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262
262화
마법서를 받아드는 필립의 눈매가 꿈틀댔다.
건너편에 앉은 엘리야가 마법서와 이안을 번갈아 바라보는 가운데, 필립이 덧붙였다.
“아이나스일지도 모르겠군요. 나세르가 보낸 전서를 받고 곧바로 움직였다면, 따라올 시간은 충분했을 테니까요.”
“확인해 보면 알겠지. 일단 안에 있어라. 싸우지 않고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안 싸우신다고요…? 어떻게요?”
“귀쟁이 들의 방식을 쓸 거야. 일단은.”
“……?”
어리둥절한 필립과 그가 늘어뜨린 책으로 손을 뻗는 엘리야를 마지막으로, 이안이 창문을 닫았다.
술병의 남은 술을 전부 단숨에 마셔 버린 그가, 한 손으로 쥐고 있던 고삐를 놓으며 읊조렸다.
“지금처럼 그냥 가라.”
…알아들을지는 모르겠지만.
속으로 덧붙인 이안이 훌쩍 마차 지붕으로 올라섰다.
추격전이라도 벌어진다면 모를까. 그냥 나아가는 거라면 한동안은 마부석을 비워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닐라인지 셀림인지 모를 백마는, 굳이 이끌지 않아도 알아서 길을 따라 나아갔으니까.
“…….”
지붕 위에 선 이안은 달려 내려오는 요정 무리를 바라보았다.
어쨌건, 당장 칼부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았다.
싸우는 게 목적이라면 더 빨리 말을 몰았을 테고, 무기도 이미 뽑아 들고 있었을 테니까.
지금은 둘 다 아니었다.
다섯으로 구성된 인원 모두가 미늘 갑옷과 각종 무기로 중무장한 상태였음에도 그랬다.
곧 요정 전사들의 시선이 집중됐지만, 이안은 그다지 긴장하지 않았다.
‘도대체, 추적자란 놈들은 매번 어떻게 이렇게 내 위치를 잘 알고 따라오는 거야?’
위치 추적기가 달린 것도 아니고.
심지어 이번엔 일행들과 뿔뿔이 흩어지기까지 했는데. 하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의문을 떠올리며 허리춤의 검을 천천히 뽑아 들었을 뿐이었다.
진은 강철 장검을 늘어뜨린 이안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 이상 달려온다면, 싸우자는 뜻으로 받아들이겠다.”
마력을 조금 담아서, 그리 크지 않음에도 선명하게 번져 나가는 목소리였다. 요정들은 귀가 밝으니 굳이 마력까지 담을 필요는 없었지만. 이쪽의 뜻을 더 확실하게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시선을 받은 선두의 요정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곧이어 한 팔을 옆으로 들어 올렸다.
잿빛에 가까운 은발을 목덜미까지 기르고, 요정 특유의 오만하고 냉막한 인상을 가진 여전사였다.
다그닥- 다그닥-
뒤따르던 요정들이 그녀의 손짓에 발맞춰 속도를 줄였다.
이안은 그들을 차근히 눈에 담았다. 그들은 성별에 상관없이 차가운 인상에 늪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나마 다른 머리 색도 백금발이나 은발 정도의 차이였다.
‘귀쟁이들은 죄다 비슷비슷하게 생겨 먹었다니까…’
이안은 내심 혀를 찼다.
그가 단숨에 구별할 수 있는 요정은 아마도 테사이아뿐일 터였다. 이목구비가 더 개성 있는 건 둘째 치더라도, 그녀에겐 저들에겐 없는 장난기와 기품이 있었으니까.
“신분과 용무를 밝혀라.”
요정들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마차를 뒤따르는 형상이 되자, 비로소 이안이 덧붙였다.
선두의 요정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굳이 먼저 존대를 해 줄 생각은 없었다. 이안은 주문쟁이 다음으로 요정을 싫어했다.
예외는 단 한 명뿐이었다. 아직까지는.
미간을 더 찌푸렸던 선두의 요정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아이나스가의 요정들이다. 이안 호프 경을 만나 뵈러 왔다. 이 마차에 타고 계신 것 같은데.”
역시. 내심 읊조리면서도, 이안이 태연하게 어깨를 까딱였다.
“글쎄. 어쩌면.”
“우리는 싸우러 온 게 아니다. 마부. 그저 그분께 몇 가지를 여쭙고 확인받을 이야기가 있을 뿐이야. 그러니 잠시 마차를 멈춰라.”
