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264
264화
“장본인… 이라니요?”
되묻고는 멈칫한 페이든이, 이윽고 미간을 찌푸리며 덧붙였다.
“설마, 정말 그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아요. 북부에서 두각을 드러낸 후로도, 수많은 업적과 혼란을 낳은 자.”
두건 아래의 푸른 눈이 묘한 열망을 머금고 일렁였다.
“교단이 그 이름을 알리지 않으려 노력 중이지만, 어느새 제법 많은 이들이 이름을 알게 된. 새로운 성자로 임명될지도 모르는데도, 어째서인지 아직도 교단의 수중에 들어오지 않은 자….”
혼잣말을 읊조리듯 내뱉은 공녀가 두건을 벗었다. 한데 곱게 묶은, 윤기가 흐르는 갈색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페이든이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머리칼을 바라보는 가운데.
“우리는 그를 만나러 갈 겁니다.”
공녀가 확신하듯 말을 맺었다.
“하지만… 본래는, 서부로 가시겠다 하지 않으셨었습니까?”
화들짝 머리칼에서 시선을 뗀 페이든이 덧붙였다.
공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죠. 하지만 변방과 서부에 관심을 두고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잖아요. 문득 이런 의문이 들더군요. 내가 직접 움직인다 해서 오라버니와 동생을 이길 수 있을까. 과연 아버님이 정말 바라시는 게, 우리끼리 서부나 변방을 두고 힘겨루기를 하는 걸까.”
공녀의 미소가 짙어졌다. 아주 기품 있는. 하지만 동시에 어떤 묘한 권위를 가진 미소였다.
“그래서 관점을 조금 바꿔 봤죠. 그랬더니 이런 결론이 나오더군요. 이게 정답일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허락을 받은 걸 보면, 가능성이 조금은 있지 않겠어요?”
“…….”
페이든이 낮게 침음했다. 공녀를 바라보는 눈빛에 불안이 묻어났다.
“소문대로라면, 지금 그의 행적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분명, 아주 위험해지실 겁니다.”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도, 페이든이 말을 이었다.
“머잖아 공녀께서 자리를 비우셨다는 걸 많은 이들이 알게 될 테니까요. 몇몇 분들은 경쟁자를 제거할 아주 좋은 기회라 여기실 겁니다. 가장 손쉬운 선택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건,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행방조차 알 수 없는 이를-.”
“경의 생각처럼 오래 걸리지도, 멀리까지 가게 되지도 않을 겁니다.”
말을 자르며 그에게로 고개를 기울인 공녀가, 속삭이듯 덧붙였다.
“그는 지금, 중앙에 있거든요.”
“……!”
“바로 어제 들어온 보고서로 알게 된 사실이죠. 아직은 나를 포함해 교단의 극소수만이 알고 있어요.”
“중앙의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까진 아직 몰라요. 하지만 그자라면 머지않아 어딘가에서 또 자신을 드러내겠죠. 그 소식은, 곧바로 나도 알게 될 거고요. 그리고 어차피….”
페이든을 응시하는 공녀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경이 날 지켜 줄 거잖아요?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물론입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경에게만 무거운 짐을 지우진 않을 거예요. 아스메도 함께 갈 거니까. 그러니, 염려는 거기까지만 해요.”
슬며시 쪽문 앞의 여인들을 돌아보았던 페이든이, 이윽고 고개를 숙였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좋아요. 설레네요. 제도를 떠나는 건, 정말이지 오랜만이거든요.”
상쾌하게 미소 지은 공녀가 두건 여인들을 돌아보았다.
한 명이 깊이 허리를 숙이는 가운데, 다른 한 명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발소리도 내지 않고 미끄러지듯 걸었다.
비로소 공녀가 다시 페이든을 마주 보았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가면서 나눌까요?”
그제야 그녀를 이 냄새나고 음침한 골목에 너무 오래 세워 뒀다는 것을 깨달은 페이든이, 황급히 몸을 돌렸다.
