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Dark Fantasy Villain RAW novel - Chapter 266
266화
“그 근처에 있었지.”
“……!”
파엘이 눈을 치켜뜨는 가운데, 잔을 내려놓은 이안이 덧붙였다.
“용병에게 의뢰와 관련된 질문은 하지 않는 게 좋으실 거요.”
뭔가 더 물으려던 파엘이, 그의 시선을 마주하고는 움찔 입을 다물었다. 이안이 곧 다시 술잔을 쥐며 말했다.
“어쨌든, 소문은 거의 다 사실일 것이오. 올해부터 귀하는 포도주를 더 비싸게 파실 수 있겠지.”
“…그렇군.”
굳어 있던 파엘이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술잔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던 그가 읊조렸다.
“북부의 변화를 보면서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긴 했소만. 생각보다 더 빠르게 현실이 되고 있는 모양이오. 하긴… 변방이 그리되었다는데. 제국이라고 영원히 안전할 순 없겠지.”
필립의 시선이 곧바로 파엘에게로 돌아갔다. 쥐고 있던 포크를 놓은 그가 입을 열었다.
“지금 변방은 어떤 상태입니까?”
그의 눈빛이 진지해진 건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메브가 다시 변방으로 가게 될지도 모르지 않던가.
이안은 게임에서의 기억으로 짐작하고 있지만, 필립은 아는 게 거의 없었다.
파엘이 입맛을 다시고는 입을 열었다.
“최악이라고 들었소. 마경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고 있다더군. 흉지가 아닌 곳을 찾는 게 더 어렵고, 본 적도 없는 마물들이 뒤틀린 숲과 계곡을 활보하며 사람들을 산 채로 씹어 먹는다고 말이오.”
“…….”
“왕국들도 전쟁을 멈췄다더군. 사실, 전쟁을 계속할 상황도 아닐 것이오. 그런데도 변경 지역에는 매일 같이 밀입국한 자들이 붙잡히고 있다고 들었소. 많은 이들이 목숨 걸고 국경을 넘어, 스스로 노역 형을 택하고 있는 것이오.”
“…차라리 용기 있는 이들일지도 모르죠. 가만히 앉아 죽음을 기다리느니, 도전을 택한 거니까요.”
필립이 읊조렸다. 여러 생각이 오가는 듯, 술잔을 응시하는 눈빛이 음울하게 일렁였다.
쓴웃음을 흘린 파엘이 덧붙였다.
“두 분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나도 그 한복판에 휩쓸리고 말았을 것이오. 나뿐만 아니라 함께하던 수많은 이들도.”
다시 말없이 음식을 우물대고 있던 이안이 그를 바라보았다.
“결국, 오른델까지 가지는 않으셨었나 보군.”
“그렇소. 벨 론데 국경 인근까지만 들어갔었지. 그리고 그때쯤엔 이미 많은 이들이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소. 주민들조차 검은 벽의 광기가 변방을 물들이고 있다고 수군댔으니 말이오.”
술잔을 턱 아래로 든 파엘의 눈빛이 깊어졌다.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때의 기억이 어제처럼 생생한 모양이었다.
“결정을 내리기 전날 밤. 하늘에서 심상치 않은 벼락이 여러 번 쳤소. 비도 오지 않았는데, 하늘이 쪼개지는 것 같았지. 어쩌면, 정말 그랬을지도 모르겠소.”
흡혈 여제를 죽였을 때인가. 어쩌면 균열 사이로 뭔가 넘어왔을 때일지도.
이안은 내심 생각하며 식사를 이어 나갔다.
아직도 음식을 먹고 있는 건 그뿐이었다. 필립은 진작 입맛이 떨어진 듯 술잔만 들고 있었고. 엘리야는 흥미로워하는 눈빛으로 파엘의 입만 바라보았다.
포도주로 입술을 축인 파엘이 덧붙였다.
“보르가 이제는 결정을 내릴 때라고 재촉하더군. 그래서 그렇게 했소. 행렬을 돌려 다시 되돌아 나가기로 했지. 하지만 모든 상단이 동의하진 않았소. 몇몇은 오히려 아겔 란까지 반드시 가야겠다고 주장했지.”
“돌아가는 상단이 더 많을 테니, 그만큼 물건을 비싼 값에 팔 수 있겠다고 생각했겠군요.”
엘리야가 덧붙였다. 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다못해 벨 론데에도 아직 남은 도시가 여럿 있었습니다. 그 인근의 상황은 아주 어지러워서, 평소보다 더 큰 이문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요. 유혹을 이기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래서, 무리가 둘로 쪼개졌습니까?”
필립이 물었다. 파엘이 씁쓸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됐소. 나와 함께 돌아가기로 한 이들이 훨씬 더 많긴 했소만. 어쨌든, 그래서 내 뜻에 동의해준 상인들에게 돌아가는 길의 거래를 전부 양보했소. 내 결정 때문에 모두에게 손해를 끼칠 수는 없잖소.”
“…상단의 규모를 이렇게까지 키운 이야기라기엔, 계속 손해만 보고 계신 것 같은데.”