자존심이 상한 듯 더 싸늘해지긴 했지만, 어쨌건 여전히 최소한의 정중함은 잃지 않은 채였다.
하지만 그 여쭙고 확인받을 이야기가 뭔지 이미 알고 있는 이안은 입꼬리를 말아 올릴 뿐이었다.
“그냥 이대로 대화하도록 하지. 정말 싸우러 온 게 아니라면.”
“…그럼 이안 호프 경이라도 뵐 수 있게 해라. 나는 그분과 대화를 나누러 온 거니까. 네가 아니라.”
“그것도 이대로 하면 돼. 내가 이안 호프니까.”
“……!”
요정의 눈이 순간 커졌다. 그녀의 뒤에서 저마다 이안을 노려보던 다른 요정들도 마찬가지였다.
한 차례 눈을 깜빡인 요정이, 이안을 빤히 바라보며 덧붙였다.
“귀하가 이안 호프 경이시라면… 왜 마부석에 앉아 계셨습니까?”
“계속 안에만 있으면 답답해서. 요정과 달리 인간은, 아무나 마부석에 앉아도 죽지 않거든.”
말을 멈춘 이안이 짧게 실소했다.
“어쨌든, 재미있네. 대뜸 찾아와서 날 불러 달라고 해 놓고. 정작 나타나니 의심부터 하다니.”
“……!”
화들짝 눈을 깜빡인 요정이, 비로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이안 경…. 이렇게 곧바로 뵐 수 있으리라 예상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쪽이 책임자이신가?”
“예. 아이나스의 일원이며, 수색대의 지휘를 맡은 앨리스 아이나스입니다.”
“말했듯, 이안 호프요. 용병이지.”
“…용병 출신이시란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아, 그래. 나에 대해 사전 조사를 좀 했나 보군.
이안은 옅게 웃음 지었다. 이 오만하고 잔인한 거짓말쟁이들이 이렇게 조심스러운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아서였다.
물론, 그저 그의 명성이 이유의 전부는 아닐 터였다.
“대화를 나누고 싶다면, 먼저 내 질문에 답부터 주셔야 할 것 같은데.”
이안이 운을 뗐다.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앨리스가 곧바로 대답했다.
“말씀하십시오.”
“내 뒤는 어떻게 알고 따라온 거지? 추적이야, 전서를 받고부터 시작하셨겠고.”
순간 멈칫했던 엘리스가, 아직도 이안의 손에 들린 새하얀 칼날을 곁눈질하고는 대답했다.
“…마차의 흔적을 추적했습니다.”
“바퀴 자국을?”
“예.”
“어디서부터?”
“드네로브에서 테센으로 접어들면서부터였습니다.”
이안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눈이 정말 밝으시군. 꽤 오래전 흔적이었을 텐데.”
“…칭찬 감사합니다.”
거짓말이 아니라 이거지.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슬며시 말려 올라갔다.
핀드렐 아이나스, 그가 죽인 귀쟁이가 주절대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가문의 요정들은 포기를 모르는 최고의 추적자들이라던. 적어도 그 말은 허언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동시에 이 귀쟁이들이 이렇게까지 공손한 가장 큰 이유도 확실히 알게 됐다.
테센이 어떤 몰골이 되었는지도 직접 본 것이다. 그리고 그곳이 그 꼴이 된 데에는 이안이 영향이 지대했으리라 판단한 게 분명했다.
’하긴. 도시에서도 한 푸닥거리 하긴 했었으니까.‘
그가 싸운 흔적이 역력하게 남아있었을 테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어쨌건 잘된 일이었다. 덕분에 상황이 더 편해졌으니까.
“라클리프에서도?”
“예. 약간의 돈을 쓰긴 했습니다만.”
이안은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금화라도 하나 찔러 줬다면, 그의 행방을 알아내는 건 식은 죽 먹기였을 터였다. 성문을 나선 뒤론, 하던 대로 마차의 흔적을 따라왔겠고.
마차를 바꿔 타지 않길 잘했군.
내심 읊조리며, 이안이 미소 지었다.
“덕분에 의문이 풀렸군. 좋아. 이제 귀하가 원하는 대화를 시작해 봅시다.”
그가 진은 강철 장검을 검집으로 되돌렸다.
앨리스의 눈빛에 옅은 안도가 스쳤다. 표정은 그대로였으니, 꾸며낸 감정은 아닐 터였다.