“모시겠습니다.”
***
“슬슬 마차 안으로 들어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리.”
마부석에 앉은 필립이 말했다.
마차 지붕 위에 반쯤 눕듯이 기대앉아 있던 이안이, 옆에 놓인 술병을 집어 들었다.
“한 모금만 더 마시고.”
그가 고개를 젖히며 술병을 입에 댔다.
푸른 하늘이 그의 시야에 가득 찼다. 높게 흐르는 흰 구름보다 푸른색이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더 많았다.
어제부터 볼 수 있게 된 광경.
적당히 선선하기까지 해서, 이렇게 지붕에 기대 누워 술을 축내기에도 딱 좋았다.
물론, 그저 시간만 죽인 건 아니었다. 야습조차 없이 보낸 지난 며칠은, 늘 머릿속을 오가던 생각들을 정리하기에도 좋은 환경이었다.
‘중간중간 귀찮은 소일거리들이 있긴 했지만….’
이안은 비로소 상반신을 일으켰다. 곧게 뻗은 관도 너머, 낮게 이어진 장벽이 펼쳐져 있었다.
아마 일대를 전부 감싸고 있을 터였다. 중앙에선 그리 드물지 않은 광경이기도 하리라.
문득 루 사드의 글루미르가 뇌리를 스쳤다. 이런 걸 따라 하려 한 것이었겠지.
이 세계가 게임이었다는 걸 다시금 떠올리게 하기에도 충분한 광경이었다.
어쨌든, 관도 끝의 활짝 열린 관문 너머가 보르타였다.
첫 번째 목적지에 도착할 순간이 머지않은 것이다.
끼익-
몸을 숙여 마차 문을 연 이안이, 날렵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의자에 앉아 있던 엘리야도, 지금은 허벅지에 펼쳐 놓은 책이 아니라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 나타날 관문과 도시를 눈에 담고 싶은 것이리라.
그녀의 옆에 앉은 이안이 말했다.
“그 책, 잠깐 넣어두는 게 좋겠다.”
“아. 그러네요. 이걸 보일 순 없겠어요.”
엘리야가 냉큼 책을 덮어 내밀었다.
그녀가 벌써 반 이상을 읽었다는 걸 확인한 이안이, 짧게 입맛을 다시며 마법서를 아공간에 던져 넣었다.
이걸 다 읽으면, 이제 이안의 수중에 남은 건 한 권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건 퀘스트의 카운트도 올라가고 있고, 엘리야 역시 이안이 지워 버린 부분들은 알아내고 싶지 않은 눈치였지만.
‘…읽을 게 다 떨어지면, 또 얘기가 달라질 것 같단 말이지.’
그 전에 관심을 돌리거나, 경각심을 무의식에 각인시킬 만한 예시가 필요했다.
정말, 마법사의 악몽이라도 찾아가야 하나.
이안은 소리 없이 입맛을 다셨다.
이 빌어먹을 세상은, 정말이지 타락의 유혹이 너무 많았다.
물론, 그 모든 것을 대신 막아 줄 수 있으리란 오만한 생각까진 하지 않았다.
그가 해 줄 수 있는 건 이 정도까지였다. 그러고도 끝내 엘리야가 흑마법에 빠져든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리라. 애초에 검은 벽을 연구하겠다는 그녀의 목표는, 그런 위험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다각- 다각-
창밖으로 관문이 가까워졌다.
경비병들의 표정도 느슨하고 문도 열려 있는 걸 보면, 사실상 검문을 하지 않는 지역인 모양이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여긴 중앙이고, 변방이나 북부, 심지어 내해와도 거리가 멀었으니까.
애초에 이 장벽은 내전의 시대나 전쟁의 시대에 지어졌을 터였다.
지금은 그저 영지를 구분하는 경계선에 불과하리라.
역시나, 마차는 정차조차 하지 않고 관문을 지나쳤다.