옅은 실소를 흘린 이안이 고기를 한 점 더 입에 넣으며 말했다.
파엘이 고개를 옆으로 까딱였다.
“대신 우리 상단은 북부로 향하기로 했소. 변방에서의 거래를 양보한 대신, 다른 상단들의 보급 물자를 싸게 잔뜩 양도받았지. 그들 중에는 북부의 출입이 금지된 이들도 있었으니, 좋은 거래였던 셈이오.”
“아하….”
이안이 다시 한번 웃음 지었다.
기어코 북부를 다시 갔군.
하긴. 달리 뾰족한 수가 있진 않았을 터였다. 그대로 돌아간다면 손해만 보고 끝났을 테니까.
이안이 알기로 그건, 파엘이 죽는 것보다 싫어하는 일이었다.
“사실 거의 울며 겨자 먹기나 다름없었소만. 북부에 들어서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소. 검은 벽이 심상치 않은 상태라지 않겠소.”
“검은 벽이요…?”
엘리야가 눈을 치켜떴다. 재빨리 자세를 고쳐 앉은 그녀가 덧붙였다.
“정확히 어떻게 심상치 않다던가요?”
“불안정하다고 하더군요. 직접 본 건 아닙니다. 카링기온을 비롯한 최전선의 요새들은, 이미 민간의 접근이 금지된 상태였습니다.”
파엘은 엘리야의 반응에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조곤조곤 말을 이어갔다.
“북부 군단은 거의 다 검은 벽 인근에 주둔 중인 것 같았습니다. 아마 동부 전선도 비슷한 상태일 거고. 아래쪽 사막 요새들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겠지요.”
“…침식을 대비하는 거군요. 검은 벽이 그 너머의 괴물들을 불러들이고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엘리야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평소의 조금은 어리숙해 보이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진지하게 현상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학자의 얼굴. 그녀가 술을 한 모금 더 마시며 읊조렸다.
“어쩌면 변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도 검은 벽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네요. 어쩌면 그 반대이거나요. 변방에 뿌리내린 광기가 검은 벽을 자극하고 있는 거예요.”
똑똑하네. 그런 얘긴 해 준 적도 없는데.
이안은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며 생각했다.
검은 벽은 그가 북부를 떠날 때 이미 불안정해지고 있었다. 흡혈 여제가 죽으며 만들어 낸 균열이 그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이리라.
어쩌면 서부의 의식이 타락자들이 원치 않은 순간에 시작된 것도 그 영향을 받은 걸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다시 검은 벽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겠지. 모든 게 연결된, 일종의 악순환의 고리인 셈이었다.
‘난 그걸 알면서도 굴리고 있고.’
이안의 입가에 옅은 쓴웃음이 스쳤다. 물론 그 사실이 새삼스럽거나 공교롭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퀘스트들을 해결해 나가다 보면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으니까.
어차피,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을 터였다.
그저 속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리라.
거기 무력하게 휩쓸리느니, 지금처럼 발버둥이라도 쳐야 했다.
‘정해진 운명이 있다는 걸 아는 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적응이 안 된다니까.’
술잔을 다시 입에 가져가던 이안은, 필립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필립이 짧게 헛기침하며 술잔을 들었다.
보아하니 저 녀석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동안 우리가 해 온 모든 일이 오히려 검은 벽을 자극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이런, 제가 말이 너무 많았군요. 죄송해요.”
혼잣말처럼 중얼대던 엘리야가, 뒤늦게 주위가 조용해진 것을 깨달은 듯 말했다. 파엘이 아니라는 듯 술잔을 드는 가운데, 그녀가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그래서요? 그 뒤엔 어떻게 됐나요?”
“덕분에 물건들을 비싸게 팔 수 있었습니다. 영애께선 모르시겠지만, 그때 제가 가지고 있던 물건은 대부분 제국제 병장기였으니까요. 거기다 술과 치즈도 잔뜩 있었죠. 전부, 전선에서 필요로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술을 한 모금 마신 파엘이 묘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물건을 다 정리하고 보니, 평소의 배가 넘는 이득을 봤더군요. 추가적인 일정으로 생긴 손해를 전부 메꾸고 나서도요. 이것도 어떤 의미에선….”
파엘의 시선이 다시 이안 쪽으로 돌아왔다.
“경 덕분이라고 할 수 있겠소. 이미 그 전에 자치령 수비군에 물자를 납품한 이력이 있어서, 거래가 더 원활해졌었으니.”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정말 편하게 쉬다 가도 될 것 같소. 술과 고기도 마음껏 축내면서 말이오.”
접시를 깨끗이 비운 이안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
파엘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당연한 말씀을. 말씀드리지 않았소. 한 가지 아쉬운 건….”
문득 짧게 입맛을 다신 파엘이 덧붙였다.
“나름대로 노력해 봤지만, 끝내 용살자의 이름을 알아내지는 못했다는 부분이오.”
필립과 엘리야가 또 한 번 동시에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들과 달리 태연하게 술을 한 모금 마신 이안이 내뱉었다.