이 귀쟁이는 확실히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물론, 그 사실이 이들에 대한 호감이나 방심을 불러일으키진 않았다.
어쨌건 이들은 귀쟁이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악명 높은 아이나스.
“경의 일행 중에, 아이나스의 이름을 사칭한 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텐시아 아이나스라는 이름의 원로는,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앨리스가 입을 열었다. 슬쩍 이안의 얼굴을 한차례 올려다본 그녀가, 재빨리 다시 마차로 시선을 내리며 덧붙였다.
“가문의 이름을 사칭하는 행위는 가장 큰 범죄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본래라면, 그 요정을 따라가 극형에 처하는 것이 당연한 절차였습니다.”
“…그래서?”
이안이 덤덤하게 되물었다. 다시 한번 이안을 일별한 앨리스가 마른 침을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추적하며 알게 된바. 우리는 이안 경께 먼저 자초지종을 듣는 게 옳다고 판단했습니다. 그 요정은 이안 경의 동료이며, 경의 명령으로 그런 역할을 수행한 것 같았으니까요. 해서, 집행에 앞서 경께 이야기를 듣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
요정답지 않게 담백한 말투였다. 하지만 이안은 앨리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녀가 티 나지 않게 조금씩 마차와 간격을 벌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튀겠다는 생각이 틀림없었다. 그야말로 요정다운 선택이었다.
아마 작정하고 튄다면 이안도 전부 잡아 죽이기는 어려울 터였다.
물론 다 죽인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으리라. 이것들은 꾸준히 가문에 연락을 넣고 있었을 테니까.
소식이 끊긴다면 이안이 범인이란 걸 곧바로 눈치채겠지. 그럼 아이나스 전체와 싸우게 될 터였다. 어쩌면 중앙의 다른 요정 가문들과도.
하지만 이안은 그 사실에 새삼스럽게 당황하거나 긴장하지 않았다.
“훌륭한 선택을 하셨군.”
핀드렐을 죽인 순간부터. 그리고 테사이아에게 신분을 사칭하게 한 순간부터 언젠가 예정되어 있던 상황이었으니까.
이런 상황을 대비한 몇 가지 계획들도, 당연히 진작부터 준비되어 있었다.
심지어 그중에서도 최선의 계획이 현실이 됐다. 사실, 이안도 가능성이 그리 높지는 않다고 생각했던 계획이었다.
이 귀쟁이들과 칼부림이 아니라 대화부터 나누는 건,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만약 내 친구에게 먼저 갔다면, 귀하의 가문과 나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을 테니까.”
“…경께서 그런 명령을 내리신 게 맞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겠습니까?”
요정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 가운데, 앨리스가 한층 더 서늘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이안을 올려다보는 눈빛에 두려움과 적의가 동시에 묻어났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뒷짐을 지듯 왼팔을 슬쩍 뒤로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 내 친구는 그저 내 부탁을 들어주었을 뿐이지. 정확히 말하면 가명을 쓴 것일 뿐, 사칭은 아니었소.”
엘리스의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그게 무슨….”
“이건 내 정당한 소유물이니까.”
이안이 아공간에서 꺼낸 은 브로치를 요정들이 보이게 내밀었다.
크랄렌과 만나기도 전에 테사이아에게 진즉 돌려받아 아공간에 처박아 뒀던 물건이었다.
“……!”
앨리스의 눈이 커졌다. 눈이 좋은 요정이니, 이안의 손에 들린 브로치가 진품이라는 것을 단숨에 알아본 것이리라.
“…그건 가문의 인장입니다. 납득할 만한 해명을 해 주지 않으신다면, 결코 그냥 넘어갈 수는 없을 겁니다. 이안 경이라 할지라도.”
확연히 딱딱해진 얼굴로 앨리스가 씹어 뱉었다. 말과 달리, 그녀와 마차의 거리는 조금 더 벌어지고 있었다.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해명이랄 것도 없소. 핀드렐에게 받은 거니까.”
여기서 그 이름을 들을 줄은 몰랐다는 듯, 앨리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핀드렐? 핀드렐을 아십니까?”
“잘 알지. 내가 그자의 전 재산을 판돈으로 탈탈 털어먹었으니까.”
이안이 싱긋 미소 지었다. 용병의 미소였다. 앨리스가 멍청한 표정을 지은 건 거의 동시였다. 눈을 멍하니 깜빡인 그녀가, 이윽고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판돈…? 설마 지금, 가문의 인장을 도박으로 따내셨단 말씀이십니까?”