시선도 주지 않는 경비병이 보일 때쯤, 이안은 몸을 앞으로 뻗어 간이 창문을 두드렸다.
마차가 곧바로 멈췄다.
다시 의자에 걸터앉은 이안이 경비병을 바라보았다.
“말 좀 묻겠소.”
“음…?”
쩍 하고 하품을 하던 경비병이 느릿느릿 마차 옆으로 다가왔다.
이안이 창문 밖으로 주먹 쥔 손을 내밀었다. 순간 졸음이 가신 표정이 된 경비병이 그의 주먹 아래로 손을 내밀었다.
…사람 사는 동네는 다 똑같구만.
내심 읊조리며, 경비병의 손바닥 위에 쥐고 있던 은화 하나를 떨어뜨린 이안이 말했다.
“이 도시에 방주 상단이 있다고 들었는데. 어디로 찾아가야 하오?”
“아, 도시로 가시려던 것이었. …이셨습니까?”
대답하며 이안을 눈에 담은 경비병이 뒤늦게 말을 올렸다.
그가 귀족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지금 이안은 상당히 깔끔한 모습이었으니까.
물이 보일 때마다 씻은 건 물론이고, 엘리야가 그의 의복과 식사까지 도맡아준 덕분이었다.
“그렇소.”
“찾는 건 어렵지 않으실 겁니다. 얼마 전, 도시에 몇 없는 장원으로 이사했으니까요. 대로를 따라 내성 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간판을 발견할 수 있으실 겁니다.”
살아 돌아온 정도가 아니라, 한몫도 단단히 챙긴 모양인데.
내심 웃음 지은 이안이 덧붙였다.
“상단주는 도시에 있소?”
“그럴 겁니다. …외부인이 도시에 들어가면 통행료를 내야 합니다만. 알렉에게 이미 지불했다고 말씀하시면, 그냥 통과할 수 있으실 겁니다.”
“그럼 덕 좀 보겠소. 알렉.”
싱긋 미소 지은 경비병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평화로운 동네라 그런지 인심도 후했다.
슬쩍 마주 웃은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마차가 유유히 관문을 통과했다.
곧 보르타의 전경이 펼쳐졌다.
수확을 끝낸 포도밭. 저 멀리 밀밭과 풍차가 보였다. 심지어 드문드문 여러 개였다. 근처에 강이 흐르는 것이리라.
드르륵-
얼마 지나지 않아 간이 창문이 열렸다. 필립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도시가 보입니다, 나리. 생각보다 크네요.”
이안을 돌아보는 눈빛이 반짝였다.
이제 제국의 도시에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변방 출신인 그에겐 매번 새로운 놀라움을 선사하는 모양이었다.
어쨌건 그의 말대로, 보르타는 제국의 대도시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어 보였다.
높다랗고 고풍스러운 성. 그 주위로 꽤 높다란 성벽이 한 겹 더 도시 안쪽을 두르고 있고, 그 밖으로도 크고 작은 지붕들이 이어졌다. 도시 외곽을 감싼 성벽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것이리라.
‘이제야 좀 사람 사는 것 같은 동네들이 나오네.’
이안의 입매가 설핏 올라갔다. 변방은 물론이고 북부나 서부보다도 깨끗하고 화려한 도시였다.
모든 도시가 이런 식인 세상에 떨어졌다면, 조금은 삶이 덜 고달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관문과 이어진 성문도 활짝 열려 있었다. 저 옆의 성벽으로 다가가는 마차와 행인들이 모습이 보였다. 성문이 하나가 전부가 아닌 것이리라. 보르타는 여행객들이 한 번쯤은 거쳐 가는, 일종의 자유 도시인 모양이었다.
“통행료는 알렉에게 지불했소.”
성문을 지키는 병사는 그 한마디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러났다.
마차가 도시로 들어갔다.