“아쉬우시겠군. 궁금해하셨는데.”
“당연한 말씀을. 다들 그 얘기만 하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다물어 버리더군. 사실… 음. 민망한 이야기지만, 이실직고하겠소.”
짧게 헛기침한 파엘이 슬쩍 이안의 눈치를 살피고는 덧붙였다.
“우리는 경이 북부의 초인과 연이 닿아 있으리라 추측했소. 해서, 경의 이름도 언급했었지.”
“내 이름을…?”
이안이 슬며시 한쪽 눈썹을 말아 올리며 되물었다. 그의 표정을 오해한 듯, 파엘이 고개를 숙였다.
“사과드리겠소. 그저, 내가 경과 친분이 있는 사이라 했을 뿐이오.”
“…아니오. 어쨌든, 결과가 좋지는 않으셨나 보군.”
“북부인들은 경을 안다고 하면 화색이 되었소만. 해서 북부의 초인이 누구냐고 물으면 표정이 요상해지더군. 그리고는 곧 기분 나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소. 다들 더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더군.”
“…….”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던 필립이 황급히 술잔으로 입을 가렸다. 이안의 입가에도 헛웃음이 스쳤다.
북부인들이 기분이 상한 건, 파엘이 자신을 놀리고 있다 여겨서일 터였다. 어쩌면 모욕으로 받아들였을지도 몰랐다.
당연한 일이었다. 용살자의 이름을 대면서 용살자가 누구냐고 물었으니.
다시 생각해도 이상하다는 듯 입맛을 다신 파엘이 덧붙였다.
“그리고 그날 밤에, 웬 무뢰배들이 숙소로 들이닥쳤소. 용살자의 전사들이라는 이름의 용병단이었지. 혹시 아시오?”
“뭐, 이름 정도는.”
“말이 용병단이지, 사실상 자경단이나 다름없는 작자들이오. 거의 북부 전체에 세력을 뻗치고 있다더군. 혹 북부에 갈 일이 있다면, 경도 조심하시오.”
이안의 한쪽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그 새끼들이, 골목대장 노릇을 하고 있단 말이지.
그의 표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듯, 파엘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자들의 우두머리가 말하길, 앞으로 북부에서 계속 거래를 하고 싶거든 입을 조심하라더군. 금방 들통날 거짓말 같은 건 하지 말고, 북부의 초인에 대해서 캐내려 하지도 말라고 말이오.”
“그래서, 순순히 그러겠다고 했소?”
“날붙이를 들고 와서 윽박지르는 데 별수 있겠소. 거짓말 같은 건 한 적 없다고 했더니, 코웃음을 치며 돌아가더군. 그래서 뭐, 그 뒤론 어디서 말도 꺼낼 수가 없었소. 대체 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다는 건지는 아직도 의문이오.”
쩝 입맛을 다신 파엘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혹시, 짐작 가는 부분이라도 있으시오?”
“글쎄….”
그냥 사실대로 알려 줄까, 순간 고민한 이안은 이내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이자도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알게 될 사실이긴 했지만, 지금 말했다가 따라오게 될 온갖 요란스러운 반응과 질문들이 귀찮았기 때문이다.
당분간은 조용히, 떠돌이 용병 이안 호프로 지내고 싶었다.
술잔을 마저 비운 이안이 술병을 집어 들며 내뱉었다.
“어쨌든 무사히 돌아오셨으니 상관없잖소.”
“그건 그렇소. 거래가 끊긴 것도 아니고. 남아도는 모피를 잔뜩 헐값에 사서 이중으로 이문까지 남길 수 있게 됐지. 그러니 돌아오는 길에 변방의 상황을 전해 들었을 땐, 얼마나 등골이 서늘했겠소.”
“제게 알려 주신 변방의 소식을, 그때 들으신 거군요.”
필립이 덧붙였다. 변방의 이야기를 한마디라도 더 듣고 싶은 것이리라.
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변방 깊이 들어갔던 상단은 아직도 돌아오지 못했소. 단 하나도. 생사조차 알려지지 않았지. 설사 누군가 살아 있다 해도, 변방 깊은 곳에 고립되어 있을 것이오.”
잠시 말을 멈춘 파엘이 이안과 필립을 번갈아 돌아보았다.
“이안 경과 필립 경, 두 분께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겠소. 두 분은 수백 명을 살린 것이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고.”
“감사는 기꺼이 받겠소만. 결국은 귀하의 공이 가장 클 것이오. 결정은 귀하가 내린 거잖소.”
이안이 덤덤하게 말했다. 필립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파엘이 쓴웃음처럼 느껴지는 옅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 하지만 몇 번을 감사해도 모자랄 것이오. 덕분에 목숨을 구하고 돈을 번 것뿐 아니라, 숙원까지 이루게 되었으니까.”
“숙원이라니요?”
필립이 되물었다. 파엘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번 상행에서 살아남은 상단들끼리 뭉치게 됐소. 아직 이름도 정해지지 않았소만. 일종의 동맹이 만들어진 것이오.”