“이걸 가지고 있으면 아이나스가의 일원이나 다름없다는 의미이며, 그에 따른 권리도 행사할 수 있는 거라 주장하더군. 금화로 치면, 그래… 한 백 개쯤 된다던가.”
“…….”
엘리스의 입이 설핏 벌어졌다. 다른 요정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앨리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자식이… 그랬다고요?”
“애석하게도.”
“…그걸, 순순히 넘겨줬습니까?”
“아니었지. 곧바로 날 죽이겠다고 덤벼들던데. 거꾸로 두들겨 패 줬더니 잠잠해졌지만.”
“그게… 어디였습니까?”
미간을 더는 좁아질 수 없을 때까지 찌푸리던 앨리스가, 이윽고 한숨 섞인 목소리로 내뱉었다.
이안이 즉답했다.
“변방.”
“조금만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어차피 거기로 가도 못 찾을 것이오. 새벽에 부하들을 끌고 도망쳤으니까. 더 깊은 변방으로 갔겠지. 전쟁통에 껴서 한몫 챙길 계획이었으니.”
“이런… 빌어먹을… 놈이….”
엘리스가 이를 갈며 중얼댔다. 방금까지 튀려던 건 잊은 듯, 그녀의 말이 다시 조금씩 마차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곧 숨을 고른 앨리스의 얼굴이 다시 냉막하게 되돌아왔다. 하지만 뾰족한 귀만큼은 여전히 붉게 달아오른 채였다.
“그놈은 제 혈육으로, 가문에서도 퇴출당한 문제아입니다. 가문의 수치라고 할 수 있죠. 놈이 경께 어떤 무례를 저질렀는지도 알 것 같습니다만….”
분노를 꾹꾹 억누른 목소리로 내뱉은 그녀가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그 녀석이 가문의 인장에 대해 한 말은 전부 거짓말입니다. 그러니, 가문의 인장을 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건, 도박의 판돈 따위로 거래될 물건이 아닙니다.”
“애석하게도 그럴 순 없소. 이건 내 소유물이니까.”
이안이 딱 잘라 말했다.
사실 주려면 줄 수도 있었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물건에 깃든 기억을 읽을 수 있는 주문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다시 낯이 굳어지는 앨리스를 내려다보며, 이안이 덧붙였다.
“하지만 더는 이걸 사적으로 사용하는 일은 없을 것이오. 기회가 된다면 녹여서, 돈으로 바꾸겠소.”
“녹여….”
더듬댄 앨리스가, 자존심이 상한 듯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덧붙였다.
“그럼, 맹세라도 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찬란한 여신의 이름을 걸고.”
“어렵지 않지. 맹세하겠소.”
“경께서 해 주신 이야기가 전부 사실이라는 것도요?”
“…….”
이게 본론이었네.
앨리스의 눈을 잠시 빤히 내려다본 이안이, 이윽고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대답했다.
“그것도 맹세하지.”
“…알겠습니다. 빌어먹을… 그 말하는 짐승 같은 놈이….”
시선을 돌린 앨리스가 중얼댔다. 눈빛에 수치심과 분노가 아른거렸다.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가문이 망신당했다 여기는 게 분명했다.
“물을 말은, 그게 끝인가?”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이안이 내뱉었다. 앨리스가 고개를 까딱였다.
“예. 협조해 주셔서 감사하군요.”
말투가 까슬해진 걸 보니, 정말 볼일을 다 본 모양이었다.
다신 안 볼 사이다, 이거지?
낮게 코웃음 친 이안이 덧붙였다.
“하지만 나는 아직 하나 남았소.”
“……?”
엘리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안을 향한 두려움은 여전했지만, 이제는 짜증을 숨기지 않은 채였다.
용무가 끝났으니 여차하면 그냥 튀어 버리면 그만이라 여기는 게 분명했다.
이안이 손을 내밀었다.
“핀드렐에게 받아야 할 빚이 남아있거든.”
“빚이… 남으셨다고요?”
“궐련 스무 개쯤.”
“궐….”
“하루면 만들 수 있다더니. 그게 도망칠 시간을 버는 거였더군.”
이야기가 이어질 수록 앨리스의 표정이 점점 더 일그러졌다. 이안이 내민 손의 손가락을 까딱이며 덧붙였다.
“그놈을 다시 만나긴 어려울 것 같으니, 같은 아이나스인 당신이 갚으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