밖에서 보이는 것만큼 번성한 도시였다. 수도 시설까지 존재하는 듯, 그다지 고약한 냄새도 나지 않았다. 거리를 오가는 다양한 인종의 행인들도 복장이 제법 깔끔했다. 절반쯤은 외부인 같았다.
“역시, 바깥세상은 넓네요.”
창문 밖을 구경하던 엘리야가 중얼댔다. 하긴. 제대로 된 도시를 보는 건 처음일 터였다.
라클리프는 거대한 도시이긴 했지만, 반파되어 재건 중이지 않았던가.
이안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제도는 훨씬 더 클 거다.”
“그렇겠죠. 거긴, 난쟁이를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여긴 인간과 요정뿐인 것 같거든요.”
요정…? 생각하기가 무섭게, 이안은 인파 사이에서 요정을 발견했다. 생김새도 복장도 요정치고는 평범했다. 다소 거만해 보이는 표정은 여전했지만.
하긴. 여긴 중앙이지.
이안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내해나 숲과 이어진 도시가 아니라도, 정착한 요정 가문이 존재할 수도 있으리라.
“내가 알기로 난쟁이들은 죄 북부에 있지만…. 그래. 중앙에선 그래도 찾아볼 수 있을지도.”
“난쟁이 남자들은 그렇게 온몸에 털이 덥수룩하다면서요. 궁금하네요. 정말 그런지.”
“너랑은 여러모로 다를 거다. 너무 놀라지 마.”
잡담을 나누는 사이, 대로를 나아가던 마차가 방향을 틀었다.
이유를 깨닫는 건 어렵지 않았다.
높다란 담벼락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저택을 열 개 정도는 지을 수 있을 법한 범위였다.
‘매달 세금을 엄청나게 뜯기겠군.’
아까 알렉이라는 이름의 경비병이 말했듯, 두 번째 성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치였다.
이런 장소에 이만한 부지 하나를 통째로 쓰다니. 변방에선 상상도 못할 광경이었다. 북부나 서부에서도, 물론.
‘…어쨌든, 동네 장사는 아예 안 하는 모양인데.’
굳게 닫힌 대문 앞은 무장한 경호병 둘이 지키고 있었다.
마차가 대문 앞에 멈췄다. 필립이 경호병들을 향해 말했다.
“파엘 단주에게 전하시오. 고객이자 은인인, 이안 호프 경께서 방문하셨다고.”
이젠 시키지 않아도 잘 한다니까.
이안은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문을 열면서, 그가 엘리야를 돌아보았다.
“넌 여기 앉아 있다가, 필립이 문을 열어 주면 그때 내려라. 예법 정도는, 알고 있겠지?”
“물론이죠. 저를 어떻게 소개하실 건가요?”
엘리야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잠시 멈칫한 이안이, 이윽고 마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의뢰인.”
문을 닫은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굳게 닫힌 대문이 보였다. 그 앞, 홀로 남은 경호병도.
기다란 창과 가죽을 덧댄 방패. 그리고 가죽 갑옷으로 무장한 반투르인이었다. 소매 사이로 드러난 팔 근육이 우람했다.
‘여기서 저렇게까지 중무장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이안은 대문 양옆에 튀어나와 있는 간판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뿔처럼 곡선을 그리며 솟은 철제 골자 사이를 은으로 장식하고, 끝에 각기 커다란 배와 저울을 조각한 금속 장식물이 달려 있었다.
한쪽은 은으로, 한쪽은 금을 덧씌워 고급스러웠다.
이안은 중앙이라 해도 문맹률이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글자는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끼이이-
커다란 대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수염을 멋스럽게 기른 제국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까지 본 것중 가장 단출한 차림인 그가, 이안을 발견하고는 눈을 치켜떴다.
“루 솔라여…! 오면서도 반신반의했건만! 정말 경이셨군!”
다행이네. 북부의 초인 어쩌고 하면서 무릎부터 꿇을까 걱정했는데.
내심 읊조리며, 이안이 입술을 말아 올렸다.
“오랜만이오. 보르타의 파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