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26
026화
콰르르르-
그의 주위로 새빨간 불덩이가 연달아 피어올랐다.
그것들은 형태를 갖추기가 무섭게 앞으로 뿜어져 나갔다.
콰콰콰쾅! 끼아아악-!
불덩이 네 개가 연달아 망령에 부딪혀 폭발했다.
망령이 비명과 함께 증발했다.
콰광-!
빗나간 두 개는 찌꺼기를 맞췄다.
앞부분이 움푹 들어가며 뼛조각이 사방으로 튀었지만, 흘러내린 파편들이 순식간에 그 자리를 메꿨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
필립과 미구엘은 눈을 치켜뜬 채로 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악과 불신으로 가득한 눈빛.
“말도 안 돼….”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안이 마법사이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한 적 없었을 테니까.
“구경났냐? 정신 차려 새끼들아!”
태연하게 덧붙인 이안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앞을 돌아보았다.
막상 마법을 쓰고 보니 속이 다 시원했기 때문이다.
“이왕 쓴 거… 제대로 쓰지 뭐.”
읊조린 이안이 몸을 날렸다.
왼손 손아귀에 주먹만 한 화염구를 움켜쥔 채로.
콰직- 퍼엉!
몇 번째인지 모를 폭발이 일었다.
구울 기사가 파편이 되어 흩뿌려지고, 주위의 해골들이 우수수 튕겨 나갔다.
‘이제야 모든 게 이해되는군.’
그 사이를 뚫고 돌진하는 이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메브는 흑마법사의 속삭임을 다시 떠올렸다.
적색 나부랭이. 어째서 그게 이안이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가.
단지 겉모습이 어울리지 않을 뿐.
식견과 지식. 안목과 통찰력. 신중하며 비밀이 많은 성격까지.
돌이켜 보면, 이안의 많은 의문스러운 부분이 마법사와 어울렸다.
물론 마법사는 온갖 음험한 소문과 비화를 몰고 다니는, 광기와 가장 인접한 존재들이었지만.
메브는 그런 뜬소문보다 자신이 직접 보고 겪은 것을 믿었다.
오히려 조금 안도하기까지 했다.
반드시 찾으리라 마음먹었던 적색 마법사가 이안이었다니.
‘결국은 또 빚을 지게 되겠군.’
사실 빚은 지금도 지고 있었다.
품은 신성력을 다 소모할 각오까지 했건만.
이안 덕에 전진이 훨씬 빨라지면서, 찌꺼기를 막으려 안간힘을 쓸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놈이 전진하는 속도는 보이는 것보다 훨씬 빨랐지만.
그렇다고 달리는 걸 따라잡을 정도로 빠르지는 않았다.
키이… 키이잇-
이제 메브가 신경 써야 할 적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저 분노한 망령뿐이었다.
이안의 공격이 치명적이었는지, 놈은 한동안 일행의 근처로는 다가오지도 않았다.
웃음 대신 기분 나쁜 숨소리를 토해내며 주위를 맴돌 뿐.
하지만 메브는 놈이 곧 다시 공격해 오리라 확신했다.
계속 따라오고는 있었으니까.
그녀는 그런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채 달리기만 했다.
망령이 방심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야 근처까지 다가올 테니까.
그 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찾아왔다.
키이이잇-
정수리 위에서 울리는 숨소리.
곧장 쥐고 있던 검날을 놓은 메브는, 떨어지는 검의 자루를 낚아채며 그대로 길게 올려 베었다.
번쩍! 신성력이 푸른 선을 그렸다.
선이 망령을 세로로 관통했다.
망령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툭 떨어뜨렸다.
끼아아…
산발한 머리칼을 얹은 흉측한 두개골이 비명과 함께 쪼개지고, 이윽고 한 줌의 재가 되어 스러졌다.
“망령을 처리했다, 이안!”
메브가 소리쳤다.
좀 전부터 주위를 살피며 달리던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럼 이제부터 나를 시야에서 놓치지 마시오! 곧 갈림길이 나올 거요!”
“갈림길…? 알았다!”
대답한 메브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의아해한 건, 이안이 전에도 이곳에 와 본 적이 있는 것처럼 말해서였다.
이 또한 마법사가 품은 수많은 신비 중 하나인가.
