋 미소만 지었다. 그녀의 시선을 가만히 마주하던 이안이, 이윽고 낮게 웃음 지었다.
“안 그러시겠단 거군.”
“아니. 이건 그냥 아쉬워서 보는 거야. 다시 만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
이어진 대답에, 오히려 이안이 잠시 멈칫했다.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눈을 바라보며, 메브가 말을 이었다.
“이상하지? 그토록 길고 긴 여정을 끝낸 뒤에 남은 감정이, 헤어짐의 아쉬움이라니.”
“…너무 늦지 않게, 보수를 받으러 가겠소.”
이윽고 이안이 말했다. 메브의 눈을 피하지 않은 채, 그가 슬며시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과연 그게 좋은 일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건 몰랐나 보네. 나는 너와 함께 사선을 넘는 걸 아주 좋아해. 솔직히 말해서, 그걸 즐기는 편이지. 그러니까….”
메브가 이안의 팔을 쥔 손아귀에 슬며시 힘을 주고는 속삭였다.
“그날을 손꼽아 기다릴게. 이안.”
미소 지은 메브가 휙 몸을 돌렸다. 붉은 머리칼이 찰랑대면서, 불그스름해진 귀가 설핏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멀어진 그녀가, 마차의 발받침대에 한쪽 발을 올리고서야 이안을 다시 돌아보았다. 평소와 다름 없는 얼굴. 빙긋, 의미 모를 미소를 지은 그녀가 그대로 마차에 올랐다. 탁. 마차 문이 닫혔다.
“…….”
그 모습을 끝까지 가만히 바라보던 이안은, 이윽고 참고 있던 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떠날 채비를 하던 나세르의 시선이 그와 마주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그가 어정쩡한 미소를 지을 찰나, 이안이 말했다.
“잘 모셔라. 네 속죄와 참회를 끝내기도 전에 죽지 말고.”
“…예. 나리의 앞날에도 찬란한 빛과 무운이 함께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빛과 무운은 무슨.
코웃음을 흘린 이안이 마저 몸을 돌렸다. 그가 자신의 마차로 다가갔다. 백마 한 마리를 내어 주고 대신 갈색 말을 마차에 묶은 필립이, 백마의 마갑을 벗기고 있었다.
“뭐 하냐?”
이어진 이안의 물음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한 마리만 마갑을 씌우고 다니면 너무 눈에 띌 것 같아서요. 도로 입힐까요?”
눈이 불그스름한 걸 보니,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뭐라도 해야 할 상태 같았다.
슬쩍 입맛을 다신 이안이, 닐라인지 셀림인지 모를 백마를 눈에 담았다. 그는 아직도 두 녀석을 구별하지 못했다.
“머리랑 목 부분은 이 녀석한테 그대로 두고, 몸통만 옆 놈한테 입혀. 그렇게 하면, 조금 덜 눈에 띄겠지.”
사실 눈에 띄지 않으려면 그냥 마갑을 벗기는 게 가장 좋았지만.
저 성능 좋은 마갑을 그냥 썩히고 싶지는 않았다.
“예. 그러겠….”
필립이 대답할 찰나,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이어졌다. 잠시 멈칫했던 필립이, 입술을 꾹 앙다물고는 다시 하던 일에 몰두했다.
“…천천히 해라. 서두를 필요 없으니까.”
핀잔대신 덧붙인 이안이 몸을 돌렸다.
아무리 그라도, 지금 필립의 심정을 다 짐작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 메브는 스승이자 은인이며, 동시에 가족이지 않던가.
“…….”
마차 문을 열자, 안에 타고 있던 엘리야가 그를 돌아보았다. 이안은 별다른 말 없이 그녀의 건너편에 앉았다.
열린 창문 너머로, 북쪽으로 이어진 관도로 접어드는 마차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안의 시선이 가만히 그 마차의 뒤를 좇았다.
“…괜찮으세요?”
문득 엘리야가 물었다.
이안의 시선을 받은 그녀가, 잠시 머뭇거리고는 말을 이었다.
“주제넘은 말이었다면 죄송해요. 제 어릴 적 생각이 나서 그만.”
“어릴 적?”
이안이 물었다. 말해도 되나, 하는 눈빛으로 잠시 그의 눈치를 살핀 엘리야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어릴 때, 둥지에는 아직 형제가 몇 남아 있었어요. 전 검은 벽이 솟은 이후에 입양된 마지막 아이라, 다들 저랑은 나이 차이가 조금 있었죠. 그리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차례로 둥지를 떠났어요. 그때마다 전, 매번 울었고요. 한밤중까지.”
왜 내내 그런 표정인 건가 했더니. 지난 기억 때문이었나.
짧게 웃음 지은 이안이, 이윽고 덧붙였다.
“그 형제 중에, 혹시 요리를 잘하는 녀석도 있었냐?”
“어떻게 아셨어요…?”
엘리야의 눈이 커졌다. 푸른색과 갈색의 눈동자에 놀람이 서렸다.
“벨라가 그랬죠. 둥지의 서고에는 온갖 시대의 요리사들이 비법을 기록한 책들도 있었거든요. 늘 그걸 보며 연습했고, 저와 형제들에게 먹였어요. 언젠가 황실의 요리사가 되겠다고요. 저는 열심히 잡일을 도우면서 구경했죠. 벨라의 요리를 아주 좋아했거든요.”
…정말이었다니. 그냥 한 말인데.
이안의 실소가 짙어질 찰나.
다각- 다각-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이어 마부석 쪽의 간이 창문이 열리더니, 필립의 목소리가 번졌다.
“그래서… 어디로 갈까요, 나리?”
“그게 네가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야.”
창문 너머를 슬쩍 돌아본 이안은, 필립의 손에 못 보던 깨끗한 지도가 펼쳐져 있다는 걸 확인하고는 말을 이었다.
“제도까지 한 반년쯤 걸렸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가는 게 좋을지, 경로를 몇 개 짜 봐. 오늘 밤까지.”
뭔가 몰두할 게 필요할 테니, 필립에게도 마냥 귀찮은 작업은 아닐 터였다. 역시나, 필립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야영할 때 보고 드리겠습니다.”
간이 창문이 닫혔다. 반년이라는 말에 다시 반짝이기 시작한 엘리야의 눈빛을 슬쩍 마주 본 이안이,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메브와 나세르가 탄 마차는, 이미 저만치까지 멀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