하지만 그녀의 새로운 의문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
이안이 후려친 구울 기사가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이안은 자신이 죽인 구울을 돌아보지조차 않았지만.
그녀는 머리가 으깨져 널브러진 구울 기사를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설마….’
놈이 걸친 갑옷의 형태가 아주 익숙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왕국의 친위 기사들이 착용하는 것과 똑같이 생겼으니까.
이안이 계단 앞에서 주운 목걸이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애써 잊었던 불길한 상념들이 선명하게 고개를 들었다.
‘설마….’
멈춰선 메브가 무릎을 꿇었다.
그녀가 떨리는 손길로 시신을 붙잡았다.
갑옷의 이음매 부분에 새겨진 사슴뿔 문양.
허겁지겁 시신을 뒤적인 그녀의 손아귀에, 이윽고 부러진 목패 하나가 들려 나왔다.
흔들리는 눈으로 거기 새겨진 이름을 확인한 메브가, 비로소 고개를 떨궜다.
버논이 아니었다.
“하… 하하.”
안도인지 무엇인지 모를 한숨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그 순간.
품속에서 공명하던 정수가 문득 마력을 퍼뜨렸다.
신성력을 일으키려던 메브가 순간 멈칫했다.
흑마법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낯설지만 익숙한, 모순된 느낌이 드는 또 다른 누군가의 의식.
“……?!”
눈을 치켜뜬 메브의 고개가 좌측으로 돌아갔다.
수많은 언데드의 보랏빛 안광.
정수와 공명하는 무언가는 그 너머에 있었다.
그녀를 부르듯이.
“…경! 리우렐 경! 메브!”
마력 실린 이안의 외침이 메브의 정신을 간신히 일깨웠다.
눈을 깜빡인 메브는, 목소리가 들려온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널브러진 언데드의 잔해들.
그 위를 내달리는 필립과 미구엘.
그리고 그 너머의 통로 한복판, 눈을 부릅뜬 이안.
그의 외침이 이어졌다.
“조심하시오!”
“……!”
본능적으로 몸을 날린 메브가 바닥을 굴렀다.
촤르르르르-
그녀가 주저앉아 있던 자리로 뼈 무더기가 쏟아졌다.
구울 기사의 시신이 그 사이로 파묻혀 사라졌다.
어느새 죽음의 찌꺼기가 지척까지 다가온 것이다.
“나, 나리이이!”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필립과 미구엘이, 바닥을 구르다시피 방향을 돌려 그녀 쪽으로 달려왔다.
연달아 땅을 구르며 메브는 숨을 헐떡였다.
충격을 받아서인지, 평소에는 한 몸 같던 갑옷이 납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나리…! 괜찮으십니까?”
그런 그녀의 팔을 붙잡아 일으켜 세운 건 필립이었다.
반대쪽 팔을 부축한 미구엘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설마 또 부상이라도 당하신 건-”
쿠구구구-
익숙한 진동이 그의 목소리를 가렸다.
필립과 미구엘, 메브의 고개가 거의 동시에 진동의 근원지 쪽으로 돌아갔다.
이안이 선 통로 앞에 석벽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비로소 메브의 눈이 커졌다.
“이안-!”
이내 이안의 모습이 벽에 가려져 사라졌다.
홀연히 떠오른 검붉은 고대어.
“저런 미친, 염병할, 개 같은…!”
미구엘이 욕설을 토해내는 사이.
찌꺼기를 곁눈질하던 필립이 메브를 돌아보았다.
“나리! 이제 어떻게 할까요?”
굳어졌던 것도 잠시.
메브의 고개가 좌측으로 돌아갔다.
유일하게 남은 길.
“…따라오거라.”
검을 으스러질 듯 움켜쥔 메브가, 이윽고 걸음을 내디뎠다.
이렇게 된 이상 갈 수밖에 없었다.
저 너머에 기다리는 게 무엇이건.
***
“뭘 봤길래 저런 거야…?”
앞을 가로막은 석벽을 응시하며, 이안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하필 갈림길 앞에서 멈춰 서다니.
영문 모를 상황이었지만, 이안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
게다가 메브라면 필립과 미구엘을 데리고도 한동안은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늦기 전에 끝내면 되겠지.”
이안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복도 너머, 낡아빠진 갑옷을 걸친 해골 기사 수십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물론 혼자가 된 지금은, 저놈들의 숫자 따윈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솨아아- 타탓!
몸을 기울였던 이안이 예고도 없이 튀어 나갔다.
카앙-!
해골 기사 하나가 내리친 검을 메이스로 빗겨 막은 이안은, 미련 없이 자루를 놔버리며 내달렸다.
좌우로 줄지어 이어진 석관들이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이윽고 이안의 시선이 안치실 너머의 야트막한 단상 위에 꽂혔다.
한쪽 무릎을 꿇고 검을 땅에 꽂은 요정 기사의 석상.
‘게임이랑 똑같이 생겼네.’
해골 기사들을 이리저리 피해 지나친 이안이 석상으로 돌진했다.
그리고 적당한 거리에서 도약.
쩌억-
공중제비를 돈 이안이 석상이 내리꽂은 검의 무게추 부분을 짓밟으며 곡예하듯 착지했다.
한 박자 늦게 검이 단상 아래로 움푹 들어갔다.
철컥-! 쿠구구구-
단상이 뒤로 밀려나면서, 더 깊은 지하로 이어진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숨겨진 지름길이었다.
게임에선 흑마법사를 죽인 뒤에 출구로 사용했던 길.
달려오던 해골들이 우뚝 멈췄다.
고요하게 일렁이는 안광들.
들어오라 이거지?
이안은 보란 듯 미소 짓고는 계단 아래로 뛰어내렸다.
계단은 직선으로 이어지다 꺾였다.
이안이 코너를 돌자, 얼마 지나지 않아 한쪽 벽면이 사라졌다.
시야가 순식간에 트였다.
거대한 지하 동공.
‘아겔 란의 국왕도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모르겠지.’
벽면을 따라 이어진 계단을 내려가면서, 이안은 주위를 살폈다.
저 멀리까지 빽빽하게 이어진 주문 회로.
곳곳에 솟은 굵직한 기둥은, 거대한 신전을 고스란히 지하로 옮겨 놓은 것처럼 웅장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여긴 고대 요정들이 죽음의 신을 모시던 신전이었으니까.
주문 회로가 모이는 중심부에 높이 솟아 있는 제단이 그 증거였다.
제단 위에는 반으로 부서진 석상과 온갖 뼈로 만들어진 거대한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유적을 타락시킨 장본인은, 바로 그 의자에 앉아 있었다.
로브를 머리까지 덮어쓴 채.
흐르는 마력을 전신에 머금고서.
“기어코 여기까지 오다니…. 그 만용만큼은 칭찬해 주마, 적색 버러지야.”
쇠를 가는 듯한 목소리가 울렸다.
보랏빛 안광을 줄기줄기 흘리면서, 흑마법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네 하찮은 잔재주가 통하리라 기대하지는….”
느긋하게 이어지던 목소리가 문득 끊겼다.
흑마법사의 안광이 흔들릴 찰나.
콰아아아아-
용의 숨결을 방불케 하는 불길이, 제단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콰르르르-
제단을 녹여 버릴 기세로 쏟아지던 불길이 한참 만에 잦아들었다.
자욱한 연기 사이, 왼손을 내뻗은 이안의 모습이 드러났다.
손아귀의 정수에서 아지랑이 같은 열기가 번졌다.
“학습 능력이란 게 없나….”
겪어 보고도 주절대고 지랄이야.
이안이 비웃듯 읊조릴 찰나.
“이… 노오오옴!”
제단에 덮인 연기를 뚫고 보랏빛 안광이 터져 나왔다.
“감히 또 내 말을 자르다니!”
흑마법사가 연기를 뚫고 솟구쳤다.
입고 있던 로브가 너덜너덜해지면서, 놈의 본모습이 드러났다.
“그때와 같으리라 생각하지 마라! 네놈의 조잡한 주문 따윈 더는 통하지 않을 테니!”
“말 많네. 되다 만 리치 주제에.”
이안이 놈을 훑으며 빈정댔다.
얼굴은 물론 온몸이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졌고 어깨 위에 뼈로 만들어진 팔이 하나씩 더 돋아 있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지만.
그의 기억보단 여러모로 초라했다.
게임에서의 놈은 뼈만 남은 데다 팔도 여섯 개였고, 이마 한복판에 커다란 정수까지 박혀 있었으니까.
“이… 버러지 같은 놈이!”
정곡을 찔린 듯 흑마법사가 격노했다.
제단 뒤편에서 보라색 마력이 번지더니, 그대로 흑마법사가 치켜든 마법 봉으로 빨려 들어갔다.
놈의 등 뒤로 거대한 악령이 뭉치기 시작했다.
사령 소환. 물리적 실체를 갖춘 악령 덩어리가 아가리를 벌리며 달려들었을 때, 이안은 이미 제단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네놈이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 철저하게 깨닫게 해 주마! 끝없는 고통은 그 후에 선사할지니!”
흑마법사가 마력이 맺힌 왼손을 치켜들었다.
퍼서석- 푸스스-
땅속에서 해골들이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어 나왔다.
인간보다 더 크고 긴 골격.
시원 지하에 묻혀 있던 고대 요정들의 유골이었다.
순식간에 포위당한 형국이었지만.
이안의 눈빛은 여전히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 기억보다 약한 것 같은데. 변이가 덜 끝나서 그런가.’
게임 속 흑마법사는 날아다니는 데다 온갖 주문과 소환을 난사하고, 패턴도 까다로웠다.
하지만 그런 만큼 체력이 낮고 물리 공격에도 취약했다.
접근할 수만 있으면 의외로 쉽게 죽일 수 있다는 얘기였다.
여러모로 불완전한 지금은, 아마 더 쉬우리라.
“두렵나? 벌써 굳어 버리다니 애석하군. 공포는 이제 시작이거늘.”
흑마법사가 마법 봉을 뻗었다.
장내의 모든 언데드가 이안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 반대일걸? 새꺄.”
이안의 눈동자가 다시금 붉게 달아올랐다.
손아귀의 정수가 회전하면서, 이안의 주위로 수많은 불덩어리가 동시에 피어올랐다.
춤추는 불꽃.
쓰기 쉽다는 이유로 별생각 없이 2레벨이나 배운 이 하위 적색 마법은, 정수로 증폭되자 불꽃의 숫자가 엄청나게 늘었다.
정확한 조준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조준 자체가 필요하지 않았다.
적이 모든 곳에 있었으니까.
콰과과과광-
달려들던 해골들이 불꽃에 부딪혀 터져나갔다.
후끈한 열기와 산산이 부서진 뼛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쉬학-!
그 사이로 이안이 솟구쳤다.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그를 보며, 흑마법사가 조소했다.
“통하지 않는다고 했을 텐데?”
그가 보랏빛 마력을 내뿜는 마법 봉을 길게 휘둘렀다.
마력의 궤적을 따라, 울부짖는 망령들이 맺힌 장벽이 피어올랐다.
끼아아아-
장벽에서 터져 나오는 귀곡성.
이안이 땅을 향해 화염구를 내던진 건 그 직후였다.
퍼엉-!
화염구는 얼마 뿜어져 나가지 않아 폭발했다.
그 반작용으로 연기에 휩싸인 이안의 몸이 허공에서 한 번 더 솟구쳤다.
“뭣…?!”
그것까지 예상하지는 못했는지, 흑마법사가 쇳소리를 냈다.
그사이 망령 장벽을 뛰어넘은 이안이 몸을 휘돌렸다.
잿빛이 아른거리는 눈동자.
바람을 전신에 두른 채 회전하던 그의 몸이, 일순간 화살처럼 흑마법사를 향해 쏘아졌다.
어느새 이안의 오른손에 들린 새로운 메이스가 흑마법사의 머리를 향해 뻗어나갔다.
네 개의 팔로 얼굴을 가린 흑마법사가 황급히 물러났지만, 이안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철퇴로 모여든 바람이 맹렬하게 회전했고.
콰지직-!
뼈로 만든 팔 두 개와 함께, 흑마법사의 한쪽 어깨가 통째로 박살 났다.
“키- 아아악-!”
흑마법사가 허공에서 활처럼 몸을 꺾으며 비명을 내질렀다.
제단 위를 구르며 착지한 이안이, 혀를 차며 읊조렸다.
“빗나갔네. 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